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론 하권
23. 모든 부처님은 다섯 가지 눈으로써 중생들의 마음이 머무는 곳을 본다
【經】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肉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육안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天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천안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慧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혜안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法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법안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佛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불안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항하강(恒河江) 가에 있는 모래를 여래는 모래라고 말하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것을 모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 항하강 가에 있는 모래와 같이 많은 항하가 있고 이렇게 많은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알의 수효만큼의 불 세계가 있다면, 이와 같은 세계를 어찌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 세계는 매우 많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한 세계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얼마 되지 않는 종류의 마음이 머무는 곳을 여래는 다 알고 계시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씀하신 모든 마음이 머무는 곳은 다 마음이 머무는 곳이 아니므로 이것을 마음이 머무는 곳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이겠는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일곱 가지 보배를 보시에 사용한다면, 이 선남자와 선여인은 이러한 인연으로써 얻은 복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이러한 인연으로 얻은 복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수보리야, 저 선남자와 선여인은 이 인연으로 얻은 복덕의 덩어리가 매우 많을 것이니라.
그렇지만 수보리야, 만약 복덕의 덩어리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는 곧 복덕의 덩어리, 복덕의 덩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니라.”
【論】
다시 의심하기를
‘앞에서 보살은 저들은 곧 중생이라고 보지 않고 나는 보살이라고 보지 않으며 부처님 국토가 청정하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무슨 까닭에 모든 법을 보지 않는 것을 불ㆍ여래라 한다고 할까?
만약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모든 불ㆍ여래도 갖가지 법을 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할 것이므로
이 아래 경문(經文)에서는 이런 의혹을 끊게 하기 위해서 다섯 가지 눈을 말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비록 모든 법 보지 않아도
경계를 깨달아 아는 눈 없지 않으니
모든 부처님은 다섯 가지 눈으로써 진실로
저들의 뒤바뀐 견해를 본다.
‘무슨 까닭에 저렇게 말할까? 뒤바뀐[顚倒]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할 것이므로
이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하여 비유를 들어 밝힌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저 중생들의 가지가지 마음이 머무는 곳을 알고 있다”는 이와 같은 말을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을 보이기 위한 것인가?
저들이 뒤바뀐 것이 아니라, 뒤바뀌게 보는 까닭이다.
어떤 것이 뒤바뀐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갖가지 뒤바뀐 인식작용이
실상의 염처(念處)를 여의었기 때문에
저 실상의 지혜에 머물지 아니하니
그런 까닭에 뒤바뀐 말을 한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갖가지 뒤바뀜’이라고 한 것은, 갖가지 마음의 인연에 머무는 것을 가지가지 인식작용이라고 부르는데, 여섯 가지 인식작용이 각각 차별이 있기 때문에 뒤바뀐 견해가 생겨난다.
무엇 때문에 저 마음이 머무는 곳을 뒤바뀌었다고 부르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실상의 염처를 여의었기 때문에 저 진실한 지혜에 머물지 못하나니 그런 까닭에 뒤바뀐 말을 한다”라고 하였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마음이 머무는 곳은 모든 마음이 다 머무는 곳은 아니다’라고 한 이 구절은 4념처(念處)를 멀리 여읜 것을 나타내 보이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마음이 머문다’는 것은 저 염처에 머무는 것인데 저 염처를 여의었기 때문에 ‘머물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또 머문다는 것과 근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름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실한 지혜에 머물지 않는 까닭에 ‘마음이 머문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머물지 않고 계속 이어져서 행인(行因)이 끊어지지 않으므로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데, 저것이 계속 이어져 뒤바뀐 견해가 일어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경에
“무슨 까닭이겠느냐?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느니라”라고 한 것은
과거와 미래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은 허망한 분별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그 마음이 머물러 뒤바뀐 견해를 일으키므로 모든 인식작용이 허망하여 3세관(世觀)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무엇 때문에 복덕에 의거하여 거듭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불지혜(佛智慧)의 근본은
뒤바뀐 공덕이 아님을
이 복덕의 모습으로써
비유를 들어 거듭 말씀하셨다.
이 게송은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다시 의심하기를
‘앞에서 마음이 뒤바뀐 망상에 머물고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만약 이와 같다면 복덕을 얻는다는 것도 뒤바뀐 망상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뒤바뀐 망상을 선한 법[善法]이라고 부를까?’라고 하므로
이런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하여 마음이 머무는 것은 비록 뒤바뀐 것이지만 복덕이 뒤바뀐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게송에 이르기를
“불지혜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근본을 나타내 보였는가?
경에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는 곧 복덕의 덩어리, 복덕의 덩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유루(有漏)의 복덕 덩어리는 그것이 곧 뒤바뀐 것이다. 이 복덕의 덩어리는 곧 유루이기 때문에 여래께서 복덕의 덩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또 복덕의 덩어리라는 것은 곧 복덕의 덩어리이니, 왜냐하면 만약 복덕의 덩어리가 아니라면 여래께서는 지혜의 근본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복덕의 덩어리라고 한 것은 곧 복덕의 덩어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