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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12권
4. 변연기품(辯緣起品)①
4.1. 유정세간과 기세간[2]
2) 5취(趣)
취(趣)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취’란 어떠한 곳이며, 몇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3계] 중에 지옥 등은
자신의 명칭에 따라 5취(趣)로 설해지니
오로지 무부무기로서
유정에 속하지만 중유(中有)는 아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3계 중에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5취가 존재한다고 설하니, 자신의 명칭이 지시하는 바와 같다.
즉 앞에서 설한 지옥ㆍ방생(傍生)ㆍ아귀(餓鬼), 그리고 인간과 천(天), 이것을 5취라고 이름하는데,95) 오로지 욕계에만 4취 전부가 존재하며, 3계에는 각기 천취의 일부가 존재한다.
그리고 계(界)에는 [포섭되지만] ‘취’에 포섭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3계 중에는 5취가 존재한다’고 설한 것으로, 선(善)ㆍ염오ㆍ무기ㆍ유정(有情)ㆍ무정(無情), 그리고 중유(中有) 등은 모두 다 [3]계[에 포섭되는] 존재[界性]이지만, ‘취’ 자체에는 오로지 무부무기와 유정만이 포섭될 뿐 중유는 포섭되지 않는다.96)
여기서 ‘5취 자체에는 오로지 무부무기만이 포섭된다’고 말한 것은, ‘취’의 본질이 오로지 [숙업에 의해 초래되는] 이숙생(異熟生)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이미 ‘취’에는 오로지 유정만이 [포섭될] 뿐이라고 해석하였던 것이니, 무정물 중에는 이숙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5취 자체에는 오로지 무부무기만이 포섭된다’고 하는 사실은 이를테면 『칠유경(七有經)』에서 [설하고 있는 바로서], 결정코 마땅히 신수(信受)해야 한다.97)
즉 경에서는 일곱 가지 존재[七有]를 설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지옥유(有)ㆍ방생유ㆍ아귀유ㆍ천유ㆍ인유ㆍ업유(業有)ㆍ중유가 바로 그것이다.98)
여기서 업유는 바로 5취의 원인으로, ‘취’와는 다른 ‘원인’으로 간택하고 있으니, 그래서 별도로 설하게 된 것이다. 즉 이 경에서는 ‘5취 자체에는 오로지 무부무기만이 포섭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5취와는] 다른 [그것의] 원인으로 업유를 간택하고 있으니,99) 이치 또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선(善)이나 염법(染法)이 바로 ‘취’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취’는 마땅히 뒤섞여 버리고 말 것이니, 어떤 한 ‘취’의 소의신 중에는 다양한 종류의 번뇌와 업이 모두 바로 일어날 수 있고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100) 즉 경에서는 업유를 중유와 마찬가지로 별도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취’의 원인이기 때문에 결정코 ‘취’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견탁(見濁)의 경우와도 같은 것이 아니니, [성교에서] “‘견’은 바로 번뇌이다”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곳에서도 업이 바로 ‘취’의 자체라고 설한 일은 없기 때문에 ‘견탁’의 경우를 예증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101)
오로지 이숙생만이 바로 온갖 ‘취’의 본질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깨달아 알게 된 것인가?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존자 사리자(舍利子)는 이같이 말하였다.
구수(具壽)여, 만약 어떤 이에게 지옥의 [과보를 받을 만한] 온갖 번뇌[漏]가 현전하는 일이 있다면, 지옥의 이숙을 초래할 업[順地獄受業]을 조작하고 증장할 것이니, 그때 그의 신ㆍ어ㆍ의 업은 첨곡(諂曲)ㆍ진예(瞋穢)ㆍ탐탁(貪濁)할 것이기 때문에 나락가 중에서 5온의 이숙을 받게 된다.
즉 그 같은 이숙이 이미 일어났으면 그것을 나락가(那落迦)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니 5온의 법을 배제하고서 어떻게 그러한 나락가가 획득될 수 있을 것인가?”102)
여기서 이미 이숙생인 색 등의 5온을 배제할 경우 별도의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였으며, 그러한 이숙[과]가 이미 일어난 것을 나락가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취’ 자체는 오로지 바로 이숙생임을 알아야 한다.
