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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11)
9.화공동진
해방 전 경봉은 풍진 세상을 비껴나 한도인(閑道人)으로 나날을 보냈다. 3조 승찬이 남긴 <신심명>의 첫머리처럼 무엇을 간택하거나,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일상으로 돌아와 무심히 극락암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한도인이라 해서 말 그대로 한가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에 집착하여 시비가 없기 때문에 겉으로는 한가하게 보이지만 도인처럼 하루가 바쁜 사람도 없을 터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을 온몸으로 살기 때문인 것이다.
도인에게는 자잘한 일상으로 돌아와 무심하게 머물고 있는 것이 최고의 정진이었다. 경봉은 그런 일상을 <삼소굴 일지>에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는 것이다.
‘1944년 2월 22일 화요일 맑음.
오전에 간장 담그다. 콩 6말 물 36동이에 소금(청염) 2가마 반, 매 동이마다 소금 고두 1되 평두 1되 넣다. 매주가 98덩이, 3독에 큰 독에는 29개, 작은 독에는 28개가 들어갔다. 백소금이면 고두 2되가 적당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은 승속을 가릴 것 없이 만세를 부르게 했다. 산중의 절에서도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양식이 부족해 선방이 폐쇄되고 흘린 콩나물 대가리도 주어먹던 궁핍한 살림이었지만 자축하느라고 창고의 가마니를 헐어 만든 흰떡을 사하촌까지 돌린 절도 많았다. 경봉은 오전에 큰절 대웅전에서 대중들에게 <유마경>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설하고 가만히 선정에 들어 해방을 맞이했다.
눈을 감고 있자, 먼저 만해가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년 전에 입적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만해였다. 경봉으로서는 22세 때 통도사 강원에서 만해의 <월남망국사>를 강의 들은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만해는 감정에 북받쳐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었는데, 월남이 주권을 빼앗긴 우리나라와 처지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경봉은 만해가 머리를 휘휘 휘젓는 모습도 떠올랐다. 머리를 자꾸 흔들어대는 바람에 종강 시간에 기념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해가 시베리아 여행 중 그 지역 주민에게 첩자로 오인을 받아 머리에 총을 맞은 후유증으로 그랬던 것이다.
만해는 경봉의 강사인 셈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경봉은 상경하여 시간이 나면 가끔 심우장을 들르곤 했다. 그때마다 만해는 소홀한 대접을 미안해했다.
“경봉수좌. 찬이 없는 밥이라서 미안하오.”
“그러지 마십시오. 맛있게 먹겠십니더.”
그러면 만해는 농담을 하나 던지며 숟가락을 들었다.
“내가 지금이라도 한 생각 고쳐먹으면 대접을 잘할 수 있을 것이오.”
만해가 한 생각 고쳐먹는다는 것은 조선총독부와의 타협을 말하는 것인데, 조선총독부가 역겨워서 심우장을 북향으로 앉힌 그이고 보면 농담이 분명했다.
경부선 열차는 해방 된 날부터 정지되었다가 3일 후에야 운행되었다. 각 역마다 지역 주민들이 몰려나와 만세 부르며 해방가를 불렀다. 통도사에서 가장 가까운 물금역도 마찬가지였다. 경봉은 시를 한 수 지어 자축했다.
동해 반도에 새 가을 맞아
만국전쟁이 이날 모두 끝났네
길이 빛 나거라 순국절사의 공명이여
와신상담한 충렬들 얼마나 근심스러웠나
매란의 은은한 미소 뭇 향기 압도하고
강과 바다가 서로 어울려 한맛으로 흐르네
풍진이 다 지나가 국민들 즐거워하니
이제부터는 응당 태평세월을 누리리라.
扶桑半島到新秋
萬國干戈此日收
殉節功名長歲活
臥薪忠烈幾時愁
梅蘭暗笑衆香壓
江海相和一味流
歷盡風塵民快樂
也應今後太平遊
이 <해방의 노래>에서 경봉의 순수한 의지가 담겨 있는 대목은 ‘강과 바다가 서로 어울려 한 맛으로 흐르네’라는 구절이었다. 수많은 강물이 바다에 이르면 한 맛으로 변해버리듯 경봉 자신도 인간 세상에 뛰어들어 모든 중생을 부처로 만들겠다는 서원을 했던 것이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산문 밖으로 나가 인간 세상에 섞이어 사는 것을 불가에서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 부르고, 수행자의 이상은 누구나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진리를 구한 후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었다.
마침 경봉은 선학원 이사장에 당선되어 서울 선학원으로 정해진 때마다 올라가 대중을 상대로 <선문촬요>와 <반야심경>그리고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설법했다. 한번 올라가면 일주일 혹은 그 이상씩 머무르면서 설법을 했는데, 하루는 선학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가 운봉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만해, 운봉, 만공 등 선승들이 하나 둘 입적할 때마다 경봉은 잠시 선정에 들어 영가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해방을 전후해서 선승들이 하나 둘 가고 있었다. 경봉은 혜월의 법을 이은 운봉과는 곧잘 현담을 나누던 사이로 생전 운봉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그의 영가에게 향기로운 차를 한 잔 따랐다.
