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화평케 하는 자 화평케 하는 것은 하나님을 분배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백성에게 화평을 주어야 될 사람이다. 하나님 자신이 화평이시니까 왕은 그 화평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나눠줘야 하는 것이다. 제일 좋은 왕은 백성을 화평하게 하는 왕이다. 그는 하나님을 분배하고 하나님을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면 사람을 화평하게 할 수 없다. 앞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라고 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큰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필요와 욕망이 없어져서 마음이 청결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고 하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분배해 준다. 즉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화평’을 생각하면 지성소 안을 생각할 수 있다. 지성소 안은 바깥에 어떤 환란이 있어도 그곳은 전혀 환란과 관계되지 않는 곳이다. 즉 하나님 자신이 그런 거처에 계신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바깥에 의해서 영향을 안 받는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든지, 춥든지 덥든지, 그것과 상관없는 곳이다. 하나님은 화평 중에 거하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화평이시다. 우리가 세상을 화평케 하려면 우리 안에 지성소가 있어야 된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 곳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으면 화평을 나눠줄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욕망과 어떤 소망으로 가득 차 있거나 마치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헐떡이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화평을 나눠줄 수 없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느꼈을 때 그것을 차지하려고 하다 보니 일어나는 것이다. 누구를 제패(制霸)하기 원하는 사람은 뭔가 남을 제패하지 않으면 만족이 없다. 자기 안에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만족하다면 남에게 피해를 줄 필요가 전혀 없다. 호랑이도 자기 배가 부르면 앞에서 토끼가 뛰어가든지 노루가 뛰어가든지 관심이 없고, 그 앞에서 놀아도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배가 고프면 아무것이나 잡아먹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족하지 않으면 남에게 화평을 베풀 수 없다. 세상에서 무엇을 가져야 남에게 화평을 베풀 만큼 만족할 수 있는가? 이 세상 어떤 것을 가져도 남에게 줄 것은 없다. 객관적으로 볼 때 부자라고 해도 자신이 나누어줄 것은 없다. 세상적인 부를 가져서는 절대로 화평케 할 수 없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이것은 절대로 완전한 만족이 아니다.”는 것이다. 완전한 만족이라면 남에게 나누어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적인 부는 아무리 많아도 남에게 나누어줄 것이 없다. 어떤 필요를 아무리 채운다 하더라도 그 필요가 만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족이 되지 않는 한, 마음이 청결해질 수 없고, 청결해지지 않는 한, 화평케 할 수 없다. 화평케 하는 자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라야 화평케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왕이 된 사람은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자라야 왕이 될 수 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여호와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였다. 그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었다. 솔로몬은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지만 그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것을 상속 받았기 때문에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화평케 하는 사람이었다. 야곱은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고 태어났음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것을 축복으로 여기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이미 준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야곱은 그 복을 뺏으려고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고, 거짓말로 속여서 형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뺏었으며, 자기 외삼촌과 전쟁을 해서 재물을 뺏었다. 이런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는 뭔가 끝없이 만족이 없었다. 하나님이 이미 그에게 예언해 놓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지 않으면 사람은 만족할 수 없고, 만족하지 못하면 마음이 청결해지지 않는다. 마음이 청결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며 하나님을 나누어줄 수 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을 만유 앞에 드러내도록 지어졌다. 우리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을 골고루 알려주고 분배하는 것이며 그의 모든 성분을 다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기 때문에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만유 앞에 나누어줄 수 있도록 지어졌다.
나.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 1) 하나님을 대신하고 분배하는 사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8-9).” 하나님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을 상속해서 유증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우리에게 분배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이어받아서 하나님을 내놓는 사람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보고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독생자이십니다.” 하였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을 분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분배해야 한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다. 모양도 없고 형체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화평으로 나타나면 그분을 화평으로 알게 되고, 사랑으로 나타나면 그분을 사랑으로 알게 된다. 요한1서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였다. 어떤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면 우리가 하나님을 느끼게 된다. 그 사랑이 드러난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므로 그는 하나님을 보게 해주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없다면 아들이 그 아버지를 보여준다. 