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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8권
10. 업론[6]
10.19. 팔계재품(八戒齋品)
여덟 가지 계재(戒齋) 우바새(優婆娑)라 한다. 우바새를 진(秦)나라 말로는 선숙(善宿)이라 한다.
이 사람은 착한 마음으로 파계를 하지 않고 착함에 묵기[宿] 때문에 선숙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여덟 가지 일을 여의라고 말하는가?
[답] 이 여덟 가지는 문(門)으로서 이 여덟 가지 법으로 말미암아 온갖 악을 여윈다.
이 가운데서 네 가지는 실지의 악[實惡]이고, 술 마시는 것은 뭇 악의 문이며, 나머지 세 가지는 방일의 인연이다.
이 사람이 다섯 가지 악을 여의면 그것은 복 받을 인연이고 나머지 세 가지를 여의면 그것은 도 닦는 인연이다.
속인은 대부분이 착한 법이 모자라서 도 닦는 인연만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여덟 가지 법으로 다섯 가지 법[乘]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문] 이 여덟 가지의 재(齋)는 모두 받아야만 하는가? 일부를 받을 수도 있는가?
[답] 힘에 따라 지닐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법은 재계하기를 하루 낮 하룻밤만 지닌다”고 하나 그 일도 옳지 못하다.
계를 많이 받고 적게 받는데 따라서 혹 반나절도 좋고, 내지 한 달 동안 지닌다 한들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야 한다”고 하나 이 역시 정해 있지 않다.
만일 사람이 없을 때면 다만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입으로 말하되, “나는 여덟 가지 계율을 지니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계에는 다섯 가지 청정함이 있다.
첫째는 열 가지 착한 길을 행하며,
둘째는 앞뒤가 모두 착하며,
셋째는 악한 마음 때문에 괴로움을 받지 아니하며,
넷째는 생각으로써 수호하며,
다섯째는 열반에 회향(回向)하는 것이다.
이렇게 계를 지니면 네 가지 큰 보배 갈무리는 그의 일분(一分)에도 못 미치며 천왕(天王)의 복도 따르지 못한다.
제석(帝釋)이 게송을 외울 때 부처님은 꾸짖었으나 만일 샘이 다한 사람이면 이 게송을 말하여야 한다.
6재일이 든 신족(神足)의 달에
여덟 가지 계율을 받아지니면
이 사람이야 말로 복덕을 얻어서
바로 나와 똑같으리라.
이 재법(齋法)을 받으면 열반의 과보에 부응한다. 그러므로 샘이 다한 사람은 이 게송을 말하여야 한다.
재법을 받는 중에는 계박(繫縛)과 질곡(桎梏)을 마땅히 다 놓아 버리며 또 모든 불선한 인연을 끊게 되므로 이를 청정이라고 한다.
[문] 전륜성왕은 재법 받기를 좋아 한다는데 누가 그를 가르쳤는가?
[답] 대덕(大德)인 천신으로서 일찍이 부처님을 뵌 분이 그를 가르쳐서 받게 하였다.
10.20. 팔종어품(八種語品)
여덟 가지 말[八種語]이라 함은 네 가지 깨끗하지 못함[不淨]과 네 가지 깨끗함[淨]이다.
네 가지의 깨끗하지 못함이라 함은
만일 사람이 본 것을 보지 않았다하며 보지 아니한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보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보고서도 남이 묻는 말에 보지 않았다 대답하는 것이요.
보았다는 것은 보지 않고서도 남이 묻는 말에 보았다 대답하는 것이니,
그러한 말은 일이 뒤바뀌고 마음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네 가지의 깨끗함이라 함은
만일 보았으면 보았다 하고 보지 않았으면 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보았다 함은 보지 아니한 것이면 남의 묻는 말에도 보지 않았다 하고
보지 않았다 함은 보았으면 물음에 대하여도 보았다고 대답하는 것이니,
일도 진실하고 마음도 진실하기 때문에 깨끗하다는 것이다.
듣고 깨닫고 아는 것[聞覺知] 또한 그렇다.
[문]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세 가지의 믿음이 있다.
본다 함은 현재의 믿음에서 말하고
듣는다 함은 성현의 말씀을 믿음에서
말하며 안다 함은 견주어 앎을 말하고
깨닫는다 함은 분별에서 말한다.
