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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을 손꼽아 그의 자서전이라 부릅니다.
* 『원인』 1975년
* 『지하실』1976년
* 『호흡』 1978년
* 『추위』 1981년
* 『한아이』 1982년
이렇게 다섯 작품이지요.
이 가운데서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4가지뿐이라 일단 연대기 순으로 추려보았습니다.
1. 『한아이』
미모가 출중했던 어머니가 처녀시절 농부이자 목수인 동네 총각과 정자에서 만나 아이를 갖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선 금세 소문이 날 것 같아 네덜란드에 가서 해산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끝내 모른 척 했으므로 아이는 생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가 남의 일을 해주며 돈을 버는 동안 아이는 어부에게 맡겨져 고깃배 해먹에 매달려 키워졌다.
그러다 아이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손에 넘겨졌고 작가였던 외할아버지를 아이는 존경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외삼촌이 한 명 있었는데 공산주의자이자 발명왕이었다. 그가 어느 날 공산주의자로 포섭하기 위해 집에 데려온 이발사가 새아버지가 되었다. 어머니와 새아버지 사이에 동생들이 태어나는 동안 아이는 문제아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아이를 향해 어머니는 쇠가죽 회초리질을 하며 이런 욕설을 했다.
"어쩌자고 태어났어? 너는 내 불행의 전부야, 너 같은 자식은 지옥에 떨어져야 해! 너는 내 인생을 전부 망가뜨렸어! 모든 게 네 탓이야! 너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야! 너 때문에 내가 죽을 거야! 너 같은 자식이 나는 부끄러워! 너는 네 애비와 똑같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너는 아무 가치도 없어! 분란만 일으키는 자식! 거짓말쟁이!" (42쪽)
그것이 아이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그 가운데에도 외할아버지는 아이를 인정했고 함께 산책을 하며 정신적인 위로를 주었다. 나중에 이웃에 이사온 여의사가 아이를 노려보더니 허약하다며 요양원에 보내주었다. 그런데 가보니 요양원이 아니라 소년 감화원이라 또 다른 지옥을 체험해야만 했다.
2.『원인』
패전국이 된 오스트리아에 영국의 폭격이 쏟아지던 당시 찰스부르크의 기숙사에 있던 주인공에게
어떠한 이유를 대서라도 한 주에 두세 번씩 따귀를 때려대던 그륀크라츠 원장 이야기로 시작된다.
나치를 대표하고, 민족사회주의자인 그 장교는 새디스트로서 주인공의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폭격 맞은 그 땅에서 어떤 모습의 주검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는 굳이 나까지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전쟁이 끝나고 이번에는 프란츠 신부가 원장이 되어 히틀러 사진이 걸렸던 자리에 십자가가 매달리지만 그륀크라츠의 권력 방식이나 프란츠 신부의 권력 방식이나 다를 바가 없다.
식사 시간마다 '하일 히틀러'라고 외치건 '축복받은 음식'이라 기도하건 같은 억압이고 같은 숭배와 찬양의 양식으로 인간을 조절하는 것이다.
베른하르트가 번번히 나치와 가톨릭을 같은 것으로 치부하는 이유를 잘 알 것 같은 대목이다.
"이 도시는 수백 년 동안 가톨릭주의에 의해 천하고 진부하게 되었으며,
수십 년 동안 민족사회주의당에 의해 거칠게 강간당했다.'(102쪽)
학교 또한 공습으로 문을 닫고 주인공이 존경해 마지 않는 외할아버지의 의도에 따라 '국가 김나지움'에 입학하지만 이 또한 알려진 명성과는 달리 형편 없는 교육기관이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교육기계’이자 ‘수업기계’란 것이다. 주인공은 고등학교란 대다수의 학생을 파멸의 상황에 빠지게 하고 결국 파멸하게 만들기 때문에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등학교와 대학에서만 교육이 집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초등학교는 어린 사람들의 그 무엇도, 그들 천성의 그 무엇도 파괴하지 않으며 대학교는 학문에 적합한 사람들, 소위 고등학교의 교육 없이도 대학교육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기 때문이다." (130쪽)
결국 주인공은 집안 식구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김나지움에서 나와 생필품 거래상에서 3년자리 견습공 일을 시작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와 산책했던 기억을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한다. 외할아버지가 그때마다 몽테뉴를 들려주었다는데 외할아버지가 사랑하셨고 그리고 주인공이 사랑한 몽테뉴는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몇 구절 인용하겠다.