아들이 아버지의 생명을 상속 받았기 때문이다. 만 년 전에 있었던 밀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지금 있는 밀이다. 현재의 밀은 만 년 전의 밀의 아들(씨)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당신 자신이 세상에서 현재적으로 그분의 아들로서 살기를 원하신다. 아버지로서는 하늘에 계시지만 아들로서는 땅에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아들의 형상 안에서 지어진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 ‘자기 형상’은 곧 ‘아들의 형상’을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하나님은 형체가 없지만 아들은 형체가 있다. 형체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는 유일한 길은 형체가 있는 자기 아들이다. 우리의 마음은 형체가 없지만 그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는 형체가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손을 잡았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형상(형체)이다. 우리의 마음이 나타난 자리이며, 우리의 마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타난 것은 아들이고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버지이다. “하나님은 셋이고도 하나이시다.” 할 때 나타나지 않는 분을 아버지라고 하고 나타나신 분을 아들이라고 한다. 2)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 화평케 하는 자는 누구인가? 화평 자체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을 나타낸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이삭을 만난 사람들은 “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한 사람이다.” 하였다. 이삭에게 아무리 해를 입혀도 전쟁이 안 나오고 평화가 나오니까 그들이 마침내 두려워하게 되어 화친을 청하였다. “너와 우리 사이에 화친을 맺자. 네가 우리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했다. 이것은 이삭에게 화평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은 사람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다. 왕은 세상에서 가장 복을 많이 받은 사람임으로 그것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왕이 어떤 경우에 악한가? 무엇을 나누어주지 않을 때다. 왕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워진 자다. 주어야 할 자가 주지 않으면 그것이 악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화평을 주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긍휼을 입은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 앞에 긍휼을 베풀지를 못했다. 그들은 악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받은 긍휼로 인해서 우리를 화평케 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서 화평을 세상 앞에 전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3)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평케 함 복음은 사람으로 화평케 하는 것이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화평케 했기 때문에 평화의 복음이라고 하였다. 사람 관계가 화평하다면 행복한 것이다. 만일 진리든 무엇이든 어떤 이유로든지 화평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첫째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이루게 하였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어떤 싸움이 있다. 이 싸움을 없게 한다면 이것이 인류 최대의 복음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당신이 나를 지어주신 것이 정말 감사합니다.” 하면 이것이 화평이다.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렇게 할까? 하나님은 왜 저렇게 할까? 하나님은 왜 이 모양으로 할까?” 한다면 이것이 싸움이다. 이 싸움을 누가 어떤 방법으로 없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내게서 나를 지어주신 이에게 감사가 나올 수 있겠는가?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이 나를 지어 주신 자이고 나를 보내신 자이며 나를 만드신 자라는 이 사실이 드러난 자리가 십자가다. 이 사실 앞에 있으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된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이루게 한다. 그래서 십자가는 복음이다. 누구에게든지 십자가를 전해서 그가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그래서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이 십자가가 필요하다. 십자가 때문에 이방인과 유대인은 최초의 교회(그리스도의 몸)가 된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어떤 것도 하나가 될 수 없다. 좋은 교리가 있으면 하나 된다는 것은 큰 오산이다. 좋은 교리가 있다면 그 다음에 더 좋은 교리가 나온다. 끝없이 싸우고 갈라지게 된다. 교리나 선악이 없는 곳에는 싸울 필요가 없지만 교리나 선악이 있으면 싸우게 된다. 무엇이든지 그 안에 생명 아닌 어떤 것이 있으면 반드시 싸우게 된다. 생명만이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십자가가 있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화평케 한 것은 그가 십자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십자가를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분과 하나님 사이는 화평이 되었고, 그분과 사람 사이도 화평이 되었다. 우리도 그 운명 안에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있다. 내가 십자가 앞에 있으면 하나님과 화목하고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된다. “저 사람이 옳게 되면 화목이 된다.”는 것은 사탄의 말이다. 그 사람이 옳게 되어서 화목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내게 십자가가 있으면 그 사람과 화목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길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화평케 하는 자다. 그는 하나님으로 만족하니까 자기 마음에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이미 화목이 된 사람이다.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것이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이 사람만이 남에게 화평을 줄 수 있다. 4) 화평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음 화평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은 십자가 안에서 부름 받은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다. 아담 안에서는 자기의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도저히 화목할 수가 없다. 아담 안에서는 싸우는 것이 정상이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화목한 것이 정상이다. 