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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의 시작
박정희와 채명신은 육사시절 중대장과 사관후보생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채명신 백골병단 시절 유격전 임무에서 귀환할 무렵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있던 박정희 대령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은 인연에다 제1군사령부 참모장과 작전참모로 상하관계를 맺은 인연 등으로 비교적 가까운 사이였다. 상호 정의감이 강하고 강직한 면도 통해 박정희는 채명신을 몹시 좋아했다. 그런 연유로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내게 되면서 두 사람은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간혹 서로 서울에서 만나게 되면 때를 맞추어 장경순,김진위 장군 등 친한 장성들과의 회동이 잦아졌다. 만나면 한결 같이 사회불안을 염려하며 나라걱정이 대화의 주조였다. 보다 나아지리라 기대했던 4.19 이후의 만남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실망은 더 커갔다.
해가 바뀌어 1961년에 들어서도 이들과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단지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박정희 장군이 대구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직접 채명신의 5사단에 오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었다. 그는 머물지는 않고 급하게 사단 비행장에서 채명신과 만난 후 그대로 돌아갔다.
"이대로 앉아 빨갱이한테 당할 수 없소. 그렇찮소. 채 장군"
박정희 장군의 예기는 점점 과격해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둘과의 대화 속에서 쿠데타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그러나 채명신은 여전히 순수한 애국충정을 토로할 뿐이지 어떤 구체적인 복안이나 거사계획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후에 채명신이 알았지만 박정희는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과 예기를 나누며 자신의 구상에 색칠하고 있었다.아마 그때의 언행 하나하나가 거사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기미를 채명신은 느끼기 시작했다. 더불어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육사8기생 중에는 쿠데타를 생각하는 모임도 생기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채명신은 그해 2월이 다 되었을 때까지도 그저 순수하게 박정희 장군을 만나 시국을 걱정하며 나라의 안위를 염려하는 차원에서 쿠데타도 불가피하다는 공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2월 초순의 매섭게 추운 그날,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박장군 한테서 채명신에게 가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박 장군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채명신은 시간을 맞추어 사단비행장에 나갔다. 약속한 시간에 박 장군의 경비행기는 비행장에 착륙했고 박 장군은 내렸다. 채명신은 박 장군을 비행장내 비행대장실로 안내했다.
박 장군과 채명신과의 단 둘만의 대화는 이미 상당 부분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4.19로 인해 집권했지만 당시 장면 정부는 우리가 보기에는 국가를 통치해 나가는데 자격 미달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방법은 없습니다. 개혁하지 않으면 북괴에 먹히고 맙니다. 일단 우리 군부가 주동이 돼 하루 빨리 개혁의 길로 나가야 합니다."
채명신과 박정희는 어느새 쿠데타는 불가피한 것이라는 생각까지 접근해 있었다.
"벌써 육사8기생 중에는 많은 움직임이 있소.게다가 그들 청년 장교들은 거사 시기를 하루 빨리 앞당겨야 한다고 하는데...,채 장군 생각은 어떻소."
박정희는 후방의 많은 장교들과 교감이 활발했던 것을 채명신은 직감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시기를 거론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채명신은 막연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안됩니다. 쿠데타를 논의하는 건 해방 이후 처음입니다. 그만큼 신중해야 합니다. 게다가 북괴군의 전력이 우리보다 우세한 것도 우려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한국군이 미군 지휘하에 있다는 점입니다. 자칫 미군과 충돌할 위험도 있습니다."
채명신은 진지하게 또박또박 말은 이어갔다.
"또한 탄약 1발까지도 미 군원에 의존하는 종속된 입장에서 미국측이 어느 정도 납득치 않는 한 성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여론이 무르익어 미국도 장면정부로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시기를 잘못 선택하면 실패합니다."
"역시 채 장군은 장군이라 신중하오. 젊은 장교들이야 혈기만 왕성하고....,"
"이제 다음달부터는 우리 사회가 또다시 시끌시끌해질 겁니다. 대학이 개학하는데다 4월이 되면 4.19 발발 1주년이라 하여 시끄러워질 겁니다. 지금 장면 정부의 행적을 보면 아마 과격한 데모가 발발할 겁니다.그렇게 되면 자연 시기는 성숙되는 게 아닙니까?'
"그렇군..., 그러면 시기는 차후 논의키로 합시다."
그날은 그 정도로 매듭짓고 헤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4월이 가까이 다가오자 대학가를 비롯한 사회는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도 둘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거사계획도 점점 구체적인 윤곽을 잡아가고 있었다.
