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막에서* / 김인수
7월이 노루꼬리 만큼 남으면 나는 두손가락을 다 헤이며
여름방학이란 이름이 내 가슴속에 예쁜 집 하나를 짖게 된다
방학만 되면 어머니는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여수 화양면 고향집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유년내내 살던 신촌에서 성산역까지 삽십여리를 걸어야 했다
악명높은 성산재를 오르락 거리면 숨이 가슴에 탁 막혀 오던 날들
성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쌍봉역에서 내린다.
아마 성산역에서 쌍봉역까지는 완행 다섯 정거장쯤 지나면 있다
그때부터 또 이십릿 바닷길을 걸어야 했다.
교통이 편치 않던 때라 고단한 시간들을 견디어야
그리운 고향집에 다달을수 있게 된다.
쌍봉역에서 내리면 그리운 내고향 용주리 까지는
잊을수 없는 풍경이 있는 바닷가로 걸어 간다
수많은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그 바닷가로 지금은 4차선 길이 나저 있다
개발이라는 명제로 그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들이 사라젔다는 것이
지금도 아픔이다
용암이 바닷가로 흘러 용바위가 정말 용이 드러누어 있는 것처럼 리얼하게 그려져 있고
개선문처럼 머리를 숙이고 그 바위 안으로 들어 가야
그 바닷가 길을 갈수 있었다.
수많은 용암들이 바다로 드러누어 아름다운 풍경으로 수놓는 바닷가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그 가막만 바다는 유년시절 내내 내 가슴에
잉크빛으로 물들어 있다.
긴 바닷가 길도 없는 해안가로 돌아 화양면 용주리로 가다 가픈 산 하나를 넘으면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들이
눈앞에 섬섬거려 가끔은 눈물이 나기도 했다.
애타게 기다리는 조부님과 조모님의 애끓는 가슴이 있었다.
8대 종손이라는 계급장이
유년시절 내내 나를 유별나게 지켜 주었다
고향집은 너른 터에 백년이 넘은 나무들이 수십그루씩이나 있다.
그리고 퍽 부유했던 기억이 있다.
머슴들이 여러명 일을 했고 부엌에는 여럿 어멈들이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고향집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바다가 훤히 드러나는 마당쪽으로는 방풍림 나무들이 빼곡이 서 있고
뒤란으로 아름들이 나무들이 그득했다
나무 뿌리들이 유골처럼 엉켜저 뒷밭으로 가는 그길은
내 가슴속에 지울수 없는 오솔길이다.
지금도 숙부님이 살고 있는 고향집에 가면 그 뒷밭으로 가는 오솔길을 걸으며
그날들의 풍요르 가슴에 담기도 한다.
내가 4- 6살 때 조부모님의 성화에 어머니를 떠나 살았는데
그 때도 그 오솔길에는 전봇대나무라 하는 굵은 삼나무가 30여 그루 더 있었다.
모시를 만드는 삼잎이 무성하게 자라있고
너른 뒷밭은 여름내내 풍요가 숨쉬는 곳이다.
뒤란으로 가면 각종 나무 열매들과 과일나무들이 가득해서
에덴동산처럼 누리고 살았다.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 고외부락에서
오리 정도 바닷가로 걸어가면 숙부님이 멸치선단 전주로 계시는 멸막이 나온다
화양면 용주리 그 유명한 멸치 잡이를 하는 곳이다
숙부님의 멸막에 가면
50여명의 바다일을 돕는 어부들과 사공들이 있고
숙부님은 숯체말로 사장이다.
노을이 가막만 바다를 물들일 때면 일곱척의 배가 일사불란하게 먼바다로 향한다.
발통기, 연포배, 살배1, 살배2. 불배1, 불배2, 종선, 일곱척의 배가
긴 선하나로 그림을 그리며 바다로 가면
남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풍요의 밤을 맞는다.
그 여숯몰 바다에는 가끔 누구의 공격을 받았는지 장어가 떼를지어 육지로 올라올 정도다
급한김에 우리는 갈쿠리로 많은 양의 장어를 잡았다.
