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 사무엘 베케트
블라디미르: …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에스트라공: 그건 그렇지.
블라디미르: 아니면 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 (사이) 우린 약속을 지키러 나온 거야. 그거면 된 거다. 물론 우린 성인 군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약속을 지키러 나온 거란 말이다. 이 정도라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에스트라공: 수없이 많겠지.
블라디미르: 그럴까?
에스트라공: 난 모르겠다.
블라디미르: 그럴지도 모르지.
포조: 사람 살려!
블라디미르: 확실한 건 이런 상황에선 시간이 길다는 거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우린 온갖 짓거리를 다해가며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는 거다. 뭐랄까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버릇이 되어버린 거동을 하면서 말이다. 넌 그게 이성이 잠드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짓이라고 할지 모르지. 그 말은 나도 알겠다. 하지만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은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야. 너 내 말 알아듣겠냐?
에스트라공: 인간은 모두 미치광이로 태어나는 거다. 그 중에는 끝내 미치광이로 끝나는 자들도 있고.
-S·베케트,「고도를 기다리며」제 2막(부분)
[단상] 20세기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사무엘 베케트의「고도를 기다리며」는 전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별다른 무대 장치도 특별한 줄거리도, 극적 사건도 없다. 저녁 시골길, 앙상한 나무 한 그루를 배경으로 블라디미르와 그의 친구 에스트라공은 오지 않는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지주 포조와 그의 노예 럭키, 고도의 전령인 양치기 소년도 등장하지만, 중심 인물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지루한 기다림과 드라이한 대화가 극의 전부다. 포조가 장님이 되고 럭키가 벙어리가 되는 이유도 궁금하지만, 질문의 끝은 언제나 누구를 기다리고, 왜 기다림인가에 있다. 기다림의 대상은 고도(Godot). 고도는 텍스트의 전편에서 미완의 인간을 구원하는 신이자 희망, 자유와 행복, 아니 기다림 그 자체랄까. 이 모두랄까. 기다림이 의미를 뛰어넘은 장소로 나아가는 가능성(와시다 기요카즈, 『기다린다는 것』)이라면, 고도는 ‘거의-아무-것도-아닌-것’이거나 모든 것이다. 고도의 언어는 특별한 메시지나 계몽적이지 않고, 전후 맥락이나 연관성도 없다. 침묵이다.
2차 대전의 와중에 쓴 이 극의 허무와 실존은 전후 유럽의 정신적 풍경과 맞닿아 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이성은 더 이상 빛을 발할 수 없으며, 깊고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한다. 이성이 은폐하고 있는 정서적 폭력, 그것은 포조의 단말마적 대사(사람 살려!)에 특징적으로 드러나 있다. 신체의 표상, 에스트라공이 생각하는 인간은 성인 군자가 아니라 광인이다. 어떤 보상도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일련의 행위는 이성의 시각에서 보면 미친 짓이 분명하다. 하지만 부조리하고 니힐한 세상에 태어나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광기에 수렴된다. 사유의 표상, 블라디미르에게 고도는 익명성의, 모호하고 신비한 ‘밤’이다. 둘은 역사와 실존의 경계에서 슬픈 웃음을 유발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화가 이어진다.
에스트라공: 바람을 맞혀 버릴까? (사이) 이 쪽에서 바람을 맞혀 버리는 게 어떻겠냐고?
블라디미르: 우릴 벌할 걸 (침묵-나무를 바라본다) 나무만이 살아 있구나
여전히 오지 않는 고도. 에스트라공이 이번에는 제법 농조로 혼잣말을 한다. 바람을 맞혀 버릴까? 이 대목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베케트의 고도에는 대화를 주고 받는 동안 유독 사이나 (긴) 침묵, 휴식이란 지문이 많이 나온다. 러시아의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오랜 친분을 맺어온 베케트는 평소 희곡을 악보처럼 쓸 수는 없을까, 라는 고민을 해 왔다. 극이 특유의 내재율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한 편의 시다. 고도가 말하는 반복의 화법에서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것은 어떤 순수한 힘들 내지 운동(성)이다. 이 경우 반복은 차이를 포괄하며, 하나의 특이점에서 또다른 특이점으로 직물처럼 짜여 나간다. 시와 연극은 실재의 숨은 깊이나 정중동(靜中動)을 드러내는 데 유효하며, 아직 모르고 전혀 모르는 사유이미지로서 내재성(immanence)을 점유한다.
사건의 예비적 과정으로서 유적(類的)인 것에 대한 글쓰기는 사무엘 베케트의 특징이다. 그것은 존재의 장소로서 잿빛 암흑에 비유되며, 베케트의‘말함’은 차이-사이가 빚어낸 목소리의 현상이다. 이는 시적 발화가 아니면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앎과 느낌의 방법이다. 모든 사건이나 사건의 현존에 대한 명명은 본질적으로 시적이다. 밤의 광인과 밤에만 나타나는 소년이 시인이라면, 고도는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데도 없는 에레혼(Erewhon)이다. 나무를 곁에 두고서도 고도라는 나무를 기다리는 부재의 사람들.‘지금-여기’의 나는 무(無). 이 기다림의 무, 환상으로서의 문학은 과연 무의미한 것인가?
영겁회귀의 삶은 뚜렷한 이유 없이 반복된다. 그 무엇도 일어나지 않는다.“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인간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말. 마침내 고도가 나타나면 기다리는 행위는 끝나게 되고, 인생이란 연극도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유쾌한 허무주의자’ 사무엘 베케트! 그에게 ‘가장 현실적인 것은 무(無)’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베케트가 쓴「서투른 시」에는 "모든 것이/ 모두 존재하면서,/ 모든 것으로,/ 따라서 그것으로,/ 심지어 그것으로,/ 모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강조: 필자). 고도의 시는 이 ‘따라서’와 ‘심지어’, ‘모두’를 포함하고 배제하는 시. 未와 無, 美가 겹쳐진 주름이다. (김상환)
첫댓글 블라디미르: 확실한 건 이런 상황에선 시간이 길다는 거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우린 온갖 짓거리를 다해가며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는 거다. 뭐랄까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버릇이 되어버린 거동을 하면서 말이다. 넌 그게 이성이 잠드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짓이라고 할지 모르지. 그 말은 나도 알겠다. 하지만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은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야. 너 내 말 알아듣겠냐?
에스트라공: 인간은 모두 미치광이로 태어나는 거다. 그 중에는 끝내 미치광이로 끝나는 자들도 있고.
고도의 시는 이 ‘따라서’와 ‘심지어’, ‘모두’를 포함하고 배제하는 시. 未와 無, 美가 겹쳐진 주름이다. (김상환) - 시는 미쳐야 미친다. 아무 것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그것이 시다.
<고도를 기다리며 / 사무엘 베케트> 잘 읽었습니다. <세계의 명시- 세계의 시와 산문 > 관련 글 내용이 알차고 좋습니다. "고도의 시는 이 ‘따라서’와 ‘심지어’, ‘모두’를 포함하고 배제하는 시. 未와 無, 美가 겹쳐진 주름이다."라는 선언에 가슴이 뭉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