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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26권
7. 분별지품(分別智品)1) ①
앞의 「현성품」 앞부분에서 온갖 인(忍)과 온갖 지(智)에 대해 논설하였으며,
뒷부분에서 다시 정견(正見)과 정지(正智)에 대해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인(忍)이면서 지(智)가 아닌 것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지’이면서 견(見)이 아닌 것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2)
게송으로 말하겠다.
성혜(聖慧)의 인(忍)은 ‘지’가 아니고,
진지와 무생지는 ‘견’이 아니며,
그 밖의 혜는 두 가지와 통하고, 유루혜는
모두 ‘지’이나 여섯 가지는 ‘견’의 성질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혜(慧)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유루혜와 무루혜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오로지 무루혜에만 ‘성(聖)’이라는 명칭을 설정하는데, 이러한 성혜 중에서 8인(忍)은 지(智)의 성질이 아니니, 끊어야 할 스스로의 의심[疑]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3) 그러나 ‘견’의 성질에는 포섭될 수 있으니, 추리 판단[推度]하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진지와 무생지의 두 가지는 ‘견’의 성질이 아니니, 이미 추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종식되어 추리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밖의 성혜는 모두 ‘지’와 ‘견’의 두 가지 성질과 통하니, 이미 스스로의 의심을 끊었으며, 추리 판단하는 성질이기 때문이다.4)
온갖 유루혜는 모두 ‘지’의 성질에 포섭되지만, 그 중에서 오로지 여섯 가지만은 역시 또한 ‘견’의 성질이기도 하니, 이를테면 다섯 가지의 염오견과 세속정견의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5)
그리고 이상에서 설한 성혜와 유루혜는 모두 다 택법(擇法)이기 때문에 아울러 ‘혜’의 성질에 포섭된다.
지(智)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으며, 그 상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지는 열 가지이나 총괄하면 두 가지로
유루와 무루의 차별이 바로 그것인데
유루지는 세속지를 말하고
무루지는 법지와 유지를 말한다.
세속지는 두루 경계로 하며
법지와 유지는
순서대로 욕계와 상계의
고제 등을 경계로 삼는다.
논하여 말하겠다.
지(智)에는 열 가지의 종류가 있어 일체의 지를 포섭하니,
첫째는 세속지(世俗智)이며, 둘째는 법지(法智)이며, 셋째는 유지(類智)이며,
넷째는 고지(苦智)이며, 다섯째는 집지(集智)이며, 여섯째는 멸지(滅智)이며, 일곱째는 도지(道智)이며,
여덟째는 타심지(他心智)이며, 아홉째는 진지(盡智)이며, 열째는 무생지(無生智)이다.
이와 같은 10지는 전체적으로 말하면 오로지 두 가지 종류일 뿐이니, 유루성과 무루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6)
이러한 두 가지 지는 다시 세 가지로 차별되니, 이를테면 세속지와 법지와 유지가 그것이다.
즉 앞의 유루지를 전체적으로 세속지라고 이름하니, 항아리 등의 다수의 세속의 경계를 취하기 때문이며,7)
뒤의 무루지를 법지와 유지로 나누어 구별한 것이다.8)
이러한 세 가지 지 중에서 세속지는 일체의 유위와 무위를 두루 소연의 경계로 삼으며,
법지와 유지의 두 종류는 순서대로 욕계와 상 2계의 4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종류의 지(智)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리라.
법지와 유지는 경계의 차별에 따라
고지(苦智) 등의 네 가지 명칭으로 설정되니
모두 진지와 무생지에 통하는 것으로
최초의 그것은 오로지 고류지와 집류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법지와 유지]
법지와 유지는 경계의 차별에 따라 고ㆍ집ㆍ멸ㆍ도의 네 가지 지로 나뉜다.9)
그리고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지(법지ㆍ유지와 4諦智)로서 만약 무학에 포섭되고 ‘견’의 성질이 아니라면, 이를 일컬어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라고 한다.
이러한 진ㆍ무생의 두 가지 지로서 처음으로 생겨나는 것은 오로지 고류지와 집류지이니, 고제ㆍ집제를 소연으로 하는 여섯 종류의 행상으로써 유정(有頂)의 온을 경계로 하여 관찰하기 때문이다.10)
그렇다면 금강유정(金剛喩定)의 경계는 이것과 동일한 것인가?
고제ㆍ집제를 소연으로 하는 경우라면 이것과 동일하지만, 멸제ㆍ도제를 소연으로 하는 경우에는 이것과 그 경계가 다르다.11)
앞에서 설한 아홉 종류의 지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리라.
법지ㆍ유지와 도지와 세속지는
타심지를 성취하는 경우가 있지만
뛰어난 경지와 근기와 계위와
과거ㆍ미래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법지ㆍ유지는 서로를 알지 못하며
성문과 인각유와 부처님은
순서대로 견도의 두 찰나와 세 찰나와
일체의 찰나를 안다.
논하여 말하겠다.
법지와 유지와 도지와 세속지는 타심지(他心智)를 성취하는 일이 있지만, 그 밖의 지는 그렇지 않다.
즉 이러한 타심지는 그 경계에 대해 결정적인 상을 갖으니, 이를테면 수승한 마음과 과거ㆍ미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수승한 마음’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경지[地]와 근기[根]와 계위[位]가 뛰어난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뛰어난 경지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함은 하지의 타심지는 상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뛰어난 근기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함은 신해(信解)와 시해탈 근기의 타심지는 견지(見至)와 불시해탈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12)
뛰어난 계위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함은 불환과 성문의 응과(應果)와 독각과 대각 중에서 앞의 계위의 타심지는 뒤의 뛰어난 계위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13)
또한 이러한 타심지는 과거와 미래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 오로지 현재 다른 상속 중의 마음 따위만을 능히 소연의 경계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법지와 유지의 품류에 포섭되는 타심지는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한다.
즉 법지에 포섭되는 모든 타심지는 유지의 품류를 알지 못하며,
유지에 포섭되는 모든 타심지는 법지의 품류를 알지 못하니,
법지와 유지는 욕계와 상계의 모든 대치(즉 견혹과 수혹의 대치)만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14)
그리고 이러한 타심지는 견도위 중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견도에서는 4제 이치에 대한 전체적 관찰[總觀]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이다.15)
그렇지만 견도의 마음은 모두 이러한 타심지의 소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온갖 유정이 장차 견도에 들고자 한다면 성문과 독각은 미리 가행을 닦아야 하는데, 하물며 그러한 유정의 견도위의 마음을 알고자 함에 있어서랴.
곧 그러한 온갖 유정이 견도위에 들었을 때, 만약 성문이 법지 부분[法分]의 가행을 원만히 하였다면 그 유정의 견도 첫 두 찰나의 마음(고법지인과 고법지)을 알며,
만약 다시 유지 부분[類分]의 마음을 알기 위하여 별도의 가행을 닦아 그 가행이 원만하게 되었다면, 그 유정은 이미 제16찰나의 마음에 이르렀을 것으로,
비록 이러한 마음(제16심)을 알았을지라도 그것은 더 이상 견도를 안 것이 아니다.16)
인각유(麟角喩) 독각이 만약 법지 부분의 가행을 원만히 하였다면 그 유정의 견도 첫 두 찰나의 마음을 알며,
만약 다시 유지 부분의 마음을 알기 위하여 별도의 가행을 닦아 그 가행이 원만하게 되었다면, 그 유정의 제8 찰나인 집류지의 마음을 아니, 이는 다만 하등의 가행에 의하였기 때문이다.17)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독각은 처음 두 찰나와 제15찰 나의 마음을 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존은 알고자 하기만 한다면 가행에 의하지 않고서도 그 같은 견도의 일체의 마음에 대해 능히 안다.18)
[진지와 무생지]
진지와 무생지의 두 지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4성제에 대한 지(智)로서
‘나는 이미 알았다’는 등으로 아는 것과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등으로 아는 것이
차례대로 진지와 무생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론(本論)에서 설한 바와 같다.19)
“무엇을 일컬어 진지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무학위에서 ‘나는 이미 고(苦)를 알았다’, ‘나는 이미 집(集)을 끊었다’, ‘나는 이미 멸(滅)을 작증하였다’, ‘나는 이미 도(道)를 닦았다’고 스스로 바로 알며,
이에 따라 소유하게 된 지(智)와 견(見)과 명(明)과 각(覺)과 해(解)와 혜(慧)와 광(光)과 관(觀)을 바로 진지라고 이름한다.20)
무엇을 일컬어 무생지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나는 이미 고를 알았으므로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는 이미 도를 닦았으므로 더 이상 닦아야 할 것이 없다’고 스스로 바로 알며,
이에 따라 소유하게 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따위를 바로 무생지라고 이름한다.”