세 가지 믿음은 지혜이며, 이 세 가지 지혜는 다 진실이기도 하고 다 뒤바뀌기도 한다.
상등(上等) 사람은 깨끗하지 않음을 일으키지 않고 다만 깨끗한 말만 일으킨다. 그러므로 하등 사람이 사용하는 바면 깨끗하지 못하다 하고 상등 사람이 사용한 바이므로 깨끗하다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뜻 안에서는 바른 지혜 지닌 이들을 모두 상등이라 하며, 도를 얻은 이뿐이 아니다”고 한다. 그러므로 범부에게도 깨끗한 말이 있다.
10.21. 구업품(九業品)
아홉 가지 업이라 함은 욕심 세계 매임의 업[欲界繫]의 세 가지인 지음[作]과 지음 없음[無作]과 지음도 아니고 지음 없음도 아님[非作非無作]이다.
형상 세계 매임의 업도 역시 그와 같으며, 무형 세계에는 두 가지와 샘 없는 업이다.
몸과 입으로 짓는 업을 지음이라 하고,
지음으로 인하여 쌓이는 바 죄와 복이 항상 따르는 그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법[心不相應法]을 지음 없음이라 한다.
또 마음만으로 생기는 지음 없음도 있다.
지음도 아니고 지음 없음도 아님이라 함은 바로 이런 뜻[意]으로서 듯은 바로 생각함[思]이다.
생각함을 업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만일 뜻으로 내생을 구하면 그것을 뜻의 업이라 하고 생각함이라고도 하며 후생 몸을 생각하기 때문에 업이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샘 없는 생각함은 없다.
[답] 만일 이것만으로 생각함을 삼는다면 샘 없음은 없다.
[문] 이 지음이 없음[無作]이 비록 몸으로부터 생긴다 할지라도 많고 적음의 차별이 있어야 하는가? 아닌가?
[답] 만일 온갖 몸으로서 모두가 지음의 업을 일으킨다면 이로 인하여 지음 없음을 많이 모아서 큰 과보를 얻으리라.
[문] 이 지음 없음은 어디에 있는가?
[답] 업도(業道)의 자체가 결정코 모으는 지음 없음은 혹 있기도 하고 혹 없기도 하며, 그 나머지는 마음에 상대되어 만일 마음이 굳세면 있고 마음이 부드러우면 없다.
또 이 지음 없음은 또한 소원으로부터도 생긴다.
만일 사람이 소원을 세우며, “나는 반드시 보시하여야겠다”고 하거나 혹은 “탐과 절을 일으켜야겠다”고 하면 이런 사람은 결정코 지음 없음을 얻는다.
[문] 이 지음 없음은 어느 때에 얻고 어느 때에 잃는가?
[답] 할 일의 있음에 따른다. 만일 동산과 숲과 탑과 절 등을 일으켜 보시하면 보시한 물건이 파괴되지 않음에 따라 그 동안에는 항상 따른다. 또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동안에는 따르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나는 항상 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함과 같다.
만일 모임이 있거나 옷을 보시하거나 간에 이런 일들이 마음에 있으면서 쉬어지지 아니하면 그 때에는 항상 얻는다.
또는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동안에는 따르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출가계(出家戒)를 받으면 그 때부터 언제나 얻는 것과 같다.
[문] 어떤 이가 말하기를 “욕심 세계 안에서만 지음으로부터 지음 없음이 생기며, 형상세계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는데 그 일은 어떠한가?
[답] 두 가지 세계에 다 있어야 된다. 왜냐하면 형상 세계의 모든 하늘도 설법할 수 있고 부처님과 스님에게 예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찌하여 지음의 업으로부터 지음 없음을 내지 않겠는가?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은몰무기(隱沒無記)에는 지음 없음이 없다”고 하나 그 일도 옳지 못하다.
은몰무기는 바로 무거운 번뇌로서 이 번뇌가 쌓이면 이름을 부림[使]이라 한다.
비슷하거나 은몰무기가 아닌 것에는 지음 없음이 없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하열하고 약해서 쌓임[集]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꽃은 행[麻]내음을 스며들 수 있으나 초목들로서는 그렇게 하지 못함과 같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범천의 세계를 지나서 그 위로는 업 짓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친 생각[覺]과 세밀한 생각[觀]이 구업[口業]을 일으키는 것인데 그 곳에는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없고 범천 세계의 마음만을 써서 구업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나 그 일도 옳지 못하다.