즉 지옥의 업을 낳는 것을 지옥의 번뇌[漏]라고 말하고, 지옥의 생을 초래하는 것을 지옥의 업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번뇌와 업이 바로 지옥의 자체는 아닌 것이다.
논(論)에서
“5취는 일체의 수면(隨眠)에 의해 수증(隨增)된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을지라도,103)
[거기서는] 취와 아울러 취가 능히 마음을 결생(結生)시킨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104)
중유는 ‘취’가 아니라는 사실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알게 된 것인가?
경(經)과 논(論)과 올바른 이치[理]를 결정적인 근거[定量]로 삼았기 때문이다.
먼저 경을 근거로 삼았다고 함은, 이를테면 『칠유경(七有經)』에서 [중유와는] 별도로 5취를 설하고 있음을 말하니, [여기서 중유는] 원인으로서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논을 근거로 삼았다고 함은,
『시설족론(施設足論)』에서
“4생(生)은 5취를 포섭하여도 5취는 4생을 포섭하지 않는다. 포섭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중유이다”105)라고 설하였으며,
『법온족론』에서도
“안계(眼界)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4대종과 소조의 정색(淨色)으로, 바로 지옥ㆍ방생ㆍ아귀ㆍ인간ㆍ천의 취(趣)와 수소성(修所成)과 중유의 안(眼)ㆍ안근(眼根)ㆍ안처(眼處)ㆍ안계(眼界)이다”106)라고 설한 것을 말한다.
올바른 이치를 근거로 삼았다고 함은, ‘취’란 [업에 의해] ‘가게 되는 곳[所往]’이지만 중유를 마땅히 ‘가게 되는 곳’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것에 의해 ‘가게 되는 처소’로 능히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중유)은 바로 죽는 곳[死處]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가게 되는 처소’가 아니기 때문에 ‘취’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색계도 역시 마땅히 ‘취’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죽는 곳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그렇지 않으니, 모든 무색은 죽는 곳이 바로 태어나는 곳으로, 다른 곳으로 가지 않지만,
중유는 비록 죽은 곳이 바로 태어나는 곳이라 할지라도 다른 곳으로 가기 때문에 ‘취’ 자체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중유’라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중간에 존재하는 단계[中有地]이기는 하지만 결정코 사유(死有)와 생유(生有)의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으로, 생유와 무간에 사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본유(本有)를 중유라고 이름하는 과실은 없다.107)
혹은 그것은 [동일한 ‘취’의] 이류(異類)의 두 생 중간에 일어나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중유라고 이름한 것으로,
[반드시] “두 가지 ‘취’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중유라고 이름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그럴 경우 ‘중유 즉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에’라는 논거는] ‘중유는 바로 취에 포섭된다’는 주장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중유는 취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주장명제[宗]의 논거[因]로서 확정적이지 않은 것[不成]이다.108)
3) 7식주(識住)
앞에서 설한 [3]계와 [5]취 중에는 그 순서대로 식주(識住)에 일곱 가지가 있다.109)
그것의 일곱 가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체가 다르고 생각도 다른 것과
신체는 다르지만 생각은 동일한 것과
이와 반대되는 것과, 신체와 생각이 동일한 것과
그리고 무색계의 아래 세 가지 처이다.
때문에 식주에는 일곱 가지가 있는 것으로
그 밖의 처는 식주가 아니니, 손괴함이 있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를테면 만약 간략히 논설하면, 욕계의 인(人)과 천(天), 그리고 [색계와 무색계의] 아래 세 정려와 [세] 무색정, 이러한 7생처(生處)가 바로 식주(識住)의 본질[體]이다.
그러나 널리 분별하자면, 마땅히 계경에 따라야 할 것이니,
“유색(有色)의 유정으로서 신체가 다르고[身異] 생각도 다른[想異] 인간과 일부의 천(天)과 같은 이가 바로 제1식주이다”라고 하였다.110)
여기서 ‘일부의 천’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욕계의 6천과, 겁초(劫初)에 생겨난 자를 제외한 초정려[의 온갖 천]을 말하며,111)
‘유색의 유정’이란 말은 색신을 성취하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신체가 다르다’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그들의 색신은 여러 가지의 색깔ㆍ형태[顯形]와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신체가 다르기 때문에, 혹은 다른 신체를 가졌기 때문에 그러한 유정을 설하여 ‘신체가 다르다’고 일컬은 것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그들은 고(苦)ㆍ낙(樂)ㆍ불고불락(不苦不樂)으로 생각[想]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혹은 다른 생각을 지녔기 때문에, 혹은 다른 생각을 익혀 그러한 성질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유정을 설하여 ‘생각이 다르다’고 일컬은 것이다.
