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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복음화의 어머니
교황 프란치스코의 권고 <복음의 기쁨> 259-288항(완결)
제 5 장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화활동가
259.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화활동가란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두려움 없이 개방되어 있는 복음화활동가를 의미합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는 사도들을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각각의 사람에게 그/그녀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경이로운 행적을 전하는 사자로 만드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또한 복음의 새로움을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반대자를 만났을 때조차 과감하게(parrhesia) 선포할 용기도 주십니다. 오늘 기도에 튼튼히 뿌리를 내려 그분을 다시 부릅시다. 왜냐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활동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우리의 메시지는 공허한 것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쁜 소식을 말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현존으로 변형된 삶으로 선포하는 복음화활동가를 원하십니다.
260. 이 마지막 장에서, 저는 그리스도교적 영성의 종합을 제시하거나 기도, 성찬례의 거행, 혹은 신앙의 전례적 기념과 같은 엄청난 주제들을 탐구하려하지 않겠습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교도권이 내놓은 문헌과 위대한 저술가들이 내놓은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 보물을 바꾸거나 발전시키려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단순히 새 복음화의 정신과 관련한 몇 가지 성찰을 제시하고 싶을 뿐입니다.
261. 어떤 것에 “혼이 실렸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보통 개인의 활동과 공동의 활동을 격려하고, 유발하고, 기르며,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지칭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화는 자신의 인격적 성향과 원의가 있음에도 의무감으로 수행하는 일련의 과업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열정, 기쁨, 관대함, 용기, 끝없는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 찬 복음화 열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알맞은 단어를 찾고 싶습니다. 그것을 제가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격려의 말도 성령의 불이 우리 마음을 태우지 않는다면 충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혼이 실린 복음화는 성령께서 인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라고 부름 받은 교회의 혼이시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영적 동기와 제안을 제시하기 전에, 저는 또 다시 성령께 호소합니다. 저는 성령께서 오셔서 교회를 새롭게 해주시고, 교회를 흔들어 깨우시고 재촉하시어, 교회가 모든 민족을 복음화하기 위해 과감하게 길을 나서게 해주시기를 탄원합니다.
I. 새로워진 선교의 추진(력)이 필요한 이유들
262.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화활동가는 기도하고 일하는 복음화활동가입니다. 사회적이고 선교적인 확실한 확장이 없는 신비적 관념은 복음화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영성이 없는 논문이나 사회적 혹은 사목적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일방적이고 불충분한 제안들은 소수의 그룹한테만 퍼질 뿐이며, 복음을 축소시키기 때문에 그 일부 사람을 넘어서는 빛을 발할 수 없게 됩니다.
필요한 것은 활동과 헌신에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적 공간을 계발하는 능력입니다. 지속적으로 말씀을 경배하고 기도 속에서 말씀과 만나지 않고, 주님과 지속적으로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의 일은 쉽게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피곤함과 어려움의 결과로 힘을 잃고, 우리의 열정은 사라집니다. 교회는 시급히 기도로 심호흡을 크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기쁘게도 기도에 전념하는 그룹, 중재기도에 전념하는 그룹, 하느님 말씀을 기도 속에서 읽는 그룹, 그리고 끊임없이 성체를 흠숭하는 그룹들이 교회 생활의 모든 차원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랑의 요구와 일치하는 않는 개인주의적이며 배타적인 영성을 제시하려는 유혹을, 육화가 갖는 함의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유혹을 배척해야만 합니다.” 기도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사명에 삶을 봉헌하지 않는 위험은 항상 존재합니다. 사유화된 생활태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일부 거짓 영성 속으로 피신하게 할 수 있습니다.