중생은 업에 따라 몸을 받는 것이어서 만일 웃 세계에 가서 나면 범천 세계의 과보를 쓰지 못해야 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제 땅의 마음으로써 구업을 일으키는 줄 알 것이다.
또 그대는 그곳에는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데 다음에 있다 함을 설명하겠다.
[문] 성인은 번뇌를 아직 다 끊지 못하고서도 지음의 업을 일으킬 수 있는가?
[답] 성인은 실죄(實罪)의 업을 일으킬 수 없다.
[문] 개 따위 중생의 소리는 바로 구업인가 아닌가?
[답] 비록 말씨[言辭]의 구별은 없으나, 마음으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에 역시 업이라 한다.
또 나투는 모양이거나 호령(號令)하는 것이거나 퉁소 피리 따위의 소리도 다 구업이라 한다.
이 몸과 입의 업은 반드시 의식(意識)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요, 다른 식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가 몸의 업을 보고 스스로가 입의 업을 듣는다.
의식의 일으키는 업이 서로 이어져서 끊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보고 듣는다.
10.22. 십불선도품(十佛善道品)
경전 중에서 부처님은 열 가지 착하지 않은 길[不善道]을 말씀하셨으니 살생 등이다.
다섯 가지 쌓임의 화합한 것을 중생이라 하는데 목숨을 끊기 때문에 살생이라 한다.
[문] 이 다섯 가지 쌓임은 생각생각에 항상 사라진다면 무엇으로 살생을 삼겠는가?
[답] 다섯 가지 쌓임은 비록 생각생각에 사라지지마는 도로 이어지면서 생기는 것인데 그 서로 이어짐을 끊기 때문에 살생이라 한다. 또 이 사람은 살생하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살생의 죄를 얻게 된다.
[문] 현재의 다섯 가지 쌓임을 끊기 때문에 살생이라 하는가?
[답] 다섯 가지 쌓임이 계속하는 동안에 중생이라는 이름이 있다면, 이 계속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살생이라 하며 생각생각에 사라지는 동안에 있는 중생의 이름을 말한 것이 아니다.
[문] 어떤 사람이 예전의 국법에 의하여 중생을 살해하는 일도 있고, 혹 강한 힘에 눌려서 부득이 중생을 살해하기도 하는데,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하면 그 일은 어찌되는가?
[답] 역시 죄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살생한 죄의 인연을 구비하였기 때문이다.
네 가지 인연으로 살생하는 죄를 얻게 된다.
첫째는 중생이 있고,
둘째는 중생인 줄을 알며,
셋째는 살생할 마음이 있었고,
넷째는 그 생명을 끊은 것이다.
이 사람이 이 네 가지 인연을 구비하였다면 어떻게 죄가 없겠는가?
도둑질이라 함은 이 물건이 실지로 그 사람에게 딸린 것인데도 빼앗거나 훔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도둑질이라 한다.
여기에도 네 가지의 인연이 있다.
첫째는 그 물건이 실로 남에게 소속되고,
둘째는 남의 소유물인 줄을 알며,
셋째는 빼앗거나 훔칠 마음을 가지고
넷째는 빼앗거나 훔치는 일을 끝낸 것이다.
[문]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땅 속에 묻혀 있는 광은 임금에게 속한지라 만일 이 물건을 차지하면 임금에게 죄를 짓는다”고 하는데 그 일은 어찌되는가?
[답] 땅 속에 묻힌 물건은 논하지 않으며, 땅 밖의 물건만이 국왕에게 속하여야 된다. 왜냐하면 급고독(給孤獨)같은 성인도 역시 이런 물건을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죄가 없다.
또 저절로 얻은 물건이면 도둑이라 하지 못한다.
[문] 온갖 만물이 다 공업(共業)으로 생긴 것이라면 도둑질을 한다 하여 무엇 때문에 죄를 얻는 것인가?
[답] 비록 공업의 인연으로 생긴다 할지라도 인연에는 강하고 약한 것이 잇다.
만일 사람이 그 업을 지은 힘이 강하고 또 부지런히 공덕을 드린다면 그 물건은 그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다.