백련암에 선방을 개설했을 때 경봉은 통도사 주지로 있으면서 운봉을 조실로 초빙했는데, 그때 백련암 선방에서는 젊은 향곡, 성철 등이 정진했던 것이다. 운봉의 인상은 강철처럼 구부러지지 않는 강인함이었다. 운봉의 상호는 기이했다. 한 수좌의 표현에 의하면 까만 얼굴에 눈은 마치 바늘귀처럼 작았다. 이마와 광대가 툭 나오고 턱이 뾰죽하였다. 종일 침묵하고 좀체 말이 없었다. 길을 가다가 비가 쏟아져도 결코 뛰는 법이 없었다. 벼락이 쳐도 부동이었다. 비록 체구는 작지만 자세는 태산과 같이 부동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운봉의 목소리는 연잎에 떨어지는 봄비 소리처럼 매우 아름다웠다. 그래서 수좌들은 검은 얼굴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합해서 운봉의 별명을 ‘굴뚝새 조실’이라거나 ‘굴뚝새 화상’이라고 불렀다. 그런 목소리의 운봉도 선문답을 할 때만은 불꽃이 튀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험구(險口)로 일관했다. 경봉은 운봉과 한암 사이에 벼락 치듯 오고간 선문답을 전해들은 적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운봉이 오대산 상원사로 한암을 찾아가 물었다.
“스님, 스님 오도송에 ‘부엌에서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눈이 밝았으니/ 이로 좇아 옛 길이 인연따라 맑네/ 누가 와서 조사의 뜻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바위 아래 울려대는 물소리는 젖지 않았더라 하리라.’고 하셨는데 끝의 암하천명불습성(岩下泉鳴不濕聲)이 어떻게 이것이 조사의 뜻이 될 수 있습니까.”
운봉의 질문은 한암이 우두암에서 깨쳤을 때 지은 이 시는 조사선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암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네 뜻이 아닌 고로 조사의 뜻이니라(不是汝意故 是祖師意).”
운봉은 한암의 제자가 오대산에서만 나는 텁텁한 마가목차를 사발에 따라주자, 훌쩍 마시더니 작은 눈을 끔벅거리며 다시 말했다.
“스님께서 속서(俗書)에 능한 것을 익히 들었습니다.”
속서에 능하다는 것은 저잣거리의 선비를 일컫는 말로 수행자로서는 결코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속서는 물론이고 불서(佛書)마저도 뛰어넘어야 진정한 선승이기 때문이었다. 한암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다.
“내가 그대를 공부인(工夫人)인 줄 잘못 부를 뻔했다(錯喚汝是林下客).”
이 무렵 경봉에게는 단아한 상좌 한 명이 있는 듯 없는 듯 정진하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법호는 벽안(碧眼), 법명은 법인(法印)이었다. 1937년 경봉을 은사로 출가한 그는 경봉 회상을 떠나 해인사에서 정진 중이었다. 사찰 순례를 하다가 해인사에 주저앉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경봉에게 보내었던 것이다.
‘미혹한 제자는 해인사 법보사찰을 참배하고 금년 동안거를 지낼 예정이온데 모법 총림으로 칼날과 같습니다. 효봉 화상께서 조실로 계시고 만공, 한암 양대선사께서 증명으로 오르시고 결제대중도 근 30명이나 됩니다. 양로원 시설도 겸했으며 총림외호는 주지화상이 전담하며 내외살림살이가 아주 원만하게 짜였으니 부처님 태양이 더욱 빛남이 어찌 금일의 이 총림시설이 아니겠습니까. 금년 겨울에는 용맹 정진하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코자 하오니 멀리서 가호 있으시기를 바라나이다.’
경봉은 노파심으로 벽안에게 불전에 올리는 공양만큼은 성심을 다할 것을 간곡하게 당부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수행자의 근본 도리이기 때문이었다. 불전에 마음을 등한히 하면 해(害)가 있을 것인바, 사시에 법당마지를 지어 올리는 데 보리쌀을 섞지 말라 한 것이다. ‘보리는 기를 때 인분을 주어서 자라게 하므로 옛날 고인들도 성심마지(誠心摩旨)에는 보리쌀을 넣지 않았으니 법당불전 사시마지를 공양주에게 단속하여 성의있게 하여야 한다.’
그런가 하면 벽안이 사중(寺中)의 일에 대한 부담감으로 위장병을 앓을 때 경봉은 약을 구해 보내주기도 했다.
‘소화가 잘 안된다 하니 구레오소드환 1병을 보내니 매일 2회에 6개씩 온수에 복용하시오.’