“유색의 유정으로서 신체는 다르지만[身異] 생각은 동일한[想一] 자가 있으니, 범중천(梵衆天)과 같은 이로서 이를테면 겁초에 일어난 자가 바로 제2 식주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겁초에 일어났으므로 그들 여러 범중천들은 다 같이 이같이 생각하였다.
“우리들은 모두 다 대범(大梵)의 화생(化生)이다’라고.
그리고 그때 대범도 역시 이같이 생각하였다.
“이러한 여러 범중들은 모두 다 나의 화생이다”라고.112)
어떠한 이유에서 범중천은 다 같이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인가?
범왕의 처소와 형태[形色], 그리고 신통 등이 모두 수승하다고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대범왕은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밖의 다른 천들은 그 후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라고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상지(上地)로부터 몰(沒)하였다는 사실을 능히 관찰하지 못하였으니, 초정려에 근거하여 숙주통(宿住通)을 낳았기에 상지의 경계를 능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113)
어떠한 이유에서 대범왕 역시 이같이 생각하게 되었던 것인가?
그가 문득 마음을 발함에 범중이 바로 생겨났기 때문에 자기가 변화한 것이라고 여겼으니, [그들이] 신속히 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은 업의 과보가 초래되는 이치에 대해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혹은 자기 신체의 형상이나 세력, 수명, 위덕 등이 그 밖의 다른 범중에 비해 뛰어난 것이라고 관찰하였기 때문이니,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범중천과 대범왕은 신체는 비록 다를지라도 동일한 생각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체가 다르다’고 말한 것은 초정려 중에는 신체를 초래하는데 원인이 된 유표(有表)ㆍ무표(無表)ㆍ심(尋)ㆍ사(伺)와 다수의 식(識)이 차별되기 때문으로, 중생을 안립하는데 신체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유색의 유정으로서 신체가 동일하고[身一] 생각이 다른[想異] 극광정천(極光淨天)과 같은 이가 바로 제3 식주이다.”
여기서는 뒤의 천(즉 제2정려의 최후인 극광정천) 만을 언급하였지만 아울러 처음의 천(역시 제2정려 천인 小光天과 無量光天)도 포섭되니, [제3식주는] 제2정려를 모두 포섭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러한 소광천이나 무량광천은 어떠한 식주에 포섭될 것인가? 즉 그러한 두 천도 이미 제3식주의 상(相)을 갖고 있어 식주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설할 만한 이유가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치를 드러냄에 의거하여 온갖 식주를 설한 것으로, 다만 [경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즉 그러한 천 중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표업 등의 원인에 의해 초래되는 차별적인 신체적 형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체가 동일하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동일한 처소에서의 신체 모양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지 처소가 다른데도 [신체의 모양에 차이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114)
그리고 제2정려는 희(喜)와 사(捨)의 두 생각[想]이 뒤섞여 현전하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고 말하였다.
즉 그러한 천중(天衆)들은 근본지(根本地)의 희근(喜根)을 싫어하여 근분지(近分地)의 사근(捨根)을 일으켜 현전시키고, 다시 근분지의 사근을 싫어하여 근본지의 희근을 일으켜 현전시키니,
비유하자면 어떤 이가 온갖 음식에 대해 소박하고 기름진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여 서로를 증익시키는 것과 같다.115)
“유색의 유정으로서 신체가 동일하고[身一] 생각이 동일한[想一] 변정천(遍淨天)과 같은 이가 바로 제4 식주이다.”
여기서 ‘신체가 동일하다’고 말한 뜻은 앞에서 해석한 바와 같으며, 오로지 낙(樂,즐거움)의 생각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이다.
