[경상도 맛길기행 .6] 고령의 다끼파]
대구 육개장에 '맛의 날개' 밑둥 원래 자줏빛 감돌아…
대파로 특화 "국맛 더욱 깊고 깔끔하게" 잎파 밀어내,
광복직후 국밥집 주인 직접 와서 사 가
제자 : 蘭汀 李美蘭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이지용기자sajahu@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맏며느리가 저렇게 경상도 음식에 대해 무지해서야…."
"와카능교." "육개장 끓이면서 자청파(쪽파) 집어넣는 경우가 어딨어.
다끼파를 모르면서 국은 말라꼬 끓이노."
서울서 대구로 시집 온 한 맏며느리가 처음 끓인 육개장 앞에서 시아버지가 혀를 찬다.
그도 그럴 것이 어른 손가락 굵기만한 대파 대신
막창 소스용 자청파를 쫑쫑 썰어넣은 것에 말문이 막힌 것이다.
며느리는 대구 육개장 끓이는 법을 제대로 못 배웠고 대파가 들어가는 줄도 몰랐다.
당연히 시어머니로부터 한 소리 들을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난 며느리,
'웬수' 같은 다끼파가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확인차 화원 사문진 나루터옆 강변 파 시장을 기웃거렸다.
그들은 지게와 리어카, 달구지에 파를 싣고 강건너
현재 계명대 성서캠퍼스 앞을 지나 반고개를 넘어 서문시장까지 물건을 팔러다녔다.
광복 직후 호촌2리엔 40여가구가 살았는데 모두 파를 재배했다.
사문진 나루터는 다끼파 출하시기가 되면 '파 나루'로 둔갑했다.
국일, 한일, 벙글벙글 등 대구의 대표 국밥집 주인들도 그걸 사들고 갔다.
72년 다끼도 된서리를 맞는다. 경지정리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대구 육개장 수요가 70년대 들면서 타 음식산업의 발전으로 위축되자
다끼파도 그만큼 설 자리가 줄어든 것이다.
특히 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전국 각처의 파들이
대구 서문·칠성·원대시장 등으로 내려온다. 10여년 전 텃밭 파씨를 받아
다음해 사용하던 2년생 파 채종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서울 종묘,
서울 흑능도 국내 굴지의 종묘회사도 다국적 기업인 신젠타, 노바티스 등에 의해 통폐합돼 버렸다.
고령 다끼도 예전 같지 않다.
현재 부산시 강서구 녹산·명지, 사하구 하단, 김해시 장유, 제주도 등지가 주산지로 급부상했고
고령과 안동은 예전만 못하다. 향토사학자와 대구시 당국자들이
다끼파 멸종과정과 파 특유의 향기를 내는 '알리신(Allicin)' 성분과
국맛의 상호 관계 등도 연구해 볼 시점인 것 같다.
하루 150단 다듬는 '파 아저씨' 동성로 골목 손성헌씨,
30년 넘게 식당에 "납품" 대구 도심 한 켠에 '파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그는 종일 파 다듬는데 여념이 없다. 점포도 없다.
30여년째 길거리 작업장에서 국밥용 파와 무를
즉시 요리할 수 있도록 깨끗하게 다듬어 계약한 식당에 직접 배달해주는 손성헌씨(61).
그는 현재 대구시 중구 대구백화점 주차장 동편 골목에 진을 치고 있다.
하도 많은 파를 만져 손이 문드러져 있다. 식당 풍속도 많이 변했다.
예전 같으면 식당 주인이 직접 시장에 가서 재료를 사갖고 와서 칼질을 했지만
이젠 그럴 시간이 별로 없다. 분업의 시대,
효율적 식당 관리 차원에서 주인의 욕구를 훤히 알고 있는 손씨 같은 사람에게 잔일거리를 위탁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손씨는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북구 매천시장과 팔달시장에서 최상품 파를 구입해 와 일일이 정리한다. 요즘처럼 국이 많이
팔리는 김장철엔 파의 경우 하루 150단 다듬고, 무는 100여개 깍두기용으로 잘라 갖다준다. 손씨도 대구 국문화 파수꾼인 셈이다. 30여년 전 아세아극장 옆 빈터에서 이 일을 시작했다. 20여년 전 대백의 배려로 부인 김씨와 종일 후미진 일을 도맡아 한다.
대파의 본질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파를 다듬을 땐 겉에 있는 늙고 시든 떡잎은 가차없이 벗겨냅니다. 아깝다고 생각해 말라버린 입과 밑동 겉껍질을 국에 슬쩍 넣으면 국맛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국맛은 역시 좋은 재료에서 나옵니다.
