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까지 제가 ‘드래곤볼 슈퍼’ 애니의 작화와 관련된 얘기만 나오면 늘 빼놓지 않고 질릴 정도로 언급해온 것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제작 스케줄링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제작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한 문제가 생겨난 것일까요?
2008년, ‘점프 40주년판: 안녕! 돌아온 손오공과 친구들!’이 좋은 반응을 얻자 드래곤볼이라는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길 원했던 ‘반다이’는 ‘토에이 애니메이션’과 원작자 ‘토리야마 아키라’에게 접근하여 새로운 드래곤볼 애니를 만들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 제작에 직접 관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토리야마는 이를 거절하죠. 그 대신 ‘드래곤볼 Z’의 불필요한 씬들을 제외시키며, 음악을 바꾸고, 성우 녹음도 다시 작업한 ‘드래곤볼 카이’가 2009년 4월부터 방영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드래곤볼 카이는 반다이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카이는 사실 시청률도 잘 나왔고 해외에서의 반응 역시 뜨거웠습니다만 사실 드래곤볼과 같은 케이스에서 시청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로 중요하진 않습니다. 그것보단 관련 상품이 팔리냐 안 팔리냐의 문제였는데요. 반다이와 토에이 애니메이션, ‘슈에이샤’는 모두 드래곤볼로 이득을 취하며 서로 서로 얽혀있는 관계입니다. 시청률은 훌륭했으나 드래곤볼 카이라는 간판 아래에 나온 상품들은 팔리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렇게 드래곤볼 카이는 결국 인조인간 편을 끝으로 종영을 맞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카이의 음악 담당이던 야마모토 켄지의 표절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카이는 야마모토의 표절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에 이미 종영이 확정된 상황이었습니다.
토리야마는 ‘드래곤볼 에볼루션’이 제작 진행 중이던 당시 스탭 측에게 몇 가지의 조언과 요청을 하였지만 스탭진은 원작자의 이러한 요청을 깡그리 무시하였고 나중에 토리야마는 단순히 에볼루션의 퀄리티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요청이 무시당한 데에 대한 큰 분노를 느꼈으며 이는 토리야마가 ‘드래곤볼 Z: 신들의 전쟁’의 제작에 깊게 관여하는 이유가 됩니다. 본래 토에이 측에서 구상 중이던 컨셉을 확인한 후 본인 스타일의 시나리오로 바꿔냈죠. 신들의 전쟁이 나온 후인 2014년, 시청률도 상품 판매도 지지부진하던 토리코를 대신하여 드래곤볼 카이 마인부우 편이 후지 TV의 일요일 아침 9시~9시 30분 시간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일요일 오전 9시부터 10시는 후지 TV의 어린이 타겟 황금 시간대로 불려집니다. 9시 반부터 10시는 일본에서 단연 독보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원피스가 차지하고 있죠. 한편 토에이 측에선 디지몬 어드벤처 트라이를 발표하였습니다.
2015년 4월 18일에 개봉한 ‘부활의 F’가 박스오피스를 휩쓸며 대성공을 거두자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드래곤볼 카이 마인부우 편이 마무리를 향하고 있던 상황에서 모든 팬들은 디지몬 트라이가 7월부터 카이의 시간대에 들어갈 거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이 타겟 프로그램 시간대로는 거기밖에 남는 자리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부활의 F 개봉으로부터 10일 후, 갑자기 반다이의 염원이었던 새로운 드래곤볼 애니메이션이 공식적으로 발표되더니 그로부터 약 일주일 뒤엔 디지몬 트라이는 극장 개봉이라는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후지 TV의 황금 시간대를 검증된 머니 메이커인 드래곤볼로 가고 싶었던 거죠. 정말 모든 게 갑작스럽고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애니가 막 발표되었을 당시엔 정말 다른 아무런 정보가 없었습니다. 로고도, 디자인도 뭐 하나 공개된 게 없었죠. 나중에 드래곤볼 슈퍼 로고가 나오긴 했으나 작업이 덜 된 미완성본(위)이었으며 캐릭터 디자인은 신극장판 두 개에서 쓰인 디자인들이 그대로 쓰이게 됩니다. 제작 준비 기간은 해당 애니가 방영되는 내내 든든한 허리가 되어줍니다. 