우리는 화평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았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아무리 좋은 교리를 전하더라도 화평을 주지 못하면 다 헛일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자기와 사람이 화목을 이루도록 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하였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로만 지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의 구조 자체가 무엇이 하나 있음으로써 완전해지도록 지어졌다는 것이다. 피조 된 모든 세계는 무엇이 하나 더 있을 때만 완전해지게 되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든 것처럼 사람도 자기 형상, 곧 사람의 형상대로 뭔가를 만든다. 사람이 마이크를 완전하게 만들어 놓아도 거기에 전기가 들어와야 완전해진다. 사람이 자기 형상대로 만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는데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과 합해서 하나가 되도록 지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야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둘이 합해서 하나가 되는 자리에서만 행복하다. 둘이 합해서 하나가 되는 길은 유일하게 십자가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비밀이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5) 화평은 생명 안에 있는 비밀임 화평은 생명 안에 있는 비밀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각기 모양이 다르지만 완전한 화평 가운데 거하신다. 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것들이 셋이 모였다면 절대로 화평할 수 없다. 각자 자기 몫이 따로 있으니까 화평할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모양이 다르지만 몫이 한 몫이다. 아버지가 나타난 바 된 것이 아들이고, 그 아들이 나타난 바 된 것이 성령이니까 하나이다. 뿌리가 나타난 바 되면 나무가 되고, 나무가 나타난 바 되면 가지가 되고, 가지가 나타난 바 되면 잎이 된다. 뿌리와 나무와 가지와 잎 사이에는 완전하게 화평이 있다. 각기 달라도 거기서 나와서 다 하나이니까 싸우지 않는다. 하나님도 그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완전하게 화평하신 분이다. 6) 하나님을 상속 받은 교회는 화평 중에 거함 하나님은 완전하게 화평 중에 거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상속 받은 교회만이 화평 중에 거한다. 하나님의 어떤 생명이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연결되고, 우리를 통해 흐르는 생명이 화평을 이루게 한다. 화평은 생명에 관한 것이고 지식에 관한 것이 아니다. 지식이 있는 곳에는 분열이 생기고 생명이 있는 곳에는 화평이 생긴다. 생명이 생명을 낳는 세계는 영원히 평화가 있다. 7) 하나님은 화평으로 승리함 하나님은 완전하게 화평으로 승리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도 화평으로 승리하는 교회가 된다. 생명으로 말미암은 교회는 화평이 필연적이다. 우리가 지식으로 말미암으면 분열이 되고 생명으로 말미암으면 하나가 된다. 손과 발은 몸에 붙지 않으면 자기가 못살게 된다. 우리도 형제와 연합하지 않으면 못사는 생명이 되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는 것이다. 8) 화평은 생명에 속함 화평은 생명에 속한 것이다. 생명이 아닌 것은 도저히 화평을 흉내 낼 수 없다. 사탄은 절대로 화평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가 화평을 만들어 내려고 하면 전쟁만 일어날 뿐이다. 계시록에 보면 “백마 탄 자가 나와서 손에 활을 가지고 이기고 이기려고 하더라.”는 것이다. 백마는 화평을 상징한다. 화평을 만들려고 애쓰고 노력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붉은 말이 나왔다. 이것은 전쟁을 의미한다(계6:1-3). 세상에서는 화평을 이루려고 노력할수록 전쟁이 나온다. 생명에 붙어 있어서 나오는 화평이 아니고 지식으로 말미암은 화평이기 때문에 전쟁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생명 안에서는 붙을수록 화평이 나오게 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영의 생각이라는 것은 곧 생명이다. 영에서 나온 것은 평안을 주고 육에서 나온 것은 싸움을 준다. 옳으냐 그르냐가 전혀 아니다. 옳으냐 그르냐는 사탄이 하는 일이다.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합당하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려들어가게 된다. 사탄이 사람에게 선악과를 준 이후 사람은 당연한 이유가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니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였다. 이유가 되는 것이다. 또 하와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하니까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였다.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이 결과를 보면 전혀 다른 데로 가고 있다. 그때 당시는 자기한테 그 이유가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만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가지 않는다면 뒤로 가서 보면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평을 이룰 수 있는 이유라면 좋지만, 아무리 옳은 이유라도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라면 이미 옳지 않은 데서 온 이유이다. 우리 스스로 옳으냐 그르냐를 분별한다면 그 근원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결과를 본다면, 즉‘이것이 평화냐? 싸움이냐?’ 그 결과를 보면 근원을 알 수가 있다. 옳고 그른 것 속에는 영원히 해답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면 안 되고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평화를 이루는데 이유는 전혀 없다. 9) 평강을 가진 자 하나님은 평강 중에 거하시는 분이다. 그 자신이 바로 평강이시다. 이 평강을 가진 자는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나라로 말한다면 왕이라는 뜻이다. 왕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백성에게 나눠주는 사람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받아서 아버지를 나타내는 자다. 즉 평강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이어받아서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들이다. 10) 화목케 하는 직책을 부여 받음 우리는 화평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도이다. 우리의 목적이 분명하다면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를 목적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목적이 없다. 목적이 없으니까 이유만 남고 그 이유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어떤 목표가 있을 때 그 이유가 옳든지 그르든지 해야 한다. 우리가 화목케 하는 직책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화목케 하지 못하면 잘못한 것이고 화목케 하면 잘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화목케 하는 직책을 부여 받았다고 하였다. 사람은 만물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케 하는 중보자로서 지어졌다. 즉 화목케 하는 직책을 위해서 지음 받았고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복음은 바로 화목케 하는 것이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