263. 우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과 역사 속의 수많은 형제자매를 잘 명심하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들은 복음 선포에 있어서 기쁨, 불굴의 용기와 열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요즘 어떤 사람들은 일들이 예전처럼 쉽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우리는 로마제국이 복음 메시지, 정의를 위한 투쟁, 혹은 인간 존엄성 수호를 받아 전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역사의 모든 시기는 우리를 먹이로 삼는 육욕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적 약점. 자아도취, 자기만족과 이기심 따위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항상 이런 저런 가면을 쓰고 현존합니다. 그런 것들은 특정 상황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인간의 한계에 기인합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그 문제들이 더 어렵다고 말하지 맙시다. 단지 다를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앞서 가셨고, 그 시대 어려움에 맞선 성인들한테서도 배웁시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 성인을 닮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이유들을 재발견하기 위해 잠시 멈출 것을 제안합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과 인격적으로 만납시다
264. 복음화를 하는 주요 이유는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 즉 그분의 더 큰 사랑에로 우리를 몰아대는 구원의 체험입니다. 사랑하는 그분을 말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그분을 지목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그분을 알릴 필요를 느끼지 않는 그런 사랑이 있다면, 도대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사랑입니까? 만일 우리가 이 사랑을 나누려는 강렬한 열망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 마음을 한 번 더 흔들어주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그분의 은총을 애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우리의 차가운 마음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미지근하고 피상적인 실존을 흔들어 일으켜주시기를 청해야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그분 앞에 섬으로써, 그분이 우리를 보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눈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눈길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9)고 하셨던 그 날 나타나엘이 얼핏 본 그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 있는 것이, 성체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그리고 단순히 그분 현존 속에 있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분께서 우리의 삶을 흔들어 그분의 새로운 생명을 나누게 할 때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선포하는”(1요한 1,3) 것입니다.
복음을 나누려는 가장 훌륭한 자극은 복음을 사랑하며 묵상하는 데서, 복음 구절에 머무는 데에서, 그리고 복음을 마음으로 읽는 데서 나옵니다. 그렇지만 만일 그 자극이 생기려면 묵상의 정신을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보다 인간적으로 만들며 새로운 생명에로 이끄는 어떤 보물이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묵상의 정신은 이를 항상 다시 깨닫는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귀한 것은 이 보물 말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265. 예수님의 전 생애, 그분이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 그분의 활동들, 그분의 성실함, 그분의 관대한 매일의 행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의 완전한 자기 증여는 귀한 것이며, 그분의 신적 생명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그것을 다시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야말로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사도행전 17,23)
복음은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과 우정을 맺고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창조된 것입니다. 복음은 이 심오한 요구에 응답합니다. 가끔 우리는 이 점을 잊기 때문에 복음 선포의 사명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복음의 핵심 내용을 적절하고 아름답게 표현한다면, 분명히 그 메시지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심오하게 동경하는 것에 이야기를 걸 것입니다.
“성령께서 활동하심으로써 이미 각 개인과 사람들 안에, 비록 무의식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에 관한 진리, 사람에 관한 진리, 어떻게 죄와 죽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에 관한 진리를 알려는 기대가 있다는 것을 선교사는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선교사의 열정은 그리스도께서 그 기대에 응답하고 계시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복음화의 열정은 이 확신에 기초합니다. 우리는 기만할 수 없는 사랑과 생명의 보물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혹시키거나 실망시킬 수 없는 메시지를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우리를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해서 우리를 떠받치고 품위 있게 해줍니다.
그 메시지는 절대로 시대에 뒤지지 않은 하나의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의 메시지가 다른 어느 것도 도달 할 수 없는 그 곳에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끝없는 슬픔은 무한한 사랑으로만 치유할 수 있습니다.
266. 그러나 그 확신은 그리스도의 우정과 그분의 메시지를 맛보는 우리 자신의 체험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함으로써 떠받쳐야만 합니다. 예수를 아는 것과 그분을 알지 못하는 것, 그분과 함께 걷는 것과 눈감고 걷는 것,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과 그 말씀을 모르는 것, 그분을 묵상하는 것과 묵상하지 않는 것, 그분을 섬기는 것과 섬기지 않는 것,
그분 안에서 우리의 평화를 찾는 것과 찾지 않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인격적 체험으로부터 확신하지 않는 한, 우리가 뜨거운 복음화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분의 복음으로 세상을 건설하려는 것과 우리 자신만의 생활태도로 그렇게 하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생활이 좀 더 풍요로지며, 그분과 함께 모든 것에서 의미를 더 쉽게 찾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것이 우리가 복음화를 하는 이유입니다. 결코 제자가 되기를 멈추지 않는 선교사는 예수님께서 자신과 함께 걷고, 자신에게 말하고, 자신과 함께 숨쉬고, 자신과 함께 일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 사업 한가운데에 자신과 함께 살아계신 예수님을 느낍니다.
