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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당집 제8권[2]
[흠산 화상] 欽山
동산洞山의 법을 이었다. 휘諱는 문수文遂라 했으나, 행장行狀을 보지 못해 족성族姓은 알 수 없다. 무릉武陵의 뇌雷 상공이 곁에서 예경하기를 시종始終 한결같이 하였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양무제의 곡척曲尺이요, 보지[志] 공의 전도剪刀이니라.”
“모든 부처님과 모든 법이 모두가 이 경經에서 나온다 하는데, 어떤 것이 이 경입니까?”
“항상 바뀌는 것이니라.”
“경에서는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의심나는 것이 있거든 물어보라.”
선사가 와룡臥龍과 설봉과 함께 차를 달이다가 밝은 달이 종지 물에 비친 것을 보고 말했다.
“물이 맑으니 달이 비치는구나.”
와룡이 말했다.
“맑은 물이 없으면 달이 비치지 않습니다.”
이에 설봉이 종지의 물을 쏟아 버리고 말했다.
“물과 달이 어디에 있는가?”
장강사將江寺 스님이 돈을 얻으러 왔는데,
어떤 사람이 물었다.
“돈을 얻어가 무엇을 하려 하시오?”
“우물을 파려 합니다.”
“절 이름이 강물을 끌어들인다는 뜻인 장강將江인데 우물은 파서 무엇 하려 하시오?”
스님이 대답이 없었다. 선사가 대신 말했다.
“여러 물줄기가 모여 이룬 강이라 마시지 못합니다.”
선사가 물었다.
“도사道士께서는 법을 구하기 위해 왔는가, 절을 하기 위해서 왔는가?”
도사가 대답했다.
“법을 구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법을 구하기 위해서 왔다면 앉아서는 안 된다.”
“거친 말과 고운 말 모두 제일의第一義로 돌아간다는데, 어떤 것이 제일의입니까?”
선사가 도리어 물었다.
“그대는 절집의 종이라던데 사실인가?”
“화상께서는 몹시 거치시군요.”
“제일의가 어디에 있는가?”
“화상께서는 3교敎도 알지 못하십니까?”
“3교는 그만두고라도 노군老君이 언제 태어나셨는가?”
“혼돈混沌이 나뉘기 전에 태어나셨습니다.”
“혼돈이 나뉘기 전의 일은 어떠한가?”
도사가 대답이 없자, 선사가 문득 때려 주었다.
[중산 화상] 中山
동산洞山의 법을 이었고, 고안현高安縣에서 살았다. 휘諱는 도전道全인데, 행장을 보지 못해서 생애를 알 길이 없다.
선사가 동산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삼계를 벗어나는 요체要諦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의 발밑에서 연기가 나느니라.”
이에 선사가 활연히 깨달았다. 나중에 운거雲居가 이에 대해 말했다.
“그렇다면 화상을 저버릴 수 없겠습니다.”
대광大光이 덧붙여 말했다.
“그렇다면 감히 경솔할 수 없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문장가들이 제2 화상을 찬탄하기를,
“선사는 귓전을 스치는 소리만 듣고도 닦아 증득하는 길을 그치게 한다” 하였다.
어떤 이가 물었다.
“‘청정하게 수행하는 이는 열반에 들지 못하고, 계행을 파괴한 비구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렇게 말한 옛사람의 뜻이 무엇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남김없이 다 제도하여 그들 모두열반을 뛰어넘느니라.”
어떤 이가 물었다.
“두 용이 여의주를 다투면 얻는 이는 누구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모든 물건이 다 없어졌지만 그저 눈앞에 있는 것 같을 뿐이다.”
“그렇다면 두 용 모두 얻지 못하겠습니다.”
“두 용뿐만 아니라 천 부처가 나와도 얻지 못하리라.”
“부처가 아닌 이는 얻겠습니까?”
이에 선사가 대답했다.
“얻는다면 밝은 구슬이 아니니라.”
[조산 화상] 曺山
동산洞山의 법을 이었고, 항주杭州에서 살았다. 휘諱는 본적本寂이고, 천주泉州의 포전현蒲田縣 사람이며, 속성은 황黃씨이다. 어릴 적부터 9경經을 익혀 출가하기를 간절히 바라더니, 19세가 되어서야 부모의 허락을 받고 복당현福塘縣 영석산靈石山에서 수업하였다.