즉 변정천의 즐거움은 적정 미묘하여 항상 기쁘고 즐거운 생각만 낳을 뿐 싫어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때가 없으니, 그렇기 때문에 근분정(近分定)으로 말미암아 서로 뒤섞이는 일이 없으며, 그래서 오로지 이(樂想)에 근거하여 ‘생각이 동일하다’는 말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생각이 동일하고 동일하지 않음에 대해 다시 정리하면] 초정려에 대해서는 염오한 생각[染汚想]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이니, 원인이 아닌 것에 대해 계금취견을 일으켜 원인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이다.116)
제2정려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선한 생각[善想]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다르다’고 말한 것이니, 등지(等至)의 힘에 따라 두 가지 수(受: 喜受와 捨受)가 서로 교차하여(뒤섞여) 현전하기 때문이다.117)
제3정려에서는 무기의 생각[無記想]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이니, 순일(純一) 적정(寂靜)하여 이숙의 낙수(樂受)만이 현전하기 때문이다.118)
나아가 아래 세 가지 무색정(無色定)의 명칭의 차별은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이것이 바로 세 가지 식주로서, 이상의 식주를 일컬어 7식주라고 한다. 그리고 세 가지 무색정에 대한 해석은 『순정리론』에서 [설한 바와] 같다.119)
여기서 어떠한 법을 일컬어 식주(識住)라고 한 것인가?120)
이를테면 그곳에 계속(繫屬)되는 5온과 4온을 말하니,121) 식(識)은 거기에 낙주(樂住)하며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로지 유정수(有情數)만이 ‘식주’라는 명칭을 획득하니,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온갖 식이 머물고 집착하는 바를 나타내기 위해 계경에서 7식주라는 말을 설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그 밖의 처소는 식주에 포섭되지 않으니, 그러한 처소에서는 식이 손상되고 파괴[損壞]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식은 거기에 낙주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 밖의 다른 처소란 무엇을 말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악처(惡處,지옥ㆍ아귀ㆍ방생)와 제4정려, 그리고 유정천(有頂天: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를 말한다.
어째서 거기서는 식이 손상되고 파괴되는 일이 있는 것인가?
그곳에는 ‘식’을 손상시키고 파괴하는 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컬어 ‘식’을 손상시키고 파괴하는 법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악처에는 무거운 고수(苦受)가 존재하여 능히 ‘식’을 손상시키며,
제4정려에는 무상정(無想定)과 무상사(無想事: 무상과)가 존재하고,
유정천 중에는 멸진정이 존재하여 능히 ‘식’을 파괴하고 그 상속을 끊어지게 하는 것이다.”
다시 [유여사는] 설하였다.
“만약 [앞에서 언급한 악처 등을 제외한] 다른 처소에 처해 있는 유정이라면, 마음이 즐거이 와 머물며, 만약 그곳에 이를 경우 다시는 나가려고 희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설하여 ‘식주’라고 이름하였다.
그렇지만 온갖 악처에는 이러한 두 가지의 뜻이 모두 없으며, 제4정려의 마음은 항상 나가기만을 희구하니,
이를테면 모든 이생(異生)은 무상(無想)에 들기만을 희구하고,
혹은 모든 성자는 정거(淨居) 등을 즐기며,
혹은 정거천은 적멸(寂滅)의 증득만을 즐기기 때문에,122)
그리고 유정천은 어둡고 저열[昧劣]하기 때문에 ‘식주’가 아닌 것이다.”
어떤 이는 [다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식(識)의 애력(愛力)이 집수(執受)하여 거기에 안주(安住)하는 것을 설하여 ‘식주’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일체의 악처나 정거천 등은 업력(業力)이 집수하여 거기에 안주하며,
무상(無想)의 유정과 유정천(有頂天)은 견력(見力)이 집수하여 거기에 안주하니,
이에 따라 그것들은 모두 식주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유여사는 [다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중생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온갖 경계대상[境]과 즐거움[樂]과 생각[想]에 대해 즐거이 집착하는 자가 바로 그들이다.
경계대상에 대해 즐거이 집착하는 자는 바로 인간과 욕계의 천이며,
즐거움에 대해 즐거이 집착하는 자는 바로 아래의 세 정려이며,
생각에 대해 즐거이 집착하는 자는 아래의 세 무색정이다.