우리가 선교적 헌신의 핵심에 현존하시는 그분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열정은 금세 쇠약해지고, 우리가 건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자신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활기와 열정을 잃을 것입니다. 확신하지 않고, 열정적이 않고, 확신을 가지 못하고, 사랑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누구도 납득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267. 우리는 예수님과 결합하여 그분이 구하는 것을 구하고, 그분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합니다. 결국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에페소 1,6) 살고 행동합니다. 우리가 끈기 있게 그리고 온전하게 헌신하기를 바란다면 다른 모든 동기를 제쳐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이야말로 결정적이고, 가장 심오하고 위대한 동기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 이유이며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 모든 순간에 찾았던 것은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아들로서 그분은 영원히 “아버지와 가장 가까이”(요한 1,18) 계신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선교사라면 그것은 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선호하고 흥미를 갖고 있는 그 모든 것, 우리의 지식과 동기들을 넘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보다 더 큰 영광을 위해 복음화를 합니다.
한 백성이 된다는 영적 향기
268. 하느님 말씀은 우리가 한 백성임을 인정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은 한때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1베드로 2,10) 영혼들을 위한 복음화활동가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백성의 생활에 가까이 있으려는 영적 맛을 발전시키고, 그 맛이 그 자체로 더 큰 기쁨의 원천이라는 것을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명은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며 동시에 백성을 향한 열정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 지탱해 주시는 그분의 심오한 사랑을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눈이 멀지 않았다면, 사랑으로 불타는 예수님의 시선이 당신의 모든 백성을 포용하며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분이 당신 백성을 당신께 끌어들이시기 위해 우리를 이용하시길 바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분은 당신 백성 가운데서 우리를 취하셔서 당신 백성에게 보내십니다. 이런 소속감이 없다면 우리의 심오한 정체성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269.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당신 백성의 핵심에로 데려가는 그 복음화 방법의 모델입니다. 그분께서 모든 이에게 보여주신 그 친밀함을 묵상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습니까! 만일 그분이 누군가에게 말씀하신다면, 그분께서는 깊은 사랑과 관심으로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바라보시며 사랑하셨다.”(마르코 10,21) 그분이 눈 먼 사람을 가까이 부르셨을 때(마르코 10,46-52 참조), 먹보요 술꾼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걱정하지 않고(마태오 11,19 참조) 죄인들과 먹고 마실 때(마르코 2,16 참조)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다가가기 쉬운 분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죄 많은 여인이 당신 발에 기름을 붓는 것을 가만히 놔 두시는 데에서(루카 7,36-50), 니코데모와 밤까지 함께 있는 데에서(요한 3,1-15) 그분의 감성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당신의 전 생애를 살아간 방식의 절정입니다. 그분을 모범으로 삼아, 우리는 사회 구조에 완전하게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모든 이와 삶을 나누고, 그들의 관심에 귀를 기울이고, 물질적 가난과 영적 가난을 도우며,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며, 우는 사람과 함께 웁니다.
우리는 다른 이와 팔짱을 끼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는 일에 헌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무감에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부담이 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고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격적 결정의 결과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270. 때때로 우리는 주님의 상처를 멀리하는 그런 부류의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불행을 쓰다듬어 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스러운 살을 쓰다듬어 주는 것을 그분께서는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적 불행의 소용돌이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해주는 그런 곳을 찾아나서는 것을 멈추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의 삶의 현실에 들어가고, 약함으로 힘을 갖는다는 것을 깨닫기를 희망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마다, 우리의 삶은 경이롭게 악화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한 백성이 되기 위한 것임을, 한 백성의 일부가 되기 위한 것임을 철저하게 체험합니다.