25세가 되자 은사가 비로소 계 받을 것을 허락하니, 앉고 눕는 위의가 마치 오랫동안 익힌 것 같았다. 그 길로 행각行脚을 나서서 가장 먼저 동산의 법연法筵을 찾으니,
동산이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선사가 아무개라고 대답하니, 동산이 다시 말했다.
“위로 향하는 일을 다시 일러라.”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째서 말하지 않는가?”
“아무개라 이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동산이 뛰어난 기재器才라 여겼다. 그로부터 그곳에 머문 지 몇 해 만에 비밀한 방에서 현묘한 이치를 모두 이어받았다.
어느 날 동산에게 하직을 고하니,
동산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가?”
선사가 대답했다.
“변함없는 곳으로 가렵니다.”
“변함없는 곳에 어찌 감이 있겠는가?”
“가는 것도 변함없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마음을 다잡으며 시일을 보내고 유유자적하였으며, 도로써 사귄 벗이 아니면 더불어 말하지 않고 깊이 숨어 자유로운 활동을 하지 않더니, 교화할 인연이 이르자 처음에는 조산曺山에 머물다가 나중에는 하옥荷玉으로 옮겼다. 종릉鍾陵 대왕이 그의 높은 덕망을 흠모하여 두세 번 사신을 보내 청했으나 선사는 병을 핑계로 따르지 않았다.
세 번째 사신을 보낼 때, 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에도 조산 대사를 모셔 오지 못하면 나를 만날 생각을 말라.”
사신이 왕명을 받들고 산에 와서 슬피 울며 말했다.
“화상께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시어 일체 중생을 구제하시옵니다. 이번에도 화상께서 왕명에 따라 주지 않으신다면 저희들은 몽땅 죽임을 당하옵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사신께서는 안전할 테니 아무 걱정 마시오. 가실 때 제가 드리는 고인古人의 게송 한 수를 대왕께 전해 올리면 반드시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게송에서 말했다.
꺾이고 쇠잔해진 고목枯木 푸른 숲 속에서
몇 차례나 봄을 보냈건만 그 마음 변치 않았네.
나무꾼도 오히려 돌아보지 않거늘
이름난 목수가 무엇 하러 힘들여 찾아다닐까.
사신이 돌아와서 게송을 바치니, 왕이 보고 멀리 조산 마루를 향해 절을 하면서 말했다.
“제자는 금생에 영영 조산 대사를 뵙지 못하겠구나.”
이렇게 해서 두 곳의 법석法席에서 20년 동안, 여름 겨울 내내 항상 참학參學하는 문도들이 2백, 3백 명에 이르렀다.
선사가 항시 상당하여 대중을 다음과 같이 일깨웠다.
“여러분은 조산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라. 제방에 말 잘하는 선사가 많아서 여러분의 귓속이 모두 가득함이라. 온갖 법을 빌리지도 않고 접하지도 않고 이렇게 깨달아야 저들의 차별을 두는 지식이그대들을 어찌하지 못하리라. 천지天地는 막힘이 없지만 모든 일은 삼 같고 갈대 같고 가루 같고 칡덩굴 같아서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도 어찌하지 못하셨고, 조사께서 세상에 나오셔도 어쩌지 못하셨느니라. 오직 철저히 깨달아야만 허물이 없으리라.
그대들은 보아라. 저들의 천 경經과 만 논論으로 말해 놓은 일로는 자재롭지 못하고 시종始終을 벗어나지 못하니, 이는 자기의 일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의 일을 밝히면 바로 모든 일을 돌리어 그대 자신의 살림살이가 되게 하겠지만,
만일 자기의 일을 밝히지 못하면 그대들은 여러 성인과 연緣을 맺고, 여러 성인은 그대들의 경계가 되어 경계와 인연이 서로 넘나들어 끝나는 때가 없으리니, 어찌 자유로울 수가 있으랴?
만일 철저히 깨닫지 못하면 저 모든 일을 운용하지 못할 것이요, 만일 철저히 깨달아 묘함을 얻으면 모든 일을 운용하여 등 뒤로 향하게 해 하인으로 삼으리라.
그러므로 작고하신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본체는 미묘한 곳에 있으니 등한시 하지 말라.’ 하셨나니,
이 경지境地에 이르면 귀천을 나누지 않고 친소를 구별하지 않는다.
