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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8대 왕(재위 1010~1031), 휘(諱)는 詢, 자는 안세(安世), 시호는 원문(元文),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안종(安宗) 욱(郁)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종의 둘째 비(妃)인 헌정왕후(獻貞王后)(孝肅太后)이다 비는 성종의 두 딸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 시중(侍中) 안산김씨 김은부(金殷傅)의 딸 원성왕후(元成王后), 대종의 손녀 원용왕후(元容王后)이다 1009년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 해에 강조가 목종을 살해한데 대하여 문책한다는 구실로 거란의 성종(聖宗)이 쳐들어오자 참패하고 친조(親朝)할 것을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거란군은 물러갔으나 끝내 친조를 하지 않았다고 또 6성을 요구해 온 것도 거절하였다 1018년(현종9)거란의 장군 소배압(蕭排押)이 6성을 빼앗고자 침입 했으나 강감찬의 활약으로 물리쳤다 다음해 부터 거란과 국교를 열어 평화정책으로 일관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모든사치와 호화로운 의식. 제도를 폐지하고 승려의 횡포를 엄금하는 한편 기민(飢民)의 구제에 만전을 가하였다 능은 개성의 선릉(宣陵)이다 북한 개성 교외 만수산 기슭 언덕에 있는 고려 8대 임금 현종의 선릉. 병풍석이 묻힌 채 민묘처럼 퇴락한 무덤을 훼손된 석물들이 쓸쓸히 지키고 서 있다. 무덤 바로 앞에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다. 장경희 교수 제공 |
고려 8대 임금 현종 부자상봉길
992년 7월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인 욱(郁)이 사수현(지금의 사천 사남면)으로 귀양을 와 살았다.
당시 욱(郁)은 고려 5대왕 경종의 왕비(王妃) 황보(皇甫)씨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는데
어미는 아들을 낳고는 바로 숨을 거두었고 아비인 욱(郁)은 사남으로 귀양을 온 것이다.
왕족인 아이는 보모의 손에 키워졌는데 어느날 6대 임금 성종이 아이를 찾아 당시 두 살이었던 아이는 성종을 보더니 “아버지”라고 계속해서 부르는 것을 보고 아이가 아버지를 너무도 그리워하는 것이 안타까워 성종은 아이를 아버지가 있는 사천땅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능화마을 유래
고려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인 욱(郁)은 992년(成宗, 11년) 7월 사수현(泗水縣) 사남땅에 귀양을 와 살다가 4년 뒤인 996년 7월에 어린아들 순(詢)을 홀로 정동땅 배방사에 남기고 죽게 된다.
죽으면서 아들에게 유언으로 “이 곳 마을 뒷산에 시신을 엎어서 묻어라(伏屍而葬)”고 했고, 이 묘터가 장차 임금이 날 자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아들 순(詢)은 1009년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이 된다.
왕위에 오른 현종은 아버지 욱(郁)을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높이고 묘호를 안종(安宗)이라 하였다.
그때부터 장지가 있는 봉을 능화봉이라 하고 그 아래 마을을 능화촌(陵下마을, 陵花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능이 있는 아래 마을이고 꽃밭등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배방사지(排房寺址)
이 사지(寺址)는 정동면 장산리 대산(垈山)마을 뒤 천금산(千金山) 맞은편 산자락에 있다.
절터를 중심으로 사방이 빙 둘러싸여 가운데가 오목하게 생겼는데, 속칭 ‘배방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배방절(排房寺)이 옛날부터 이름나게 된 까닭은, 고려 초기에 현종(顯宗)이 어린시절 한때를 이 절에서 보낸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1530년)을 비롯하여 여러 향지(鄕誌) 배방사조(排房寺條)를 보면 현종에 관한 고사(故事)가 어김없이 실려있다.
992년 7월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인 욱(郁)이 사수현(지금의 사천 사남면)으로 귀양을 와 살았다.
당시 욱(郁)은 고려 5대왕 경종의 왕비(王妃) 황보(皇甫)씨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는데 어미는 아들을 낳고는 바로 숨을 거두었고 아비인 욱(郁)은 지금의 사남땅으로 귀양을 온 것이다.
어느날 6대 임금 성종이 보모손에 키워지는 아이를 찾아 보았는데 계속해서 아버지를 찾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겨 아이를 아버지가 있는 사천땅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살지는 못하도록 하여, 아이는 이곳 정동면 장산리 대산마을의 배방사(排房寺)에서 거주를 하게 된다.
아이는 이곳 배방사(排房寺)에서 4년을 살다가 6살 되던해 개성(숭교사)로 올라갔다.
그리고 신혈사로 갔다가 마침내 1009년 강종의 난에 의해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이 된다.
이와 같이 배방사(排房寺)는 고려 왕실과의 인연으로 명찰(名刹)로서의 영화를 누렸을 뿐 아니라 임금을 모셨다는 뜻의 일명 배왕사(陪王寺)로 이름을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절의 창건 시기를 <조선 사찰사료>에 의할 것 같으면, 본래 북방계(北方系)의 절로서 신라 경덕왕 22년(763)에 대내마(大奈麻:품관 10 등) 공관(이순 혹은 이준)이 승려가 되어 이곳에다 절을 짓고 노곡사(蘆谷寺)라 했다고 한 것을 볼때 이 절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사찰이라 하겠다.
이후 어떤 연유로 해서 이 절은 폐사(廢寺)되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았다.
그래도 고려 현종의 발자취가 담겨 있는 만큼 비록 유허(遺墟)로 변했으되,
향토사적(鄕土史的)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현종이 어린시절(5~6세) 이 곳에서 지었다는 사아시(蛇兒詩)가 전해져 온다.
顧子亭(고자정)
고려 6대임금 성종때인 992년 7월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인 욱(郁)이 사수현(지금의 사천 사남면)으로 귀양을 와 살았는데,
당시 2살이던 그의 아들 순(詢)이 애타게 아버지를 찾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성종은 아들 순(詢)을 죄인인 아버지와 같이 살지는 못하게 하고
사수현 정동땅 배방사에 거주를 하게 했다.
아버지 욱(郁)은 오직 아들을 보는 낙으로 살며 매일같이 사남땅에서 정동땅 배방사까지
10km의 거리를 걸어 아들을 만나러 다녔는데,
되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서 아들이 있는
배방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그때부터 아들이 사는 배방사를 돌아보던 지금의 정동면 학촌리 고개를 .‘
고자봉(顧子峰-되돌아볼 고, 아들 자 / 아들을 되돌아본다)’이라 하고 이 마을을 ‘고자실’이라 불렀다.
아버지 욱(郁)은 귀양온지 4년만인 996년 세상을 떠났고, 아들 순(詢)은 배방사에서 4년을 살다가 6살 되던 해 개성으로 올라갔고
마침내 1009년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고려 8대 임금 현종이다.
원성태후(元成太后) 덕종 즉위 후에 왕태후로 추존하였고, 뒤에 용의(容懿)·공혜(恭惠), 1056년(문종 10)에 영목(英穆), 뒤에 양덕(良德)·신절(信節)·순성(順聖), 1140년(인종 18)에 자성(慈聖), 1253년(고종 40)에 광선(廣宣)의 시호가 거듭 추증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