◇버티는 이한림 1군사령관
어수선했던 4.19발발 1주년이 지나고 5월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중론을 모으지 못해 거사의 D-데이는 잡지 못하고 있었다. 5월 15일에도 채명신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채명신은 그날 오전 원주로 출발했다. 다음날인 5월 16일에는 1군사령부에서 사단장급 이상 주요 지휘관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원주에 도착한 채명신은 군사령부에서 지정해 준 여관에 짐을 풀었다.그리고 항상 지휘관회의가 열리는 전날 밤에는 관례대로 1군 장교클럽에서 댄스파티가 있었다. 파티가 끝나자 바로 채명신은 여관에 돌아왔다. 여관에 돌아온 채명신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군 작전처에 근무하는 육사8기생인 조창대 중령이 채명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창대 중령은 거사의 동지라는 것을 이미 박정희 장군으로부터 들어서 채명신은 초면이지만 알고 있었다.
"상황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박정희 장군님의 편지가 있습니다."
채명신은 편지를 개봉했다. 양면에 빽빽하게 씌어진 모두 2장의 편지는 그간의 내용을 자세하게 적고 있었다.
"거사일자를 추후 논의하자고 약속했는데 일부 장교들의 부주의로 밀고자가 발생해 우리 기밀이 새어 나갔소. 그래서 하루라도 늦추면 모두 체포될 위험이 있기에 부득이 빨리 거사를 해야겠소, 일자는 내일 새벽 4시요, 그리고 내일 새벽 이후에는 중앙방송을 계속 듣기 바라오. 그런데 거사하는데 있어서 제일 염려되는 건 1군의 동향이오. 그러니 채 장군은 서울에서 가까이 있는 5사단을 완전히 장악해 만일 미1군단이나 1군사령부에서 진압하려 할 때 서울로 진입 이들을 봉쇄 저지해야만 거사를 성공시킬 수 있소. 또한 주변 부대에도 우리와 합류할 수 있는 협력부대를 만들어 주시오. 서울 주변의 일부 부대가 서울에 진입해 요소를 점령하겠지만 야전군의 큰 부대들의 행동 여하에 따라 성패가 날 것 같소. 이번 거사의 성패는 5사단에 달려 있소....,건투를 빌겠소."
채명신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밀고자가 있었다는 말에 부아도 치밀었다.
"어떤 놈이 누설을 해 문제를 일으켰소.?"
채명신은 애꿎은 조창대 중령에게 따졌다.
"글쎄..,원래는 6관구, 30사단, 33사단 등 병력이 거사에 참여키로 했는데 일부에서 CIC에 밀고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사단장님께서도 신변을 조심 하십시요."
말을 마친 조 중령은 워낙 사태가 급하다며 곧바로 나갔다. 채명신은 즉각 사단에 전화를 걸었다. 당시 부사단장 유창훈 대령은 채명신과 육사5기 동기생이었다.
"부대 이상 없소?."
채명신의 이 간단한 말에는 특별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그도 이미 채명신과 박정희 장군과의 관계는 물론 뜻을 함께 하는 동지이기에 채명신의 말 뜻을 즉시 알아차리고 있었다.
"이상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는 걱정마시고 원주에서 회의나 잘 마치고 돌아 오십시요."
믿음직스러운 대답이었다.채명신 역시 그의 말에서 그가 완전히 부대를 장악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그리고 부사단장에게 지시하여 내일 날이 밝아지면 원주비행장에 경비행기를 보내 대기시키도록 조치했다.
밤이 깊어 벌써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채명신은 자리에 누었지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누설된 정도도 궁금했지만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버릴 각오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꼬박 새우고 라디오를 틀었지만 아무 반응이 없다가 4시가 되자 정규방송이 시작되고 있었다. 채명신은 초조했다. 한편으로는 잘못되는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5시가 지났다. 그러나 정규방송만 계속되었다. 채명신의 혀끝이 타들어 갔다.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려 받았더니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이 각 지휘관을 긴급 소집한다는 급보였다.채명신은 순간 상황을 파악했다. 만일 회의에 들어가면 이한림 장군이 나와 박정희 장군과의 관계가 알려질 것이니 회의에 나갈 것이 아니라 사단으로 돌아가 부대를 장악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맺고 비행장으로 차를 몰았다. 비행장에는 부사단장이 보낸 경비행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채명신은 경비행기를 타고 5사단으로 향했다.
5사단 비행장에는 유창훈 대령이 나와 있었다.
"무슨 소식 있소?."
유 대령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소식을 전했다.
