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의 시는 시적 화자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작품이 많다.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의지를 내보임으로써 시인은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정확히 보여주려고 한다.

위 시에서 시인은 ‘바위’를 이러한 의지의 표상으로 표현한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는 구절에 나타나듯, 시인은 죽음 이후에 펼쳐지는 상황을 ‘바위’에 빗대어 펼쳐내고 있다. 죽음은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생에 대한 의지가 아무리 커도 인간은, 아니 모든 생명은 죽음을 넘어설 수 없다.
죽음 너머에 있는 바위는 시인에게 죽음이 아니면 이를 수 없는 어떤 세계와 맞닿아 있다. 죽어서 바위가 된다는 건, 곧 인간은 죽어야만 자기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거제시 둔덕골 청마 기념관>
시인은 우선 “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는 바위를 이야기하고 있다. 애련과 희로는 인간의 감정이다.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지지 않는 한, 인간은 애련과 희로라는 감정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돌려 말하면 인간으로서 시인은 이러한 애련과 희로에 물들어 있다.
“내 죽으면”이라는 조건문이 암시하는 바는 바로 여기에 있다. 죽는다는 건 감정에 빠진 나로부터 벗어나는 걸 의미한다. 육체적 죽음만이 죽음이 아니다. 자기감정에 휘둘리는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과정 또한 시인에게는 정신적 죽음으로 인식된다. “비와 바람”이라는 외부 조건에 반응하지 않고,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黙)에” 빠지면 육체적 죽음과는 또 다른 ‘죽음’에 접근할 수 있는 셈이다.
“안으로 안으로 채찍질하여”라는 시구에 주목한다면, 시인이 ‘바위’라는 시적 대상에서 강인한 정신력을 이끌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인한 정신력은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의 면모가 돋보이는 이 대목에서 시인은 “드디어 생명도 망각”한 상태에 이른 존재와 마주한다. 그 존재는 물론 강인한 정신력으로 ‘자기’라는 본질과 맞선 인물이다.
그는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는 사람이다. 마음속에 품은 이상을 쉽게 노래로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앞서 시인은 이미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黙)”을 이야기했다. 함묵은 침묵을 의미한다.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는 정신은 무엇보다 이러한 침묵의 태도와 결부되어 있다.

<거제시 둔덕골 청마 기념관>
꿈을 꾸되 노래는 하지 않는 정신은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의 형상으로 이어진다. 두 쪽으로 깨뜨려질 정도라면 외부에서 엄청난 충격이 바위에게 가해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바위는 소리하지 않는다. 신음 소리 하나 내뱉지 않는 저 바위를 보며 시인은 침묵의 세계로 들어간 어떤 존재를 떠올린다. 정신적 강인함은 자기 몸에 가해지는 고통을 넘어설 때 비로소 주어진다. 정신과 몸은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다. 정신과 몸은 하나가 되어 어떤 고통도 참아내는 견인주의자를 만들어낸다. 어떻게 해야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안으로 안으로 채찍질”하는 자기 단련을 거치지 않는다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없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거제시 둔덕골 청마 생가>
안으로 안으로 채찍질하는 마음은 죽음과 대면하는 상황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시인의 의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애련과 희로에 물들지 않는 마음이라고 해도 좋다. 자기감정에 빠지지 않는 ‘냉정함’을 실천함으로써 시인은 죽음과 대면하는 침묵의 세계로 들어간다. 침묵은 말(=소리)이 없는 세계이다. 몸이 두 쪽이 나도 신음 소리 하나 흘리지 않는 존재만이 이 침묵에 이를 수 있다.
“생명도 망각”한 존재는 따라서 인간(=생명)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유치환이 시 쓰기를 통해 내보이는 의지는 이렇게 생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 곧 신(神)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신의 영역을 넘보면 어떻게 될까? 죽음 밖에는 없다. 죽은 사람이 과연 시를 쓸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시작(詩作)을 놓음으로써 시인은 죽음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시적 자아’를 내보이고 있는 셈이다.

<청마 생가 인근에 있는 바위>
첫댓글 그래서 그냥 청마가 아닌 게지요~~~문장21에서 거제 청마 기념관으로 문학기행을 간 기억이 떠오릅니다***
네~
아련한 향수를 자아내듯이 그때가 그리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