밤새 그 밤바다의 그 파도소리는 수만 개체의 음률로 노래하는 모습이
폴모리아 악단의 장엄한 연주처럼 귀에 선하게 들어 왔다
멸막 밖에 혿이불을 덥고 누워있으면 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내게로 쏟아저 내렸다.
가끔은 별똥별들이 비오듯 쏟아지는 우주쑈를 볼수 있었고
미리내 강가에 정박한 카시오페이아 별에 정박해
그밤내내 풍요를 가슴에 담았다.
아침이면 일찍 바닷가 물길따라 걷는다
그 바닷가 돌하나 들어내면 해삼이 몇마리 옹기종이 무리지어 있었고
미처 물을따라 나서지 못한 꽃게가 있고 낙지가 있고 비단고동이 즐비했다
그야말로 그날들의 풍요는 영원히 잊을수 없는 그리움이였다
아침이면 어제 바다로 나갔던 멸치 선단이 들어온다
밤새 멸치를 많이 잡으면 저 바다 한가운데서 징소리가 나고 오색 깃발을 배에 꼽고 온다
그럴때면 숙부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하는 모습도 오래도록 기억 저편에 오려저 있다.
멸치 선단 배가 들어오면 지난밤 멸치도 많이 잡았겠지만
부수적으로 오는 고기 어종들도 다양해서
아침이면 그 반찬의 풍요도 뺄수없는 그리움이였다
해가 뜨는 날은 넓은 밭같은 갯가에 멸치가 흑허게 널리고
그 안에서 디포리를 가려내고 잡어들을 구별하여 놓는다.
특히 고록은 가려낸다는 것보다
그 맛의 특별함 때문에 입으로 먼저 들어갔다.
난 그때부터 멸치를 좋아한 것 같다. 지금은 종종 밥에 물을 붓고 멸치로 고추장을 듬북 찍어
식사를 할때마다 그 맛깔스러운 별미는 언제나 일품이다.
한낮에는 그 바다에서 수영을 하며 몇십미터 깊이까지 훤히 드러나는 바다
그속에 감성돔이며 줄돔, 농어, 우럭등의 수많은 어종들의 아름다운 유희를
볼수 있다는 것도 퍽 즐거움이였다.
여름방학 내내 고향집으로 멸막으로 왔다 갔다 하며 그 아름다운 날들이
아직도 나의 가슴속에 펄럭거리고 있다.
특히 고향집에서 여숯몰 멸막으로 밤에 심부름을 가게되면
가는길에 공동묘지가 있고
등꼴이 오싹한 서낭당이 오색무늬 실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어찌나 무서웠는지 특히 밤에 그길을 갈때면 가슴으로 오그라트리면 갔다.
세살 때부터 교회앞에 살았기에
입에 붙은 찬송가 가락을 되뇌이며 그 무서움을 쫒아 내곤 했다
가끔은 조부님의 산이 가막만 바다가 훤히 보이는 자리에 있었다
산에 밭이 2.000편 있어서 사방에 수박을 심어서 마음대로 그 수박을 먹을수 있었다
밤에는 넓은 바위 위에 앉아 수박을 자르고 나서
가막만 바다를 보면 멸치 선단들이 온바다에 불을 켜놓고 명치를 잡고 있었다
살배 2척이 그물을 넓게 느려뜨려 놓으면 불배가 그 그물 안으로 들어가 불을 밝게 켜놓고
엔징소리가 웅웅 산에 까지 들렸다
그 불을 보고 멸치들이 가득 들어오면 불배는 엔진을 끄고 살작 노저어 빠져 나가면
살배가 그물을 모은다
잡은 멸치는 바로옆에 있는 제일 큰배 염포배로 가서 몇치가 상하지 않도록 삶는다
멸치를 삶으며 따까리(당시의 이름)에 담아서 두었다
산에서 달빛아래 이풍경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환상의 아름다움이엿다
산에서 일을 도와주는 형과 같이 밤새 수박을 먹으며 밤을 지샜는데
지금도 그날들이 선명해 잊혀지지 않는다.
[계속]
* 밤새 멸치를 잡던 50여명의 어부들이 낮잠을 잘수 있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