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荔枝)라는 과일은 중국어로 릿츠[lìzhī]라고 읽는다. 중국의 남방에서는 ‘과일 중의 왕’이라고 불린다. 거북이 등처럼 도돌도돌 돌기가 난 빨간 껍질을 벗기면 우유 빛의 과육과 맑은 즙이 줄줄 흐른다. 씨는 꼭 개암처럼 검고 단단하다. 순진한 시골 총각 같은 멀건 맛이 아니라, 약간 달착지근하면서도 신 맛이 감돈다. 과육을 먹고 나면 상큼하고 깔끔한 뒷맛에 행복감이 절로 밀려든다.
여지는 사전에 “무환자과(無患子科)에 속하는 상록교목. 우상복엽(羽狀複葉)이고 열매는 용안(龍眼)의 열매 비슷하며 식용함.”이라고 되어 있다. 이지(離枝), 단려(丹荔)라는 이명도 있다. 여지의 나무는 키가 5~6장(丈) 정도 되고, 계수나무처럼 크고 푸른 나뭇잎이 겨울과 여름에 울창하다. 나뭇가지는 유약하여 그 가지에 단단하게 달라붙어 있는 과실을 별도로 떼어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보통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빨간 여지를 통째로 판매한다. 중국의 남부 지방에는 집집마다 여지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한유(韓愈)의 “여지는 빨갛고 바나나는 노란데, 고기와 채소 곁들여 자사의 사당에 올리네.〔荔子丹兮蕉黃 雜肴蔬兮進侯堂〕”라는 글을 보면, 남방에서는 당시 제수(祭需)로 썼던 것으로 보인다.
여지에 관하여 저술한 전문 서적도 여러 권 있다. 송나라 채양(蔡襄)이 복건산(福建産)의 여지에 대하여 찬한 『여지보(荔枝譜)』와 청나라 진정(陳鼎)이 찬한 『여보(荔譜)』 같은 저술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는 여지가 식용으로나 약용으로나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지에는 비타민 c, 단백질, 레몬산, 철 등의 영양소가 듬뿍 들어있어서 사람의 피부를 아름답게 해 준다. 그러니까 여지는 미용에도 상당히 도움이 되는 과실이다.
여지는 예로부터 중국의 남방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었는데, 한나라 때부터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여지는 가지에서 따서 하루만 되면 향내가 변하고, 이틀이 되면 빛깔이 변하고, 사흘이 되면 그 맛이 변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지(離支)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한 대(漢代) 이후 공물로 바치기 위해, 먼 남방에서 장안(長安)까지 역마를 달려서 신선한 여지를 가져오게 하느라 수많은 백성들을 괴롭히고 희생시켰다. 후한(後漢) 화제(和帝) 때 여남(汝南)의 당강(唐羌)이 상소하기를, 남쪽 지방에는 악충과 맹수가 도처에 가득하여, 여지를 따서 운반하느라 백성들이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면서 “이 물건을 대궐에 올린다고 하여 반드시 장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자, 화제가 그 말에 따라 공물로 받는 일을 중지하라고 명령을 내린 기록이 『후한서(後漢書)』에 보인다.
여지하면 아무래도 양귀비를 연상하게 한다. 당 현종의 비 양 귀비가 여지를 무척 좋아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마도 양귀비가 비타민이 풍부한 여지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탄력 있는 피부와 미끈한 미모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백성들은 양귀비에게 싱싱한 여지를 가져다주기 위해 여지의 주 산지인 복건(福建), 광동(廣東) 등에서 장안에 이르는 수천 리 길을 파발마로 달려야 했다. 조금이라도 시각을 지체하면 여지의 싱싱한 맛을 잃게 되기 때문에 연도(沿道)에는 역마가 늘 대기하고 있었다. 만당 때의 시인 두목(杜牧)의 시에 “말발굽에 이는 티끌 양귀비가 좋아하였으니, 여지가 올라오는 줄 아는 사람은 없겠지.(一騎紅塵妃子笑 無人知是荔枝來)”라고 한 것도 당시의 풍정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당나라 두보(杜甫) 역시 여지를 소재로 한 시를 지었다. 시제가 〈해민(解悶)〉이다.
선제의 귀비는 이제 적막하기만 한데,
여지는 지금 다시 장안으로 들어오누나.
남방에서 매양 앵도에 이어 바쳐왔으니,
옥좌는 응당 방울진 이슬을 슬퍼했으리.
先帝貴妃今寂寞, 荔枝還復入長安.
炎方每續朱櫻獻, 玉座應悲白露團.