어떻게 무루지가 이와 같이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습미라(迦濕彌羅)의 모든 논사는 설하기를,
“이러한 두 지로부터 출관한 뒤에 획득한 지[後得智]로써 이와 같이 알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다.
그리고 이후에 획득한 두 지의 차별에 따라 이전의 현관(現觀) 중의 두 지의 차별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21)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무루지로써도 역시 이와 같이 안다”고 하였다.22)
그리고 [앞의 본론(本論)에서] ‘견(見)’이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말의 편의에 따랐기 때문에, 혹은 진리의 이치를 바로 비추어 일어난 것이기 때문으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본론(本論)에서는 역시,
“바야흐로 온갖 지(智)를 역시 또한 견(見)이라고도 이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23)
이와 같은 10지의 상호 포섭관계는 어떠한가?
세속지는 한 가지의 전부와 한 가지의 일부분을 포섭하며,
법지와 유지는 각기 한 가지의 전부와 일곱 가지의 일부분을 포섭하며,
고ㆍ집ㆍ멸지는 각기 한 가지의 전부와 네 가지의 일부분을 포섭하며,
도지는 한 가지의 전부와 다섯 가지의 일부분을 포섭하며,
타심지는 한 가지의 전부와 네 가지의 일부분을 포섭하며,
진지와 무생지는 각기 한 가지의 전부와 여섯 가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24)
[유루지와 무루지)를 10지로 건립하게 된 근거]
어떠한 근거에서 두 가지의 지(유루지와 무루지)를 10지로 건립하게 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자성과 대치와
행상과, 행상과 경계와
가행과 이루어짐과 원인의 원만함에 따라
열 가지 지로 건립하게 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일곱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의 지를 10지로 설정하게 되었다.
첫째로는 자성(自性)으로 인해 세속지를 설정한 것이니, 그것은 승의지(勝義智)를 자성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25)
둘째로는 대치(對治)로 인해 법지와 유지를 설정한 것이니, 그것은 전부 욕계와 상계의 혹을 능히 대치하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행상(行相)으로 인해 고지와 집지를 설정한 것이니, 이러한 두 가지 지의 경계 자체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26)
넷째로는 행상과 경계로 인해 멸지와 도지를 설정한 것이니, 이러한 두 가지 지는 행상과 경계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다섯째로는 가행(加行)으로 인해 타심지를 설정하였다.
곧 이러한 타심지가 다른 이의 심소법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행을 닦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그것이 성취되어 원만하게 되었을 때에는 다른 이의 심소도 역시 알지만, 가행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타심지’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27)
여섯째로는 일이 이루어짐[事辦]으로 인해 진지를 설정한 것이니, 일이 이루어진 소의신 중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28)
일곱째로는 원인이 원만하게 됨으로 인해 무생지를 설정한 것이니, 일체의 성도를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이 법지와 유지는 전부 욕계와 상계의 법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지만, 일부 상계와 욕계의 법을 대치하는 경우도 있는 것인가?29)
게송으로 말하겠다.
멸제ㆍ도제를 소연으로 하는 법지는
수도의 단계 중에서
아울러 상계의 수소단도 대치하지만
유지는 능히 욕계의 혹을 대치하지 못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수도에 포섭되는 멸ㆍ도법지는 [욕계의 수소단과] 아울러 상계의 수소단을 능히 대치하니,
욕계의 멸ㆍ도법지는 상계의 그것보다 수승하기 때문에 자계의 원적(怨賊)을 제거하고 나서 타계의 그것도 아울러 능히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30)
이에 따라 유지는 능히 욕계를 대치하는 일이 없다.31)
[10지(智)의 행상의 차별]
이러한 10지 중에서 어떤 지가 어떠한 행상을 갖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법지와 유지는
행상이 모두 열여섯 가지이고
세속지는 이것과 그 밖의 것이며
4제지는 각기 네 가지이다.
타심지로서 무루의 경우는
오로지 도제를 소연으로 하는 네 가지이고
유루의 경우는 자상을 소연으로 하는데
다 같이 개별적 실체[一事]만을 소연으로 한다.
그리고 진지와 무생지는 열네 가지이니
이를테면 공(空)과 비아를 제외한 그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법지와 유지는 각기 비상(非常)과 고(苦) 등의 열여섯 가지 행상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16행상에 대해서는 뒤에서 마땅히 널리 해석하리라.
세속지에도 이러한 16행상이 있으며, 아울러 다시 그 밖의 행상이 있으니, 능히 일체의 법의 자상과 공상 등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32)
고(苦) 등의 네 가지 지에는 각기 자제(自諦)의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네 종류의 행상이 있다.
타심지의 경우, 만약 무루의 타심지라면 오로지 도제(道諦)를 소연으로 하는 네 종류의 행상만을 갖으니, 이는 바로 도지(道智)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유루의 타심지라면 자신의 소연이 되는 심ㆍ심소법의 자상을 경계로 취하기 때문에 자상을 경계로 삼듯이 행상도 역시 그러하다.
따라서 이것은 앞의 16행상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두 종류의 타심지는 일체 시(時)에 있어서 1찰나에 단지 하나의 실체[一事]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으니,
이를테면 마음을 소연으로 할 때에는 심소를 소연으로 삼지 않으며,
수(受) 등을 소연으로 할 때에는 상(想) 등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박가범께서는,
“유탐심(有貪心) 등을 참답게 알라”고 설한 것인가?33)
‘탐’ 등과 ‘마음’을 동시에 취하는 것이 아니니, 마치 ‘옷’과 ‘때’를 동시에 취하지 않는 것과 같다.
여기서 유탐심이란 두 가지 뜻이 있어 ‘유탐’이라 한 것이니,
첫째는 탐과 상응하는 것이며,
둘째는 탐에 의해 계박되는 것이다.
곧 탐과 상응하는 마음은 다 같이 바로 이러한 두 가지 뜻에 따른 것이지만, 그 밖의 유루의 마음은 오로지 탐에 의해 계박된 것일 뿐이다.34)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경에서 유탐심이라고 말한 것은 오로지 첫 번째인 ‘탐과 상응하는 마음’을 설한 것이고,
이탐심(離貪心, 즉 무욕심)이란 탐을 대치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런데 만약 탐과 상응하지 않는 마음만을 이탐심이라고 한다면, 그 밖의 혹(惑)과 상응하는 마음도 마땅히 이탐심이라는 명칭을 획득해야 할 것이다.”3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탐을 대치하지 않는 마음으로서 불염오성일 경우, 이 같은 마음은 마땅히 유탐심이나 이탐심 따위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36)
그렇기 때문에 다른 논사가 설한 대로 탐에 의해 계박된 마음도 유탐심이라고 마땅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37)
나아가 유치심(有癡心)과 이치심(離癡心)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계속하여]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취심(聚心)이란 이를테면 선심을 말하니, 이 같은 마음은 소연상에서 어지럽게 내달리지 않기 때문이며,
산심(散心)이란 이를테면 염심(染心)을 말하니, 이 같은 마음은 산란 동요와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38)
이에 대해 서방(西方)의 모든 논사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잠[眠]과 상응하는 마음을 일컬어 취심이라 하고,
그 밖의 염오심을 설하여 산심이라 이름한다.”39)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온갖 염오심이 만약 잠과 상응하는 경우, 마땅히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40)
또한 마땅히 본론(本論)에서 말하고 있는 바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
“취심을 참답게 아는 것에는 네 가지 지(智)가 갖추어져 있으니,
이를테면 법지와 유지와 세속지와 도지가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기 때문이다.41)
[계속하여]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침심(沈心)이란 이를테면 염심을 말하니, 이 같은 마음은 해태(懈怠)와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며,
책심(策心)이란 이를테면 선심을 말하니, 이 같은 마음은 정근(正勤)과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소심(小心)이란 이를테면 염심을 말하니, 청정함이 적은 이들이 즐겨 익히는 바이기 때문이며,
대심(大心)이란 이를테면 선심을 말하니, 청정함이 많은 이들이 즐겨 익히는 바이기 때문이다.
혹은 근(根)과 가치와 권속과 수전(隨轉)과 작용[力用]의 적고 많음에 따라 소심과 대심으로 일컬은 것이다.