" 부대는 이상 없습니다. 그리고 6시 이후에 방송이 있었는데 자세히는 못들었지만 일단의 군인들이 일어나 방송국과 서울 시내를 장악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채명신은 즉시 전 사단에 비상을 걸었다. 언제든 사단장의 명령을 내리면 즉시 출동할 수 있게 태세를 갖추었다. 채명신은 사단을 장악한 후에 군사령부 헌병참모 박태원 대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군사령관이 회의를 소집했는데 어떻게 됐소. 나는 급한 일이 생겨서 그냥 사단으로 돌아왔어요"
"아, 잘 하셨습니다. 회의 소집은 취소돼 사단장들은 모두 귀대하려는 중입니다."
그 역시 거사의 같은 동지였다.
"그 쪽 상황은 어떻소?."
"이쪽은 저와 정봉욱 포병부대장 등 박정희 장군을 지지하는 군인들이 똘똘 뭉쳐 이한림 군사령관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벌써 혁명을 지지하는 장교들이 군사령관께 동참해 달라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군사령관께서'박정희가 드디어 일을 저질렀구먼. 그러나 야전군은 내가 장악하고 있는데 내가 승인 않으면 어떤 군사행동도 있을 수 없다'고 버티드랍니다."
채명신이 그 말을 들으니 걱정이 되었다.자칫 잘못하면 아군간 총격전이 벌어질 최악의 상태를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이한림 1군사령관과 박정희 장군은 만주국 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이다.상호 버티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박정희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채명신 혁명의 기치 높이 들다
5월 16일. 채명신은 5사단의 출동준비를 완전히 갖추고 서울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정오가 지났다. 그런데 뜻밖에 1군사령관 이한림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방송을 들으니 채 장군이 혁명 5인 위원회의 한 명으로 나오던데, 야전군은 내 명령이 아니고서는 누구하나 서울로 갈 수 없다. 이 명령을 어기면 총살이다."
쩌렁쩌렁 울리는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채명신은 이미 결심이 선 이상 당당하게 나서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군사령관 각하. 야전군은 각하 개인의 군대가 아닙니다. 우선 각하의 지휘하에 있는 나부터 혁명을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만일 군사령관께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시면 우리는 서로 싸우게 됩니다. 만일 그렇게 돼 한국군끼리 싸우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좋아할 사람은 김일성뿐입니다. 그러니 각하도 이젠 이번 혁명을 지지해줘야 합니다."
"이유불문하고 야전군은 내 지시가 없는 한 단 한 명도 혁명에 가담해서는 안된다. 내 지시가 없으면 안돼 !"
군사령관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5월 16일은 혼돈과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그대로 흘러갔다. 채명신은 결심이 굳건히 서 있었으므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 날인 17일. 아침 일찍 미 8군사령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매그루터 8군사령관이 그곳으로 가시겠답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채명신은 깜짝 놀랐다. 전혀 뜻밖의 사태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까지 났다.그리고 궁금했다. 오전 내내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었다.군사령부에서 소식이 왔는데 매그루터 8군사령관이 1군사령관과 대담중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오후 2시가 되어서야 헬기 편으로 1군사령부에서 5사단에 도착했다. 채명신이 생각한대로 매그루터와 채명신은 사단장 실에서 격론을 벌여야 했다.
"채 장군이 이번 거사에 가담했다는 얘기를 들었소. 그러나 야전군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전방을 지키는 것이오. 그러니 야전군이 거사에 가담하는 건 정치에 물든다는 걸로 결코 좋지 않는 선례가 될 거요. 그러니 혁명군에서 탈퇴하시오. 야전군이 혁명에 가담한다는 것은 난 납득할 수 없소. 게다가 채 장군이 정말 아깝소. 순수한 야전군인인데...,"
여기서 메그루터가 쿠데타 대신 혁명군이라는 어휘를 처음 꺼냈다. 채명신은 이미 각오했고 논리무장을 하고 있었다.
"장군께서는 한국군과 미군의 군사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지휘관입니다. 장군의 임무는 북한 공산군이 휴전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쳐들어오는 걸 저지시키는 겁니다. 그러나 한편 이렇게 상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내부가 잘못돼 공산화될 지경에 이르면 그것까지도 장군께서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즉 장군께서는 외부로부터의 공격뿐만이 아닌 내부 전복으로부터 공산화되는 것도 막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만일 한국이 공산화돼도 장군은 귀국하면 그만 이지만 이곳에는 저처럼 공산당을 피해 남하한 사람이 6백만 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 국민은 공산주의를 싫어합니다. 만일 한국이 공산화되면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외국으로 갈 수도 없는 우리는 최악의 경우 이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비장했다.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과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절대 다수 한국인에게는 생사가 걸린 일이기 때문이었다. 채명신은 다시 말을 이었다.