주지하다시피, 양귀비는 27세에 당 현종의 귀비로 책봉되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었다. 현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자신의 세 자매는 한국(韓國)·괵국(虢國)·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고, 육촌 오빠인 양소(楊釗)는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인물이었음에도 현종에게서 국충(國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다. 그러나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란 말이 있듯이 양귀비의 권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안록산의 난 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양귀비가 죽고 난 후 현종은 그녀만을 그리워하며 여생을 지냈다고 한다. 두보의 위 시는 남방의 과실인 여지를 생전에 좋아했던 양 귀비가 죽은 뒤로, 당 현종이 여지를 볼 때마다 그녀를 생각하며 슬퍼했을 정상을 읊은 것이다.
여지는 중국의 남방에서 나는 과실이라 우리나라 사람 중에 여지를 맛본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 1168 ~ 1241)의 시에 여지를 소재로 한 것이 보인다.
젖빛에 얼음 같은 과액 맛이 아직도 신선하니
성화같은 역마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와서지.
삼천 리를 지척같이 달려왔기에
미인 얼굴에 화사한 웃음 더하였네.
玉乳氷漿味尙新, 星飛馹騎走風塵.
却因咫尺三千里, 添得紅顔一笑春. 「여지(荔枝)」
위의 시에서도, 양귀비가 젖 빛깔의 시원한 여지 맛을 볼 수 있는 것은 삼천 리 머나먼 길을 성화같이 달려왔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여지를 양귀비만이 좋아하였던 것은 아닐 것이나 여지를 노래한 거의 모든 시에는 이처럼 ‘여지는 양귀비가 좋아하였던 과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위의 시만으로는 이규보가 여지의 맛을 보았다고는 장담할 수 없을 듯하다. 위 시의 표현이 다분히 관념적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주름 진 열매 막 터지면 씨는 황금 같은데,
흰 타락 좋은 술처럼 깊은 맛이 일품이지.
소로는 민촉의 거리를 알지도 못하면서
어찌하여 너를 위해 한 번 길이 읊었던고.
皺縫初綻子如金, 雪酪氷漿一味深.
蘇老不知閩蜀去, 何曾爲汝一長吟.
위 시의 기승구는 여지의 모양, 맛 등에 대하여 읊고 있다. 전구의 ‘소로’는 소식(蘇軾)을 가리키고, ‘민촉(閩蜀)’은 중국의 민중(閩中)과 촉(蜀) 지방을 합칭한 말이다. 당 현종은 양 귀비를 위해 먼 곳으로부터 여지를 자주 바쳐 오게 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더욱 컸으므로, 일찍이 소식은 이런 폐단을 탄식하는 뜻에서 「여지탄(荔枝歎)」이란 시를 읊었다. 그 시에 특히 교주(交州)와 부주(涪州)를 언급하였는데, 이 지방은 둘 다 남해 지방만큼 멀지는 않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역시 위의 시에서도 여지를 통해 양귀비를 연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동파가 「여지탄(荔枝歎)」을 읊었어도, 실제 그 역시 여지를 몹시 좋아하였다. 동파는 “하루에 삼 백 개의 여지를 먹을 수 있다면 벼슬을 사양하고 영남사람이 되겠다.(日啖荔枝三百颗,不辭長作岭南人)”라고까지 하였다. 영남(岭南)은 광동성, 광서성 일대의 남방 지역을 가리킨다. 하루에 삼 백 개의 여지를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마는 그만큼 여지를 좋아하였다는 뜻이다.
연산군 때에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에게 여지를 사가지고 오라는 전교를 내린 기록이 보이며, 또 임금께서 여지를 신하들에게 하사하고 칠언율시를 지어 올리라고 한 기록도 보인다.
조선시대 김창업(金昌業)은 1712년 사신이 되어 연경에 갔다가 여지를 처음 맛보고는 “껍질은 반쯤 말랐으나 아직도 붉은색이 있고, 안은 희기가 옥과 같은 것이 씨를 몇 겹이나 둘러싸고 있었다. 껍질과 살 사이에 물이 가득히 찼는데 단맛이 꿀과 같았다.”고 하면서 “1월에 먹는 여지 맛이 이처럼 좋은데, 만일 제철에 나무 밑에서 금방 따먹는다면 그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힐까’라고 감탄하였다. 홍대용의 담헌서(湛軒書)에도 ‘우리나라에서 진귀하게 여기는 과일 중의 하나가 여지’라고 하였다.
‘과일 중의 과일’이라는 여지의 감칠맛 나는 맛도 추천할 만하거니와 역사 속 비운의 여인인 양귀비가 특히 좋아하였다고 하니, 여지 맛을 통해 역사를 반추함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첫댓글 리쯔는 저도 무척 좋아하는 과일이라 대만 살 때 잔뜩 먹었던 생각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