마치 큰 부잣집 수전노처럼 쓸 때를 전혀 모르는 것 같으니라.
이 경지에 이르면 이것이 곧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는 것이며, 청탁淸濁을 나누지 않는 것이니라.
만일 하인이 나서서 옷을 입고 단장하여 주인보다 훌륭하게 되었더라도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는 것이야 어찌하랴?
나는 여러분에게 이르나니, 향해 가는 말은 맑고 깨끗하나 현상 위의 말은 맑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하나니, 무엇을 현상 위의 말이라 하는가?
도량이 큰 사람이 없어 가려내지 못하는구나.”
어떤 스님이 물었다.
“학인學人이 화상의 회상에 이른 뒤로 몸을 벗어날 길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부디 화상께서는 몸을 벗어날 길을 지시해 주십시오.”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는 전에 어떤 길을 걸어왔었느냐?”
“이 경지境地에 이르면 가려낼 수가 없습니다.”
이에 선사가 대답했다.
“필시 몸 빼낼 길을 얻지 못하겠구나.”
어떤 이가 물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싹을 보고서 땅을 가리고 말을 듣고서 사람을 안다’ 했는데,
지금 말하고 있으니, 스님께서 가려 주십시오.”
선사가 대답했다.
“가리지 않겠노라.”
“어째서 가리지 않습니까?”
“조산은 솜씨 좋은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어떤 이가 물었다.
“노조魯祖가 면벽하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고자 함이었습니까?”
선사가 손으로 귀를 가렸다.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드러냅니까?”
“여기서는 드러내지 마라.”
“어디에서 드러내야 합니까?”
“어젯밤 3경에 돈 세 닢을 잃었느니라.”
“해가 뜨기 전에는 어떠합니까?”
“지난날 조산도 그랬느니라.”
“해가 뜬 뒤에는 어떠합니까?”
“여전히 조산에게 석 달 양식을 빚졌느니라.”
“옛사람이 면벽하는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
“두 그루의 어린 계수나무가 오래도록 푸르다.”
“듣건대 경전에서 말하기를,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서 원각圓覺을 변별하면 그 원각圓覺의 성품도 곧 윤회와 같다’ 하였는데, 어떤 것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원각을 변별하는 것입니까?”
“마치 어떤 사람이 길에서 집안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으니라.”
“어떤 것이그 원각圓覺의 성품이 곧 윤회와 같다는 것입니까?”
“분명히 길에 있으면서도 갈 길을 알지 못하니라.”
“변별할 곳이 있습니까?”
“변별할 것이 있으면 원각이 아니니라.”
“변별할 것이 없는 자리도 유전流轉합니까?”
“역시 스스로 유전하느니라.”
“어떻게 유전합니까?”
“빙글빙글 돌지 않아야 하느니라.”
“눈썹과 눈은 서로 알아볼 수 있습니까?”
“알아보지 못하느니라.”
“어째서 서로 알지 못합니까?”
“같은 곳에 있기 때문이니라.”
“그렇다면 나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눈썹은 눈이 아니니라.”
“어떤 것이 눈입니까?”
“뚜렷한 것이니라.”
“어떤 것이 눈썹입니까?”
“조산도 오히려 의심스러워하느니라.”
“화상께서는 무엇 때문에 의심하십니까?”
“내가 만일 의심하지 않는다면 뚜렷한 것이니라.”
또 어떤 이가 물었다.
“항상 생사의 바다 속에 빠져 가라앉는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제2의 달이니라.”
어떤 스님이 물었다.
“벗어나려고 합니까?”
“벗어나려 하나 길이 없을 뿐이니라.”
“벗어날 때에는 어떤 사람이 그를 접합니까?”
“쇠칼을 쓴 자이니라.”
다시 어떤 이가 물었다.
“밝은 달이 중천에 떴을 때는 어떠합니까?”
“여전히 섬돌 아래 있는 놈이로다.”
“스님께서 섬돌 위로 끌어올려 주십시오.”
“달이 진 뒤에 만나리라.”
“그런 일은 드문데 어떻게 도달해야 합니까?”
“드물지 않느니라.”
“그럼 어찌하여야 합니까?”
“비웃지 않겠노라.”
“그렇다면 달이 진 것입니다.”