즉 염심은 ‘근’이 적으니, 많아야 두 가지 근과 상응하기 때문이며,42)
선심은 ‘근’이 많으니, 항상 세 가지 근(무탐ㆍ무진ㆍ무치)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염심은 가치가 적으니, 노력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선심은 가치가 크니, 크나큰 자량(資糧)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염심은 권속이 적으니, 미래에 닦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선심은 권속이 많으니, 미래에 닦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염심은 수전하는 법이 적으니, 오로지 3온뿐이기 때문이며,
선심은 수전하는 법이 많으니, 4온과 통하기 때문이다.43)
염심은 작용이 적으니, 끊어진 선근은 반드시 다시 상속할 것이기 때문이며,
선심은 작용이 많으니, 인(忍)은 반드시 온갖 수면을 영원히 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염심과 선심은 소심과 대심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도심(掉心)이란 이를테면 염심을 말하니, 도거와 상응하기 때문이며,
불도심(不掉心)이란 이를테면 선심을 말하니, 능히 그것(도거)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부정심(不靜心)과 정심(靜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부정심(不定心)이란 이를테면 염심을 말하니, 산동(散動, 산란과 동요)과 상응하기 때문이며,
정심(定心)이란 이를테면 선심을 말하니, 능히 그것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불수심(不修心)이란 이를테면 염심을 말하니, 득수(得修, 즉 미래수)와 습수(習修, 현재수)를 다 같이 포섭하지 않기 때문이며,
수심(修心)이란 이를테면 선심을 말하니, 두 가지 수(修)를 갖기 때문이다.
불해탈심(不解脫心)이란 이를테면 염심을 말하니, 자성(自性)과 상속(相續)이 해탈하지 않았기 때문이며,44)
해탈심(解脫心)이란 이를테면 선심을 말하니, 자성과 상속이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해석은 계경에 따르지 않은 것이며, 또한 역시 모든 명칭[句]의 개별적인 뜻도 능히 분별하지 않은 것이다.45)
이러한 해석이 어떻게 계경에 따르지 않은 것인가?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엇을 일컬어 이러한 마음이 내적으로 모아지는 것[內聚]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마음이 만약 혼면(惛眠, 혼침과 수면)과 구행(俱行)하거나 혹은 내적으로 상응하여 지(止, śamatha)만이 존재하고 관(觀, vipaśyan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일컬어 밖으로 흩어지는 것[外散]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마음이 5묘욕(妙欲)의 경계로 나돌아다니며 그것에 따라 이리저리 산란되고 흘러가거나 혹은 내적으로 상응하여 ‘관’만이 존재하고, ‘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46)
어찌 앞에서 설하지 않았던가?
염오심이 잠과 구유(俱有)하는 것이라고 할 경우, 하나의 마음이 모이고[聚] 흩어지는 것[散]과 통하게 되는 허물이 있다고.47)
비록 그 같이 설하였을지라도 이치에 맞지 않으니, 잠과 구유하는 온갖 염오심이 바로 산심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48)
또한 본론(本論)과 상위(相違)하는 것이라고 설하지 않았던가?
본론과는 상위할지라도 경설(經說)에는 어긋남이 없다.
어찌하여 모든 명칭의 개별적인 뜻에 대해서는 분별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그 같은 해석에 근거하여서는 산심 등과 취심 등의 여덟 가지 각기 다른 상에 대해 능히 잘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49)
우리가 해석한 바에 의해 이러한 계경 중에서 설한 8구(句)의 개별적인 뜻에 대해 능히 잘 분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니,
이를테면 비록 산심 등이 다 같이 염심이라고 하였을지라도 그 과실의 차별을 나타내기 위하여,
아울러 비록 취심 등이 다 같이 선심이라고 하였을지라도 그 공덕의 차별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덟 가지 뜻에 근거하여 여덟 가지 명칭을 별도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이미 경설과 어긋난 바를 능히 회통시키지 못하였으니, 분별한 명칭의 뜻도 역시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만약 침심(沈心)이 바로 도심(掉心)이라고 한다면, 경에서 마땅히,
“만약 그 때 마음이 가라앉으면 가라앉는 것을 염려하여 경안(輕安)과 정(定)과 사(捨)의 세 가지 각지를 닦는 자를 ‘때 아닌 때 닦는 이[非時修]’라고 이름하며,
만약 그 때 마음이 들뜨면 들뜨는 것을 염려하여 택법(擇法)과 정진(精進)과 희(喜)의 세 가지 각지를 닦는 자를 ‘때 아닌 때 닦는 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50)
어찌 각지를 닦는데 산위(散位)라는 별도의 이치가 있을 것인가?51)
여기서는 작의를 일으켜 닦으려고 하는 것에 근거하여 ‘닦는다’고 말한 것이지 바로 지금 [산란된 마음에서] 닦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과실도 없다.
어찌 우리의 설도 역시 경설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비록 온갖 염심이 모두 침심(沈心)이나 도심(掉心)으로 일컬어질지라도,
해태(懈怠)가 두드러진 것을 경에서는 ‘침심’이라고 설하고 있고,
도거가 두드러진 것을 경에서는 ‘도심’이라고 설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항상 상응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것의 본질[體]이 동일하다고 설한 것이다.52)
자의(自意)에 따라 말하는 것을 누가 다시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이 경의 뜻은 실로 그렇지가 않다.
앞에서 ‘일체의 탐에 의해 계박된 마음을 모두 유탐심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는데,
그 때 탐의 계박이란 무슨 뜻인가?
만약 탐의 득(得)이 따르기 때문에 [탐의 계박이 있다]고 한다면 유학의 무루심도 마땅히 ‘유탐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탐의 득이 따르기 때문이다.53)
만약 탐이 소연이 되기 때문에 [탐의 계박이 있다]고 한다면 무학의 유루심도 마땅히 ‘유탐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다른 사람의] 탐이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 같은 무학의 유루심이 탐을 소연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의 마음이 유루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공상의 혹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유루심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유치심(有癡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것은 ‘치’의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심지는 탐의 득을 소연으로 삼지 않으며, 또한 역시 그같이 마음을 반연하는 탐[緣心貪]을 소연으로 삼는다고 설할 수도 없다.
[그럴 경우 이미 소연을 획득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다른 사람의 마음이 유탐심 등이라고 알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탐의 계박을 유탐심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엇을 유탐심이라고 하는 것인가?
여기서 경의 뜻을 살펴보건대 탐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탐심이라고 하는 것이며, 탐과 상응하지 않는 것을 이탐심 등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또 다른 계경에서,
“이탐(離貪)ㆍ이진(離瞋)ㆍ이치(離癡)의 마음은 더 이상 3유(有)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54)
그것의 ‘득’에서 떠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
‘[만약 탐과 상응하지 않는 마음만을 이탐심이라고 한다면,] 그 밖의 혹(惑)과 상응하는 마음도 마땅히 이탐심이라는 명칭을 획득해야 할 것이니, 그것도 역시 탐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여 앞에서 이미 이러한 설을 논파하지 않았던가?55)
만약 이 같은 뜻에 근거할 경우, [그 밖의 혹과 상응하는 마음도 이탐심이라고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아무런 어긋남이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마음을 설하여 이탐심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유진심(有瞋心)이나 유치심(有癡心) 등에 소속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여기서 방론(傍論)을 마치고 마땅히 본종(本宗)에 대해 논술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밝힌 타심지는 다른 이의 마음의 소연도 역시 또한 능히 취하며, 아울러 다른 이의 마음의 능연이 되는 행상도 역시 또한 취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취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 모두를 능히 취하지 않으니, 그의 마음을 알 때 그것의 소연과 능연(즉 마음)의 행상을 관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타심지는 단지 그같이 염오함이 있는 등의 마음(즉 22심)을 알 뿐, 그같이 마음을 더럽힌 색 등을 알지 못하며, 또한 역시 그 같은 능연의 행상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56)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타심지는 마땅히 색 등도 역시 소연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또한 역시 능히 스스로를 소연으로 삼게 되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57)
모든 타심지에는 결정적인 상이 있다.
이를테면 오로지 욕계와 색계의 계박과 아울러 계박되지 않는 것(즉 무루)과, 타상속 중의 현재 동류의 심ㆍ심소법과 한 가지와 실재와 자상만을 능히 취하여 소연의 경계로 삼을 뿐이며,
공(空)ㆍ무상(無相)과는 상응하지 않으며,
진지와 무생지에는 포섭되지 않으며,
견도와 무간도 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58)
그러나 그 밖의 사실은 부정되지 않으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인정될 수 있다.
