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 활동가, 교육자, 사회사업가, 세계평화운동가
춥고 어두운 곳에 따뜻함과 밝은 빛을 전해주신 인권계의 대부,
故 유재건 변호사님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원장 양 정 자
며칠 후면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 위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평화의 사자 예수그리스도의 탄신일 크리스마스이고, 2022년 호랑이해가 마감되고 2023년 토끼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전 세계가 아직 코로나-19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여파로 두 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통일이 더 멀리 달아나고, 여·야간의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다툼,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유족의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랑과 평화의 사자이신 예수님께서 국내·외 지도자들과 우리들 모두의 강퍅한 마음을 풀고 평화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본 상담원의 고문이시며, 법률구조사업의 선각자, 인권변호사, 세계유네스코협회연맹(유엔의 전문기구로서 교육‧과학‧문화‧정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국제협력을 촉진하여 세계 평화와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하는 기관) 회장이신 유재건 박사님이 12월 1일,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시어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유재건 박사님은 미국 유학 중 살인 누명을 쓴 재미교포 이철수 씨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끌어내고, 인종과 이념, 종교, 지역의 장벽을 넘어 취약계층이 삶에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을 펼치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사회·경제적 취약 계층이 소외와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자립 지원, 보건의료, 교육, 구제 및 권익옹호 사업을 위해 비영리법인 구호단체를 설립하고, 여성인권 보호와 이주민, 난민 지원사업에도 앞장서신 인권변호사, 활동가, 교육자, 사회복지사, 세계평화운동가인 동시에 화해의 사도로 국내‧외 구석구석에 따스한 손길과 발자취를 남기신 어른이십니다.
법률구조사업의 선각자요 실천가인 유 박사님은 법률구조사업을 하는 저희와 같은 길을 가는 동역자요 동지셨으며, 저를 비롯한 수많은 후학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스승이셨습니다. 유 박사님은 ‘정의를 실천하고 약자의 편에 서서, 특히 힘없는 어린이들과 소외계층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본인의 삶 전체를 통해 보여주시고 가르침을 주신 분으로,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항상 마음속에 깊은 존경과 사랑 그리고 정신적인 지주로 모신 큰어른이셨습니다. 그렇게 크신 분이 곁에 생존해계시고 본 상담원의 고문이시라는 사실만으로도 제게는 언제나 큰 힘과 용기, 의지가 되었습니다.
유재건 박사님과의 첫 만남은 1978년 이철수 사건을 한국에 알리고 지지와 지원을 받기 위해 한국에 오셔서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방문하셨을 때입니다. 그리고 필자가 1979년 상담간사로 미국 감리교의 지원을 받아 미국과 캐나다의 법과대학‧법률구조기관‧가정상담소‧형무소‧소년형무소‧법원 등을 시찰하던 중 새크라멘토(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주도)의 유 박사님이 근무하는 법률사무소를 방문했을 때, 사모님(김성수)과 함께 그 지역 법률구조기관을 섭외하여 안내해주셨습니다. 또한 필자가 1983년 교포가정을 위한 한국가정법률상담소 L.A.지부 창설을 위해 파견되었을 때, 변호사 개업 후 여러 어려움이 있으심에도 항상 열정적이고, 밝고 따뜻한 바이러스를 주위에 전달하시며 지부 창설과 정착에 도움을 주셨습니다.
유재건 박사님은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국 BYU에서 사회학 석사, 워싱턴주립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과정 졸업, 1977년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77년부터 1989년까지 미 연방정부 지역사회변호사로 일했고, 1982년부터 1990년까지 L.A.에서 법률사무소를 경영하셨습니다.
특히 유 박사님은 변호사 시험 공부를 하던 197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인누명을 쓴 재미 한국인 이철수 씨의 무죄를 확신해 1977년 ‘이철수 구명위원회’를 결성했고, 이에 동참한 한인들이 20만 달러의 성금을 모으는 등의 노력으로 1982년 9월 3일 무죄 평결을 끌어냈습니다. 이씨가 교도소 복역 중 정당방위로 맞서다 살해한 사건에 대해 사형판결을 받은 제2의 사건도 1983년 사형판결이 무효화됨으로써 이철수 씨는 풀려났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 땅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됐고, 미국 역사상 최초의 소수민족 연대 승리로 기록됐습니다.