[문] 만일 사람이 탑과 절 등 여러 스님 처소에서 밭이나 주택 등의 물건을 탈취하면 누구에게서 죄를 받는가?
[답] 부처님과 스님은 그 물건에 대하여 내 것이라는 마음은 없다 할지라도 역시 그로부터 죄를 받는다.
그 물건은 결정코 부처님과 스님에게 속한 것인데, 그것에 나쁜 마음을 내어 훔쳤거나 빼앗았기 때문에 죄를 받게 된다.
삿된 음행이라 함은 중생이 자기의 아내가 아닌데 그와 음행을 하는 것이니, 그것을 삿된 음행이라 한다.
또 그가 자기의 아내라 할지라도 그릇된 방법으로 음욕을 행하면 역시 삿된 음행이라 한다.
또 모든 여인에게는 다 보호하는 이가 있나니, 그들은 부모와 형제와 남편과 자식들이며 출가한 여인이면 국법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다.
[문] 매음녀는 가정부인이 아닌데, 그와 음욕을 행한데도 어째서 잘못된 삿된 행이라 하는가?
[답] 어렸을 적은 가정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비니(比尼ㆍ律藏) 중에
“이 어렸을 적의 부인이면 다리[鬘]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금지 된다”고 하셨다.
[문] 만일 임자 없는 여자가 스스로 찾아 와서 아내 되기를 원한다면 이 일은 어떻게 되겠는가?
[답] 만일 실지로 남편이 없는 여자로서 여러 사람 앞에서 법답게 온 사람이라면 삿된 음행이라 하지 않는다.
[문] 만일 출가한 사람이 아내를 얻으면 삿된 음행을 면하게 되는가?
[답] 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법이 없기 때문이다.
출가의 법에는 언제나 음욕을 여의어야 한다.
죄만은 다른 사람의 아내를 관계한 것보다는 가벼우리라.
거짓말이라 함은 몸과 입과 뜻으로 다른 중생을 속여서 허망한 오해를 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을 거짓말이라 한다. 부처님은 그것이 무거운 죄가 되므로 말씀하신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일정한 물음에도 거짓말이 되고, 한 사람이 묻는 때에도 거짓말이라 하거늘 어찌 여러 사람만을 필요로 하겠는가?
또 남을 속이려는 그 사람에 따라서 죄를 얻는다.
만일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서 “내가 아무에게도 이런 일을 말하였다”고 말하면 그런 일은 사실이 아닐지라도 거짓말이라 하지 않는다.
또 거짓말은 자기의 생각에 따른다.
만일 보았지만 보았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물음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의 죄는 없다. 마치 비니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만일 일을 거꾸로 보지 아니한 것을 보았다고 하면 어째서 거짓말이 아니겠는가?
[답] 모든 죄와 복은 다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긴다. 이 사람은 보지 않은 일을 보았다는 생각을 낸 것이니, 그러므로 죄가 없다.
마치 실지로 있는 중생을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거나 중생이 아닌데서 중생이라는 생각을 가지면 살생의 죄를 얻지 아니함과 같다.
[문] 실지로 있는 중생에게 중생이라는 생각을 내면 곧 살생하는 죄를 얻는 것처럼, 만일 본 것에 보았다는 생각을 내면 죄가 없어야 하고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생각하면 죄가 없지 않으리라.
[답] 이 죄는 마음으로 인하고 중생으로 인하여 생긴다. 그러므로 설사 중생이 있을지라도 중생이라는 생각만 없으면 죄를 얻지 않으리니 무심하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이 없는데 중생이라는 생각이 있어도 중생이 없기 때문에 또한 죄가 될 수 없다.
만일 중생이 있고 중생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인연이 구비하였기 때문에 살생의 죄를 얻게 된다.
만일 보았던 일을 보지 않았다는 생각을 내어서 물었을 때에 보지 않았다고 하면 이 사람의 생각은 뒤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중생을 속인 것이 아니며 설사 그 일은 뒤바뀌었다 할지라도 역시 진실하다고 한다.
만일 보지 아니한 일을 보았다는 생각을 내어서 물을 때에 보지 않았다고 대답하면 이 사람의 생각은 뒤바뀌어 중생을 속인 것이요, 설사 일은 뒤바뀌지 않았어도 역시 거짓말이라 한다.