진지와 무생지에는 각기 모두 공(空)과 비아(非我)를 제외한 나머지 열 네 가지 행상이 갖추어져 있으니, 이러한 두 가지 지는 비록 승의지에 포섭되는 것일지라도 세속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공과 비아를 제외한 것이다.59)
즉 두 가지 지의 힘에 의해 출관(出觀)할 때 ‘나는 생을 이미 다하였고, 범행이 이미 이루어졌으며, 해야 할 일을 이미 다하여 더 이상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무루는 이러한 16행상을 뛰어넘어 다시 그 밖의 다른 행상을 포섭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청정(즉 무루)의 행상은 열여섯 가지를 넘는 일이 없으나
유여사는 있다고 설하니, 논(論)에서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모든 논사는 말하기를,
“무루의 행상은 이러한 열여섯 가지를 넘지 않는다”고 하였다.60)
그러나 외국(外國)의 논사는 설하기를,
“열여섯 가지를 뛰어넘어 그 밖의 다른 무루의 행상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본론(本論)에 의거하였기 때문으로, 본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불계(不繫)의 마음(즉 무루심)으로서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법을 능히 요별하는 경우가 있는 것인가?
능히 요별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욕계계는] 비상(非常)이기 때문에, 고(苦)이기 때문에, 공(空)이기 때문에, 비아(非我)이기 때문에, 인(因)이 되기 때문에, 집(集)이 되기 때문에, 생(生)이 되기 때문에, 연(緣)이 되기 때문이며,
이러한 처(處)가 있고 이러한 사(事)가 있으니, 이것이 여리작의(如理作意)에 의해 인기되어 요별된다.”61)
그러나 만약 이 같은 글이, 불계의 마음이 욕계에 계속되는 법을 요별할 때 여덟 행상을 제외한 그 밖에 ‘이러한 처가 있다’, ‘이러한 사가 있다’고 하는 행상이 따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여덟 행상을 짓는 그 같은 ‘이러한 처가 있다’와 ‘이러한 사가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같은 해석(외국사의 해석)은 옳지 않으니,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만약 그 논(論)이 그 같은 뜻에 근거하여 설해졌다고 한다면, 마땅히 다른 곳에서도 역시 이러한 말을 설하였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논의 다른 글에서는 다만 이같이 설하고 있을 뿐이다.
“견소단(見所斷)의 마음으로서 능히 욕계에 계속되는 법을 요별하는 경우가 있는가?
능히 요별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욕계계는] 아(我)이기 때문에, 아소(我所)이기 때문에,
단(斷)이기 때문에, 상(常)이기 때문에,
무인(無因)이기 때문에, 무작(無作)이기 때문에,
감손(減損)이기 때문에, 존귀한 것이기 때문에,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위의 것[上]이기 때문에,
제일의 것이기 때문에, 능히 청정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능히 해탈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능히 출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혹(惑)이기 때문에, 의(疑)이기 때문에, 유예(猶豫)이기 때문에,
탐이기 때문에, 진(瞋)이기 때문에,
만(慢)이기 때문에, 치(癡)이기 때문이니,
이것은 바로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 작의(즉 비리작의)에 인기되어 요별된다.”62)
즉 여기에서도 역시 마땅히 ‘이러한 처가 있다’는 등의 말을 설하였어야 할 것이지만,
이 같은 말이 없기 때문에 앞에서의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16행상의 실체[實事]는 몇 가지인가?
무엇을 행상이라고 하는가?
능히 행하는 주체[能行]인가, 행해지는 대상[所行]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행상의 실체는 열여섯 가지로서
이것의 본질은 오로지 혜(慧)인데
능행(能行)은 소연을 갖는 것이고
소행(所行)은 존재하는 모든 법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16행상의 명칭은 비록 열여섯 가지일지라도 그것의 실체는 오로지 일곱 가지이니,
이를테면 고제를 소연으로 삼는 것은 그 명칭도 실체도 다 같이 네 가지이며,
그 밖의 3제를 소연으로 삼는 것은 명칭은 네 가지이지만 실체는 한 가지이다”고 하였다.63)
그러나 여시설자(如是說者)는 ‘실체도 역시 열여섯 가지이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고성제에 네 가지 행상이 있으니,
첫째는 비상(非常)이며, 둘째는 고(苦)이며, 셋째는 공(空)이며, 넷째는 비아(非我)이다.
즉 [5취온 등의 현행의 고과(苦果)는] 인연에 근거[待]한 것이기 때문에 ‘비상’이며,
핍박의 성질이기 때문에 ‘고’이며,
아소견(我所見)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공’이며,
아견(我見)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비아’이다.
집성제에 네 가지의 행상이 있으니,
첫째는 인(因)이며, 둘째는 집(集)이며, 셋째는 생(生)이며, 넷째는 연(緣)이다.
즉 [5취온 등의 현행의 원인은] 종자의 이치와 같기 때문에 ‘인’이며,
동등하게 현기하는 이치이기 때문에 ‘집’이며,
상속하는 이치이기 때문에 ‘생’이며,
성취하여 이루어지는[成辦] 이치이기 때문에 ‘연’이다.
비유하자면 진흙덩이와 물레와 밧줄과 물 등의 여러 인연이 화합하여 항아리를 성취하여 이루는 것과 같다.
멸성제에 네 가지의 행상이 있으니,
첫째는 멸(滅)이며, 둘째는 정(靜)이며, 셋째는 묘(妙)이며, 넷째는 리(離)이다.
즉 [5취온 등의 현행의 소멸은] 제온(諸蘊)이 다하였기 때문에 ‘멸’이며,
삼재(三災, 탐ㆍ진ㆍ치)가 종식되었기 때문에 ‘정’이며,
온갖 환란이 없기 때문에 ‘묘’이며,
모든 재앙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리’이다.
도성제에 네 가지의 상이 있으니,
첫째는 도(道)이며, 둘째는 여(如)이며, 셋째는 행(行)이며, 넷째는 출(出)이다.
즉 [5취온 등의 소멸을 획득하는 번뇌 대치의 성도는] 통행(通行)의 뜻이기 때문에 ‘도’이며,
정리(正理)와 계합하기 때문에 ‘여’이며,
[열반으로] 바로 나아가는 것[趣向]이기 때문에 ‘행’이며,
능히 영원히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출’이다.
또한 [5취온 등의 현행의 고과는]
구경(究竟)이 아니기 때문에 ‘비상’이며,
무거운 짐을 진 것과 같기 때문에 ‘고’이며,
내적 사부(士夫, purua, 즉 자아)를 떠난 것이기 때문에 ‘공’이며,
자재(自在)하지 않기 때문에 ‘비아’이다.
[현행의 원인은]
견인(牽引)의 뜻이기 때문에 ‘인’이며,
출현의 뜻이기 때문에 ‘집’이며,
산출[孶産, 增生을 말함]의 뜻이기 때문에 ‘생’이며,
근거[依]가 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연’이다.
[현행의 소멸은]
상속하지 않고 상속이 끊어진 것이기 때문에 ‘멸’이며,
세 가지 유위상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정’이며,
승의(勝義)의 선(즉 열반)이기 때문에 ‘묘’이며,
지극한 안온(安穩)이기 때문에 ‘리’이다.
[현행을 소멸하는 성도는]
사도(邪道)를 대치하기 때문에 ‘도’이며,
진리가 아닌 것[不如]을 대치하기 때문에 ‘여’이며,
열반의 궁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행’이며,
일체의 유(有)를 버리기 때문에 ‘출’이다.
이와 같이 옛날 사람의 해석은 한 가지 갈래가 아니기 때문에 선호하는 바에 따라 다시 별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5취온의 고과는]
생멸하기 때문에 ‘비상’이며,
성심(聖心)과 어긋나기 때문에 ‘고’이며,
여기에 아(我)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며,
그 자체 내(즉 나의 것)가 아니기 때문에 ‘비아’이다.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에 대해서는 계경에서 해석하고 있는 바와 같으니,
이를테면 “5취온은 탐욕(chanda)을 뿌리[根]로 삼고, 탐욕을 집(集)으로 삼고, 탐욕을 종류[類]로 삼고, 탐욕을 ‘생’으로 삼는다”고 하였다.64)
다만 여기서는 ‘생’이란 말을 뒤에 설하고 있으니, 이것이 논(論)과 다른 점이다.
