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한국 기독교의 수용과 갈등
(1) 민족공동체와 신‧구교의 만남
‧ 16세기 로마 가톨릭의 극동지역 선교에 착수했으나, 일본과 중국에 비해 쇄국의 빗장이 강력하던 조선에는 곧바로 접촉하지 못했다.
‧ 18세기 후반부터 조선 학자들의 ‘서학연구’가 시작되고, 이승훈의 세례와 자생적 조선교회의 창설이 본격적인 조선 가톨릭의 시작이 되었다.
‧ 가톨릭의 보수적인 신학적 입장이 기존 조선의 전통가치와 크게 상충되었고, 당시 가톨릭 선교지역 어느 곳에서 보다 철저한 충돌과 갈등을 야기하기에 이르렀다.
‧ 가톨릭교도 황사영이 ‘황사영 백서’를 작성하여 로마 교황청에 보내려다가 중도에 발각되어 더욱 강력한 가톨릭 박해사건으로 이어졌다. 그 벽서의 내용은 ‘나라는 없어져도 교회의 표적은 남아 있어야 한다’는
‘탈(脫)민족 함(含)교회’적 사상에 몰두한 것이었다.
‧ 결국 가톨릭 초기의 수용사는 갈등과 박해의 과정을 겪게 되었고, 가톨릭으로 시작된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반민족 혐의’라는 위기로부터 시작되었다.
‧ 초기 가톨릭의 이미지는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에도 걸림돌이 되었다. 따라서 가톨릭의 전례를 극복하지 않는다면, 프로테스탄트의 선교나 수용에도 대립과 충돌을 피할 수 없기에, 초기 개신교들은 ‘이체선언’(異體宣言)을 내세웠다. 말하자면 ‘우리는 가톨릭과 다르다’는 선언이다. 개신교는 ‘정교분리’가 되어 있어, 정치적 간섭이 배제된 경향이라는 의미의 선언이었다.
(2) 한국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정착과정
‧ 1832년 독일계 칼 귀츨라프가 조선을 방한한 최초의 선교사였으나 거절당했고, 1866년 영국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가 대동강을 통해 평양에 진입하였으나 거절 당하였다.
‧ 1870년대 말에 스코틀랜드 장로교 만주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속인주의’(屬人主義) 선교방식을 택하였다. 한만국경의 소규모 무역상들이 경제적 이득과 외래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로스팀의 어학선생이 되었고, 마침내 한글성서번역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 중 학식이 있는 서상륜이 가세하여 한글 쪽복음서들이 차례로 간행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성서를 번역하던 조선인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자청한 것이다. 마침내 이들은 자기들이 번역한 성서를 지니고 평안도 일대에서 전도를 하였다.
특히 서상륜은 한국 최초의 자생적 개신교 교회가 설립된 황해도 장연의
솔내(松川)를 거쳐, 서울 남대문 밖에서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이것이 ‘북방선교루트’이다.
‧ 1880년대 초, 일본에 건너가 농학습득으로 조선의 농업경제를 일으키려던 이수정이 일본인 농학자 츠다로부터 기독교를 접하고 세례 후 입교하였다. 그는 한문성경에 한국식 토를 달고, 마가복음서의 한글판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미국교회 저널에 기고하여 조선신교를 촉구하는 선교유치활동을 벌였다.
이 때를 맞추어 미국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부는 조선선교를 결정하고, 이들은 일본에 들러 이수정을 만나 조선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았고, 그가 번역한 한글성서를 지니고 조선으로 건너왔다. 이것은 ‘속지주의’(屬地主義) 선교방식으로써, ‘남방선교루트’라고 할 수 있다.
‧ 이들은 입국하여 학교와 병원을 세웠으며, 마침내는 교회를 설립하였다. 1887년 9월 27일 조선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언더우드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이 교회의 첫 세례교인 14명 중 12명이 서상륜 등에 의해 기독교를 접한 ‘북방선교루트’의 결실이었다.
이렇듯 최초의 조선교회는 남‧북방 선교활동의 연합, 즉 ‘속인주의’와 ‘속지주의’ 선교방식의 절묘한 조화로 이룩된 교회였다.
‧ 미국교회 선교사들은 이보다 먼저 ‘간접선교방식’으로 조선선교에 착수한 바 있다. 1884년 6월 주일(駐日) 감리교 선교사였던 매클레이가 내한하여 고종에게 교육과 의료 영역에서 한정적인 선교를 윤허받았다.
같은 해 9월초에 상해에서 활동하던 미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이 미 공사관 부속의사 신분으로 내한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보수파의 거두인 민영익이 심각한 부상으로(27군데 칼에 찔림) 사경을 헤매자, 알렌이 외과수술을 단행하고 40일 치료 끝에 그를 회생시켰다.
이를 계기로 1885년 반국영의료기관 제중원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개신교 선교기관이었다.
‧ 조선 최초의 복음선교사인 장로교회의 언더우드, 감리교회의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교육선교사 신분으로 내한하였다. 아펜젤러는 서울 정동에서 영어학교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배제학당이다.
같은 시기에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톤은 여학교를 시작했는데, 곧 이화학당의 창설이다. 한편 언더우드는 고아를 모아 기숙학교를 열었는데, 이것이 경신학교의 시작이며 경신학교 대학부가 연희대학으로 발전하였다.