경봉의 효성스런 상좌를 꼽으라면 누구라도 주저하지 않고 벽안을 먼저 드는데, 그가 효상좌가 된 데에는 이처럼 경봉의 제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자비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공부하지 않은 제자는 결코 경봉에게 믿음을 얻지 못했다. 경봉은 선학원에 가서도, 극락암에서도 공부인들에게는 허수아비에게 속지 않고 맹렬하게 나아가는 멧돼지처럼, 힘 있게 짓밟고 지나가는 소가 되라고 가르쳤다.
콩밭에 풀로 만든 하수아비를 소가 먹어버린 것은 경봉이 실제로 조국이 해방이 되던 8월 초에 경험한 일이었다. 한 뙤기의 콩밭은 극락암 입구에 있었다. 경봉이 콩잎을 자주 뜯어먹는 산짐승을 쫓기 위해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워 놓았던 것이다. 이후 경봉은 어디에서나 이 이야기를 소재로 설법을 자주하였다.
‘선창(禪窓) 밖에 한 뙤기 콩밭이 있는데 산짐승과 들새들이 자주 침해하기에 마른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밭 한 가운데 세워놓았다. 처음에는 들새와 산짐승들이 허수아비를 사람으로 속아 의심하여 들어가지 않더니 하룻밤에는 소가 밭에 달려 들어가서 콩을 다 뜯어먹고 허수아비도 의심치 않고 모두 먹어버렸다.’
대중들이 망친 콩밭을 보고 걱정하였다. 그러나 경봉은 손뼉을 치며 허허 웃고 말았다. 시 한 수를 읊조리기까지 했다.
마른 풀로 사람을 만들어 옷 입혔더니
들새와 산짐승들 사람인 줄 의심했네
흉년과 험한 세상 아랑곳도 안하고
전쟁 나서 징병해도 민적에서 빠졌구나
서 있는 그 모양 언제 봐도 춤추는 듯
형용은 야밤중에 다시 새로워
들소가 힘도 세고 눈까지 밝아
곧 밭에 뛰어들어 허수아비를 먹어버렸네.
경봉은 허수아비를 소가 먹어치워 버렸다고 대중들이 걱정할 때 자신은 마음속으로 느낀 바가 있어 위와 같은 시를 읊조렸던 것이다. 화두 들고 공부할 때는 산짐승이나 들새처럼 허수아비를 의심하지 말고, 오히려 허수아비조차 먹어버리는 소가 되어야 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 당시는 선방을 운영하기 위해 스님들이 소를 키우던 시절이었으므로 생겨난 선화(禪話)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소는 산중에서 재산이 되는 짐승이었다. 당시 경부선 급행열차표 값이 25원 50전이었던 비해 극락암 선방 대중들이 키우던 어미 소를 언양 우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자그만치 7600원이나 받았던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경봉은 극락암이 아닌 다른 선방이나 포교당의 청도 거절하지 않고 가서 법문을 해주었다. 그중에서도 천성산 내원사 선원을 자주 갔다. 내원사가 통도사 말사인데다가 자신이 일찍이 주지로 산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원선원에서 한 법문 중에 훗날의 선승들이 즐겨 말한 ‘산은 산 물은 물’이란 화두도 실은 경봉이 그때 처음으로 말한 것이었다.
‘삼십년 전에 마음이 곧 부처라는 생각으로 천성산에 들어오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이십년 전에는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천성산을 보니 산이 산이 아니요 물도 물이 아니더라. 오늘 마음과 부처에 관심 없이 떡과 밥을 배불리 먹고 천성산을 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이 셋 가운데 어떤 것이 옳은가. 천성산이여, 청산이 높고 높으며 흐르는 물이여, 녹수가 잔잔하도다. 흰구름이여, 장마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녹음이여, 산새가 지저귀도다. 선덕(禪德)들에게 맡기노니 머리를 돌이켜 잘 볼지어다. 천성산이 깊으니 구름 그림자 차고 낙동강이 너르니 물빛이 푸르도다.’
경봉은 6.25전쟁 전에 통도사 주지를 또 맡았다. 주지를 다시 하기로 한 것은 통도사를 해인사처럼 총림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반대가 심했다. 절 살림이 몹시 궁핍하기 때문이었는데, 경봉의 뜻을 따르지 않는 몇몇 승려들이 찾아와 주지 사임을 권고하기도 했다. 경봉은 당시 몇몇 대중들의 행태에 어이없는 웃음을 허허 지으며 자신의 심정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취한 듯 미친 듯 세상 사람들이여
미한 듯 깬 듯하니 누가 감히 헤아리랴
시비와 장단은 그대에게 맡기노니
우습다 뭇 세정을 내가 벌써 알겠구나.