“비웃지 않았는데 무슨 달이 졌다는 것인가?”
어떤 이가 물었다.
“소 한 마리가 물을 마시면, 다섯 마리의 말이 울지 않을 때의 경계는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조산曺山에 효孝가 가득하니라.”
“형상 중에 어느 것이 진실입니까?”
“형상 그대로가 진실이니라.”
“누구에게 보입니까?”
이에 선사가 찻종지를 번쩍 들어 올렸다.
다시 물었다.
“나라 안에서 칼을 휘두르는 이는 누구입니까?”
“조산이니라.”
“누구를 죽이려 하십니까?”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죽이느니라.”
“갑자기 전생의 부모를 만나면 어찌합니까?”
“무엇을 가리겠는가?”
“자기 자신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누가 감히 나를 어찌하겠는가?”
“어째서 죽이지 않습니까?”
“손을 쓸 곳이 없느니라.”
어느 세속의 선비가 물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람마다 다 갖추고 있다’ 하였는데, 세진世塵 속에 사는 저에게도 있습니까?”
이에 선사가 손을 뻗어 선비의 손가락을 꼽으면서 말했다.
“1, 2, 3, 4, 5 모두 구족하구나.”
“옛사람이 말하기를,
‘땅에 넘어지면 그 땅을 짚고 일어나지 않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하였는데, 어떤 것이 땅입니까?”
“한 자, 두 자이니라.”
“어떤 것이 넘어지는 것입니까?”
“인정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지식을 갖추어야 대중의 논란에 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는데, 논란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칼과 도끼로도 쪼갤 수 없느니라.”
“그러한 논란을 잘 알아도 긍정하지 않는 이가 있습니까?”
“있느니라.”
“어떤 사람입니까?”
“조산이니라.”
다시 어떤 이가 물었다.
“허깨비의 본체가 어찌 진실이겠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허깨비의 본체는 원래 진실이니라.”
“허깨비가 어떻게 진실을 드러냅니까?”
“허깨비 그 자체가 바로 드러나느니라.”
“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허깨비를 여의지 않았겠습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허깨비의 형상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어떤 도반을 가까이하여야 듣지 못했던 바를 항상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한 이불을 함께 덮는 자이니라.”
“이 또한 화상께서나 들으실 수 있는 경지입니다. 어떤 것이 듣지 못한 것을 항상 듣는 것입니까?”
“목석과 같아서는 안 된다.”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입니까?”
“‘듣지 못했던 것을 항상 듣는다’ 하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들과 조사들은 알지 못하는데, 살쾡이와 암소는 알고 있다’ 하였는데,
부처님들과 조사들이 어째서 알지 못합니까?”
“부처님들은 비슷하기 때문이요, 조사들은 인가[印]에 집착하기 때문이니라.”
“살쾡이와 암소가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살쾡이와 암소라는 사실이니라.”
“부처님들과 조사들은 어째서 비슷하다거나 인가에 집착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막힘이 없으면 이 가운데서 묘하게 아느니라.”
“경전에서 말하기를,
‘한 사람의 천제闡提를 죽이면 한량없는 복을 받는다’ 하였는데, 어떤 것이 천제입니까?”
“부처라는 사견과 법이라는 사견을 내는 자이니라.”
“어떤 것이 죽이는 것입니까?”
“부처라는 견해와 법이라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 죽이는 것이니라.”
이번에 선사가 되레 그 스님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언가 아는 천제闡提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천제인가?”
스님이 대답이 없자, 선사가 대신 말했다.
“하얀 것을 두른 배 위에 검은 저고리를 입었구나.”
이 뜻은, 소견을 내는 것은 아는 것이 되므로 희다 하고, 소견을 내지 않은 것은 모르는 것이 되므로 검다고 한 것이다.
선사가 경전에 있는 일을 들어 대중에게 물었다.
“묻는 이가 없어도 스스로 말하여 행하는 도를 칭찬한다는데, 어떤 것이 묻는 이가 없어도 스스로 말하는 것이겠는가?”
누군가가 대답했다.
“온 누리에 들은 이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나 한 글자를 따내고 한 글자를 보탬으로써 불법이 크게 퍼진다.”
대중이 대답을 못하자, 선사가 말했다.
“온 누리에 듣지 못한 이가 한 사람도 없느니라.”