271. 세상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희망의 이유들을 제시하라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판하고 비난하는 원수처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듣고 있습니다.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1베드로 3,16) 그리고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로마 12,18)
또 우리는 “악을 선으로”(로마 12,21) 극복하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라”(갈라디아 6,10)는 말씀도 듣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낫게 드러나려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겨야”(필리피 2,3)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스스로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누렸습니다.(사도행전 2,47; 4,21, 33: 5,13)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깔보는 고관대작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백성을 위한, 백성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교황의 이이디어도 아니며, 여러 사목적 선택 가운데 하나도 아닙니다.
희망의 이유들은 하느님 말씀 안에 담겨있는 명령들이며,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확실해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명령의 힘을 감소시키는 어떤 해석들도 필요 없는 것들입니다. 해석하지 말고, 주석을 달지 말고 그 희망의 이유들을 살아갑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 한 가운데에 불을 밝히려 분투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과 삶을 나누는 선교의 기쁨을 알 것입니다.
272.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과의 결합으로 이끄는 영적 힘입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걸으며,”(1요한 2,11)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1요한 3,14)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1요한 4,8)
베네딕토 16세는 “우리 이웃에게 눈을 감는 것은 하느님께도 눈을 멀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사랑은 결국 “어둑해진 세상을 항상 환히 밝힐 수 있으며 계속해서 살며 일할 수 있게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유일한’ 빛은 결국 사랑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고 그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영성을 살 때, 우리의 마음은 주님께서 주시는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선물 앞에 활짝 열립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새로운 무엇을 배웁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인정하기 위해 눈을 뜰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지식의 빛으로 성장합니다. 만일 우리가 영성 생활의 진전을 원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지속적인 선교사여야만 합니다.
복음화 활동은 마음과 심장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 활동은 영적 지평을 열어줍니다. 그 활동은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에 보다 더 민감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 활동은 제한된 영적 구조물 너머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헌신하는 선교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적시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샘이 되는 기쁨을 압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찾는 데에서,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데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만이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의 개방성은 기쁨이 흘러나오는 한 원천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기”(사도행전 20,35) 때문입니다. 달아나고, 숨고, 나누기를 거부하고, 주기를 멈추며, 자신만의 편안함에 우리 스스로를 가둔다면, 우리는 더 잘 살지 못합니다. 그 같은 삶은 천천히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273. 백성 한 가운데 있어야 할 저의 사명은 그저 삶의 일부거나 떼어낼 수 있는 어떤 배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사명은 일종의 “여분”이거나 혹은 그저 내 삶의 다른 한 순간 같은 것이 아닙니다. 대신 그 사명은 나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는 나의 존재로부터 뿌리를 캘 수 없는 그 어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저는 하나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제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빛을 가져오고, 축복하고, 생기를 주고, 일으켜 세우고, 치유하고 자유롭게 하는 이 사명의 날인을 받고, 소인이 찍힌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갖고 있는 간호사, 영혼을 갖고 있는 스승, 영혼을 갖고 있는 정치인, 진심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있기를 선택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우리의 활동과 사적인 생활을 분리시키고 나면, 모든 것은 잿빛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부족한 것들을 인지하고 확인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 백성이 되기를 그만 둡니다.