이러한 네 가지 탐욕은 본질상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상태[位]의 차별에 따라 네 가지 탐욕에도 차이가 있다. 즉
첫 번째는 현행의 [5취온을] 보편적 자아[總我]라고 집착하여 보편적인 그 자체의 본질[總自體]에 대해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며,
두 번째는 당래의 [5취온을] 보편적 자아라고 집착하여 어떤 보편적인 후유(後有)에 대해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당래의 [5취온을] 개별적인 자아[別我]라고 집착하여 개별적인 후유에 대해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며,
네 번째는 상속하여 생기[續生]하는 자아에 집착하여 상속 생기하는 때에 대해 탐욕을 일으키며, 혹은 업을 짓는 자아에 집착하여 업을 짓는 때에 대해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계경의 해석에서]
첫 번째는 [5취온은] 고과(苦果)에 대해 제1 원인[初因]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인’이라고 일컬었으니, 씨앗이 과실에 대해 제1 원인이 되는 것과 같다.
두 번째는 고과를 동등하게 불러일으키는 것[招集]이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집’이라고 일컬었으니, 싹 등이 과실을 초래하는 것과 같다.
세 번째는 고과에 대해 개별적인 조건[別緣]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연’이라 일컬었으니, 마치 밭 등이 과실에 대해 개별적인 조건이 되는 것과 같다.
즉 밭이나 물ㆍ거름 등의 힘으로 말미암아 과실의 맛과 세력(싹이 발아하게 되는 힘)과 익는 것이 개별적으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네 번째는 고과를 능히 직접적으로 생겨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생’이라고 일컬었으니, 마치 꽃술이 과실을 직접적으로 생겨나게 하는 것과 같다.
혹은 계경에서 설한 것처럼 두 가지의 다섯 애행(愛行)과 두 가지의 네 애행이 있어 네 가지 종류의 탐욕이 된 것이다.65)
즉 현재의 보편적 자아에 집착하는 것에 다섯 종류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내가 현재 결정코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며,
둘째는 내가 현재 이와 같이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며,
셋째는 나는 현재 변이하며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며,
넷째는 나는 현재 [그냥]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나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미래의 보편적 자아에 집착하는 것에도 다섯 종류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나는 미래에 결정코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둘째는 나는 미래에 이와 같이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셋째는 나는 미래에 변이하며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넷째는 나는 미래에 [그냥]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나는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미래의 개별적인 자아에 집착하는 것에 네 종류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나는 미래에 개별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둘째는 나는 미래에 결정코 개별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셋째는 나는 미래에 이와 같이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넷째는 나는 미래에 변이하면서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상속하여 생기하는 자아 등에 집착하는 것에도 네 종류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나는 역시 미래에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둘째는 나는 역시 미래에 결정코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셋째는 나는 역시 미래에 이와 같이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넷째는 나는 역시 미래에 변이하면서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5취온의 소멸은]
유전(流轉)이 끊어졌기 때문에 ‘멸’이며,
온갖 괴로움이 종식되었기 때문에 ‘정’이니,
[계경에서]
“필추여! 제행은 모두 고(苦)이니, 오로지 열반만이 최고의 적정(寂靜)이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리고 이보다 더 높은 것이 없기 때문에 ‘묘’이며,
물러남이 없는 것[不退轉]이기 때문에 ‘리’이다.
나아가 [소멸의 성도는]
바른 길과 같기 때문에 ‘도’이며,
참답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여’이며,
능히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행’이니,
[계경에서] “이러한 도는 능히 청정에 이르니, 그 밖의 견(見)은 필시 청정에 이르는 일이 없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리고 영원히 존재[有]를 떠났기 때문에 ‘출’이다.
또한 상견(常見)과 낙견(樂見)과 아소견(我所見)과 아견(我見)을 대치하기 위해 비상ㆍ고ㆍ공ㆍ비아의 행상을 닦으며,
무인론(無因論)과 일인론(一因論)과 변인론(變因論)이나 지선인론(知先因論)의 견해를 대치하기 위해 인ㆍ집ㆍ생ㆍ연의 행상을 닦는다.66)
해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견해를 대치하기 위해 ‘멸’의 행상을 닦으며,
해탈은 괴로운 것이라고 하는 견해를 대치하기 위해 ‘정’의 행상을 닦으며,
정려와 등지(等至)의 즐거움은 바로 미묘한 것이라는 견해를 대치하기 위해 ‘묘’의 행상을 닦으며,
해탈은 자주 물러나 영원하지 않다는 견해를 대치하기 위해 ‘리’의 행상을 닦는다.67)
그리고 도가 없다[無道]는 견해와 사도(邪道)와 그 밖의 도[餘道]와 물러남이 있는 도[退道]의 견해를 대치하기 위해 도ㆍ여ㆍ행ㆍ출의 행상을 닦는 것이다.68)
이와 같은 행상은 모두 혜(慧)를 본질로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혜는 마땅히 행상을 갖지 않아야 할 것이니, 혜와 혜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마땅히 ‘온갖 심ㆍ심소가 경계 대상을 취하는 양태의 차별[類別]을 모두 행상이라고 이름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69)
그리고 혜와 그 밖의 온갖 심ㆍ심소법은 소연을 갖기 때문에 모두 다 능행(能行)이며,
존재하는 일체의 법은 모두 소행(所行)이다.70)
따라서 이 같은 사실에서 볼 때 3문(門, 행상ㆍ능행ㆍ소행)의 본질에는 광협이 있으니,
혜는 행상ㆍ능행ㆍ소행과 통하는 것이라면,
그 밖의 심ㆍ심소법은 오로지 능행과 소행이 될 뿐이며, 그 밖의 존재하는 온갖 법은 오로지 소행이 될 뿐이다.
10지(智)의 행상의 차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성(性)과의 포섭 관계]
이제 마땅히 성(性)과의 포섭 관계와 그것의 소의지(所依地)와 소의신(所依身)에 대해서도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성(性)의 경우 세속지는 3성이고, 9지는 선이며
소의지의 경우 세속지는 일체 지(地)에
타심지는 오로지 네 지에, 법지는 여섯 지에
그 밖의 7지(智)는 아홉 지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현기의 근거가 되는 신(身)의 경우
타심지는 욕계와 색계의 몸에 의지하고
법지는 다만 욕계의 몸에 의지하며
그 밖의 8지는 3계의 몸과 모두 통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10지(智)와 3성(性, 선ㆍ불선ㆍ무기)의 포섭관계는 이러하다.
즉 세속지는 3성 모두와 통하고, 나머지 아홉 지는 오로지 선일 뿐이다.
소의지의 차별은 이러하다.
즉 세속지는 욕계 내지 유정지 모두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타심지는 오로지 4근본정려에 의지하며,71)
법지는 이러한 4근본정려와 아울러 미지정과 중간정에 의지하며,72)
그 밖의 지(세속ㆍ타심ㆍ법지를 제외한 7지)는 이러한 여섯 지와 아래 3무색정에 의지하여 일어난다.73)
소의신의 차별은 이러하다.
즉 타심지는 욕계와 색계의 몸에 의지하여서도 모두 현전할 수 있다.
법지는 다만 욕계의 몸에 의지하여 현기(現起)할 뿐이며,
그 밖의 여덟 지는 모두 3계의 몸에 의지하여 현기한다.
[10지의] 성(性)과 소의지ㆍ소의신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염주(念住)와의 포섭 관계]
이제 마땅히 염주(念住)와의 포섭 관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갖 지(智)와 염주의 포섭 관계에서
멸지는 오로지 최후(법)의 염주이고
타심지는 뒤의 세 염주이며
그 밖의 8지는 네 염주 모두와 통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멸지는 법념주 중에 포섭된다.
타심지는 뒤의 세 염주에 포섭되며, 그 밖의 여덟 지는 4념주 모두와 통한다.74)
[10지들의 경계]
이와 같은 10지를 서로 견주어 보면, 각각의 지는 마땅히 몇 가지의 지를 경계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75)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갖 지는 서로가 서로의 연이 되니
법지ㆍ유지와 도지는 각기 아홉 가지 지를
고지와 집지는 각기 두 가지 지를
4지는 모두 10지를 경계로 하지만, 멸지는 그렇지 않다.
논하여 말하겠다.
법지는 유지를 제외한 아홉 지를 능히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유지는 법지를 제외한 아홉 지를 능히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도지는 세속지를 제외한 아홉 지를 능히 소연의 경계로 삼으니, 세속지는 도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지와 집지의 두 가지는 각기 두 가지 지를 능히 소연의 경계로 삼으니, 이를테면 세속지와 타심지가 바로 그것이다.
