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나 아함경)의 내용과 부파불교의 아비달마[논]을 구별하여 생각해야 한다.
아비달마는 니까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해설하면서 논의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니까까(나 아함경)의 내용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요한 하나의 차이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 글에서는 아함경과 아비달다를 비교한다. 아함경과 니까야의 내용은 78% 일치한다고 한다.]
1.
아비달마에서는 ‘심법’[마음]과 ‘심소법’[마음작용]을 설정하였다.
여기서 마음은 마음[manas, 意]과 식[vijñāna, 인식]을 포함한 것이다.
‘아비담심론_2. 행품(行品)’에서 “마음[心]이란 의(意)이고 의란 식(識)이다. 실은 같은 것인데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아함경의 식은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인식과, 마음의 인식[의식]인 6인식을 가리킨다.
잡아비담심론_2. 계품(界品)에에서는 “의계(意界)란 곧 6식신(識身)이니, 이것을 떠난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아비달마의 식은 이 6식에 더하여 제7식[마나스식, 말나식]과 제8식[아뢰야식]을 설정하였다.
아함경에서 마음은 지각 기관인 6내입처의 하나이며, 눈ㆍ귀ㆍ코ㆍ혀ㆍ몸에 대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은 6내입처가 지각의 결과로 얻게 되는 6외입처를 아는 것을 가리킨다.
예컨데 눈으로 빛깔을 보고 아는 것이 눈의 식[안식]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그것들을 아는 것은 귀ㆍ코ㆍ혀ㆍ몸의 인식이다. 그리고 마음으로 법을 아는 것이 마음의 인식[의식]이다.
이를 보면, 아함경에서는 마음의 인식[의식]은 마음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이며, 마음 작용의 과정이자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식은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작용아다. 그것들은 마음이 아니며, 마음작용도 아니다.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몸의 작용이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식도 마음과 무관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눈이 없으면 눈의 식을 생각할 수 없고, 귀ㆍ코ㆍ혀ㆍ몸도 마찬가지이다.]
아함경에서 마음과 식의 관계를 간단히 말하자면, 마음은 지각 기관의 하나이지만, 식은 지각 기관이 아니다.
[물론 식은 마음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아함경에서 식은 마음 자체는 아니다.]
아함경에 의하면, 눈ㆍ귀ㆍ코ㆍ혀ㆍ몸과 마음, 그리고 그것들의 식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나가 아니다.
또 아함경의 세속의 법의 처지에서 보면 사람마다 다 다르다.
2.
아비달마에서는 마음[심법]을 자아와 세겨의 형성하는 가장 주된 요인으로 보았다. 이른바 유식론이다. 유식론에서는 6내입처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을 마음과 분리하여 생각하며, 몸과 마음을 완전히 다른 부류로 보는 듯하다.
마음을 중요시하는 유식론의 주장은 대승불교에서 유심론으로 계승되었눈데, 마음[의, 意]과 식[인식]을 동일시하고 있다.
대승유식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승(大乘)에서 ‘3계(界)에 식(識)만 있을 뿐이라’고 내세움은 경에서 ‘불자(佛子)여, 3계(界)란 마음만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나니, 그는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識]에 대한 총괄적인 명칭이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에서는 마음의 종류로서 ‘업식의 마음’을 들고 있으며, ‘의意’의 다섯 가지 이름으로 ‘업식, 전식, 현식, 지식, 상속식’의 ‘식’들을 들고 있다. 그리고 “삼계는 허위이고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며, “일체법이 모두 마음을 좇아 일어나 망념이 생기는 것이니 일체의 분별은 곧 자기 마음을 분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유심론은 화엄경의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일체유심조, 화엄경_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의 각립보살의 게송]라는 명제에서 잘 드러난다.
아함경에서는 마음을 눈ㆍ귀ㆍ코ㆍ혀ㆍ몸과 함게 6내입처의 한 요소로 본다.
따라서 체계로 보면, 아함경에서는 몸과 마음은 대등한 지위에 있다.
그런데 아비달마나 대승경전에서는 마음이 몸보다 더 위의 지위에 있는 듯이 생각된다. 만일 그렇다면 몸이 마음에 종속된, 마음에 지배되는 것으로 보는 것인가? 과연 그렇게 볼 수 있는가?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보통의 사람들은 마음이 몸에 묶여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니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고 아무리 강조한다 한들, 그 마음은 몸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또 사람들이 “내 마음 나도 모르는데...”라고 말하는 일이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사실이 그러할진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말이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보통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마음의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마음을 이해하기 이전에 먼저 몸의 성질을 충분히 이해하고는 마음이 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다. 눈, 귀, 코, 혀 등의 몸을 벗어난 마음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그것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에도 맞고, 또 아함경의 뜻에도 더 부합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3.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함경의 체계가 더 논리에 맞고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또 4성제나 12연기법 등의 진리에 관한 법의 체계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러하고, 37도품 등의 수행과 관련된 법에 비추어 보아도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비달마에서는 왜 식[인식]을 마음으로 간주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아함경의 처지에서 '제7식과 제8식은 무엇의 작용인가?'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 대답으로는 6내입처의 마음이 작용하여 일어난 의식의 모습들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심(心)ㆍ의(意)ㆍ식(識)에 대한 아함경의 용법은 ‘심(心)ㆍ의(意)ㆍ식(識), 심법ㆍ색법에 관한 아함경의 용법’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관한 더 이상의 논의는
‘마음의 두 측면, 본래의/해탈한 마음과 오염된 마음’에 이어진다.
(2023.11.10.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