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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제1장 : 다정도 병이 되는 세상, 情이란 무엇인가
- 情이란 무엇인가
정은 복잡다양한 감정현상의 융합체 / 속성에 따라 다양한 질감을 가진 정 / 따뜻한 ‘감성’으로서의 정 / 정, 대체 어떤 모습일까 /
‘정’을 외국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 정에 살고 정에 울며 정을 노래해온 한국인
국민과자 오리온 ‘초코파이 情’ / ‘정’ 노래의 극치, 조용필의 <정> / 신세대 ‘영턱스클럽’의 또 다른 <정>
- 정,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다함께’ 뒤엉켜 살면서 저절로 생겨나 / 돌아가는 술잔 속에 싹트는 한국인의 정 / 개인적인 정, 집단적인 정 / 패거리문화,
정실주의 등 역기능도 커 / ‘비정’한 한국사회 / 새로운 ‘정 쌓기’의 가교, 인터넷 / 온-오프 공간의 ‘정’의 차이점
- 정의 승화, 그 이름 ‘용서’
손양원 목사의 ‘용서’ 이야기 / 어머니를 용서한 어느 딸의 이야기 / 아버지를 용서한 딸, 《거울의 법칙》
■ 제2장 : 돌아서면 남보다 못하다는, 부부간의 情
- 부부의 의미
언론인 리영희 선생 부부의 ‘차이’ / 칼릴 지브란 “그대들은 영원히 함께 하리라”
- 심금을 울린 부부의 정
세계를 울린 400년 전 ‘원이 엄마’편지 / 유배지서 보낸 추사 김정희의 ‘통곡’ / 심로숭이 아내 무덤가에 꽃을 심은 까닭 / 추사의
애틋함을 닮은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 ‘삼학사’ 오달제가 심양 감옥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 / 다산 정약용의 ‘꿈속의 아내
에게’ / 다산의 회혼시回婚詩
- 남편의 변심에 애달아하는 아내의 조바심
《시경》의 ‘소박맞은 여인의 노래’ / “늙고 야윈 저를 버리시겠죠” / 출장 간 남편, 바람피우지나 않을까
- 여자와 혼인, 그리고 아내
백낙천 “여자로 태어나지 마라” / 수의학자 우희종 교수의 ‘아내론’
■ 제3장 : 한 콩깍지 속의 운명, 형제간의 情
- 의좋은 형제, ‘안항’의 우애
성호 이익의 <우계전友鷄傳> / 《시경》에 보이는 형제의 우애
- 세상사람 모두가 형제인 것을
객지서 ‘형제의 정’ 그리는 왕유 / 도연명, “세상사람 모두가 형제인 것을”
- 특별한 형제 이야기
조식의 <칠보시七步詩> / 경북 상주 달내마을의 <형제급난도> / 고려 말 이조년의 ‘형제투금投金’ 고사 / 귀양길 다산 정약용
형제의 ‘이별시’
- 영혼의 우애를 나눈 고흐 형제
동생 테오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식한 고흐 / 고흐의 세상 짐을 도맡아 진 동생 테오 / 고흐를 세상에 살아있게 한 동생의
배려와 사랑 / “테오야, 네 가슴의 고동을 들으며 가고 싶다”
■ 제4장 : 불꽃같은 사랑, 열병같은 그리움, 남녀간의 情
- 남녀간의 성애, 그 애타는 그리움
에세이시트 고종석의 ‘그리움’ / 황진이의 꿈속의 사랑, <상사몽> / 부안 기생 매창과 ‘정인’ 유희경 / 시인 이옥봉의 정한과
그리움 / 그리움, 가릴 길 없는 파문
- 사랑, 눈멀고 마음마저 머는 열정
첫눈에 반하는 데 걸리는 시간 / “꽃이 예쁜가요, 내가 더 예쁜가요?” / “그대와 함께 얼어 죽을지언정…” / 허균 “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 / 백낙천의 <장한가>와 양귀비 / 양계초의 ‘헤어진 님을 그리며’ / 충남 공주의 <운우지정 사설>
- 사랑, 그 한없는 설렘
황순원의 <소나기>와 풋사랑 / <소나기>를 시로 쓴 박찬 / 고종석의 ‘가시내’와 풋사랑
■ 제5장 : 두 신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 친구간의 情
- 어려울 때 사귄 벗, 지극한 우정
월나라에서 친구를 사귀는 법 / 실학자 박제가의 ‘지극한 벗’ / 송홍의 ‘어려울 때 사귄 친구’ / 유종원과 유우석의 ‘간담상조’ /
백아와 종자기의 ‘백아절현’ / 최치원의 ‘소지음少知音’ / “자네 형편에 만원이면 족하네!” / 함석헌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 / ‘
탔던 배’에서 내린 ‘그 사람’ 주태익
- ‘아름다운 벗’ 퇴계와 고봉의 ‘망년지우’
세대와 지위를 초월한 벗 / 천 리를 머다 않고 넘나든 편지 / 때론 살갑게, 때론 치열하게, 때론 준엄하게 / 매화 향 그윽한 세기의
우정
■ 제6장 : 정은 붙이기 나름, 사물을 사랑하는 物情
- 수구초심, 고향을 그리는 정
윤선도의 <오우가>와 정비석의 <산정무한> / “내 심장을 조국 폴란드에 묻어 달라”던 쇼팽 / 왕유의 향수, “고향집에 매화는 피
었던가요?” / “조국이 독립되면 반장해 달라”던 안중근의 나라 사랑
- 타국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의 특별한 ‘정’