애니메이션은 한 회차를 만드는 데에 예상보다 긴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4월 말에 발표되어 7월에 방영을 시작한다는 건 그 사이에 준비가 가능한 시간은 2개월이라는, 준비 기간이라고 불러주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매우 촉박한 시간밖에 없으며 그건 곧 공식 발표보다도 훨씬 전부터 제작 준비가 치밀하게 이미 이뤄졌어야 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게 상식적인 거고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드래곤볼 슈퍼는 이러한 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제작에 착수한 건 4월 공식 발표 후부터였고 7월 첫 방영을 앞두었을 때 완성된 회차들은 고작 4화까지가 다였습니다. 왜 슈퍼가 4화까지는 멀쩡하다가 5화부터 무너졌는지 감이 오시죠? 결국 슈퍼는 방영 기간 내내 스케줄링 문제에 시달리며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드래곤볼 슈퍼의 스케줄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인데요. 왼쪽은 슈퍼 초창기 때의 콘티, 오른쪽은 중반부로 막 접어들며 서서히 문제점들을 조금씩 고쳐가던 시기의 콘티입니다. 콘티 자체가 원래 엄청 디테일하고 뭐하는 작업은 아니지만 왼쪽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숨을 자아내죠. 보통 애니 1회의 콘티를 안정적으로 마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은 약 1개월이지만 당시 슈퍼는 이러한 여유가 없었고 정말 어떻게든 작업을 제한된 시간 내에 끝내는 데에만 온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토에이는 실력에 상관없이 많은 스튜디오들한테 상당한 거금을 쥐어주고 애니메이터들을 어떻게든 섭외하는 데에 힘을 쓰기도 하였죠. 슈퍼 주력 작화진의 대부분은 토에이 애니메이션 내부 애니메이터들이지만 한국, 중국, 홍콩 등 외국 스튜디오들에게 외주를 맡겨야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슈퍼는 기본적으로 허리가 든든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름 스케줄링 문제를 고쳐나간 후반부에도 여유가 없던 건 마찬가지였어서, 아예 131화의 감독이자 콘티 작가를 맡았던 ‘이시타니 메구미’는 워낙 바빴던 관계로 매일 오전 3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해야 했으며 130화 방송은 보지도 못했다고 털어놓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이슈들이 있었음에도 드래곤볼 슈퍼는 카이와는 달리, 상당한 상품 판매량을 통한 수익을 자랑하며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드래곤볼 슈퍼 애니가 2기로 돌아온다면 든든한 제작 준비는 필수일 것입니다.잘 모르는 사람들은 별 생각도 없이 “대충 만들어도 잘만 돈을 버니까 더욱 돈도 안 쓰고 열심히 안 하는 거다”라는 헛소리를 하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토에이는 급한 슈퍼의 스케줄링으로 상당히 고생하며 온갖 돈과 인력을 쏟아부었습니다. 너무나도 급한 제작으로 그 누구보다도 토에이 본인들이 제일 크게 화를 입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통감하고 있을 게 분명하죠. 한 번 실패를 맛봤으니 이를 반면교사로 삼고 단단히 준비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첫댓글 괜히 서둘러서 개졸작 만들지 말고 늦게 나오더라도 명작 소리 들을수 있게 나오길...
후우. 그럼 2기는 비교적 좋은 퀄리티로 나올 수 있겠군요.
게다가 이번 극장판이 전세계적으로(한국 제외) 대히트를 쳤으니 자금도 넉넉할듯 한데 많은건 안 바라니까 기존 설정 좀 제발 준수해서(더 이상의 손육공은 no!) 평타 칠 정도의 작화로 만들어주셨으면 하네요
어디든 급작스럽게 진행하면 무너지게 되었는데 슈퍼 초기가 그랬군요. 2기는 제대로 준비하고 한거니 제발 명작의 타이틀답게 제대로 나오길!!
글 잘 봤습니다!
그런데 오타(?)가 있는 듯 합니다
본문에 드래곤볼 카이가 2008년 4월에 방영됐다고 하는데 2008년이 아니고 2009년입니다ㅎ
어매 글 쓸 때 나름 몇번이고 확인하는 편인데 이걸 눈치 못 챘네요 감사합니다
더 이상 대충 만들면 안되는 위치인 드래곤볼 슈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맞습니다.
이제 토에이도 알 듯요
이제 좀 이해가 가네요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좋은글 잘봤습니다
준비 기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다시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