세속지와 타심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10지를 모두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그러나 멸지는 온갖 지를 소연의 경계로 삼지 않으니, 오로지 택멸만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10지의 소연의 법과 경계]
10지의 소연에는 모두 몇 가지의 법이 있으며,
각각의 지는 몇 가지의 법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소연에는 모두 열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3계계(繫)와 무루와
무위의 각기 두 가지가 바로 그것으로
세속지는 열 가지를, 법지는 다섯 가지를 소연으로 삼는다.
유지는 일곱 가지를, 고지ㆍ집지는 여섯 가지를
멸지는 한 가지를, 도지는 두 가지를
타심지는 세 가지를 소연으로 삼으며
진지ㆍ무생지는 각기 아홉 가지를 소연으로 삼는다.
논하여 말하겠다.
10지의 소연에는 모두 열 가지 법이 있다.
즉 유위법은 여덟 종류로 나뉘니, 3계에 계속(繫屬)되는 법과 무루의 유위에 각기 상응법과 불상응법이 있기 때문이며,
무위는 두 종류로 나뉘니, 선과 무기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76)
세속지는 열 가지의 법을 모두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법지는 다섯 가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으니, 이를테면 욕계의 두 가지와 무루도의 두 가지(상응과 불상응)와, 아울러 선의 무위가 바로 그것이다.
유지는 일곱 가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으니, 이를테면 색계와 무색계와 무루도의 여섯 가지와, 아울러 선의 무위가 바로 그것이다.
고지와 집지는 각기 3계에 계속되는 법 여섯 가지를 소연으로 삼는다.
멸지는 한 가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으니, 이를테면 선의 무위가 바로 그것이다.
도지는 두 가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으니, 이를테면 무루도의 두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타심지는 욕계와 색계와 무루의 세 가지 상응법을 소연으로 한다.
진지와 무생지는 유위의 여덟 가지 법과 아울러 선의 무위를 소연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혹 1찰나의 지(智)가 일체의 법을 소연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가, 그런 경우는 없는 것인가?
그러한 경우는 없다.
어찌 비아관(非我觀)의 지(智)는 [1찰나에] 일체의 법을 모두 ‘비아’로 아는 것이 아닌가?
이것도 역시 일체의 법을 능히 소연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법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 것이며, 그 같은 법의 본질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속지는 자신의 품류를 제외한
일체의 법을 모두 소연으로 삼으니
비아의 행상이 그러한 것으로
그것은 오로지 문ㆍ사소성혜일 뿐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세속지로서 일체의 법을 ‘비아’라고 관찰할 때에도 오로지 자신의 품류[自品]는 제외하는데, 여기서 ‘자신의 품류’란 그 자체와 상응하는 법과 구유하는 법을 말한다.
즉 대상[境]과 대상을 갖는 법[有境, 즉 세속지]의 차별이 없어지기 때문에,
소연이 동일하기 때문에,
지극히 서로 가까이 근접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이러한 세속지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77)
그리고 이러한 [비아의 세속]지는 오로지 욕계와 색계에 포섭되는 지이자 문(聞)ㆍ사소성(思所成)으로 수소성(修所成)이 아니니,
수소성의 혜는 지(地)를 개별적으로 소연으로 삼기 때문으로,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단박에 염오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78)
[10지의] 소연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지를 성취하는 것]
다시 마땅히 사택해 보아야 할 것이니, 누가 몇 가지의 지(智)를 성취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생과, 성자의 견도위에 있어
초찰나에는 결정코 한 가지를 성취하며
제2찰나에는 결정코 세 가지 지를 성취하며
뒤의 네 찰나에는 하나씩 증가한다.
수도위에서는 결정코 일곱 가지 지를 성취하지만
이욕자의 경우라면 타심지가 증가하며
무학위로서 둔근과 이근은
결정코 아홉 가지를 성취하고 열 가지를 성취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이생위와 아울러 성자로서 견도의 제1찰나에는 결정코 한 가지 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세속지가 바로 그것이다.
견도의 제2찰나(고법지)에는 결정코 세 가지 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여기에 법지와 고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제4찰나와 제6찰나와 제10찰나와 제14찰나에는 순서대로 유지와 집지와 멸지와 도지를 점차 더해 나가니,79) 아직 지가 더해지지 않은 온갖 단계(즉 忍位)에서 성취되는 지의 수는 앞의 찰나와 같기 때문이다.80)
그리고 수도위 중에서도 역시 결정코 일곱 가지의 지를 성취한다.
이와 같은 온갖 단계 중에서, 만약 이미 욕계를 떠난 자라면 각기 한 가지 지가 증가되니, 이를테면 타심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이생으로서 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제외된다.81)
나아가 온갖 시해탈(둔근의 무학)은 결정코 아홉 가지의 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앞의 여덟 가지에] 진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불시해탈(이근의 무학)은 결정코 10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앞의 아홉 가지에] 무생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를 닦는 것]
어떠한 계위 중에서 몇 가지 지를 단박에 닦는 것인가?82)
바야흐로 견도위의 15찰나의 마음 중에서 닦는 지(智)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도의 인(忍)ㆍ지(智)를 일으킬 때에는
바로 그것을 미래에도 닦으며
세 가지 유지를 일으킬 때에는
아울러 현관변의 세속지도 함께 닦는다.
이는 불생법으로, [득수는] 자지와 하지이며
고지ㆍ집지의 그것은 4념주이고, 멸지는 최후 염주로서
[득수는] 자제(自諦)의 행상을 경계로 하는데
오로지 가행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견도위 중에서 인(忍)ㆍ지(智) 중의 하나를 일으킬 때에는 모두 그러한 종류를 미래에도 닦는다. 그렇지만 자제(自諦)의 온갖 행상과 염주(念住)를 닦게 된다.
어떠한 이유에서 견도위의 경우에는 오로지 동류만을 닦는 것인가?
이전에 일찍이 이러한 종성을 획득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며, 대치와 소연이 다 같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83)
오로지 고ㆍ집ㆍ멸의 세 가지 유지를 일으킬 때에는 능히 미래에 현관변(現觀邊)의 세속지도 함께 닦으니, 각각의 제(諦)를 현관하는 후변(後邊)에서 비로소 능히 함께 닦기 때문에 그 같은 말(현관변)로 일컫게 된 것이다.84)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 밖의 단계에서는 아직 능히 [세속지를] 함께 닦을 수 없다.85)
도류지를 일으킬 때에는 어찌하여 이것(현관변의 세속지)을 닦지 않는 것인가?
세속지는 일찍이 도제에 대해 사현관(事現觀)한 일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필시 도제에 대해 두루 사현관하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고ㆍ집ㆍ멸제에 대해서는 두루 알고 끊고 작증할 수 있을지라도,
도제에 대해서는 능히 두루 닦을 수 없으며,
또한 비록 집ㆍ멸제의 후변에서는 아직 두루 끊고 작증하지 않았을지라도 미래에 이르러서는 끊고 작증할 것이지만,
도제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종성이 다양하기 때문이다.86)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러한 세속지는 오로지 견도의 권속일 뿐으로, 그것(도류지)은 수도에 포섭되기 때문에 능히 닦을 수 없다”고 하였다.87)
그러나 이는 이치가 극히 잘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논증도 되지 않는 것이다.88)
이러한 세속지(즉 세 가지 유지의 현관변의 세속지)는 바로 불생법이니,89) 어떠한 때라도 일어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함께] ‘닦는다’고 말한 것인가?
(경부의 난문)
일찍이 획득하지 못한 것을 지금 바야흐로 획득하기 때문이다.
(유부의 답)
이미 일어날 수 없다고 하였으면서 ‘획득한다’는 뜻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다만 득(得)에 근거하여 ‘획득한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
‘득’에 근거하여 획득한다고 하는 말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으니, 따라서 앞서 분별한 ‘닦는다’고 하는 이치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옛 논사[古師]처럼 설할 경우 ‘닦는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는 어떻게 설하였던 것인가?
“성도의 힘에 의해 세속지를 닦으면 출관(出觀) 후 뛰어난 진리[諦]를 소연으로 하는 세속지가 현전하는 일이 있다.
곧 이러한 세속지가 일어나는 소의(所依)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이것(세속지)을 획득한다고 일컫게 된 것으로, 금광을 얻은 것을 일컬어 금을 얻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90)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 같은 뜻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어떠한 지(地)에 의지하여 견도가 현전하더라도 미래에 능히 자지와 하지의 법을 닦을 수 있다.