如醉如狂世滓漢
似迷似悟人難曉
是非長短任君說
笑殺群情勘破了
그래도 경봉은 적어도 삼보사찰인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만큼은 총림이 되어야 한다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해동수도원(海東修道院)을 만들었다. 당시 교정(敎正; 종정)이던 한암을 종주(宗主; 방장 혹은 조실)로 모시고자 곡천(谷泉)과 대야(大冶)를 오대산 상원사로 보냈다.
그러나 한암은 병이 깊어 다음과 같이 거절의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만 중원(重遠; 한암의 법명)의 병은 깊고 몸은 약해서 근근히 이 그림자 같은 물질을 지탱해 가고 있습니다. 하물며 나이 팔순에 가까운 늙은 것이 종주(宗主)의 청장(請狀; 요청서)을 받아간다면 망령된 행동이고 큰 수치가 될 것입니다. 어디에 뒷방이나 비워두시면 살아생전 함께 모여 정담이나 나누겠으니 이렇게 보류합니다.
탄허(呑虛)가 나보다 학식과 문필이 천만억 배나 낫고, 또 십육칠 년 간 나와 함께 정진하였으니 수도원에 임시로 수좌(首座)로 두어 두시면 좋은 일이 있을 듯합니다. 그리 알고 처리해 주십시오. 종주는 언제라도 스님이 적임자이니 다른 생각은 마십시오.
그만 정신이 피로하여 이만 줄입니다.>
한암을 종주로 하는 총림 계획은 당장 차질이 왔다. 한암이 종주를 거절한 데다 경봉의 뜻을 따르지 않는 악인의 무고로 양산경찰서로 출두하여 봉변을 당한 것이었다. 당시 양산경찰서장은 독실한 불자로서 경봉을 존경하는 인물이었는데, 서장이 출장 간 사이에 사찰계장이 스님을 불러 참혹하게 고문을 가했던 것이다. 사찰계장은 경봉을 좌익으로 몰았다.
“야산대(野山隊; 토벌대)에게 9월과 10월 사이에 15만원을 주지 않은 것을 보니 당신도 빨갱이와 한패이구만.”
이틀 동안 경봉은 일본 형사들이 지하에 남기고 간 전기고문기구와 몽둥이로 온갖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경봉은 만신창이 몸이 되었지만 선정에 들어 고통과 수모의 시간을 버텼다. 경봉으로서는 총림에 사용할 돈을 결코 야산대에 내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출두한 지 하루가 지나 상좌 벽안이 면회를 와 통곡을 하는데도 경봉은 피딱지가 맺힌 입술에 미소를 띠울 뿐이었다.
사찰계장은 상소리를 한동안 지껄이더니 취조실 바닥에 침을 뱉으며 나가버렸다. 서장이 출장에서 돌아오고 나서야 상황은 반전됐다. 서장은 경봉을 서장실로 불러 정중하게 사죄했다. “큰스님, 사찰계장을 파면시켰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경봉은 자신을 고문한 그를 미워할 생각이 없었다.
“그 사람도 깨치면 부처이지요.”
경찰서에서 만신창이 몸으로 돌아온 경봉은 건강을 걱정하는 일타(日陀)에게 시절에도 인연이 있으니 순리를 기다리자고 말했다.
“내가 주지를 한 것은 사욕을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제일의 사찰 통도사에 꼭 필요한 총림을 만들어야 한다는 원력이 있어 그런기라. 세상의 모든 일에는 시절인연이 있대이. 일타수좌, 지금은 때가 아니다.”
결국 경봉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주지 소임을 사임하고 6.25전쟁이 나기 3개월 전에 고향인 밀양 무봉사로 옮겨갔다.(계속)
9.화공동진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은 밀양의 저잣거리를 관통해 흘렀다. 강은 무봉산에 이르러 활처럼 휘어져 흐르며 명승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강물이 찰랑거리는 절벽 위로는 암자 규모의 작은 무봉사가 대숲 속에 있고, 그 옆으로 밀양강 강바람이 시원하게 지나치는 영남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밀양강 맞은편에서 보이는 무봉사는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어머니 가슴처럼 포근하게 보였다. 경봉은 그런 생각이 들어 저잣거리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면 꼭 강 건너편에서 무봉사를 향해 합장하곤 했다. 경봉의 그런 단상은 일찍이 낙산 홍련암에서 기도했던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실제로 경봉은 대오하고 나서 3년 만에 부산- 양양 대포항을 오가는 배를 타고 낙산사 홍련암으로 가서 기도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경봉이 홍련암을 찾아간 것은 만행 길에 들러 참배하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삼칠일(21일)기도로서 깨달음을 되새기는 보임의 일환이었다.
당시 부산항에는 신라환(新羅丸)이라는 여객선이 운항되고 있었는데, 양양 대포항까지는 2박 3일이 소요되었고, 배 삯은 삼등칸이 7원 20전이었다. 신라환은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가는 기선으로 멀리 원산까지 오가는 배였다.