이상설 “화장해서 수이푼 강에 뿌려달라” /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 헐버트 박사 / 영국군 기념비 곁에 묻힌 6.25 참전용사 /
한국 땅에 묻힌 주한 외국대사 2인
- 정들면 다 귀한 벗
온 국민의 심금을 울린 <워낭소리> / 유씨 부인의 <조침문弔針文> / 성호 이익의 <제노문祭奴文> / 노비 ‘막돌이’를 위한 노긍의
제문 / 김삿갓의 <요강> / 벤저민 프랭클린의 ‘귀한 벗’ 셋
피뢰침의 발명가이자 프랭클린자서전으로 유명한 벤저민 프랭클린은 정치가,저술가,신문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1706년 보스톤에서 양초,비누 제조업자의 15번째아들로 태여난 프랭클린은 생전에 숱한 명언,명구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귀한 벗 셋"에 관한 것이다.
내게 귀한 벗 셋이 있으니,첫째는 늙은 마누라,둘째 오래 정든 개,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비상금이다.
[서문] 情이 넘치는 사회를 꿈꾸며
1.
벌써 30년도 넘은 이야깁니다. 제대해서 3학년에 복학을 한 그해 5월, 교직을 신청한 학과 동기생들이 저마다 현장으로 교생실습을 나가 강의실이 텅 비게 되었습니다. 교직을 신청하지 않은 저는 한 달간 방학 아닌 방학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 ‘방학’ 기간 동안 뭘 하고 지낼까 궁리한 끝에 머리도 식힐 겸 해서 3남지방 명산대찰 구경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대구에서 가까운 합천 해인사를 시작으로 구례 화엄사, 하동 쌍계사를 거쳐 2일차 저녁 무렵 순천 송광사에 도착했습니다. 절 입구의 한 여관에 여장을 풀고 저녁상을 받을 무렵이었는데 가족 한 팀이 여관으로 들어섰습니다. 덩치가 큰 외국인 남자는 큰 배낭을 하나 메고는 서너 살 된 딸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뒤이어 그 남자 덩치의 반도 안 되는, 그의 아내인 듯한 조그만 동양여성이 가방 하나를 들고 뒤따라 들어섰습니다. 그들은 외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독일어였습니다. 그들은 제 옆방에 짐을 풀었습니다.
저녁을 먹고는 통으로 연결된 마루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3년 전에 결혼했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한국 여성이었는데, 고향이 경남 어디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독일 유학을 갔다가 현지에서 독일 남성과 결혼하게 됐는데, 남편이 처가 방문을 위해 3년치 휴가(총 90일)를 모아 이번에 한국으로 여행을 왔노라고 했습니다. 아내인 그 여성은 남편이 한국의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아 한국의 몇몇 고찰을 구경시켜주고 있다면서 그 다음날은 내가 막 다녀온 하동 쌍계사로 갈 작정이라고 했습니다.
기본사항 파악이 끝나자 왠지 두 사람의 ‘인연’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독일인 남편에게 한국여성의 매력이 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어눌한 한국말로 “한국 사람들은 인정이 많아서 좋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이방인의 입에서 ‘인정(人情)’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는 ‘인정’을 영어로 매우 친절하고(kind) 또 따뜻하다(warm-hearted)는 의미라며 제게 부연설명까지 해주었습니다. 곁에서 남편의 얘기를 듣고 있던 그의 아내가 끼어들면서 한 마디 하더군요.
“친절하기로는 독일 사람들도 마찬가진데요, 한국인들처럼 인정스럽고 포근한 면은 없습니다. 남편이 한국인인 저랑 결혼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인 고유의 정(情) 문화 때문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별 허물없이 대하고 또 한번 인연이 맺어지면 친형제 이상으로 살갑게 대하는 한국인들의 대인관계를 남편은 아주 신기해하며 좋아하더군요. 제 남편 개인의 독특한 취향이랄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튼 남편은 그 점이 좋다고 자주 얘기하곤 합니다.” 그제서야 저는 그 독일인 남편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그를 다시 봤던 기억이 납니다.
2.