이간질이라 함은 사람이 남을 갈라지게 하려고 구업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을 이간질이라 한다. 갈라설 마음이 없는데 다른 이의 말을 듣고 스스로 물러서면 죄가 되지 아니한다.
만일 착한 마음으로 교화하여 악한 사람을 여의게 한다면 설혹 갈라서게 한다 해도 역시 죄가 되지 아니한다.
만일 번뇌의 흐린 마음에서가 아니라면 아무리 여러 차례 말한다 하더라도 역시 죄가 되지 아니한다.
나쁜 말이라 함은 사람이 아무 이익이 없는 듣기 싫은 소리로 남을 괴롭히려고만 하는 것이니 이것을 나쁜 말이라 한다.
만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롭게 하기 위함이라면 듣기 싫은 말도 죄가 없지마는 까닭없이 괴로움만을 끼치는 것이라면 죄가 있다.
의사가 처방에 의해서 침을 놓고 뜸을 뜨는 일은 아무리 괴롭히더라도 죄가 아니며, 듣기 싫은 말도 역시 그러하다.
모든 부처님과 성현도 이런 일을 하신 것이니, 마치 “어리석은 사람들아” 하고 말씀함과 같다.
또 번뇌의 혼탁한 마음이 없으면 설혹 듣기 싫은 말을 했다 할지라도 죄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니 마치 욕심을 여윈 사람들에서와 같다.
아무리 착한 마음을 가졌어도 듣기 싫은 말을 하는 동안에 번뇌를 일으키면 즉시 죄를 얻는다.
비단 말이라 함은 진실한 말이 아니면서 이치가 바르지 아니한 것이니, 그러므로 비단 말이라 한다.
또 이것이 진실한 말이라 할지라도 시기(時期)에 맞지 않기 때문에 또한 비단 말이라 한다.
또 설사 진실하고 시기에 맞는다고 할지라도, 퇴폐에 따르는 이익없는 것이기 때문에 비단 말이라 한다.
또 말도 진실하고 시기에 맞으면서 이익이 있을지라도 말이 밑도 끝도 없거나 뜻과 이치에 순서가 없으면 역시 비단 말이라 한다.
또 어리석음 등의 번뇌를 품은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비단 말이라 한다.
몸과 마음이 바르지 못한 것을 역시 비단의 업[綺業]이라 하는데 대부분이 입으로만 짓고 또한 세속에 따라서 비단 말이라고 한다. 나머지 세 가지의 구업도 다 비단 말이 섞였고 떨어질 수는 없다.
만일 거짓말에다 듣기 싫지 않은 말로 갈라지지 않게 하려면 두 가지가 있으니, 거짓말과 비단 말이다.
만일 이 거짓말이요 갈라지게 하려 하면서도 듣기 싫은 말이 아니면 세 가지이니, 거짓말과 이간질과 비단 말이다.
만일 거짓말로서 듣기 싫은 말이며 갈라지지 않게 하려면 역시 세 가지이니, 거짓말과 나쁜 말과 비단 말이다.
만일 거짓말이요, 듣기 싫은 말이면서 갈라놓으려면 네 가지 말이 갖추어진다.
만일 거짓말이 없이 듣기 싫은 말만 하여도 갈라지지 않으며, 다만 시기에 맞지 않은 말과 이익이 없는 말과 이치가 없는 말이면, 비단 말일 뿐이다.
이 비단 말은 세밀하여서 여의기 어렵지만 부처님만은 그 근본을 끊으셨다. 그러므로 부처님만이 홀로 세존의 칭호를 누리고 그의 말씀이면 믿고 받드는 것이니 그 밖에는 따를 이가 없다.
[문] 이미 일곱 가지 업도(業道)를 말하였으니 다시 세 가지 뜻의 업[三意業]을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죄와 복은 반드시 몸과 입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마음에서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도 역시 업도 이다”라고 한다.
이 세 가지 뜻의 업의 힘 때문에 몸과 입의 악업을 일으킨다.
이 세 가지는 비록 중요하나 뜻의 업은 미세한 것이기 때문에 끝에 붙여서 설명한 것이다.
온갖 번뇌는 다 악업을 일으킬 수 있으나 이 세 가지는 오직 중생을 괴롭히기 때문에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이라 하지만 중품과 하품의 탐욕이면 업도라고 하지 않는다.
