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집단 제례의 정착
구성제(九星祭)로 호칭 바꾸다
1877년 10월 3일에 고천제례의 명칭을 구성제(九星祭)라고 이름지었다. “하늘에 구성이 있어 땅의 구주(九州)와 대응한다”는 [논학문]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이날의 제례에는 정선, 인제, 청송, 상주, 단양 등지의 도인들이 모여서 인제접주 김연호의 집에서 올렸다. 헌관을 9명으로, 집사는 12명으로 늘렸다. 소요 비용은 장춘보와 김치운이 전담하였다.
이 구성제는 한 번 올리면 49일간 기도한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많은 도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10여일 뒤인 16일에는 정선 유시헌의 집에서 구성제를 봉행하였다.
1878년 7월 25일 해월은 유시헌의 집에서 개접(開接)하였다. 개접은 도인들이 진리를 토론하는 모임을 말한다. 수운이 1863년 파접한 이후로 15년만이다. 이때 모인 사람은 강시원, 신시영, 유시헌, 방시학, 최시경, 신시일, 홍시래, 최익섭, 최기동, 홍석도, 안상묵, 김원중, 안교강, 전두원, 윤종현 등이다. 해월은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하날님만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 하단말가” 라는 대목을 골라 네 몸에 하늘님을 모셨다[시(侍)]는 뜻을 새겨보도록 하였다.
“사람이 포태(胞胎)하자 하늘님을 모시게 되었는가. 낙지(落地)할 때 하늘님을 모시게 되었는가. 아니면 대선생께서 득도하는 날에 하늘님을 모시게 되었는가 생각해 보라” 그리고 “제례를 행할 때 지금까지 벽을 향해 차려놓았던 제수상 차림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나를 향해 차려놓은 것이 옳은가 하는 것도 생각해보라” 고 하였다. 시천주(侍天主)의 신관념과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제례는 동전의 앞뒤처럼 통해 있다. 해월은 일체 설명을 하지 않고 생각할 과제만 던져주었다.
수운은 『동경대전』「논학문」에서 “시(侍)라는 것은 내 몸안에 하늘님 신령이 들어있다는 것이며[내유신령(內有神靈)], 이 신령이 항상 밖으로 기화(氣化)하고 있다[외유기화(外有氣化)]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사람이 포태하자 하늘님을 모시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네 몸에 모셨다는 말은 내 몸안에 좌정해 있다는 말이다. 즉 네 몸안에 아주 가까이 모셔져 있으니 이 하늘님을 버리고 먼데서 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시천주(侍天主)의 신관념은 동학의 기본 신념이며, 최고 가치체계 중의 하나이다. 인간관과 가치관 그리고 이상사회를 지향하려는 동학의 꿈은 이 시천주의 관념에서 비롯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동학의 신념인 인내천(人乃天)이나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관념도 시천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등제로 이름 바꾸다
1879년 2월에 해월은 두 번째로 강시원과 김용진(김연국)을 대동하고 고향인 경주를 다녀왔다. 여러 친지들을 만나보고 3월 10일 수운의 순도기념제례일에 맞추어 되돌아오다가 양양 일월면 큰사위집을 찾아가 부친의 생신제례날이라고 속이고 스승님의 환원제례를 봉행하였다.
보름 후 3월 26일 해월은 강시원, 김용진과 영서족으로 다녀오기 위해 길을 나섰다. 영월 하동면 노정식의 집에 머물던 중, 꿈 속에서 수운을 만났다. “선생님은 북문으로 가서 천문개탁자방문(天門開坼子方門)이라는 일곱 글자를 세 번 구송하고 손으로 세 번 북문을 두드리니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또한 한. 온. 포 세 글자를 써주면서 추우면 온(溫)자를 사용하고, 굶주리면 포(飽)자를 사용하고, 더우면 한(寒)자를 사용하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튼날 길을 떠나 정선 유시헌의 집을 거쳐 인제 김치운의 집에 이르렀다. 3월 7일 여기서 큰 제례를 올렸다. 집단제례를 행할 때마다 도인들의 공동체의식이 좋아졌다.
4월 초순에 해월은 정선 유시헌의 집으로 가서 구성제가 49일의 기도와 같다는 믿음에 크게 도인들의 환영을 받고 있으나 음식을 많이 차려야 하므로 경제적 부담이 크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쌀과 천과 등불로 제수를 대신하는 인등제(引燈祭)로 바꾸었다. 음식을 차리지 않으니 제수차림이 간단하고 비용도 덜 들어 도인들이 좋다고 환영하였다.