오로지 이러한 처소에 대해서만 ‘식주’라는 명칭을 설정할 뿐으로, 그 밖의 다른 처소에는 이러한 세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식주’를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上代)의 논사들로부터] 계승되어 내려온 설에 따르면,
“만약 견(見)ㆍ수소단(修所斷)과 무단(無斷)의 식을 모두 갖추고 있는 처소라면 ‘식주’라는 명칭을 설정하지만, 이와 다른 곳이라면 식주에 포섭되지 않는다.”
즉 욕계에는 소의에 근거하여 무루의 식이 존재한다고 말할 만한 선정이 존재하지 않지만, 비상[비비상처]에는 자성에 근거하여 무루의 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할 수 있는 선정이 존재한다.
혹은 욕계 인취와 천은 하나의 소의신 중에 세 종류의 식을 모두 갖출 수 있지만, [비상]비비상처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123)
그리고 제4정려는 비록 세 종류의 식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5처(處)의 전부와 1처의 일부는 세 종류의 식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소수는 다수에 따르므로 식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주의 수(數)는 오로지 일곱 가지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7식주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으니,
4) 9유정거(有情居)
이에 따라 다시 9유정거(有情居)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124)
그 아홉 가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앞의 7식주와] 아울러 유정천(有頂天)과
그리고 무상천(無想天)의 유정이
바로 9유정거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그 밖의 곳은 즐거이 머물지 않기 때문에 유정거가 아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의 7식주와 아울러 제일유(第一有:즉 非想非非想處인 有頂天을 말함)와 무상천(無想天)의 유정, 이것을 일컬어 아홉 가지라고 하니, 모든 유정류들은 오로지 이러한 아홉 곳에서만 즐거이[欣樂] 머물기 때문에 ‘유정거(有情居)’로 설정한 것이다.
이를테면 모든 유정들이 스스로 즐거이 안주하는데 근거가 되는 색 등은 실유물[實物]로서 다른 것이 아니니, 모든 유정들이 바로 가유(假有)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실유물은 바로 가유가 머무는 곳[所居]이기 때문에 유정거는 오로지 유정[이 머무는] 법이다. 그런데 유정류들은 자신의 소의신에 대해 애착하여 머물며 이를 증강시키는 것으로, 처소에 대해서가 아니다.
또한 처소를 유정거로 설정할 경우 유정거는 마땅히 뒤섞이게 될 것이지만, [유정이] 머무는 것에 뒤섞임이 없는 것은 오로지 내적 소의신을 갖기 때문으로, 유정거는 오로지 유정[이 머무는] 법인 것이다.
나아가 ‘태어난 것을 유정거라고 이름한다’고 이미 말하였으니, 유정거에는 중유(中有)가 포섭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모든 중유는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에 모든 유정들은 거기에 즐거이 안주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필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니,
본론(本論)에서
“태어나는 곳[生處]를 나타내기 위해 ‘유정거’를 설정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사(生死) 중에서 온갖 식(識)은 갈애[愛]로 말미암아 머물고 집착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하여 ‘식주’를 건립한 것이라면, 모든 유정은 자신의 의지(依止)에 애락(愛樂)하며 안주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유정거’를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두 갈래[門]의 건립은 차별되는 것이다.
유정천과 무상천은 이미 식주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유정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책망은 옳지 않으니, 그 뜻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두 곳에는 식을 허무는 법[壞法]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식이 즐거이 머물지 않기 때문에 ‘식주’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두 곳도 유정신(有情身)을 성취하고, 유정이 즐거이 머물기 때문에 아홉 가지에 포섭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만약 다른 처소로부터 기꺼이 와서 머물며, [다른 처소로] 옮겨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처소라면, 유정거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처소는 모두 유정거가 아니니, 즐거이 머무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밖의 다른 처소라고 함은, 온갖 악처(惡處)와, 무상천을 제외한 제4정려를 말한다.
즉 ‘악처는 모두 유정거가 아니다’라고 함은, 다른 처소로부터 기꺼이 와서 머무는 곳이 아니며, 역시 또한 머무는 도중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을 말한다.
‘제4정려로서 무상천을 제외한 그 밖의 천은 모두 유정거가 아니다’라고 함은, 비록 다른 처소로부터 기꺼이 와서 머무는 경우는 있을지라도 머무는 도중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광과천(廣果天) 등이 그러하다.