‧ 이들 최초 선교사들의 활동이 괘도에 오르면서, 각 교파별로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조선전역에서 활동하였다. 미국의 북장로회, 북감리회, 남장로회, 캐나다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가 앞다투어 조선선교에 착수했고, 성공회, 구세군, 침례교, 동양선교회, 안식교 등도 선교사를 파송했다.
‧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 많은 선교회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업의 중복, 불필요한 갈등이 나타나자 주요 선교교파들 사이에서 이른바 ‘교계예양’이라는 선교구역분할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는 선교의 효율적인 축면도 있었으나, 각 교파 간의 정교한 신학적 차이가 이식됨으로써, 훗날 한국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분열의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 조선주재 선교사들은 ‘북음주의 선교사 통합공의회’라는 연합기구를 결성하고, 마침내 1905년에 이르러 조선 단일교회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들의 꿈은 조선에서 교파구별 없는 하나의 기독교회를 수립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본국의 각 교파교회 선교부는 교파의 확장을 목표로 이러한 현지의 에큐메니즘을 외면하였고, 결국 단일교회의 이상은 와해되었다.
‧ 초기 조선정부의 금교정책이나 가톨릭의 선례로 인한 ‘척사위정’의 정책은 기독교 선교의 강력한 걸림돌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민중적 저항의식, 민중적 시험의 관문도 예상보다 강력하였다.
1888년의 ‘영아소동’사건과 이화학당 습격사건으로 인해, 모든 선교사들은 본국 공사관으로부터 소환령을 받았고, 활동은 잠정 중단되었다.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사건은 무마되었으나, 이 일은 결국 초기 조선기독교회가 넘어야 할 민중시험의 단계를 가까스로 넘은 사건이었다.
‧ 조선의 개신교 초기 선교는 이제 당시 조선의 민족상황, 국권의 상실과 민중의 절망이라는 정치적 민족적 현실에 어떻게 부응하느냐 하는 선교적 과제로 초점이 모이고 있었다.
(3) 애국심과 신앙의 결합, 민족교회
‧ 당시 프로테스탄트 수용기가 한말의 국권위기, 국권상실기와 겹치면서 이른바 ‘민족교회’형성의 분위기가 숙성되었다. 그런데 ‘민족교회’라는 성격 속에는 정치적 성향이 함축되어 있기에, ‘정교분리’와 일치하기 어려웠다.
초기 선교사들은 이러한 민족 혹은 정치적 경향을 우려하였으나, 이에 상관없이 조선의 수용자들은 스스로가 이미 기독교 신앙과 애국과 구국의 목표를 일치시켜 나갔다.
‧ 일제의 침략상황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민족문제라는 선교적 과제를 지니게 했고, 적극적으로 민족과 함께 하는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비기독교 국가세력인 일본의 식민침략, 그리고 그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서구 세력에 의한 기독 선교라는 ‘이원구조’를 형성하였다.
이는 ‘기독교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했던 ‘제3세계’지역에 비해, 기독교 선교의 수용 폭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이유이기도 하며 19~20세기 세계 기독교 확장사에서 유일한 경우이다
(4) 정교분리와 민족종교
‧ 그러나 ‘조선민족기독교’의 형성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계속 제기 되는 기독교의 ‘외세성’ 문제이다. 기독교가 외래의 것이며, ‘반민족’의 속성을 지녔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완전 해소하지는 못했다.
둘째, 미국형 복음주의가 지닌 ‘탈정치적 지향’이다. ‘정교분리’라는 선교신학은 조선교회의 민족적 상황적응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가져왔다. 더구나 일제 당국이 조선의 기독교를 향해 요구한 내용이 철저한 ‘정교분리’, ‘비정치화’, ‘비민족화’였다.
‧ 1907년 ‘교회 대 부흥운동’이 진행되고, 선교사들의 염원대로 교회의 신앙양태가 ‘종교성 강화’, ‘내면화 성향’으로 전환되면서 교회의 친민족적 방향은 좌초하는 것으로 보였다.
‧ 초기 조선 개신교회의 형성을 ‘조선민족교회형성사’로 규정하는 대해 전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역사가는 없다. 이는 초기교회의 주된 경향이 민족국가의 상황에 참여하는 민족교회였음을 의미한다. 우선 1880년대 중반부터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의 기독교의 진로를 의미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 시기에 진행된 민족운동 혹은 국권회복운동의 대부분은 기독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5) 3‧1 운동 속에서의 기독교의 역할
‧ 근대민족사에서 3‧1운동만큼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건은 없다. 그런데 이 사건의 중심에 당시로서는 소수 종교에 지나지 않는 기독교회와 기독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 3‧1운동은 현실적으로는 실패한 운동이다. 일제는 이를 불온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소요사건으로 단정하고, 보복과 책임자 처벌이 진행되었다. 이에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혐의를 받고 고초를 겪어야 했다.
‧ 한국교회는 1907년 대부흥사건을 겪으면서, 역사적 민족적 문제에서는 관심을 거둔 교회로, 즉 역사참여의 측면보다는 개인구원이나 내면화에 더 큰 비중을 둔 기독교 신앙으로 이행된 듯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몰역사적’경향의 교회가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민족운동과 역사참여의 과정에 한 주체로서 활동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