또 선사가 다음과 같이 수어(垂語:스승이 학인을 위해 교시하는 것)를 하였다.
“이 자리는 높고 넓어서 나는 오를 수 없으니, 무슨 자리라 불러야 되겠는가?”
강强 상좌가 대답했다.
“이 자리라고 부르면 벌써 더럽힌 것입니다.”
선사가 말했다.
“오를 이가 있기는 한가?”
“있습니다.”
“누구인가?”
“발을 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를 수 있는 이는 자리 위의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좌우일 뿐입니다.”
“어떤 것이 자리 위의 사람인가?”
“이 자리에 오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르지 않는다면 자리는 해서 무엇 하겠는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로 말하자면 오를 사람이 따로 있는가, 아니면 자리 그 자체를 최상의 몸으로 바꾸는 것인가?”
“자리를 그대로 최상의 몸으로 바꿉니다.”
선사가 칭찬했다.
“옳은 말이다, 옳은 말이다.”
선사가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대광大光에서 옵니다.”
“올 때에 광명이 여전히 나타나 보이던가?”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항상 나타납니다.”
“비추던가?”
“비추지는 않습니다.”
“큰 광명이 어디에 있던가?”
이에 스님이 대답이 없자, 선사가 말했다.
“옥새로 여겼더니, 알고 보니 천남각天南角이로구나.”
선사가 다시 대신 말했다.
“‘비추지 않게 되어야 비로소 큰 광명입니다’ 하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지위를 얻고서야 그 지위에 맞는 옷을 입는다’ 했는데, 어떤 것이 지위를 얻는 것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동서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옷을 입는 것입니까?”
“여읠 수 없는 것이니라.”
“그것이 어떤 옷이기에 여읠 수가 없습니까?”
“사람마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옷이 그것이니라.”
“사람마다 모두가 가지고 있다면 입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선사가 말했다.
“‘일어서고 넘어짐이 서로 뒤따르니, 어디를 가나 살길이 트인다’ 한 말을 듣지도 못했는가?”
“이 뒤에 저절로 보게 된다는 일은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옷 입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라.”
또 말했다.
“옷을 벗고 와서 나를 만나라.”
“어떤 것이, 10년을 돌아가지 못하니, 오던 길을 잊었다는 것입니까?”
“즐거움을 얻고는 근심을 잊어버리느니라.”
“어떤 길을 잊었습니까?”
“모든 길[十處]을 잊는다.”
“원래의 길도 잊습니까?”
“그것까지도 잊느니라.”
“어째서 9년이라고는 하지 않고, 꼭 10년이라 합니까?”
“만일 한 곳이라도 돌아가지 않는 곳이 있으면 나는 몸을 나투지 않느니라.”
“경전에서 말하기를,
‘동자가 몸을 던지니, 야차夜叉가 반 게송을 말했다’ 하였는데, 어떤 것이 동자가 몸을 던지는 것입니까?”
“단정함을 잃은 것이니라.”
“어떤 것이 야차夜叉가 반 게송을 읊은 것입니까?”
“흰 구름이 가시덤불에 드리워진 것이니라.”
“어떤 것이 단정함을 잃는 것입니까?”
“오직 젊은 어르신을 잃는 것 바로 그것이니라.”
“대궐에 이끼가 끼었을 때는 어떠합니까?”
“바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팔방에서 알현하고자 올 때는 어찌합니까?”
“절을 받지 않느니라.”
“그렇다면 무엇 하러 알현하고자 옵니까?”
“어기려면 잠시 어긴다 해도 순응함은 신하의 분수이니라.”
“임금의 뜻이 어떠합니까?”
“추밀樞密도 그 속마음을 모르느니라.”
“그렇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공은 몽땅 대신들에게 돌아가겠습니다.”
“임금의 성격을 알기나 하는가?”
“외방外方에서는 논할 수 없습니다.”
선사가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지륜智輪입니다.”
“지륜智輪과 법륜法輪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지륜이 대답이 없었다. 막공邈公이 대신 말했다.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합니다.
소공紹公이 대신 말했다.
“털끝만치도 떨어져 있지 않다.”
강 상좌가 대신 말했다.
“가까우려면 가까워지고 멀어지려면 멀어지느니라.”
이에 선사가 말했다.
“어떤 것이 가까워지려면 가까워지는 것인가?”