경북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 586-1 봉양문화마을에는 은퇴한 고령의 신부님 한 분이 기거하고 계십니다. 그 주인공은 두봉(杜峰, 본명 렌 뒤퐁) 주교님으로 초대 안동교구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1929년, ‘잔 다르크’의 전설로 유명한 프랑스 오를레앙 출신인 두봉 주교님은 1953년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11월 한국 땅을 밟은 뒤 그간 53년간 단 한 번도 한국 땅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한국에 귀화해서 아예 한국인이 되셨구요.
지난 1969년 주교 서품과 함께 초대 안동교구장 임명된 두봉 주교님은 1990년 교구장을 사임할 때까지 22년간 ‘유림의 땅’ 안동에서 안동교구를 이끄신 분입니다. 안동교구장 재임 시절엔 안동지역 최초로 문화회관을 설립하였고, 함창에는 상지 여중·고를 세웠으며, 또 한국 최초의 전문대학인 가톨릭상지대학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두봉 주교님은 안동 지역의 유림들과도 자주 교류하면서 이들과도 허물없이 지냈다고 합니다. 푸른 눈의 외국인 신부와 갓 쓴 한국인 선비들과의 친교가 상상만 해도 보기 좋은 풍경입니다.
두봉 주교님은 지난 1990년 정년을 15년 앞두고 한국인 사제에 자리를 양보한 채 천주교 안동교구장에서 은퇴하셨습니다. 2004년 말 안동교구 마련해준 경북 의성군 봉양문화마을로 거처를 옮겨 현재 8년째 이곳에 살고 계시는 두봉 주교님은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하고 합니다. 이 동네에서 두봉 주교님의 별명은 ‘웃기는 괴짜 할아버지’이며 이 마을의 ‘분위기 메이커’로 통한다고 합니다.
두봉 주교님은 평소 한국인 뺨칠 정도로 한국말을 잘하시는 것은 물론이요, 스스럼없이 ‘나는 한국인’이라고 자처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두봉 주교님은 특히 “나는 한국인으로 죽어서 한국땅에 묻히겠다.”며 한국사랑을 과시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몸과 마음이 천상 한국인인 두봉 주교님은 일전에 한국인의 인정(人情)을 두고
“인정은 세계에 수출할 한국인의 심리상품”이라며 한국인의 정(情) 문화를 극찬한 바 있습니다. 프랑스 태생으로서 지금은 누구보다도 한국(한국인)을 잘 아시는 두봉 주교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정(情)의 참가치를 되돌아보게 한다고 하겠습니다.
3. 시골출신인 저에겐 지금도 잊히지 않은 것이 아름다운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선친이 맏이였던 관계로 기제사, 봉제사 합쳐서 제사가 1년에 열 번 정도 됐습니다. 제사를 지낸 다음날 아침이면 온 식구들이 동원돼 조그만 소쿠리에 전과 떡 몇 개, 사과 반에 반 조각, 고기 몇 점 등을 담아 동네 집집마다 심부름을 다녔습니다. 비단 우리집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는 마을의 다른 집도 다들 그렇게 했고, 더러 아침 밥상에서 남의 집 제사음식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어른들은 동네의 남의 집 제삿날을 더러 기억하기조차 했었는데요, 이제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얘기가 돼버렸습니다.
예로부터 한국인은 인정 많고 마음씨 따뜻한 사람들로 불렸습니다. 유교의 가르침인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덕목으로 삼아 나라에 충성하고,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며, 형제끼리 우애 있고, 친구 간에는 믿음으로 사귀는 것을 삶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콩 한 조각도 나눠 먹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심지어 낯선 이에게도 사랑방 한 칸을 기꺼이 내주던 그런 인정스런 사람들이 바로 한국인이었습니다. 그 시절엔 이제는 전설이 돼버린 무전여행(無錢旅行)도 가능했을 만큼 인심이 좋았었지요.
그러나 그 넉넉했던 한국인들의 인심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 중평입니다. 무엇보다 도시화, 산업화가 그 주된 원인으로 생각됩니다만, 세상의 변화만을 탓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한 예로 아파트 같은 동 같은 층에 마주 보고 살아도 왕래는커녕 인사 한번 나누지 않고 사는 것이 요즘의 세속입니다. 그래서 옆집 사람이 죽어도 모르고 있다가 119가 출동하면 그제서야 겨우 사고소식을 접하는 그런 야멸찬 세상이 돼버렸습니다. 옛 적 우리의 이웃사랑을 생각해보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지금 도처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말합니다. 세상인심이 각박해지고 사람 사는 게 힘들어졌다고.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남을 돌아다볼 마음의 여유도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사람의 근본과 성품은 쉬 변하지 않습니다. 한국인의 가슴 속에는 따사로운 인정미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어려울수록 따뜻한 인간미를 되찾아야 합니다. 사람이 좋고, 사람이 귀한 그런 세상으로 가꾸어가야 합니다. 이 책이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작은 불씨가 되길 기대합니다.
2011년 2월
선열들의 애국혼이 깃든 독립문 네거리 寓居에서
정운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