"우리들의 시선이 가 닿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고 우리에게 해당되는 그런 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 영혼이 움직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에 대해 나는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그 어떤 외부의 도움도 없이 생각을 전개시켜 나갔다. 내가 가진 확신 중의 하나는, 진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외부의 압력이나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인식의 객체로 만드는데 탐닉했다. 어느 정도로? 그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정말로 나 자신을 알게 하는 데 있었으니까."
"자기 묘사보다 더 어려운, 그러나 또한 더 유익한 것은 없다. 사람은 자신을 시험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고 제자리에 세워야 한다."
"나는 언제나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언제나 나를 기술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의 행위가 아니라 나의 본질을,"
"예의 바름과 이성의 발견을 금지하는 많은 경우에 대해 나는 기술했다. 내 이웃이 그것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감히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대해 말하기, 이것을 나는 기본 명제로 삼았다. 그리하여 나는 심지어 공개적으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생각들까지도 다 말해버렸다."
"나를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내가 실제로 누구인가를 알 수 있도록 함이다." (115-116쪽)
“한 번 내딛은 길은 계속 가야 한다. 나를 인식의 객체로 삼고자 하는 갈증에 나는 목이 탔다. 어느 정도까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진실에 맞게 진행되기만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이름으로만 알고 있을 뿐인 사람들에 오인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두려워 한다.”(124쪽)
“나는 다른 그 무엇보다 나 자신을 연구한다. 그것은 나의 형이상학이며 나의 물리학이다. 나 자신이 내가 다루는 질료들의 왕이며 나는 누구에게도 변명할 필요가 없다.”(134쪽)
아. 그런데 정녕 몽테뉴가 이렇게까지 횡설수설 했을까? 이번엔 몽테뉴를 찾아봐야 하는지...
대체 뭘 보고 저토록 어렵게 번역을 했는지 조사해봐야겠다.
그렇다면 베른하르트는 잘 번역한 건지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3.『지하실』
16세 때 주인공은 가족들이 힘겹게 보내주었던 김나지움을 박차고 나와
일자리를 구하려 노동청에 간다.
여직원이 좋은 일자리를 나열하지만 한사코 '반대방향'의 일자리를 찾는다.
김나지움의 옆도 뒤도 아닌 '반대방향'....
여직원이 난색을 하며 골라준 곳이 바로 포틀라하 식료품 가게이다.
지하실에 있는 이 가게는 찰스부르크에서 가장 열악하고 소외된 우범지역에 있다.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곳,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산다고 생각하는 세르츠하우스 주거집단지에 위치한 것이다.
"여기저기 거칠게 들보를 올려 지은 돼지우리와 크고 작은 피난민 수용소들, 쇠락한 바보들의 움집과 한때는 도시에다 대고 침을 뱉았을 창녀와 술고래들의 판잣집이 널려 있었다."(38쪽)
주인공은 학교에서 그토록 쓸모 없는 것만 배웠던 반면
여기에서는 유용한 것을 많이 배운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이곳에서 보낸 것이라 평가한다.
그는 의외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성실하고 친절하다.
지하 상점에서 주요 대화의 주제는 다섯 가지이다.
식료품, 섹스, 전쟁, 미국인, 원자폭탄.
이 시기가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이므로 그럴만도 하다.
주인공은 상점에서 일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직업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또 성악레슨을 받는다.