274. 우리가 다른 사람과 우리 삶을 나눠야 하고, 우리 자신을 후하게 아낌없이 건네주어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들이 외모, 능력, 언어, 사고방식 때문에, 혹은 어떤 만족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의 작품이며,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을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 영광의 어떤 것을 드러냅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무한한 동정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생활 속에 현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귀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드러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각각의 사람은 ‘굉장히 거룩하고 우리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적어도 더 나은 생활을 하도록 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우리 삶을 봉헌해야 할 이유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경이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담을 무너뜨리고 우리 마음을 얼굴과 이름으로 가득 채울 때, 우리는 그 경이로운 일을 성취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께서 하시는 신비한 활동
275. 제2장에서 우리는 깊은 영성이 없으면 회의주의, 운명론, 그리고 불신의 늪에 빠진다는 것을 성찰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고 생각하고, 노력을 기울여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명에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의미 있는 결과를 내지 못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내 스스로 안락함과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는가?”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로는 선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안락함, 게으름, 막연한 불만, 그리고 공허한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내세우는 악의 있는 핑계일 뿐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멸의 태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희망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하고 견딜 수 없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죽음을 물리치셨으며 지금은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살아계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됩니다.”(1코린토 15,14) 복음은 우리에게 첫 제자들이 떠나가서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코 16,20)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고, 체험하도록 초대를 받습니다. 부활하시어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희망의 샘이시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할 도움을 거두어들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176.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의 어떤 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스며든 생명력을 갖습니다. 모든 것이 죽은 것 같은 그곳에서 부활의 표징이 갑자기 나타납니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힘입니다. 종종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변 곳곳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불의, 악, 무관심, 그리고 잔인함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암흑 속에서 새로운 무엇인가가 항상 생명을 갖고 살아나고 이윽고 결실을 맺는 것도 진실입니다. 파괴된 땅에서 생명이 뚫고 나옵니다. 그 생명은 완강해서 결코 정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어둡다고 하더라도, 선은 항상 다시 나타나서 퍼집니다. 이 세상에서 매일 아름다움이 다시 태어납니다. 그 아름다음은 역사의 폭풍을 뚫고 변형되어 떠오릅니다. 가치들은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갖고 다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마지막 때로 보인 그 상황에서도 언제나 일어섰습니다. 그 같은 것이 부활의 힘이며, 복음화를 수행하는 모든 사람은 그 힘의 도구들입니다.
277. 동시에, 새로운 어려움들이 끊임없이 생기고 있습니다. 실패의 체험들과 인간적 나약함이 그것인데, 이들은 많은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끔 어떤 임무가 기대했던 만큼 만족스럽지 못하고, 결과는 그다지 없고, 변화는 더디며, 점점 싫증을 내기 쉽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싫증이나 피로함 때문에 일시적으로 팔을 내려뜨리는 것과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 만성적 욕구불만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영구히 팔을 내려뜨리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자신에만 몰두하고, 인정, 환호, 보상과 지위를 쫓아 경력관리에 몰두하기 때문에 투쟁에 싫증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팔을 들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붙잡지 않는 것이며, 거기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이 같은 경우에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인 가장 아름다운 메시지, 곧 복음이 온갖 핑계거리 더미 속에 파묻히고 맙니다.
278. 신앙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그분께서는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분께서는 신비롭게 개입하실 수 있고, 그분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리고 그분께서는 당신의 능력과 무한한 창조력으로 악에서조차 좋은 것을 가져오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분께서 역사 속에서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충실한”(묵시록 17,14) 이들과 함께 승리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믿읍시다.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이 세상에 와 있고, 여기저기서 다른 방식으로 자라고 있다고 말합니다. 큰 나무로 자라게 되는 작은 씨앗처럼(마태오 13,31-32 참조),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적은 양의 누룩처럼(마태오 13,33 참조), 잡초 속에서 자라고 항상 우리를 놀라게 하는 좋은 씨앗(마태오 13,24-30)처럼 말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새로 번영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새 세상의 씨앗을 모든 곳에 뿌립니다. 비록 씨앗들이 파헤쳐지더라도 다시 자랍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이미 은밀하게 이 세상 역사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실을 한 올 한 올 엮여 천이 만들어지듯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헛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살아있는 희망의 이 행렬을 그저 지켜보는 구경꾼으로 남아있지 않게 하소서!
279. 자라고 있는 씨앗을 항상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내적인 확실성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분명한 역류에서조차 활동하실 수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2코린토 4,7) 빈번하게 이 확신은 “신비감”이라 합니다.