즉 [그곳의] 모든 이생들은 무상천이나 혹은 무색처에 드는 것을 즐거워하고,
모든 성자들은 정거천(淨居天)이나 혹은 무색처에 드는 것을 즐거워하며,
그리고 정거천처[의 유정]은 열반에 드는 것을 즐거워한다.
따라서 그러한 처소는 모두 유정거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5) 4식주(識住)
7식주에 근거하여 유정거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런데 다른 계경 중에서는 다시 4식주를 설하고 있다.125)
그것의 네 가지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4식주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4온(蘊)으로서 오로지 자지(自地)의 그것뿐으로
유독 식온(識蘊) 만은 식주가 아니라고 설하며
[7식주와 4식주는] 유루로서, 4구(句)로 포섭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식주의 네 가지란] 세존께서
“식(識)은 색(色)에 따라 머물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식은 행(行)에 따라 머문다”고 설한 바와 같다.126)
이러한 4식주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오로지 식(識)을 제외한 유루의 4온(蘊)이다.
또한 이것은 오로지 자지(自地)에 존재하는 것만 식주가 되며 다른 지에 존재하는 것은 식주가 되지 않으니, 식은 다른 지의 온에 따라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지의 온에 근거하여서도 역시 현전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다른 지의 온 중에 식은 즐거이 머물지 않으며,
“희애(喜愛)는 식을 윤택하게 하는 것으로, [4]온 중에서 증장 광대하게 한다”고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희애는 다른 지의 색 등의 [4]온 중에서는 능히 식을 윤택하게 하여 증장 광대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지의 온은 식주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자지 중에서도 오로지 유정수의, 오로지 자(自)상속의 그것만을 식주로 설정하니, 비유정수와 타상속[의 4온] 중에서는 식이 자상속의 경우처럼 즐거이 따라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그것 역시 식주가 되니, 그러한 것에 대해서도 희애는 식을 윤택하게 하고, 역시 또한 증장 광대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자신의 종의에 근거하여 식주를 건립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식주를 건립하게 된 인연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어찌하여 식온은 식주가 되지 않는 것인가?
또한 이러한 식주는 그 뜻이 어떠한가?
이를테면 식은 그러한 [4온] 중에서 희애의 힘에 의해 포섭되는 것을 ‘머물게 되는 것[所住,즉 대상]’으로 삼고, 아울러 ‘탐착하게 되는 것[所著]’으로 삼으니, 이것이 바로 식주의 뜻이다.127) 즉
“식은 색에 따라 머무는 것으로, 색에 머물고 색에 탐착한다”고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식온도 마땅히 식주가 되어야 할 것이니,
세존께서 역시 설하기를
“식식(識食) 중에도 희(喜)가 있고, 염(染)이 있으며, 희염(喜染)이 있기 때문에, 식은 거기에 머물며 그것은 식에 의해 제어[乘御]된다”고 하였던 것이다.128)
[식주로서] 오로지 네 가지만을 설한 것은, 식(識)을 자아로 간주하는 아견심(我見心)을 제거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그래서 식에 대해서는 식주를 설하지 않은 것이니,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사저계경(莎底契經)』중에서 말하기를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교법에 통달하여 보건대, 생사를 떠도는 것은 오로지 식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니, ‘식’이란 말하자면 세존께서 다른 명칭으로 아(我)라고 설한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였다.129)
바로 그러한 아견심을 제거하고 소멸하게 하기 위해 식이 다른 온에 근거하는 것임을 나타낸 것으로, [식] 자체가 바로 아(我)와 아소(我所)의 근거[依性]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식은] 능의(能依)이기 때문에 식이 머무는 갈래[識住門]에 오로지 네 가지가 있다고 설하였다’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며,
‘식주는 다만 네 가지로서 식은 [식주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진실이 아니다.130)
[그럼에도] 지금 여기서 ‘세존께서 설하신 식주는 오로지 색 등의 네 가지로,131) 식에 대해서는 [식주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다만 색 등[의 4온]만이 ‘상속하는 식[續有識]’에 대해 3시(時:과거ㆍ현재ㆍ미래)에 걸쳐 조반(助伴,식에 수반되어 그 생기를 돕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오로지 색 등[의 4온]만이 식과 구생하며, 과거ㆍ미래의 색 등도 역시 능히 식의 조반이 되어 상속하는 식으로 하여금 생사로 치닫게 하지만, 식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식주가 되지 않는 것이다.