10월이 되자 경주에 사는 해월의 종제 최경화도 인등제를 올린다는 기별이 왔다. 김용진과 황제민을 대동하고 내려가 봉행하니 김필상, 박언순, 정기중, 김영순, 권성옥, 정상중, 김재문 등이 참석하였다. 16일에는 청송 조시철의 집에서, 28일에는 정선 홍석범의 집에서, 11월 1일에는 남면 방시학의 집에서 인등제를 올렸다. 이로부터 해마다 10월과 11월, 그리고 4월이면 인등제를 올리는 관례가 자리잡아 갔다. 인등제의 보급은 동학의 조직이 강화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인등제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김연국이 이끌어왔던 시천교(侍天敎)에서는 해방 후에도 인등제를 행하였다고 한다. 밤에 장독대에 나가 봉행하였다고 한다. 해월은 인등제를 통하여 도인을 이끌어내고 포덕을 넓히는 수단으로 삼았다. 초기의 인등제는 집단제례로 시작되었으나 1880년부터는 개인적으로 집집마다 봄. 가을에 봉행하는 관행으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4월 5일 처음으로 창도기념제례를 봉행하기 시작하였다.
5. 사적편찬과 경전간행
『최선생문집도원기서』편찬
각지에서 인등제를 봉행하는 일이 자주 생기면서 도인의 수도 점점 늘어났으며 조직력도 강해졌다. 1879년 11월에 이르러 그동안 논의되어 왔던 수운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기록을 정리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도인들의 성출로 비용을 모아 정선 방시학의 집에 대선생수단소(大先生修單所)를 설치하였다. 도차주 강시원 등 몇 분이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다. 2개월만에 초고가 탈고되었고, 1880년 1월 전세인이 정서하여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였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가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에서는 수운의 생애, 득도와 포덕, 탄압과 남원행, 접주 임명과 북도중주인 선정, 수운의 체포 경위와 순도 이후 해월의 포덕 활동, 영해교조신원운동, 조직의 재건, 의례의 정립, 『동경대전』간행 경위 등 1880년 이전의 사적을 담아냈다.
그러나 1871년 영해교조신원운동 기록이 들어가 있어서 모처럼 만든 이 문건을 세상에 내놓으면 동학은 역적이나 반란집단으로 알려질 것이 뻔했다. 결국 세상에 내놓을 수 없었다. 이 문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것은 1906년경부터이다. 1910년『천도교회월보』라든가 1915년『시천교종역사』등을 집필하는데 자료로 삼았다. 이 원본은 1978년 김덕경에 의해 『중앙일보』에 공개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중에서 수운의 창도 부분은 따로 떼어 『대선생주문집』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이 두 필사본은 천도교중앙총부와 규장각에 각각 1부씩 보관되어 있다.
동경대전, 용담유사 간행
인등제의 정착으로 도인수가 늘고 경전을 찾는 이가 많아졌다. 필사로 경전을 보급해왔으나 탈자가 생기고 오자가 들어가 원본을 손상시키는 일이 적지 않았다. 수운도 경전인쇄를 해월에게 부탁했으나 비용이 많이 들어 지금껏 미루어왔다.
해월은 1880년 4월 하순에 측근들과 의논하여 각 접에서 비용을 모아 우선 『동경대전(東經大全)』만이라도 간행하고자 하였다. 5월 9일에 인제 갑둔리 김현수(치운)의 집에서 간행소를 설치하고 판각작업에 착수하였다. 6월 14일 100부를 간행하였다. 이 초판 『동경대전』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881년 6월에는 역시 인제접에서 비용을 전담하여 단양군 남면 천동[샘골]에 있는 여규덕의 집에서 『용담유사(龍潭諭詞)』를 간행하였다. 수 백권을 찍어서 각처로 반포하였다. 이 역시 원본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표영삼 선생은 1979년 12월 여규덕의 고향으로 찾아가서 수소문하여 보았으나 정확한 자리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천도교서』1865년조와 1880년조에는『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諭詞)』는 해월이 구송(口誦)하여 간행하였다고 기록하여서 세간에 해월이 뛰어난 기억력으로 암송한 것을 가지고 출간하였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하지만 표영삼 선생은 해월이 암송한 것이 아니라 수운이 건네준 원본을 가지고 20여년 후에 출간한 것으로 보고 있다. 1880년 집필한 『최선생문집도원기서』나 1906년 필사된 『해월선생문집』에 구송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아무튼 많은 부수는 아니지만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諭詞)』를 각각 출판하자 도인들은 수운의 경전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당시 도인이면 누구나 내용을 줄줄 외웠다고 한다. 글을 모르는 부녀들도 『용담유사(龍潭諭詞)』만은 외웠다고 한다. 뜻을 일건 모르건 경전을 외운다는 사실은 수행에 큰 힘이 된다.
첫댓글 집단 제례 의식을 창안하여 실천하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출간하여 이념서로 삼아 포교를 하여 조직세를 넓히고, 집단 의식을 고취시켜 나가는 모습들을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