“같은 바퀴자국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멀어지려 하면 멀어지는 것인가?”
“뭇 바퀴살과 같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것이 먼저인가?”
“뭇 바퀴살과 같지 않은 것이 먼저입니다.”
이에 선사가 칭찬하였다.
“그렇다, 그렇다.”
“어떤 것이 법신法身의 주인입니까?”
선사가 양구하니, 스님이 다시 물었다.
“듣건대 돌아가신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부가 현묘하지 않으면 속된 중이 된다’ 하셨다는데, 어떤 것이 현묘함입니까?”
이에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가 질문하기 이전의 일이니라.”
“그렇다면 그대로가 현묘함이 아니겠습니까?”
“현묘하다면 속된 중이 아니다.”
“어떤 것이 현묘함입니까?”
“질문을 바꾸어라.”
“3승 12분교에도 조사의 뜻이 있습니까?”
“있느니라.”
“이미 조사의 뜻이 있었다면 무엇 하러 다시 서쪽으로부터 왔습니까?”
“그저 3승 12분교에도 조사의 뜻이 있기 때문에 서쪽에서 왔느니라.”
“어떤 것이 화상의 가풍家風입니까?”
“그런 주정뱅이에게 물어서 무엇 하겠는가?”
그리고는 또 말했다.
“그대가 묻지 않았더라면 조산도 알지 못했을 것이니라.”
“어떤 것이 다른 종류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다른 가운데서는 종류를 대답하지 않느니라.”
그리고는 또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해 준다면 나귀 해에나 다름을 얻겠는가?”
또 말했다.
“조산에게는 단지 눈썹 한 쌍이 있을 뿐이니라.”
“문수文殊는 어째서 구담瞿曇을 향해 칼을 뽑았습니까?”
“그대의 오늘을 위해서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문수를 잘 해치는[善害] 이라고 말하였습니까?”
“대비大悲로써 뭇 중생을 보호하기 때문이니라.”
“다 죽인 뒤에는 어찌합니까?”
“죽지 않는 자를 비로소 아느니라.”
“그 죽지 않는 자는 구담瞿曇에게 어떤 권속입니까?”
“그대에게 이름이야 지어 주겠지만 권속이 되지 못할까 걱정이구나.”
“하루 동안을 어떻게 모셔야 합니까?”
“그대는 반드시 잘 해치는 이가 될 것이니라.”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기를,
‘큰 바다는 시체를 간직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어떤 것이 큰 바다입니까?”
“만물을 포용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시체입니까?”
“숨이 끊어진 자이니 그들을 붙들지 않느니라.”
“만물을 포용한다면서 어찌하여 숨이 끊어진 자들은 붙들지 않습니까?”
“큰 바다에겐 그러한 공이 없지만 숨이 끊어진 자에겐 그러한 덕이 있기 때문이니라.”
“큰 바다도 위로 향하는 일이 더 있습니까?”
“있다 해도 되고 없다 해도 되겠지만 용왕이 칼을 빼들고 있음이야 어찌하겠는가?”
선사가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손에 든 것이 무엇인가?”
스님이 대답했다.
“부처님 머리 위의 보배 거울입니다.”
“부처님 머리 위의 보배 거울이라면 어째서 그대의 손에 들어 있는가?”
스님이 대답이 없으니, 선사가 대신 말했다.
“‘부처님들도 역시 저의 후손들입니다’ 하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도 도를 알지 못하니, 나 스스로 수행을 하리라.’ 하였다는데, 어떤 것이 부처님이 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부처의 경계에는 안다는 것이 없느니라.”
석문石門이 말했다.
“더 알아서는 무엇에 쓰겠는가?”
“어떤 것이 스스로 수행하는 것입니까?”
“위로 향하는 것에는 아무 일도 없느니라.”
“그것뿐입니까, 아니면 별다른 도리가 있습니까?”
“그것뿐이라 한들 누가 어찌하겠는가?”
“크게 보임保任하는 사람이 한 생각을 잃을 때는 어떠합니까?”
“비로소 보임을 하게 되느니라.”
“큰 마왕魔王이 되었을 때는 어떠합니까?”
“부처가 있다는 것을 모르느니라.”
“최후의 일이 어떠합니까?”
“부처도 그 일을 하지 않느니라.”