가령 안(眼) 등의 근과 그것과 함께 하는 색 등은 구생하는 식에 대해 소의로서의 근거[依]가 되며, 이미 소멸하였거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즉 과거ㆍ미래의 5근과 5경)은 다만 식의 경계대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색온은 상속하는 식에 대해 3시에 걸쳐 능히 조반이 되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수(受) 등도 식과 구생하는 것으로서 구유인이 된다. 즉 일부(즉 현재)의 ‘수’ 등은 식과 함께 동일한 경계대상을 반연하며 조반의 작용을 갖지만, 이미 소멸하였거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즉 과거ㆍ미래의 ‘수’등)은 다만 식의 경계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수’ 등도 역시 상속하는 식에 대해 3시에 걸쳐 능히 조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식의 경우 비록 과거ㆍ미래의 식은 상속하는 식에 대해 약간의 조반의 공능[助能]을 지닐지라도 구생한 것 중에는 전혀 조반의 힘[助力]이 없으니, [식은 또 다른 식과] 구기(俱起)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색 등[의 4온]은 식에 대해 두 가지 조반의 공능을 갖추고 있지만,132) 식의 경우 오로지 과거ㆍ미래의 식만이 [조반의 공능을 갖기] 때문에 식주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조반의 공능을 갖지 않은] 비유정수나 다른 소의신 중의 색 등의 4온 역시 식주가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니, 그러한 것은 식에 대해 다만 소연이 될 뿐으로, 두 가지 조반의 공용(功用)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주의] ‘주(住)’란 이를테면 ‘머물게 되는 것[所住]’을 말하는 것으로, 바로 상속하는 식이 자신의 결과를 인기할 때 ‘능히 근거[依]로 삼는 것’이라는 뜻이다.
혹은 ‘주’라고 함은 ‘탐착하게 되는 것[所著]’을 말하는 것으로, 바로 상속하는 식이 자신의 결과를 인기할 때 ‘능히 경계대상으로 삼는 것’이라는 뜻이다.133)
그렇다고 할 때 자기 자신의 소의신의 색 등은 식에 대해 동일한 경계대상이 될 수 있으며, 설혹 동일한 경계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능히 근거가 되는 [등] 두 가지 조반의 공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식주로 설정한 것이지만, 비유정수와 다른 소의신의 색 등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식주가 되지 않는 것이다.134)
식주의 도리(이치)가 이와 같이 안립되는 것임을 어떻게 결정적으로 알게 된 것인가?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으로, 이를테면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네 가지의 근거[依]와 취착[取]하는 소연(즉 대상)이 있어 식이 머무는 것[識住]이다.
즉 식은 색에 따라 머무는 것으로, 색에 [근거하여] 머물고 색에 취착하니, 식은 혹 어떤 경우 색과 동시에 생겨나 색에 근거하여 머물기도 하며, 혹은 색의 경계대상을 반연하여 취착을 낳기도 하는 것이다.
어떠한 까닭에서 취착을 낳게 되는 것인가?