외할아버지의 주선으로 드레스덴 극장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초연 때에 소프라노를 맡았던 여가수에게 성악 공부를 한다.
상인이란 직업과 동시에 음악을 수업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그러다 돌연 감기에 걸려 지하실에서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 주인공이 <민주 국민신보>에서 법원 출입 기자로 일할 때
많은 피고가 바로 세르츠하우스 주택단지 출신이란 걸 알게 된다.
그건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일이었다. 벌써부터 그들이 언젠가는 법정에 서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판사들은 그런 원인을 알지 못했으며 한 인간을 운명을 근본적으로 파악해보려는 노력은 시도하지 않았다.”(20쪽)
그런데 문득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다.
"나의 업무에서 얻어진 만족감은 뚜렷했다. 그 만족감은 이 지하 상점에서 내가 관계하는 모든 이에게 손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해야 할 일이 많은 날마다 인생이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지 그 전에 나는 알지 못했었다."(78쪽)
여태까지 내가 읽은 베른하르트 작품 중에서 처음 '행복'이란 단어를 본 것같다.
그가 한번도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행복이란 말을 모르는 줄로만 알았는데
행복을 모르지 않는 베른하르트라서 내가 행복해진 순간이었다.
4.『호흡』
식료품 상점에서 수백 킬로그램의 감자를 나르던 주인공은 고열로 출근도 못하던 날 새벽에 정신을 잃고 만다. 깨어나보니 병원이다.
바로 어제 외할아버지가 입원하신 그 병원에 하필 함께 입원하게 된다. 감기에 걸린 걸 겨우내 방치해두었더니 폐렴이 되었다가 늑막염으로 번진 상태다. 늑막 천자로 누런 액체를 2-3리터씩 빼내는 처치를 받고 환자는 거의 초주검이 된다.
오죽하면 병원에서도 '죽음의 방'에 입원시켜 두었다. 그 방에 입원한 노인들은 차례차례 죽어 나간다. 오직 주인공만 예외이다. 의사들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살아날 가망이 없단 진단으로 신부에게 종부성사까지 받았던 것이다. 주인공이 18세 때의 일이다.
외할아버지는 외과 병동에 입원해 계시다가 손주의 병문안을 온다. 할아버지는 병원을 '사색 공간'이라 부르며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생각들을 이곳에서 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감옥이나 수도원 등도 '사색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 작가는 병원에 꼭 입원해야 한다고 말씀 하신다.
그러나 주인공이 살펴본 결과 병원은 너무나 비인간적인 곳이다.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그들의 의술을 펼쳐 보이지도 않았다. 의사들이 보기에, 이곳에 있는 환자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별 관심 없이 그들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이곳에서 의사들이 하는 모든 것들은 의례적인 일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 곳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지배하고 있는 죽음 앞에서 무리를 지어 아무런 생각 없이 습관상 흰 가운을 입고 돌아다닐 뿐이었다. 나는, 철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 의사가 해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의사들이 보기엔 이 환자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그래도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의사들은 마치 어떻게 해서든 환자들이 살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타성에 젖은 환자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함으로써 죽음의 방에서 오로지 의사들만 믿고 있는 가련한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버렸다. 이 곳 죽음의 방에 있는 환자들에게 의사들이 처방해 준 약들은 치료제가 못되고, 오히려 환자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사망촉진제나 다를 바가 없었다."(60-61쪽)
간호사들에게도 감정이란 도저히 찾아볼 수 없어 환자를 돌보는 기계와 같았다.
"환자란 결국 숙환을 선고 받은 집단이요, 궁극적으로는 사형선고를 받은 집단인 셈이다. 의사들이란 아무런 도움이 안되거나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들인데, 그 어떤 부류든 환자들 스스로가 주도권을 쥐지 못할 경우 의사들은 환자에게 해가 될 뿐이다."(62쪽)
주인공의 생일날 다시 악화되고 그 무렵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신다. 외과에 입원하여 정밀건사를 받을 예정이었지만 급성 패혈증으로 예기치 않게 사망하신 것이다. 식구들은 주인공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병실에서 신문을 보다 우연히 할아버지 부고를 접한다.