이를테면 미지정에 의지하여 견도가 현전할 때는 미래에 능히 한 지(미지정)의 견도와 두 지(미지정과 욕계)의 세속지를 닦으며,
내지는 제4정려에 의지하여 견도가 현전할 때는 미래에 능히 여섯 지의 견도와 일곱 지의 세속지를 닦는다.91)
또한 고지와 집지의 후변에 닦는 세속지는 4념주에 포섭되며,
멸지의 후변에 닦는 세속지는 오로지 법념주에 포섭될 뿐이다.92)
또한 어떠한 제(諦)의 현관변을 닦더라도 바로 이러한 행상으로써 이러한 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93)
그리고 [이러한 세속지는] 바로 견도의 힘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에 오로지 가행득일 뿐이다.94)
나아가 [이러한 세속지는 견도 중에서] 지(智)가 증가하기 때문에 ‘지’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만약 권속과 함께하는 경우라면, 욕계의 네 가지 온과 색계의 5온을 그것의 자성으로 한다.95)
다음으로 수도의 이염위(離染位) 중에서 닦는 지(智)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도위의 첫 찰나에는
여섯 혹은 일곱 가지의 지를 닦으며,
[아래] 8지를 끊는 무간도와
유욕(有欲)의 그 밖의 도와
유정지를 끊는 8해탈도에서는
각기 일곱 가지의 지를 닦으며,
그 이상의 무간도와 그 밖의 도에서는
차례대로 여섯 가지와 여덟 가지의 지를 닦는다.
논하여 말하겠다.
수도의 첫 찰나란 제16 도류지가 일어나는 때를 말하는 것으로, 이 때에는 두 가지의 지를 바로[現] 닦는다.96)
그리고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은 자라면 미래에 여섯 가지의 지를 닦으니, 이를테면 법지와 유지와 고ㆍ집ㆍ멸ㆍ도지가 바로 그것이며,
욕계를 떠난 자라면 [미래에] 일곱 가지의 지를 닦으니, 이를테면 앞의 것에 타심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그 때에는 세속지를 닦지 않으니, 유정지(有頂地)를 대치하기 때문이다.97)
욕계 수소단을 끊는 9무간도와 앞의 여덟 가지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98)
위의 일곱 지(4정려와 아래 3무색정)를 끊는 온갖 무간도가 일어날 때에는 4제의 유지와 세속지와 멸ㆍ도법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는다.
욕계를 끊는 가행도와 유욕(有欲)의 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는다.
그리고 이상의 도가 일어날 때에는 미래에 모두 일곱 가지의 지를 닦으니,99) 이를테면 세속지와 법지와 유지와 고ㆍ집ㆍ멸ㆍ도지가 바로 그것이다.
유정지를 끊는 앞의 여덟 가지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4제지와 유지와 두 가지 법지(멸ㆍ도법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이러한 때에는 미래에도 역시 오로지 일곱 가지의 지를 닦으니, [앞서 언급한 미래의 득수에서] 세속지를 제외하고 타심지를 더한 것이다.
유정지를 끊는 9무간도가 일어날 때에는 4제지와 유지와 두 가지 법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 법지와 유지와 고ㆍ집ㆍ멸ㆍ도지의 여섯 가지의 지를 닦는다.
욕계 수소단을 끊는 제9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의 여섯 가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위의 7지(地)의 수소단을 끊는 온갖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4제지와 유지와 세속지와 멸ㆍ도의 법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욕계 수소단을 끊는 제9 승진도와 위의 8지의 수소단을 끊는 온갖 가행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는다.
또한 위의 7지와 유정지의 8품의 수소단을 끊는 온갖 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와 유지와 타심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는다.
그리고 이상의 도가 일어날 때에는 미래에 모두 여덟 가지의 지를 닦으니, 이를테면 세속지와 법지와 유지와 4제지와 타심지가 바로 그것이다.
다음으로 이염득(離染得)의 무학위 중에서 닦는 지(智)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학의 첫 찰나에서는
아홉 혹은 열 가지의 지를 닦으니
둔근과 이근이 차별이 있기 때문으로
승진도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논하여 말하겠다.
무학의 첫 찰나란 유정(有頂)의 염오를 끊는 제9 해탈도가 일어나는 때를 말하는 것으로, 그 때에는 고지와 집지와 유지와 진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니, 유정지를 소연으로 하기 때문이다.100)
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아홉 가지와 열 가지의 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아홉 가지의 지를 닦고, 열 가지의 지를 닦으니,
이를테면 둔근자는 오로지 무생지를 제외한 지를 닦고,
이근자는 무생지도 역시 닦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 밖의 계위에서 닦는 지(智)의 많고 적음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연근(練根)의 무간도에서
유학은 여섯 가지를, 무학은 일곱 가지를 닦으며
그 밖의 도에서 유학은 여섯ㆍ일곱ㆍ여덟 가지를
응공은 여덟ㆍ아홉 가지와 일체의 지를 닦는다.
잡수(雜修)와 신통[通]의 무간도에서
유학은 일곱 가지를, 응공은 여덟ㆍ아홉 가지를 닦으며
그 밖의 도에서 유학은 여덟 가지를 닦으며
응공은 아홉 가지 혹은 일체의 지를 닦는다.
성자가 그 밖의 도를 일으킬 때와
이생이 온갖 상태에서
닦는 지의 많고 적음에 대해서는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유학위의 경우, 연근(練根)의 온갖 무간도가 일어날 때에는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여섯 가지의 지를 닦으니, 4제지와 법지와 유지가 바로 그것이다.
즉 이 때는 견도와 유사하기 때문에 세속지를 닦지 않는 것이며,
능히 장애를 끊기 때문에 타심지를 닦지 않는 것이다.
연근의 온갖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도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은 자라면 미래에 여섯 가지의 지를 닦으니, 4제지와 법지와 유지가 바로 그것이며,
이미 욕계를 떠난 자라면 미래에 일곱 가지의 지를 닦으니, 이를테면 앞의 것에 타심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말하기를,
“해탈도의 단계에서도 역시 세속지를 닦는다”고 하였다.
[유학위에서 연근의]
온갖 가행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은 자라면 미래에도 일곱 가지의 지를 닦지만,
이미 욕계를 떠난 자는 여덟 가지의 지를 닦으니, 이를테면 거기에 타심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온갖 승진도가 일어날 때로서,
만약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은 자라면,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역시 일곱 가지의 지를 닦지만,
이미 욕계를 떠난 자라면,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와 유지와 타심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역시 여덟 가지의 지를 닦는다.
무학위의 경우, 연근의 온갖 무간도가 일어날 때에는 4제지와 유지와 두 가지 법지(멸ㆍ도법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 일곱 가지의 지를 닦으니, 4제지와 법지와 유지와 진지가 바로 그것이다.
즉 이 때는 세속지를 닦지 않으니, 유정지를 대치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퇴법 등의 앞의] 다섯 종성이 앞의 여덟 가지 해탈도를 닦을 때에는 4제지와 유지와 두 가지 법지(멸ㆍ도법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 여덟 가지의 지를 닦으니, 4제지와 법지와 유지와 타심지와 진지가 바로 그것이다.
[앞의] 네 종성이 제9 해탈도를 닦을 때에는 고지와 집지와 유지와 진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 아홉 가지의 지를 닦는다.
가장 마지막 종성이 해탈도를 닦을 때에는 고지와 집지와 유지와 진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101) 미래에 10지를 닦는다.
온갖 가행도를 닦을 때 바로 닦는 것은 유학의 경우와 같으며, 미래에 아홉 가지의 지를 닦는다.
온갖 승진도를 닦을 때,
둔근자라면 아홉 가지의 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역시 아홉 가지의 지를 닦지만,
이근자라면 10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역시 10지를 닦는다.
유학위의 경우,
잡수(雜修)의 온갖 무간도가 일어날 때에는 4제지와 법지와 유지와 세속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일곱 가지의 지를 닦는다.
잡수의 온갖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오로지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가행도가 일어날 때에는 여기에 세속지를 더한 것을,
온갖 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다시 타심지를 더한 것을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모두 여덟 가지의 지를 닦는다.
무학위의 경우,
잡수의 온갖 무간도가 일어날 때 바로 닦는 지는 유학에서의 경우와 같으며,
미래에 닦아야 하는 지는 둔근자라면 여덟 가지이지만, 이근자라면 아홉 가지이다.
잡수의 온갖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오로지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가행도가 일어날 때에는 여기에 세속지를 더하여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 닦아야 하는 지는 둔근자라면 아홉 가지이지만, 이근자라면 열 가지이다.
그리고 잡수의 온갖 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연근의 승진도가 일어날 때와 동일하다.