신비감은 자신을 사랑 안에서 하느님께 맡기는 모든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확신을 갖고 아는 것까지 포함합니다.(요한 15,5 참조) 이 풍성한 결실은 때때로 보이지 않을 수도, 파악하기 어려울 수도, 계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결실을 맺는지 안다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삶의 결실이 풍부할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확신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행동들 가운데 어느 것도, 다른 이들에 대한 진심어린 배려의 행위들 가운데 어느 것도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행동은 단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고결한 노력 가운데 무의미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스러운 인내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마치 하나의 생명력처럼 우리 세상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의 일이 결실을 맺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사명은 사무처리, 투자, 혹은 인본주의적 활동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명성을 듣고 몇 사람이나 모였는지를 세는 그런 전시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보다 대단히 심오한 그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측정법을 동원해도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전혀 가본 적 없는 세상 다른 지역에 축복의 비를 내리시기 위해 우리를 제물로 이용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에서 활동하십니다. 우리는 감히 놀랄만한 결과를 보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헌신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 뿐입니다.
창의적으로 그리고 활발하게 헌신하면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포근한 품속에서 쉬는 법을 배웁시다. 계속해서 전진합시다. 그분께 모든 것을 드립시다. 그분께서 우리의 노력에 대해 적절한 때에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합니다.
260. 우리가 선교의 열정을 생생하게 유지하려면 성령을 굳게 신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나약함에도 우리를 도와주시는”(로마 8,26)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굳은 신뢰에도 자양분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께 끊임없이 간구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선교의 노력을 쇠약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치유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신뢰하는 것은 방향을 잃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찾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깊은 곳에 잠수한 것과 같습니다. 저 자신도 그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자신을 인도하도록 허락하는 자유보다 더 위대한 자유는 없습니다.
마지막 세세한 것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고 통제하려고 하지 않고, 그 대신에 그분께서 우리를 비추고 인도하고 지도하게 하시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우리를 인도하도록 하는 것만큼 위대한 자유는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롭게도 결실이 풍부하다는 의미입니다.
선교의 힘인 중재 기도
281. 특별히 복음화의 과업을 차지하고, 다른 이의 선을 찾도록 우리를 움직이는 기도 가운데 하나가 중재의 기도이다. 잠시 바오로 성인의 마음을 엿봅시다. 그분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 봅시다. 그분의 기도에는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필리피1,4,7) 여기서 우리는 중재기도가 참 묵상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묵상에는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282. 이런 태도는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가 됩니다. “먼저 여러분 모두의 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들립니다.”(로마 1,8) 그 기도는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1 코린토 1,4) “나는 여러분을 기억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필리피 1,3)
그 기도는 절대로 의심하지 않고, 부정적이지 않으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기도는 깊은 신앙에서 나온 영적 시선입니다. 그 기도는 하느님께서 다른 이의 삶 안에서 하고 계시는 것을 알아보는 영적 시선입니다. 동시에 그 기도는 다른 이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마음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복음화 활동가가 기도를 하고 일어설 때, 그의 마음은 보다 많이 열립니다. 자아도취에서 자유로워져서 좋은 일을 하고 자기의 삶을 다른 이와 나누려 열망합니다.
283. 위대한 하느님의 사람은 위대한 중재자입니다. 중재는 “삼위일체의 성심 안에 있는 누룩”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구체적 상황에 빛을 비추고 변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는 하나의 길입니다.
우리의 중재가 하느님의 마음을 쓰다듬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재로 그분은 항상 그곳에 먼저 계십니다. 우리의 중재로 얻은 것은 그분의 힘, 그분의 사랑, 그리고 그분의 풍요로움이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또렷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II. 마리아, 복음화의 어머니
284. 성령과 함께, 마리아는 언제나 사람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녀는 제자들과 함께 성령께서 오시기를 기도했습니다.(사도행전 1,14) 그래서 오순절에 일어난 선교의 폭발이 가능했습니다. 마리아는 복음화 활동을 하는 교회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 없이는 교회가 절대로 새 복음화의 정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 백성에게 주신 예수님의 선물
285.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몸으로 세상의 죄와 하느님의 자비를 극적인 만남을 견뎠을 때, 발 아래서 당신 어머니와 벗이 위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결정적 순간에, 당신 아버지께서 당신께 맡기신 그 일을 완전히 마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신 벗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9,26-27)
돌아가시면서 하신 이 말씀이 주로 당신 어머니에 대한 배려와 공경을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특별한 구원 사명의 신비를 드러내는 하나의 계시 공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남겨두셨습니다. 오직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이 이제 이루어졌음”을 아셨습니다.