“큰 이익을 짓는 사람도 비슷해질 수 있습니까?”
“비슷할 수 없느니라.”
“어째서 비슷하지 못합니까?”
“큰 이익을 짓는다는 말도 듣지 못했느냐?”
“이 사람도 존귀함을 압니까?”
“존귀함을 모르느니라.”
“어째서 존귀함을 모릅니까?”
“그가 조산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니라.”
“어떤 것이 조산입니까?”
“큰 이익을 짓지 않는 것이니라.”
“듣건대 감천甘泉이 말하기를,
‘밭가는 농부의 소를 끌고 가고 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는다’ 했다는데, 어떤 것이 밭가는 농부의 소를 끌고 가는 것입니까?”
“노지露地를 주지 않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는 것입니까?”
“제호醍醐를 없애 버리는 것이니라.”
“듣건대 옛사람이 말하기를,
‘볼 때에는 얕고도 얕으나 쓸 때에는 깊다’ 하였는데, 볼 때에 얕고도 얕다는 것은 그만두고, 어떤 것이 깊은 것입니까?”
선사가 깍지를 낀 채 눈을 감았다. 이에 학인學人이 더 물으려 하자, 선사가 말했다.
“검은 멀리 사라졌는데 무엇 하러 뱃전에다 표시를 새기려 하는가?”
“어떤 것이 현묘함입니까?”
“어째서 진작 묻지 않았는가?”
“어떤 것이 현묘함 가운데 다시 현묘한 것입니까?”
“짐짓 한 사람이 있느니라.”
“듣건대 스님께서 신풍新豊의 말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한 빛깔이 있는 곳에 나눌 수 있는 이치와 나눌 수 없는 이치가 있다’ 하셨다는데, 어떤 것이 나누는 것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일색一色과 같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그러하니라.”
“어떤 것이 나눌 수 없는 이치입니까?”
“가릴 수가 없는 곳이니라.”
“가릴 수 없는 그 자리야말로 부자父子가 한 몸으로 통하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하니라. 그대도 아는가?”
“바야흐로 일색이 될 때에는 위로 향하는 일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위로 향하는 곳에는 본래 일색이 없느니라.”
“그 일색도 종문 속의 뜻입니까?”
“아니다.”
“아니라면 어떤 사람에게 말해 줍니까?”
“나는 단지 종문 가운데는 알아들을 이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 사람을 위해서 말해 줄 뿐이니라.”
“그렇다면 순식간이란 것과 점진적인 것도 있겠습니다.”
“내가 만일 순식간의 것과 점진적인 것을 말했다면 삿됨에 빠지는 것이니라.”
“종문 안의 일은 어떻게 알아야 합니까?”
“모름지기 그 안의 사람이라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그 안의 사람입니까?”
“내가 이 산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아직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느니라.”
“지금 그런 이가 없다면 화상께서 옛사람을 만날 때에는 어찌 아셨습니까?”
“손을 벌리지 않는다.”
“옛사람의 뜻은 어떠합니까?”
“사리여, 그냥 손을 벌리지 말라.”
“그렇게 하면 화상께서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옛사람이 그대를 꾸짖느니라.”
“어떤 것이 칼날 없는 검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담금질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자는 어떠합니까?”
“맞서 오는 자는 모두 죽느니라.”
“맞서는 이가 없으면 어찌합니까?”
“그래도 죽는다.”
“맞서 오지 않는 이가 어째서 죽습니까?”
이에 선사가 말했다.
“일체의 것을 다 죽일 수 있는 말도 들어 보지 못하였는가?”
“다 죽은 뒤에는 어찌합니까?”
“비로소 이러한 칼이 있음을 아느니라.”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사문의 모습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온 시력을 다해도 볼 수 없느니라.”
“베낄 수 있습니까?”
“만일 베낀다면 사문의 모습이 아니니라.”
“어떤 것이 사문의 봇짐입니까?”
“머리에 뿔을 이고, 몸에는 털옷을 입었느니라. 이 사람은 누구의 힘을 얻었기에 이렇게 될 수 있었는가?”
“하루 종일 남의 힘을 얻어도 행하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무엇을 귀하게 여깁니까?”
“머리에 뿔을 이지 않고 몸에 털을 걸치지 않은 것이니라.”
선사가 천복天復 원년 신유의 여름에 갑자기 한마디 하였다.