유학으로서 신통을 닦을 경우,
다섯 신통의 무간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를 바로 닦으며,102) 미래에 일곱 가지의 지를 닦는다.
숙주(宿住)와 신경(神境)의 두 신통의 해탈도와 다섯 신통의 가행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를 바로 닦으며,
타심통의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법지와 유지와 도지와 세속지와 타심지를,
일체 모든 신통의 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고지와 집지와 멸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아울러 바로 닦으며,
이상의 도가 일어날 때 미래에 모두 여덟 가지의 지를 닦는다.
무학으로서 신통을 닦을 경우,
다섯 신통을 닦는 무간도가 일어날 때 바로 닦는 지는 유학에서와 같으며,
미래에 닦는 것은 둔근자라면 여덟 가지이지만, 이근자라면 아홉 가지이다.
해탈도와 가행도가 일어날 때에 바로 닦는 지도 유학의 경우와 같으며,
미래에 닦는 것은 둔근자라면 아홉 가지이지만, 이근자라면 열 가지이다.
온갖 승진도가 일어날 때의 경우는 연근의 승진도가 일어날 때와 동일하다.
그리고 천안(天眼)과 천이(天耳)의 두 가지 신통을 닦는 해탈도는, 이러한 두 신통이 무기성이기 때문에 ‘닦는다’고 말하지 않는다.103)
성자가 그 밖의 4무량(無量) 등의 수소성에 포섭되는 유루의 공덕을 일으킬 때에는 현재에 모두 한 가지의 지를 닦으니,104) 세속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유학이 미래에 닦는 지는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은 자라면 일곱 가지이지만,
이미 욕계를 떠난 자라면 여덟 가지이며,
무학이 미래에 닦는 지는 둔근자라면 아홉 가지이지만, 이근자라면 열 가지이다.
여기에 미미심(微微心)은 제외되니, 이것은 미래에 오로지 세속지만을 닦기 때문이다.105)
만약 성자가 그 밖의 무루의 공덕으로서 정려에 포섭되는 것을 일으킬 때에는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무색정에 포섭되는 것을 일으킬 때에는 오로지 4제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는다.106)
그리고 미래에 닦는 지는 앞에서 언급한 유루의 공덕을 일으킬 때와 동일하다.
이생이 염오를 떠날 때에는 세속지를 바로 닦는데,
욕계와 [앞의] 세 정려를 끊는 제9 해탈도와, 그리고 근본 4정려에 의해 승진도와 이염의 가행도를 일으킬 때에는 미래에 두 가지 지를 닦으니,
말하자면 세속지에 타심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밖의 도(앞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일체의 가행ㆍ무간ㆍ해탈ㆍ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미래에 오로지 세속지를 닦는다.
또한 [누진통을 제외한] 다섯 신통을 닦을 때의 가행도와 두 가지 신통(숙주ㆍ신경통)을 닦을 때의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를 바로 닦으며,
한 가지 신통(타심통)을 닦는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와 타심지를 바로 닦으며,
온갖 신통(앞의 다섯 신통)을 닦는 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두 가지 지(타심지와 세속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이상의 일체의 도가 일어날 때에도 모두 미래에 두 가지 종류의 지를 닦는다.
그리고 다섯 신통을 닦는 무간도가 일어날 때에는 현재와 미래에 오로지 세속지만을 닦는다.
나아가 근본정려에 의해 그 밖의 공덕을 닦을 때에는 모두 세속지를 바로 닦으며,
미래에는 두 가지의 지(세속지와 타심지)를 닦는다.
그러나 오로지 순결택분이 일어날 때만은 필시 타심지를 닦지 않으니, 이는 바로 견도에 가까운 권속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지(地)의 정려에 의해 그 밖의 공덕을 닦을 때에는 모두 세속지를 현재와 미래에 닦는다.
미래에 닦는 모든 도는 몇 가지 지(地)를 닦는다고 해야 할 것이며, 일어나 획득[得]된 모든 도는 모두 지금 바로 ‘닦는 것[修]’인가?107)
게송으로 말하겠다.
모든 도가 이러한 지에 의지하거나 획득할 때
이러한 지의 유루를 닦으며
이러한 지를 떠나고 획득하고 일으킬 때에는
이러한 지와 하지의 무루를 닦는다.
오로지 최초의 진지만이 두루
아홉 지의 유루의 공덕을 닦을 뿐으로
상지에 태어나면 하지를 닦지 않는데
일찍이 획득한 것은 ‘닦는 것’이 아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도가 이러한 지(地)에 의지하고, 아울러 이러한 지를 획득할 때에는 미래에 능히 이러한 지의 유루를 닦게 된다.108)
성자가 이러한 지를 떠나려고 할 때와, 이러한 지를 획득할 때, 아울러 이러한 지 중에서 온갖 도를 현기할 때에는 모두 능히 이러한 지와 하지의 무루를 닦게 된다.109)
여기서 ‘이러한 지를 떠나려고 할 때’라는 말은 두 종류의 네 가지 도 모두와 통한다.110)
나아가 오로지 처음으로 진지가 현재전할 때, 그것의 힘은 9지(地)의 유루공덕인 부정관 등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뛰어난 공덕을 능히 두루 닦으니,111)
능히 계박하는 온갖 번뇌가 끊어져 남음이 없기 때문으로,
마치 사람을 능히 속박하는 밧줄을 끊으면 억눌린 기(氣)가 통하는 것과 같다.
또는 그러한 자신의 마음이 지금 왕위에 오르게 되면 일체의 선법은 ‘득’을 일으켜 내조(來朝)하니,112)
비유하자면 대왕이 왕위에 올라 관정의 의식을 치루게 되면 일체의 나라에서 모두와 조공을 바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이것(진지)은, 상지에 태어나면 필시 하지를 닦지 않는다.113)
그리고 [본송에서] ‘최초의 진지’라고 하는 말은 유정지를 떠날 때와 다섯 종성의 아라한이 근기를 연마[練根]하는 단계의 제9 해탈도를 나타낸다.114)
앞에서 언급한 모든 ‘닦음[修]’이란, 오로지 일찍이 획득하지 못하는 것을 지금 일으키고, 지금 획득하는 것으로서, 이는 바로 ‘능히 닦는 것[能修]’이고, ‘닦아지는 것[所修]’이다.
이를테면 만약 일찍이 획득되지 않은 것을 지금 획득함에 있어 공을 들여 획득하는 것을 바야흐로 바로 ‘소수법(所修法)’이라 한다.
그러나 일찍이 획득하였다가 버린 법을 지금 비록 다시 획득하였을지라도 그것을 ‘소수’라고는 하지 않으니, 애써 노력하여 증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일찍이 획득되지 않았던 것이 공력을 들여 현전한 것이라면 능히 미래에도 닦을 수 있으니, 그 세력이 수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찍이 획득되었던 것이 일어난 것이라면 미래에는 그것을 닦지 않으니, 많은 공력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며,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이다.115)
[닦음의 네 종류]
[미래에는] 오로지 ‘획득[得]’에 근거하여서만 닦게 되는 것[修]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 것을 ‘닦음’이라고 하는가?
닦음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득수(得修)이며, 둘째는 습수(習修)이며,
셋째는 대치수(對治修)이며, 넷째는 제견수(除遣修)이다.
이와 같은 네 종류의 닦음은 어떠한 법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득수와 습수는
선한 유위법에 의해 설정된 것이며
온갖 유루법에 의해
제견수와 대치수를 설정하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득수와 습수의 두 가지는 유위 선법에 근거한 것으로, 미래에는 오로지 득수만이 있을 뿐이며, 현재에는 두 가지 수를 모두 갖추고 있다.116)
그리고 대치수와 제견수의 두 가지는 다만 유루법에 근거한 것이다.117)
따라서 유루의 선법은 네 가지 닦음[修]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무루의 유위와 그 밖의 유루법은 차례대로 각기 전후의 두 가지 닦음을 갖추고 있다.118)
그런데 외국(外國)의 모든 논사들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닦음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앞의 네 가지에다 방수(防修)와 관수(觀修)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으로,119) 온갖 근(根)을 방호하고, 몸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무엇을 일러 근을 닦는 것[修根]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6근을 능히 잘 막고 능히 잘 지키는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으며,120)
또한 계경에서,
‘무엇을 일컬어 몸을 닦는 것[修身]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자신의 몸에서 머리카락이나 터럭 손톱을 관찰하는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121)
그러나 가습미라(迦濕彌羅)의 모든 논사들은 말하기를,
“방수와 관수의 두 가지는 바로 대치수와 견제수에 포섭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