대구 육개장을 제일로 치는 것은 가래떡처럼 생긴 허연 대파뿌리에서 나온다고 봐요. 특히 흰뿌리가 전체의 3분의2 이상 차지하는 놈이 국거리용으론 제격이죠. 요즘 중국파도 기웃거리는데 그놈들은 잎이 더 굵고 억세 국 특유의 맛을 못내게 되죠.
그럼 국 끓이는 실력이 없는 주인들은 자꾸 조미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죠." 일제때 낙동강 유역 최고 전망대였던 화원유원지 화상대. 그곳에 서면 낙동강과 비슬산, 팔공산의 위용이 한 눈에 들어온다.
1980년 초 생긴 사문진교 서편으로 광활한 들판이 펼쳐져 있다.
반세기 전만 해도 대구 사람들이 먹는 대부분의 파를 공급했던 '다끼파' 주산지이다.
나이 든 그곳 주민 외엔 다끼파를 잘 모른다. 반세기 전 건너편 사문진 나루터에선 매일 오전 파 시장이 섰다. 그 소식을 들은 일본 육종학자들과 몇몇 일본 종묘회사 관계자들이 그 파를 연구해 가서 그것에 대응하는 종자를 개발해 한국 종묘시장에 역수출했다.
다끼파 정체를 밝히기 위해 고령군 다산농협에 전화를 걸었다. 다끼파의 주산지는 화원유원지 맞은편 고령군 다산면 호촌2리였다.
호촌2리 노인들은 대부분 예전에 다끼파 농사를 지은 경험이 있었다. 물론 그때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 '다끼'란 무슨 뜻일까? 그게 궁금해 호촌2리 이장을 지낸 박주덕씨(56)를 만났다.
대구 국밥의 맛을 결정했던 고령군 다산면 호촌2리 일명 다끼 들녘을 찾은 이영수·
성영경 할아버지, 박주덕 전 호촌2리 이장<맨 오른쪽>이 직접 파 농사를 짓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다끼란 지명은 저울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하기가 되면 이 마을 사람들 모두 크고 작은 저울을 들고 다녔고 '(저울로) 파를 달기'할 때의 '달기'가 다끼로 음운 변이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파는 과연 한국산일까, 일본산일까. 취재 과정에 풀리지 않는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다끼란 고령군 다산면 호촌 2리의 다른 지명임과 동시에 그곳에서 생산되는 파 이름이며, 올해 창업 170년을 맞은 일본의 대표적 종묘회사 상호 중에도'다키이(瀧井)'가 존재했다. 물론 <주>다키이는 자기가 개발한 파를 1910년쯤 한국으로 수출해 짭짤한 수익을 올린다.
그 전엔 잎파를 선호했다. 그런데 대파의 허연 뿌리와 줄기부분이 육수의 누린내를 없애주고 국맛을 더욱 깊고 깔끔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깨닫게 된다. 점차 대파가 잎파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따라서 고령 다끼파중에 일본산도 섞였을 수도 있다.
중국과 시베리아에서 유입된 조선파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잎만 먹는 잎파,
전체를 먹는 쪽파 두종밖에 없었다. 대파는 일제 초 도입된다. 대구 육개장엔 잎파보다 대파가 들어가야 맛을 제대로 낼 수 있었다. 따라서 고령 다끼의 경우 육개장 맛에 맞는 대파를 특화시켜 성공했고 나머지 토종 잎파는 도태됐을 가능성이 높다. 다끼는 예전 7천여평의 호수가 있어'호촌(湖村)'으로 불렸다. 주민들은 이곳이 모래땅이라서 벼농사를 생각할 수 없었다.
이영수(82)·성영경 할아버지(75)는 사문진교가 생긴 후 문을 연 감나무 보신탕집 뒤에 넓게 조성된 파 밭으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물론 반세기 전 다끼파는 멸종하고 말았다. 이씨 할아버지는 다끼파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 "다끼파는 요즘 파처럼 길지 않아요.
1년에 두번 팔려나갔는데 2~3월엔 푸른 잎만 잘라 팔 1950년대 화원유원지 사문진 나루터 다끼파 시장의 모습을 생동감있게 그렸다. 다끼파는 대구 육개장 맛을 결정하는 주재료였고 1970년대 초 점차 사라진다. /화백=곽성동 고 육개장용 올파는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 팔렸는데 길이는 한자쯤 됩니다. 굵기는 어른 엄지손가락 정도죠. 요즘 죄 밑둥이 하얗잖소,
그런데 다끼파엔 자줏빛이 감돌았죠. 겉대를 정리할 때면 파 향이 워낙 독해 모두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다끼파는 약 20개 한 묶음으로 팔려나갔는데 질겨 먹기 곤란한 시든잎은 버리지 않고 단을 만들때 완충제로 이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