경봉이 양양 대포항에서 내려 낙산사 홍련암에 도착했을 때의 날씨는 잔뜩 흐려 곧 눈이라도 내릴 것 같았다. 입춘이 지난 2월 말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겨울의 뒤끝이 매서웠다. 홍련암 감원(監院; 암주)은 응담(應潭)이었는데 확철대오한 경봉의 소문은 이미 이곳까지 미치어 경봉은 귀밑머리가 허연 응담에게 후한 대접을 받았다. 쌀이 섞인 보리밥에다 해산물반찬이 두어 가지나 된 정성스런 점심 공양에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행자 다동(茶童)이 밖에서 풍로에 달여 가지고 온 차를 마셨다. 차를 한 잔하자 배 멀미의 여독이 가시고 정신이 맑아졌다. 경봉은 요사의 빈 방을 하나 배정받고 난 다음 날에는 낙산사 주지 적묵(寂?)을 만났다. 삼칠일 기도를 하려면 낙산사 주지의 허락까지 받아야 했던 것이다.
주지실을 나서자마자 눈이 퍼부었다. 가는 겨울의 마지막 눈이었다. 바람도 거칠게 불어와 참배하는 원통보전의 문을 잡아당겼다. 원통보전에는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 임금의 어제시(御製詩)가 걸려 있는 것이 특이했다. 낙산사를 소재로 하여 지은 숙종의 한시였다.
경쾌한 남행길에 낙가봉 오르니
바람에 옅은 구름 개여 달빛이 아름답네
대성(大聖)의 원통(圓通)한 이치를 알고자 하는가
이따금 파랑새가 꽃을 물고 오네
快登南里洛迦峰
風捲織雲月色濃
欲識圓通大聖理
有時靑鳥啣花逢
낙산사 주지가 숙종을 안내하며 파랑새(靑鳥)에 얽힌 얘기를 아뢰었음이 분명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의상대사가 이곳을 참배했을 때 파랑새 한 마리가 나타나 바닷가 동굴 속으로 들어갔는데, 의상은 동굴 앞에서 기도하던 중 7일 만에 홍련 속의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던 것이다. 이후 동굴은 관음굴로 불리고, 굴 위에 홍련암이 지어졌던 것이다. 경봉은 숙종의 시를 보고는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어 자신도 시를 한 수 지었다.
물을 건너 구름 밟으며 봉우리에 오르니
연하(煙霞)와 풍월이 한 빛으로 어리었네
관음보살 친견하기 어렵다하지 말라
큰 꿈 깨고 나면 날마다 만나리.
渡水畓雲到此雲
煙霞風月一光濃
觀音莫道難親見
大夢惺時日日逢
깨닫고 나면 보이는 것마다, 만나는 것마다 관음보살이라는 경봉의 선시였다. 경봉은 바로 홍련암으로 내려와 수선(修禪)과 기도에 들어갔다. 1930년 3월 1일의 일이었다. 삼칠일 기도 첫날은 맑았으나 다음날은 비가 왔다. 그리고 다음날은 눈발이 날렸다. 10일째 되는 날에도 눈이 내렸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홍련암을 뒤덮었다. 마루바닥 밑에서는 철썩철썩 파도가 차갑게 치고, 처마 밑으로는 눈발이 파고들어 암자 안에 보석 같은 눈가루를 흩뿌렸다. 바다와 허공은 눈발로 뒤범벅이 되어 경계가 사라져버렸다. 하얀 휘장을 두른 것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몽사몽의 풍경처럼 꿈인 듯 현실인 듯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푸른 바다가 바위 절벽에 부딪치며 허옇게 자지러지곤 했다.
경봉은 선정에 들었다가 흰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이 바다 위를 걸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하얀 옷을 입은 백의관음보살(白衣觀音菩薩)이었다. 관음보살은 일출의 햇덩이처럼 붉은 연꽃에 좌정하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이었지만 정신은 옹달샘처럼 투명하기만 했다. 경봉은 법열을 가라앉히느라고 먹을 듬뿍 묻혀 한 호흡에 모지랑붓을 휘둘렀다. 자신이 지금 기도하고 있는 암자 이름을 썼다.
紅蓮庵
그래도 기쁜 마음이 가라앉지 않자 눈발이 멎기를 기다렸다가 의상대로 올라가 찬 바람을 맞으며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어린 홍송 한 그루를 관음보살이듯 정성스럽게 정표 삼아 식수했던 것이다.
삼칠일 기도를 회향하고 불공한 시각은 3월 17일 정오였는데, 그날 경봉은 양양 대포항으로 나와 부산 가는 배를 타려고 하룻밤 묵었다. 경봉은 부산 가는 기선(汽船)인 신의주환(新義州丸)을 타기에 앞서 대포리 뒷산에 올라 널따란 바다를 내려다보며 시를 한수 읊조렸다.