1990년 귀국하신 후에 1993년까지 MBC 시사토론을, 1993년부터 1995년까지 KBS 1TV 심야토론을 진행하셨습니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며 정치를 시작, 제15-17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경원대학장. 국방위원장, 국가조찬기도 회장, 한미의원연맹, 스카우트연맹, MRA, 제3대 CGN TV 대표이사, 국제사면위원회, 외교연구모임 등의 회장과 국제의원연맹의 집행위원, 부의장 역임, 2009년부터 한국유스호스텔연맹 총재, 세계유네스코협회연맹 회장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또한 2021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사회·경제적 취약 계층이 소외와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자립 지원, 보건의료, 교육, 구제 및 권익옹호사업을 위해 설립된 비영리법인 구호단체 <희망의 다리> 초대이사장으로 봉헌하셨습니다. 유 박사님은 취임사에서 “나 역시 소년가장 출신으로 장학금을 받고 연세대에 다니는 등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감리교회 덕을 많이 본 게 인연이 돼 이사장을 맡게 됐다.”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감사하며 열심히 살면 “도움을 받는 자에서 도움을 주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필자가 1983년 L.A.지부에서 근무할 때, 유 변호사님 사무실을 찾아간 교포들 중 이철수 사건 때 후원금을 내라고 해서 냈으니 내 사건도 무료로 해 달라고 하는 분들이 있어 힘드신 데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그분들에게 진심을 가지고 대해주시는 것을 보고 놀라고 많이 배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따님 유승영 변호사가 하버드 로스쿨 재학 시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와서 실습할 때, 부모님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 퇴근 후에는 코리아타임스에 가서 교정을 보는 것을 보며, 실습 담당을 맡았던 필자는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 자녀를 지원해야 한다는 우리 한국 부모들의 자녀사랑 태도에 대해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 박사님께서 귀국하신 뒤로 1995년 KBS 심야토론에서 뵙고는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은퇴하고 이제 조용히 지내고 있으시다면서 힘차고 시원시원한 필체로 이렇게 서신을 보내주시고, 고문으로 취임 승낙도 해주시고서 동역자로 함께 일해주시지 않고 이렇게 빨리 떠나시다니……. 하나님도 하늘나라에서 유 박사님을 필요로 해서 소환해 가신 걸까요?
수십 년간 사랑하고 존경해온 양정자 원장님께
은퇴하고 이제 조용히 지내고 있는 저는 일주일에 한번 유네스코 빌딩에 있는 협회연맹 사무실에 나와 회장 일을 보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꾸준히 계속해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계신 양 원장님에게 아무 도움 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오늘 사무실에서 받아본 ‘법률복지’ 회지에서 양 원장님의 글을 읽고 감동이 커서 제 심정을 드리며, 응원하기 위해서 몇 자 적어드립니다. 전체 글의 내용이 너무 훌륭하고, 윤미향 의원과 이용수 할머니 두 분에게 권면하신 내용에 적극 동의하며, 이태영 박사님의 “삯꾼” 이론에 감동이 컸습니다. 이태영 박사님 생각하면, 이철수 생각나고, L.A.사무실 개소 때 생각, 새크라멘토 사무실에 양 원장님 오셨던 일 등. 우리의 인연이 아주 오래되고 깊었는데, 저의 무심으로 계속 우정관계가 끊긴 것 같아서 회개하며, 양 원장님 사역을 적극 응원합니다. 어려운 시절에 건강에 유의하시기 빌면서 오늘 평생회원 신청하겠습니다.
2020년 6월 3일 유재건 변호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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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건 박사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뵙고 싶습니다.
“약자를 위한 사랑과 봉사의 삶”을 백분의 일이라도 닮아보고자 노력하면서 우리 모두 박사님의 ‘뜻’을 이어가도록 힘을 합하겠습니다. 행동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주시고 용기를 주셨던 유재건 박사님의 영전에 뜨거운 감사와 깊은 존경의 인사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