이 탐욕은 뛰어나서 깊이 다른 세계[有]에까지 일으키기 때문에 탐욕을 업도로 삼는다. 성냄과 어리석음도 마찬가지다.
또 어리석음을 말하면 곧 온갖 번뇌를 설명하게 된다.
이 중에서는 다만 몸과 입이 중생의 괴롭힘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 가지 만을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어리석음을 삿된 소견이라 하는가?
[답] 어리석음에도 차별이 있다. 왜냐하면 온갖 어리석음은 모두가 착하지 못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어리석음이 더 심하여 삿된 소견을 이루면 곧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이라 한다.
온갖 착하지 못함은 다 이 세 가지 문으로 말미암는다.
어떤 사람이 재리(財利) 때문에 착하지 못한 업을 일으킴은 마치 금전 때문에 중생을 살해하는 일과 같고 혹은 성냄 때문이라면 마치 원수를 살해하는 일과 같거니와 혹은 재물 때문도 아니요, 성냄 때문도 아니어서 다만 어리석은 탓으로 잘잘못을 모르기 때문에 중생을 살해하는 것도 있다.
[문] 경전에서
“악도에 가는 인연은 네 가지가 있다. 탐욕에 따르고 진심에 따르고 두려움에 따르고 어리석음에 따라서 행하기 때문에 모든 악도에 떨어진다” 하였다.
지금 이 중에서 무엇 때문에 두려움에 따라 악업을 일으킨다고는 말하지 않는가?
[답] 두려움은 바로 어리석음의 소속이다.
만일 두려움에 따름을 말하면 바로 이것은 어리석음에 따른다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지혜 있는 사람은 생명을 잃는 일에 이르더라도 오히려 나쁜 업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 일은 먼저 이미 대답한 일도 있다. 곧 “번뇌가 더욱 자라서 몸과 입의 업을 일으키면 그 때에 착하지 못한 길이라 한다”고 한 그것이니, 이 세 가지는 다분히 착하지 못함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업도라 하는가?
[답] 뜻이 곧 업이며, 이 안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업도라 한다.
먼저는 끝에 있는 세 가지를 행하고 중간과 나중에는 앞의 일곱 가지를 행하며, 중간의 세 가지 업은 길[道]이고 업(業)이 아니며, 일곱 가지 업은 업도 되고 길도 된다.
[문] 때리고 술을 마시는 따위의 모든 착하지 못한 업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열 가지만을 말하였는가?
[답] 이 열 가지는 죄가 중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또 치고 때리는 일들은 다 앞뒤의 권속이며,
술을 마시는 것은 실지의 죄가 아니요, 남을 괴롭히는 것도 아니다.
남을 괴롭게 구는 것이라면 역시 술만은 아니다.
[문] 이 착하지 못한 길은 어디에 있게 되는가?
[답] 전부가 다섯 갈래[五道]에 있게 된다. 다만 울단월에서는 사음이 세 가지 일로써 일어나서 탐욕을 이룩함이 없으나 나머지는 세 가지 일로써 일어나서 역시 세 가지 일을 이룩한다.
[문] 성인도 착하지 못한 업을 일으키는가?
[답] 역시 뜻의 착하지 못한 업은 일으키지만 몸과 입으로는 일으키지 않는다. 또 뜻의 업 중에서도 성내는 마음만은 일으키거니와 살생의 마음은 일으키지 않는다.
[문] 경전 중에서 배울 것 있는 이도 역시 남을 저주하면서 “멸망하여라. 너는 종자가 끊어지게 되라”고 하였다. 그 일은 어떤 것인가?
[답] 경전에서는 아라한이 주원하였다고 하나, 그는 샘을 다한 사람으로서 번뇌의 뿌리가 끊어져서 오히려 마음조차 일으키지 않거든 황차 남을 저주하는 일이겠는가?
배울 것 있는 이가 저주한다는 말도 역시 그와 같으리라.
또 성인은 착하지 못한 법에서는 짓지 않는 율의를 믿거늘 어떻게 착하지 못함을 짓겠는가?
또 이 성인은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인데 만일 착하지 못함을 일으킨다면 역시 악도에 떨어져야 한다.