여여한 묘한 도는 본래 깨끗하건만
모름지기 수행을 힘서야 크게 현전하리
십년간 집안의 보배를 찾다가
이제야 겁 밖의 봄소식을 알았네
가고 옴에 역력하여 다른 사람이 아니며
말할 때나 묵묵할 때나 분명한 주인일세
부처님 항상 계시는 곳 묻지 말라
큰 허공 하늘땅이 누구의 몸이런가.
如如妙道本無塵 須得加行大現新
欲覓十年家裡寶 方知萬古劫外春
往來歷歷非他客 語묵明明是主人
莫問佛陀常住處 太虛天地阿誰身
그날따라 유난히 무봉사를 향한 경봉의 합장이 길어지자 몇 달 전에 출가한 어린 사미승이 말했다. 15세 남짓 되는 사미승은 짙은 눈썹 밑의 두 눈은 유난히 또록또록했다.
“큰스님, 어서 가요. 소나기가 올 것 같아요.”
밀양강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삼랑진 쪽의 하늘은 이미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도인은 비를 맞으면서도 뛰지 않는 법이었다.
“어허, 내 잠시 낙산 홍련암을 생각하고 있었느니라.”
“홍련암이 어디 있어요?”
“설악산 바닷가에 있데이.”
“거긴 왜 갔어요?”
“기도하러 갔다.”
“기도는 왜 하지요?”
“사람에게 머리와 가슴이 있제? 그렇듯이 우리 수행자에게는 참선과 기도가 있다. 홍련암은 참선과 기도하기 좋은 성지 중에 성지야. 난 거기서 기도하던 중 열흘 만에 백의관음보살님을 보았지.”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질 무렵에야 경봉은 느릿느릿 무봉사로 향했다. 당시 무봉사에는 사판승 대월(大越)이 주지로 있었고, 경봉을 시봉하는 사미승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말솜씨가 뛰어난 대월은 무봉사 빈 터에 사명당 동상을 건립하고자 신명을 다 바치고 있었다. 매일 사찰을 돌아다니며 사명당 장충사업(장忠事業)에 동참할 승려들을 이끌어내고, 저잣거리로 나가서는 동상을 주조하는 데 쓰이는 쇠붙이를 탁발하고 다녔다.
경봉도 대월의 동상 건립 운동에 동조했다. 더욱이 사명당은 자신의 고향인 밀양이 배출한 걸출한 고승인 것이었다. 통도사의 말사들이 십시일반으로 낸 후원금은 물론이고, 선방 살림하느라고 곤궁했던 내원사에서 5백만원을 희사하기로 한 것도 다분히 경봉의 조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경봉의 진면목은 불사가 아니라 참선 수행과 기도하는 데 있었다. 한번은 자운(慈雲)이 가사 75벌을 조성하고 회향하는 날 경봉도 참석한 일이 있었다. 당시는 모든 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전쟁 중이었으므로 가사불사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 중에 어려운 일이었다.
경봉은 한 걸음에 통도사로 달려가 자운의 수고를 격려했다. 통도사에는 벌써 운봉의 제자 향곡이 와 있었다. 잘 알다시피 참선 수행자들의 인사는 한 잔의 차와 선문답이 전부였다. 그동안 공부한 경지를 탁마하고 거량하는 것은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주고받는 선문답밖에 없었다. 자운의 가사불사를 축하하러 온 선객들은 큰 방에 둘러 앉아 인사를 나누었다. 전쟁 중이라 모두다 헝겊을 덕지덕지 기운 누더기 장삼을 입고 있었다. 향곡이 경봉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어째서 정상철가(頂上鐵枷)를 벗지 못합니까.”
정상철가란 중국의 선승 설봉과 운문의 선문답 중에 나온 말로써, 철가란 철가무공(鐵枷無孔)의 준말로 구멍이 뚫리지 않은 철로 된 칼을 말했다. 죄인은 구멍이 뚫린 칼을 쓰고 있는 법인데, 구멍이 뚫리지 않은 칼을 쓰고 있으니 사량 분별로 헤아릴 수 없는 화두인 것이었다. 경봉은 가볍게 받아넘겼다.
“절을 하고 묻게나.”
향곡은 큰 덩치를 흔들며 절을 했다. 이에 경봉은 향곡을 한 대 때리며 답을 했다. 덩치가 큰 향곡도 경봉을 한 대 치며 응수했다.
“그것은 죽은 사자입니다. 어떤 것이 향상철갑입니까.”
“눈이 열리지 못하였군. 손으로 잡아서 밀고 끌어 앞에 놔 둘 테니 보거라.”
향곡은 계속 같은 질문으로 맞섰다.
“어떤 것이 정상철가입니까.”
“그렇다면 손으로 잡아서 끌고 밀어 뒤에 둘 테니 보거라.”
“설봉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바람이 소슬하게 불고 물이 차디차게 흐른다.”