"외할아버지의 죽음, 그것이 나에게 엄청난 쇼크를 주긴 했지만 또 어떤 의미로는 일종의 해방감을 주기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난생 처음으로 나는 자유로움을 느꼈으며, 갑자기 느끼게 된 이 완전한 자유를 이용하여 내 인생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92쪽)
주인공이 진정으로 사랑한 유일한 사람인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그에겐 제2의 인생이 열린 것이다.
할아버지가 후원해주던 성악 공부는 더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호흡기 질환으로 포기를 각오한 일이기도 하다.
병세가 조금 호전되자 병원에서는 요양원으로 가도록 주선해 준다. 그로스그마인 요양원으로.
주인공은 그곳에 가서 깜짝 놀란다. 거기는 폐병환자 요양원이기 때문에 자신처럼 허약한 사람은 쉽게 감염이 될 터였다.
"나를 그로스그마인으로 보낸 의사들이 정말로 그렇게 멍청하고, 비열하고, 책임감이 없는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나중에 내가 겪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멍청하고 비열하고 책임감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건강을 회복하기 귀해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를 그로스그마인으로 보냄으로써 낫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과 같은 행동을 했던 것이다."(119쪽)
결국 주인공은 허파의 손상을 입는다. 방사선과 의사에 의해 오른쪽 아래 폐엽이 침윤된 것을 발견하고 그는 이제 그라펜호프 결핵 요양소로 떠난다.
『옛거장들』을 비롯하여 베른하르트 전 작품에서 공공연하게 의사들을 비난하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들었는데 그가 왜 그토록 의사와 병원을 미워했는지 한 몫에 알게 되었다.
* * *
이렇게 간략하게 줄거리만 추려보았습니다.
베른하르트의 자서전을 두고 비평가들 사이에선 어디까지 진실이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는데 자서전이란 과거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므로 진실의 여부는 중요치 않다고 봅니다.
자서전은 사실만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사건과 인물의 관계, 사건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영향을 전달하는 것이란 정의도 내려져 있지요. 실제로 작품을 읽어보면 절대로 없었던 일이 아니라 꼭 그러했을 것처럼 느껴지므로 자서전적 양식의 글쓰기가 삶을 해석하기에 좋은 방식이란 생각이 듭니다.
베른하르트는 아픔이 많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빗대어 한 인물이나 사회가 형성되어 가는 데엔 전체의 노력이 중요하단 점을 강조했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의붓아버지와 사는 가족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도 개인의 불행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의 문제라고 이야기 하지요. 나치즘의 광기나 가톨릭의 횡포가 개인을 파괴하는 원인이 된다고 말하며. 의사라든가 판사, 정치가처럼 사회적인 책임을 가진 자들의 비인간성에 의해 세상이 흐려진다고 끊임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나쁜 주거 환경이 범죄와 연결된다는 것, 나태하고 불성실한 교육이 학생을 망친다는 것 등을 예로 드는데, 그런 중에도 예술을 섬기던 작가의 외할아버지의 덕분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베른하르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예술에 대한 또 다른 가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어쩌자고 태어났니?
익숙한 말입니다.
긴 소개 수고 많으십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믿지 말아야 할까요?
대부분의 자서전, 예를 들어 오바마나 이순신,스티븐 잡스의 자서전은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았을까요?
문학이란 이름으로 너무 혼돈스럽단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요약해주시는 노고에 감사드려요.
저 혼자서라면 저 많은 작품을 못 읽었을 거예요.
와우!
이 엄청난 노고에 그저 머리를 수그릴 뿐.....
환자 진료에 글쓰기에 며느리 노릇에 아내 역할에 대체 언제 이 많은 책을 읽고 서평까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