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시와 경계
신인 우수작품 공모
당선작 발표
■ 당선자
채종국 「네가 그린」, 「붉은 장미」, 「사슴뿔」, 「손톱」
1970년 전남 광주 출생. 시와 의미 동인. 대중서사연대 회원.
E-Mail winnerchae@hanmail.net
네가 그린 외 3편
채종국
사이프러스 나무 옆에서 정령을 보았어
네가 숨겨 놓은 걸 찾으라 할 때
난 입술을 닫고 있었지만
보리밭과 태양 그리고 달의 그림자까지
푸른 죽음이 덮고 있는 걸 보았어
이제서야 말하지만 지난번 그린
강가의 푸른 별들에서도 같은 걸 보았어
뜨거운 것들 안에는 생명이 살고 있다는데
굳은 물감을 한 겹 더 뜯었을 땐 죽음이 잉태되어 있었어
절정의 그림 속에 네가 보았던 유령들이
그림을 지키고 있었어
어쩌면 지금도 사이프러스나무가
네 곁을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어
타오르는 저 나무를 보며
언젠가 우리 모두 네가 그린 나무 옆에
이글거리는 저 푸른 죽음을 보게 될지도 몰라
정령으로 되살아날지도 몰라
네가 있던 병원
사이프러스 나무 옆에 모종 하나 심고 돌아왔어
너의 그 해바라기 말이야
붉은 장미
봄이면 엄마에게서 배운 슬픔이
칼 맞은 것처럼 길가에 낭자하다
타고난 슬픔이 켜는 우울한 변주는
내가 자라난 골목에서 눈물을 키웠다
하찮은 것들에게조차 눈을 떼지 못하는 나는
봄날, 겨울처럼 울고 있는 소녀의 등을 본다
엄마의 생각이 줄기를 타고 오르는지
계절은 병든 몸을 빨아 붉은 핏덩이를 피워낸다
해가 갈수록 장미가 붉다
엄마가 피를 토한 후 더욱 그렇다
짙어지는 선지 꽃송이 따라가면
내게로 이어진 붉은 샘을 찾을 수도 있겠다
장미를 보는 순간 거짓말이 하고 싶어졌다
문득 내가 가정법 속에서 살아온 건 아닌지
만약 내가 그녀의 자궁에서 숨 쉬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녀가 가시 돋친 담장에 자라지 않았더라면
잎이 시든 봄날의 장미는 더욱 붉다
병실 창 밖
고개 내민 엄마의 얼굴이 붉다
사슴뿔
가시 같은 공기를 너의 집에서 몰래 가져왔어
보고 싶은 마음 진정시키기 위해
손톱 끝을 가시로 따야겠지
막혔던 숨 틔우게 될 거야
이제 곧 겨울이 오면
내 안에 너의 숨소리를 가져다 심을 거야
때마다 물을 주고 마음을 뿌려
새근대는 너의 숨소리 줄기 사이로
투명한 봄꽃을 피워낼 거야
지난밤 너의 가방에서 흐르던 노래가
골목길을 지나고 있어
같이 따라 부르던 노래는 이제 곧
길고양이 꼬리 뒤로 사라지겠지
밤의 어깨에 기댄 너의 심장 소리가 들려
두근대는 소리가 꽃을 피우고 있어
방 안의 공기를 이식시킬 시간이야
꽃처럼 숨이 멎은 지금
따뜻한 봄날,
우리의 사랑도
죽은 사슴의 뿔처럼 향기로울 수 있을 거야
손톱
내 몸의 경계에서 가장 아득한 곳
내 육신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됨을 알리는,
때마다 길어 반달이 되기도 전에
지고 마는 딱딱한 밤의 초상
관계의 끝에서 잘려나가던 때를 생각해 본다
까드득 소리 내며 떨어지는 손톱같이
아득한 그믐의 밤
버려진 각질로 한밤을 떠다니다
여명으로 잘려 들어갔던
사람들 사이를 뒤돌아본다
쉽게 부러트린 손톱처럼
마음의 곁가지를 잘라 줄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서랍 속 손톱깎기처럼
닿지 않던 위로
버려진 달의 조각을 생각하는 것은
비루한 생의 궤적을 좇아 다시 한 번 떠오르고 싶은
내면의 변주다
손톱을 잘라 까만 하늘에 올린다
달 속에서 하얀 분화구가 조금씩 피어오른다
당선 소감/
잔해로 떠다니는 것들
채종국
지금은 조계사의 스님이 된 고등학교 친구와
문예부를 들락거렸다.
학교 옥상 근처에 있는 조그만 골방에서
친구는 시를 피웠고 나는 담배를 피웠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무심했다.
국문학을 전공했던 그 친구는 연필을 대신 죽비를 들었고
그리고 이제는 내가 시를 쓴다.
일곱 살 무렵이었을까
마음에서 무엇인가가 올라왔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
그게 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시를 만났다.
마음 속에 그 무엇이 시를 만나는 날이면
꽃들의 호흡을 들을 수 있었고
새들이 물어오는 저녁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도 난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시를 쓴다.
때론 잠언으로
때론 죽음으로
때론 돌멩이로 올라오는 것들.
굴뚝의 연기처럼 사라지는 내 안의 잔해,
유령처럼 떠다니는 것들을 찾기 위하여
부끄러운 글을 찾아주신 시와 경계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심사평/
존재의 실존, 사물 혹은 현실에의 투사
제21회 《시와경계》 신인우수작품상 당선작으로 채종국의 「네가 그린」 외 3편을 선정한다.
지난 1월 《시와경계》 10주년 기념식에 범 시단의 시인들이 대거 참석하여 축하해주는 광경을 떠올리며, 근자 대부분 시전문지가 동인지적 성격으로 섹트화되는 가운데서도, 계간 《시와 경계》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 시단의 공기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시와경계》가 '창작 정신에는 엄격한 경계를, 좋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는 경계 없는 잡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10년 동안 한결같은 포즈를 취해 온 것처럼 앞으로의 10년도 그러하리라 믿는다.
이번에 《시와경계》가 채종국 신인을 배출하는 것은 10년이라는 한 매듭을 정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라고 봐도 좋다. 이런 점에서 채종국 신인은 행운이기도 하지만 막중한 책임감 또한 따른다 하겠다.
채종국의 「네가 그린」에 등장하는 고흐가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창밖으로 바라보며 그린 사이프러스 나무, 그건 하늘에 닿을 듯한 힘찬 생명력이며, 해바라기 또한 태양을 향한 고흐의 열정을 상징한다. 이 시의 화자는 시공을 넘어 고흐와 직접 대면하듯 한다. 고흐의 그림, 삶을 문화적 상징으로 끌어와 노래한 이 작품은 생과 죽음, 사후세계에 놓인 파란만장한 인간의 실존을 위대한 화가의 생과 대화하는 포즈로 환기한다. 「붉은 장미」 역시 어머니와 화자 자신의 비극적 실존을 붉은 장미에 투사한다. 「사슴뿔」의 비극적 사랑의 승화, 「손톱」의 내면의 깊이 있는 성찰과 자의식의 표출도 예사롭지 않게 읽힌다.
따라서 채종국은 존재의 심연을 깊이 탐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뢰할 만하다. 시인이 궁극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신이든 인간이든 사물이든 무엇이든 존재라는 거대한 심연의 절벽이라 할 것이다. 채종국 시인의 첫 발을 제대로 내디딘 것으로 봐서, 험난한 시인으로서의 장도에 격려를 보낸다.
글: 이상옥(시인, 창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