자운을 비롯하여 방에 모인 선객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경찰과 공비 사이에서 밤낮으로 지쳐있던 산승(山僧)들이었으므로 오래간만에 감로수를 마신 것처럼 즐거워들 하고 있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불꽃 튀는 선문답이 오고가자 서서히 활기가 돌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경봉이 향곡에게 묻고 있었다.
“어째서 정상철가를 벗어 버리지 못하는가.”
“땅을 파고 들어가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차나 한 잔 하게. 석가여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러자 향곡이 말했다.
“동서남북.”
경봉은 솔가지를 들어 보이며 다시 물었다.
“여기에 조사의 뜻이 있는가, 없는가.”
이에 향곡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몇 년 전 봉암사에서 대오한 향곡은 경봉에게 저돌적으로 덤벼들어 보았지만 경봉을 넘어서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20년이나 나이 어린 자신을 기꺼이 선객으로 대해주는 경봉이 고마울 뿐이었다. 실제로 향곡은 경봉을 가리켜 통도사 스님 중에 자장율사 이래 가장 뛰어난 큰스님이라고 평하고 다녔을 정도였다.
참선과 기도. 무봉사에서도 경봉은 참선과 기도를 한시도 놓아 본 적이 없었다. 가끔 극락암으로 가 설법도 하고 한밤에 내려온 공비들에게 시달림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물거품 같은 것이었고, 경봉의 삶은 참선과 기도가 전부였다.
하루는 점심 공양을 한 후 좌선에 들었는데 갑자기 신심이 상쾌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마음속에 해가 뜬 것처럼 광명이 가득했다. 이른바 마음부처(心佛)가 방광하여 빛을 뿌리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대장부가 임금의 용상에 좌정한 것 같은 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함께 일종정진(日終精進)하고 있던 밀양 출신의 신도 가운데 한 명이 소리쳤다.
“경봉 큰시님 보거래이. 빛이 난다. 부처님 광배처럼 말이다.”
“니도 보이나. 나도 보인데이.”
신도들은 이구동성으로 수군거렸다. 그러나 경봉은 모른 체했다. 신통에 매여 그것을 과시하거나, 그것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은 수행자의 바른 길이 아니었다. 수행자의 이상은 신통마저 뛰어넘어 시비를 초월한 중도(中道)의 지혜 속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래도 경봉의 방광은 수좌들에게까지 소문이 났다. 수좌들은 경봉을 생불로 알고 무봉사로 모여들었다. 6.25전쟁이 끝난 지 8개월 만에 향봉(香峰)과 도원(道圓)도 걸망을 매고 무봉사를 찾아왔다. 해방되던 해에 헤어졌으니 꼭 7년 만이었다.
“그래, 7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내놓아 보거래이.”
그러자 도원이 말했다.
“내놓을 거 있습니까. 이미 방에 꽉 찼습니다.”
“향봉 수좌도 그런가.”
“마찬가지입니다.”
“방에만 찼지 겉에는 차지 않았구나.”
두 수좌는 말을 못하고 말았다. 경봉은 몹시 실망하여 두 수좌의 등때기를 후려치며 말했다. “그동안 선방 밥값놀이를 못했으니 밥값 내놓거래이.”
밥값놀이란 참선공부를 뜻하는 수좌들의 은어였다. 두 수좌가 가고 난 다음날에는 자원(慈元)이 왔다. 자원은 경봉과 동갑내기였다. 자원 역시도 선방만 돌아다닌 노선객이었다. 자원이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63세가 된 이 객승은 20세 출가하여 선방만 돌아다녔소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 일을 내놓아 보이소.”
“그것은 객승이 오늘 무봉사에 온 것이외다.”
“무봉사에 오시기 전에는 무엇을 하였습니꺼?”
“그렇지요.”
“어름한 수작을 하면 안됩니데이.”
이번에는 자원이 경봉에게 물었다.
“어느 수좌가 어느 조실을 찾아가서 ‘주인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조실이 ‘방안 소식을 알았거든 들어오시오’ 했소. 그러자 수좌는 대답을 못했는데 스님은 어떻게 말하겠소?”
경봉은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허허.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보시오.’라고 말하겠소.”
경봉을 찾아 무봉사에 오는 신도 중에는 젊은 사람도 더러 있었다. 경봉은 훗날 극락암에 주석하면서 그 청년 얘기를 법문 중에 자주했다. 하루는 청년 신도가 경봉에게 다가와 빚을 내 산 시계를 자랑했다.
“스님, 이 시계를 차고 있으면 시간만 아는 게 아니라 기분도 좋아집니다.”
시계가 흔할 때가 아니니 자랑할 만도 했다. 그러나 며칠 뒤 청년은 얼굴이 오이꽃처럼 노랗게 변해서 찾아왔다. 밥을 먹지 못해선지 힘도 없어 보였다.
“며칠 전에는 시계를 샀다고 야단이더니 오늘은 왜 그리 얼굴이 핼쓱한가.”
“스님, 시계를 잃어버렸습니다. 밥맛도 없고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오줌이 노랗게 나옵니다.”