"더구나 지금 장면정부는 제대로 국가 통치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혼란이 극에 달했고 학생들은 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학생들이 평양으로 간다면 야포를 쏴서라도 막아야 할 입장입니다. 때문에 내부의 혼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일어서야 했던 겁니다."
채명신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매그루터는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채 장군의 말은 이해하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전방을 막아야 할 야전군이 혁명에 가담하는 것은 반대요."
"이미 우리는 목숨을 걸고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들에겐 어차피 공산화돼 죽으나 혁명이 실패해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혁명은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를 물리적으로 막으려 한다면 우리는 최후의 피한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싸울 겁니다."
매그루터와 채명신과의 대화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그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가끔 있었다. 채명신의 주장에 합의점은 발견할 수 없었지만 분명한 입장을 밝혔으므로 그것만으로도 성과가 있는 만남 이었다.
매그루터 8군사령관이 떠나자 미군 헬기 2대가 교대 하면서 5사단 상공을 떠나지 않고 감시 비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5월 17일까지의 상황은 혼미 그대로였다. 혁명의 성공 여부도 불투명한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저녁무렵 채명신이 궁금해 서울로 보낸 최준명 대령이 돌아왔다. 최 대령은 박정희 장군의 구두 메시지를 전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 상태는 혼미를 거듭하고 있소. 야전군과 8군이 반대하는 가운데 육군의 수뇌들도 어떤 결정을 못하는 실정이오. 단 하나 이 혼미를 벗어나는 길은 채 장군이 지휘하는 5사단이 서울로 들어와 서울을 지키면서 미1군단과 6군단의 서울진입을 막아야 하오. 그렇게 하면 실마리가 풀릴 것이오."
채명신은 즉각 그자리에서 서울 진입을 결심했다. 그리고 사단의 중대장급 이상 지휘관을 모두 모아놓고 채명신이 그간의 상황과 함께 채명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리고 모든 지휘관이 나를 따를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를 물었다. 이미 채명신의 열변에 감동한 일부 장교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채명신 사단장의 연설이 끝나자 모든 지휘관은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사단장님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습니다."
모든 지휘관이 두 손을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결전의 날은 왔다. 5사단 36연대 전 병력과 35연대 일부 병력 그리고 사단 직할부대 병력을 이끌고 그날 18시를 기해 서울로 출발했다. 채명신은 '죽이려면 나부터 죽여라' 각오로 사단 병력의 맨 앞 찝차에 올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의 박정희 장군은 5사단 출발 소식을 듣고 감격하며
"됐소, 야전군의 대부대가 드디어 합류했다. 이제 혁명은 성공했소."
박정희 장군의 근엄한 얼굴빛이 처음 의미있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찝차에 올랐다.
5사단 병력이 서울 중랑교 근처까지 진출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박정희 장군을 비롯하여 혁명에 뜻을 함께 하는 장교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채명신과 박정희는 서로 얼싸안고 반가워했다.
5사단의 서울 진출로 사태는 급진전하면서 5.16쿠데타는 혁명의 길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그후 쿠데타는 성공하여 혁명의 서릿발 같은 칼날은 부패와 부정의 늪을 헤집고 썩은 곳을 도려내며 국가 중흥의 길로 향했다.
박정희 장군은 채명신 장군에게 부패 척결의 임무를 맡겨 감사원의 전신인 감찰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1961년 7월이었다.
채명신은 박정희 장군과 주변으로부터 군복을 벗고 정계로 진출할 것을 권했지만 '부패척결의 소임이 끝나면 원대복귀 하겠다' 고 고집하여 현역 육군소장 계급장을 달고 감찰위원장 직에서 직무룰 수행했다.
공무원의 기강이 잡혀가고 부패 척결이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채명신 소장은 감찰위원장 직위 21개월 만인 1963년 4월에 원대복귀를 자청,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차장 직으로 새 보직을 받고 다시 야전군인의 길로 돌아왔다.
1965년 4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보직되자 한국군 전투부대의 월남전 파병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 실무를 맡아 일하던 중 월남전 전투부대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그해 8월 주월한국군 사령관 겸 수도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첫댓글 역시 채명신 장군도 5.16 혁명에 가담하시엿군요. 참으로 급박한 혁며 전야의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읽고 감동하고 있읍니다.역시 필연의 혁명은 오기 마련이였던 당시의 사태 입니다.스릴 만점의 소설을 읽는 느낌입니다.
역사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다만 안타깝습니다 장면 정권이 좀더 국정을 잘 운영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