십자가의 밑에서, 새 창조의 결정적 시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마리아께 이끄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머니 없이 여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마리아를 데려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어머니의 이미지에서 복음의 모든 신비를 읽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성의 이 아이콘을 남겨두지 않고 교회를 떠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탁월한 신앙으로 그분을 이 세상에 모셔 오신 마리아는 “여인의 나머지 후손들, 곧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과도 동반하십니다.
마리아, 교회, 그리고 신앙 공동체의 각 구성원 밀접한 결합은, 각 신앙인들이 그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그리스도 낳는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며, 그 결합을 복된 스텔라의 이사악은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영감을 받은 성경에서, 동정 어머니인 교회의 보편 감각으로 말한 것은 동정녀 마리아의 개별 감각으로 이해됩니다. ... 보기에 따라서, 각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말씀의 신부가 된다고,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된다고, 그리스도의 딸과 누이가 된다고, 동정이면서 동시에 출산을 하게 된다고 믿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자궁이라는 임시 천막에서 아홉 달 동안 머무르셨습니다. 그분은 마지막 날까지 교회의 신앙이라는 임시천막에 머무르십니다. 그분께서는 충실한 영혼의 사랑과 지식 안에 영원히 머무르실 것입니다.”
286. 마리아는 형편없는 배내옷과 풍부한 사랑으로 마구간을 예수님의 가정으로 바꾸실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찬미한 아버지의 종입니다. 그녀는 우리 생활에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관심을 기울이시는 친구입니다. 그녀는 그 마음이 칼에 찔렸고 우리의 모든 고통을 이해하시는 여인입니다.
모든 이의 어머니로서, 그녀는 정의의 산고를 겪고 있는 사람을 위한 희망의 표지입니다. 그녀는 당신의 모성애로 우리 마음을 신앙에 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가까이 끌어당겨 전 생애에 걸쳐 동반하는 선교사입니다. 참된 어머니로서, 그녀는 우리와 함께 걷습니다. 그녀는 우리와 함께 투쟁하고, 변함없이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감쌉니다.
그녀의 많은 호칭들이 성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복음을 받아들인 각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으며, 그녀는 그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의 한 부분이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가 마리아 호칭을 가진 성당에서 자기 자녀가 세례 받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새 자녀를 낳아드린 마리아의 모성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는 표지로 말입니다. 그 많은 성당에서 우리는 마리아가 어떻게 당신 자녀를 모으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자녀는 순례자로서 그곳에서 마리아를 보기 위해, 그리고 마리아한테 보이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온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자기 삶에서 겪는 고통과 피곤함을 견뎌낼 힘을 하느님한테서 찾습니다. 그녀가 후안 디에고(Juan Diego)에게 하신 것처럼, 마리아는 그 순례자들의 귀에 어머니의 위로와 사랑을 속삭입니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너의 어머니인 내가 여기 있지 않느냐?”
새 복음화의 별
287. 우리는 살아있는 복음의 어머니께 중재를 청합니다. 복음화의 새로운 국면에로의 이 초대를 모든 교회 공동체가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마리아는 신앙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신앙 속에서 살며 앞장서 가십니다. 또한 “그녀의 탁월한 신앙의 순례 여행은 교회가 항상 따라가야 확실한 안내서입니다.”
봉사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할 신앙의 여정에서 마리아는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갑니다. 오늘 우리는 그녀를 바라보고, 우리가 구원의 메시지를 모든 이에게 선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고 새 제자들이 다시 복음화 활동가가 되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합니다.