앞에서 설하였듯이 이(색)에 대한 희애(喜愛)가 [식을] 윤택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아가 식이 행(行)을 따라 머무는 것에 대해서도 마땅히 널리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세존께서는] 일찍이 ‘식은 식에 따라 머문다’고 설한 일이 없었다. 여기서 따르는 것[隨]이란 ‘친부(親附)’ 혹은 ‘인근(隣近)’ [즉 가까운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과거와 미래는 결정코 소원(疎遠)한 것(즉 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색 등은 식과 친근(親近: 親附 隣近의 준말)한 것(가까운 것)으로, 식과 구생하므로 ‘식이 따라 머무는 것[識隨住]’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식은 결정코 식과 구생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식은 식에 따라 머문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경설에 따라 오로지 [식을 제외한] 그 밖의 4온만이 상속하는 식에 대해 조반이 된다는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네 가지의 근거와 취착하는 것[依取]이 존재한다”고 세존께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근거와 취착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색 등의 4온을 말하니, 이는 생사의 근거[依]가 되는 것으로, 번뇌에 의해 취착[取]된다. 혹은 [생사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온갖 괴로움을 포섭하여 취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무루는 식주가 되지 않는다는 이치가 성립하는 것으로,
[계경에서는] 오로지 [식이] 근거하고 취착하는 것을 식주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무루의 색 등은 [식이] 근거하고 취착하는 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앞서의]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만약 색계(色界)에서 이미 이탐(離貪)을 획득하였다면 의근(意根)은 거기에 수반되는 색[所隨色]의 계박을 끊게 되고, 이렇듯 계박이 끊어짐에 따라 능연(能緣)의 식은 더 이상 [그러한 색에] 머물고 취착하여 증장되고 광대하게 되는 일이 없다. 내지는 수(受) 등의 3계(界) 역시 그러함을 널리 설해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경의 뜻에 준하여 보건대 3세의 색 등의 4온은 모두 다 식주에 포섭되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계승한 종의에서는 색 등[의 4온]과 식의 경우가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어떤 법과 식이 동시에 생겨나고, 식이 그것을 타고 부리는 것이 마치 사람이 배를 타고 부리는 이치와 같다고 한다면,135) 이러한 법을 식주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밖의 다른 법(즉 식)은 식주가 아니다.”136)
이와 같이 말한 뜻은 식주와 식의 차별을 간택하려는 것으로, 과거ㆍ미래의 색 등은 식주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비록 [현재의 식과 동시에 생겨나지 않는] 과거ㆍ미래[의 색 등]도 역시 식주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인정할지라도 비유정수는 식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현재 존재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식과 소원(疎遠)한 것이거늘 하물며 과거ㆍ미래에 존재하는 것을 식주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137)
그러나 자기 자신의 소의신의 색 등은 비록 과거ㆍ미래에 존재하여 식과 소원한 것이라 할지라도 현재법의 경우는 상속하는 식과 지극히 서로 친근(親近)하며,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에 역시 식주라고 이름할 수 있으니, 예컨대 현재세의 다른 마음[異心]이나 무심(無心)과 같은 두 상태에서조차 자기 자신의 소의신의 색ㆍ행의 2온을 [식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ㆍ미래의 색 등의 이치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니, 두 가지 조반의 공능을 갖추어 [식의 머무는] 특성을 상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색 등으로서 3세에 포섭되는 자(自)상속을 모두 식주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7식주와 4식주는 모두 오로지 유루에 포섭된다.
[그렇다면] 7식주가 4식주를 포섭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4식주가 7식주를 포섭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서로가 서로를 두루 포섭하지 않으니,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할 수 있다. 즉 7식주에는 포섭되어도 4식주에는 포섭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138)
제1구는 이를테면 7식주 중의 식이 바로 그것이다.
제2구는 이를테면 온갖 악처와 제4정려, 그리고 유정천 중의 식온을 제외한 그 밖의 온이 바로 그것이다.
제3구는 7식주 중의 [식온을 제외한] 4온이 바로 그것이며,
제4구는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행상을 제외한 것이다.139)
그리고 7식주 중에는 식이 존재하지만 4식주 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함은, 이러한 두 가지 갈래를 설정하는 근거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만약 어떤 법과 식이 서로에 대해 원인과 결과가 되고, 식이 즐거이 수전(隨轉)하는 경우라면 7식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만약 어떤 법이 식과 동시에 생겨날 수 있고 능히 조반(助伴)이 되는 경우라면 4식주로 설정하였다.
[또는] 교화될 중생의 품성(稟性)이 차별되기 때문에 7식주와 4식주를 동일하지 않게 설하게 된 것이다.140) 즉
혹 어떤 이는 각기 개별적으로 반연하는 [경계대상을] 즐기기도 하며, 혹 어떤 이는 전체적으로 요별하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
혹 어떤 이는 제법의 자상(自相)에 대해 두루 아는 것[遍知]을 즐기기도 하며, 혹 어떤 이는 자상에 대해 두루 아는 것을 즐기지 않기도 한다.
혹 어떤 이는 애(愛)에 탐착하고, 혹 어떤 이는 견(見)에 탐착하기도 한다.
혹은 자상(自相)의 번뇌력이 강력한 자도 있고, 혹은 공상(共相)의 번뇌력이 강력한 자도 있으며,
혹은 경계대상을 즐기기도 하고, 혹은 생사를 즐기기도 하니,
이와 같은 등의 성품의 차별은 끝이 없을 정도로 많다.
식주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