“운암 노장도 62세에 열반에 드셨고, 작고하신 옛 스승인 동산도 62세에 열반에 드셨다. 나 조산도 올해 62세이니, 그들을 따라 사리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으리라.”
윤 6월 15일 밤에 주사主事에게 물었다.
“오늘이 며칠인가?”
“윤 6월 15일입니다.”
“조산이 한평생 행각行脚을 하였는데, 간 곳마다 90일로써 한 철을 삼았느니라.”
그리하여 이튿날 진시가 되자 열반에 드니, 춘추는 62세요, 승랍은 37세요, 시호는 원증元証 대사였다.
[화엄 화상] 華嚴
동산洞山의 법을 이었고, 낙경洛京에서 살았으며, 휘諱는 휴정休靜이다. 동도東都 지방을 크게 교화하니 선가禪家에서 독보적 존재였으며, 화엄사華嚴寺에 머물렀다.
이때 어떤 이가 물었다.
“해가 뜨기 전에는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밝은 임금을 생각하고, 도가 크면 평범해지느니라.”
선사가 서울에 있을 때, 가끔 궁내의 공양 청장을 받고 나갔는데, 다른 큰스님들은 모두 경을 읽어도 선사와 그의 제자만은 경을 읽지 않았다.
그러자 왕이 물었다.
“스님께서야 전부터 경을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제자는 무엇 때문에 경을 읽지 않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왕도가 태평하면 천자의 명을 전하지 않고, 사람들이 모두 태평가를 부릅니다.”
“왕자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어떠합니까?”
“6궁의 유희에 빠져 나라 안의 어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왕위에 오를 때는 어떠합니까?”
“주렴을 가지런히 걷어 올리니, 사상四相이 조례朝禮의 의식을 갖춥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어떠합니까?”
“황금 상자에 옥새玉璽를 넣어 두고, 어가御駕를 타고 사방으로 왕래합니다.”
“크게 깨달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다시 미혹해집니까?”
“깨어진 거울은 다시 비추지 못하고, 떨어진 꽃은 다시 가지에 오르기 어렵습니다.”
“스님은 젊은 후생인데도 어떻게 남보다 먼저 선지식이 되셨습니까?”
“3년 된 가옥이면 용과 봉이 새끼를 치고, 백 년 묵은 섬돌 밑에는 늙은 신하가 문안을 드립니다.”
“조사의 뜻과 경전의 뜻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용궁의 창고에 들어가지 않고서야 여러 이치를 어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선사가 처음으로 동산을 뵈었을 때 물었다.
“보기는 보았으나 식심[識]과 망정[情]의 구름이 거짓같이 덮인 것이야 어찌하겠습니까?”
동산이 대답했다.
“그대도 보았는가?”
“보았습니다.”
“보았다면 어째서 식심과 망정의 구름이 거짓같이 덮였는가?”
“그러나 식심과 망정의 구름이 거짓같이 덮였음이야 어찌하겠습니까?”
이에 동산이 말했다.
“그렇다면 만 리에 한 치의 풀도 없는 곳으로 가서 서 있으라.”
계림溪林 화상이 목검을 들고 와서 말했다.
“마魔가 와서 나를 괴롭힙니다. 마가 와서 나를 괴롭힙니다.”
어떤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와서 물었다.
“화상께서는 평소에 어째서 마에게 괴롭힘을 당하십니까?”
이에 계림이 대답했다.
“도적은 가난한 집을 털지 않느니라.”
어떤 사람이 선사에게 와서 이 말을 전하니, 선사가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으리라.”
그 스님이 물었다.
“화상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나를 괴롭히는 마는 없다.”
“화상에게는 어째서 괴롭히는 마가 없습니까?”
“도적은 가난한 집을 털지 않느니라.”
화산禾山이 이 말을 들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말해야 두 화상의 뜻을 회통하고, 또 스스로가 주인이 되겠는가?”
스님이 대답이 없자, 스스로 대신 말했다.
“있음에 인하지 않고 없음 또한 아니니라.”
나중에 하북河北으로 갔다가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머물다가 입적하였다. 입적한 뒤에 다비茶毘하고, 사리는 네 곳에다 모시어 탑을 세웠다. 시호는 보지寶誌 대사요, 탑호塔號는 무위無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