[문] 모든 성인은 금생에 착하지 못한 업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악도에 들지 아니하려니와 과거 세상에서는 착하지 못한 업이 있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떨어지지 아니한가?
[답] 이 성인의 마음속에서 진실한 지혜가 생길 때는 모든 악도의 업은 이미 우그러짐이 마치 부패한 종자는 다시 날 수 없음과 같다.
또 3독은 두 종류이다.
첫째는 악도를 얻는 것이요,
둘째는 얻지 않는 것이니,
악도에 들어갈 것을 성인은 다 끊었다. 업과 번뇌 때문에 몸을 받아 나는 것인데 성인은 비록 모든 업과 번뇌가 있으나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떨어지지 않는다.
또 이 사람은 큰 세력을 의지하는 것이니 이른바 3보는 큰 악업을 소멸시킴이 마치 사람이 왕에 의지하면 빚쟁이가 괴롭히지 못함과 같다.
또 이 사람은 지혜가 밝고 영리하여 악업을 소멸함이 마치 사람의 몸 가운데 온기가 왕성하기 때문에 소화하기 어려운 것도 잘 소화되는 것과 같다.
또 이 사람은 많은 방편이 있어서 혹은 모든 부처님을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자비와 모든 착한 업을 생각하기도 하기 때문에 모든 악업을 해탈할 수 있음이 마치 여러 방편의 간사한 도적들도 모든 험난한 곳을 의지하고 있는지라 어찌할 수 없음과 같다.
또 이 성인은 해탈하는 도를 알고 얻는 것이 마치 큰 황소가 걸어가는 것 같고 새가 허공을 의지하는 것 같다.
또 오랫동안 착한 법을 닦아 익혔기 때문에 악도에 떨어지지 않음은 마치 경전 중에서
“사람이 항상 몸의 계행과 마음의 지혜를 닦으면 지옥의 과보가 있더라도 현재에 가볍게 받게 된다”고 함과 같다.
또 게송으로 말함과 같다.
자비로운 마음을 행하는 것이
한량이 없고 걸림이 없으면
모든 세상의 무거운 업도
그 곳엔 미칠 수 있는 것 없다.
또 이 성인의 마음에는 착하지 못한 업이 견고할 수 없어서 마치 한 방울의 물을 뜨거운 철판 위에 떨어뜨림과 같다.
또 이 성인은 착한 업은 깊고 멀어서 마치 환수라(桓殊羅) 나무의 뿌리와 같다.
또 이 성인은 성한 일은 많고 악한 일은 적어서 적은 악이 많은 선 가운데 있으면 세력이 없는 것이 마치 한량중(一兩重)의 소금을 항하의 물에 던진다 하여 물맛을 달라지게 만들 수 없음과 같다.
또 이 성인은 믿음 등의 재물이 풍부하여서 마치 빈궁한 사람은 1전 때문에 죄를 당하지마는 부귀한 사람은 백천량 때문에도 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
또 성도(聖道)에 들기 때문에 존귀함을 얻음은 마치 귀한 사람[貴人]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옥중에 들어가지 아니함과 같다.
또 범과 이리거나 개와 양이며 그리고 존귀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이 함께 다투면 큰 편이 이기는 것과 같다.
또 이 성인의 마음은 성도에 머무르기 때문에 모든 악도의 죄업이 다시는 괴롭힐 수가 없음이, 마치 임금이 빈집에 누웠으면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 없음과 같다.
또 이 성인이 자기 수행을 행하는 곳에는 악도의 죄업이 편의를 얻을 수가 없음이 마치 매와 뱁새와의 비유와 같다.
또 성인은 마음을 네 가지 염처(念處)에 매었으므로 모든 악도의 업은 그 편의를 얻을 수 없음에 마치 둥근 병을 가마[鈙]에 넣어둠과 같다.
또 두 가지의 번뇌를 갖추었기 때문에 악도에 떨어지고 업에 따라 보를 받는데, 성인은 한 가지를 끊었기 때문에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또 이 사람은 항상 선업의 보를 받기 때문에 모든 악도의 업은 그 편의를 얻을 수 없다.
또 먼저 6업품(業品) 중에서 지옥의 업에 대한 모습을 설명하였거니와 성인은 그런 인연이 없기 때문에 악도에 떨어지지 아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