이 복음화의 여정에서 우리는 무미건조함, 어두움, 그리고 피곤함까지도 느낄 것입니다. 마리아 자신도 예수님의 어린 시절 나자렛에서 그런 것들을 체험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 기쁨에 넘치는 좋은 소식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시작에서 마음이 특별하게 무거워진다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특별한 무거움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을 빌면, 일종의 신앙의 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장막’으로서 그 장막을 통해 사람은 볼 수 없는 분에 가까이 가야만 하고, 신비와이 친밀함 속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288.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는 마리아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바라볼 때마다, 한 번 더 사랑과 부드러움이라는 혁명적 본성을 믿게 됩니다. 그녀에게서 우리는 겸손과 부드러움이 약한 사람의 미덕이 아니라, 스스로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기 위해 다른 이를 함부로 대할 필요가 없는 강한 사람의 미덕을 봅니다.
마리아를 묵상하면,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셨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신”(루카 1,52-53) 하느님을 찬송한 그녀는 정의를 추구하는 우리에게 가정적인 따뜻함을 가져다주시는 분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그녀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루카 2,19) 사람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크고 작은 사건에서 하느님 성령의 자취들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우리의 세상에 있는, 인간의 역사에 있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는 하느님의 신비를 끊임없이 묵상합니다. 그녀는 나자렛에서 기도하고 노동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또한 도움의 여인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다른 이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서둘러”(루카 1,39) 마을을 떠납니다. 정의와 부드러움 사이의, 묵상과 다른 이에 대한 배려 사이의 이 상호 작용은 교회 공동체가 마리아를 복음화의 모델로 보게 합니다. 우리는 그녀의 어머니다운 중재를 탄원합니다.
교회가 많은 사람을 위한 가정이 되게 해달라고, 모든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새 세상의 탄생을 여는 길이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자신감과 흔들릴 수 없는 희망을 가득 채워주시는 그 힘을 갖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록 21,5) 마리아와 함께 우리는 이 약속의 실현을 향해 자신 있게 나섭니다. 그리고 마리아께 우리는 기도합니다.
동정이시며 어머니이신 마리아님,
성령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비천한 신앙 그 깊은 곳에
생명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영원하신 한 분께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다급하게 부를 때
우리도 “예”라고 스스로 대답하게 도와주소서.
어느 때보다 긴급한 이 때
예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가득한 마리아님,
당신은 세례자 요한에게 기쁨을 건네셨습니다.
자기 어머니 자궁에서 기뻐 뛰놀게 했습니다.
기쁨으로 가득차서 당신은 노래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위대한 일을.
내려놓을 수 없는 신앙으로
당신은 십자가 아래에 서계셨습니다.
바로 거기서 당신은 부활의 기쁜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기다리며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복음화 하는 교회가 태어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이 낳은 새로운 열정을 이제 저희가 갖게 해주십시오.
그 열정으로 모든 이에게 죽음을 물리치는 생명의 복음을 가져다주기를.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거룩한 용기를 주소서.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라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도록.
듣고 곰곰이 생각하시는 동정녀여,
사랑의 어머니, 영원한 혼인잔치의 신부여,
교회를 위해 빌어주소서.
당신은 교회의 순수한 표상입니다.
교회가 스스로를 가둘 담을 치지 않게 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는 열정을 잃지 않게 하소서.
새 복음화의 별이시여,
우리가 빛나는 증인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친교, 봉사의 증인, 불타는 신앙의 증인, 온유한 신앙의 증인,
정의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증인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복음의 기쁨이 땅 끝까지 미치게 해주시고,
이 세상 변두리까지도 밝게 비추게 해주소서.
살아있는 복음의 어머니,
하느님의 작은이들에게 기쁨의 샘이신 어머니,
우리를 위해 기도하소서.
아멘. 알렐루야!
로마 베드로 광장에서.
11월 24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임금을 기념하며,
그리고 신앙의 해 폐막을 기념하며,
2013년, 저의 교황재위 첫 해에,
프란치스코가.
(완결)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