“이 사람, 뭘 그리 낙심하고 있는가. 자네 부모님 태중에서 가지고 나온 시계도 아닌데... 원래 없었던 것이 없어지고 만 것이니 상심하지 말게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닌가.”
“스님, 그런 얘기 많아 들었습니다.”
청년이 시큰둥하게 말하자 경봉은 <암소 잡은 요량하라>라는 얘기를 꺼냈다. 물질에 집착하지 말라는 그 얘기인즉 이러했다.
옛날 경주에 정만서(鄭萬瑞)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어느 날 한양으로 가다가 노잣돈이 떨어져 이틀이나 굶게 되었다. 정만서는 허기에 지쳐 주막으로 들어갔다. 주막 기둥에는 삶은 소 낭신이 걸려 있어 군침이 돌았다. 정만서는 낭신을 썰어 달라고 하여 술안주 삼고 국밥까지 배불리 먹었다. 그런데 돈 한 푼이 없으니 자리를 일어설 수 없었다. 손님들은 자꾸 주막으로 꾸역꾸역 들어오는데 궁둥이를 뗄 수 없었다. 정만서를 지켜보고 있던 주모가 참다못해 쫓아와 말했다.
“여보시오. 낭신 값 내고 나가시오. 다른 손님들도 술 마시게 자리를 비켜주어야지요.” 정만서는 볼멘소리를 했다.
“주모, 암소 잡은 요량하소.”
“무슨 소리하는 거요. 낭신은 황소를 잡아야 나오는 것이 아니오. 암소라니 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낭신 값 내고 나가시오.”
“암소 잡은 요량하라는 말이오.”
주모의 소리가 커지자 뒷방에 누워 있던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나왔다. 주모의 남편이었다. 사내는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술장사 30년에 저런 놈은 처음 보겠네. 돈 없으니 배 째라는 것 아닌가.’
그런데 사내는 정만서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정만서는 사내를 보자 인사를 나누자며 손을 내밀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내가 정만서를 모를 리 없었다.
‘이놈이 돈이 없으니 암소 잡은 요량하고 버티는구나. 그래, 암소 잡았다고 생각하면 없어진 낭신이 아깝지 않지. 그렇다면 이 천하의 잡놈에게 소리나 한번 시켜야겠다.’
사내가 소리를 한 가락 청하자 살길을 찾은 정만서는 온갖 장기자랑을 다해가며 춤도 추고 소리도 했다. 그러자 지나가는 손님들이 주막으로 하나 둘 모여들었고, 덕분에 주막의 술도 금세 동이 나 버렸다.
며칠 뒤 무봉사를 다시 찾은 청년은 경봉에게 삼배를 올리며 말했다.
“스님, 공수래공수거 얘기는 속이 시원하지 않더니 암소 잡은 요량하라는 얘기에는 막혔던 것이 쏙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다행이다. 물질에 걸려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거든 암소 잡은 요량으로 살거라. 한 생각 막혔던 것이 풀릴 것이다. 한 생각 비우고 생생한 산 정신으로 일하면 절후갱생(絶後更生)이라, 끊어진 곳에서 다시 사는 수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사바세계를 무대삼아 연극 한 바탕 멋지게 해야 한다. 그까짓 것 근심 걱정은 냄새나고 죽은 마음이다. 앞으로는 산 정신으로 부처님 정신으로 살아가거라.”
경봉의 <암소 잡은 요량하라>라는 얘기에 청년은 다시 밥맛을 찾았다. 훗날 무봉사에서 극락암으로 돌아온 경봉은 법문 때마다 가끔 <암소 잡은 요량하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대중들은 배꼽을 잡고 웃다가 법당을 나온 뒤에는 문득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공수래 공수거가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곤 했다.(계속)
제2장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9.화공동진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나 간혹 들리던 무봉사 경내가 갑자기 시골장터처럼 시끌벅적했다. 흙을 잔뜩 묻힌 사람들이 마당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대월이 연장을 든 그들에게 뭔가 지시를 하고 있었다. 경봉은 마당을 가로지르지 않고 뒷문을 이용하여 요사채로 갔다.
경봉은 바랑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 붙였다. <법화경>을 가지고 설법하러 극락암에 갔다가 한밤중에 공비를 만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이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어서 그런지 영축산 골짜기에도 미처 퇴각하지 못한 공비들의 출몰이 잦았다.
공비들을 잘 타일러 큰 피해는 없었으나 그들은 물러갈 때, 쌀 2되, 돈 십오만 원, 내복 1벌, 고무신 2켤레, 면도칼 1개 등을 챙겨 달아났다. 자정 무렵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그들을 생각하자 경봉은 마음이 아파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전쟁이란 부질없이 목숨을 걸고 치르는 악업 중에 악업이었다. 경봉도 무봉사로 오기 전 좌익으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당한 적이 있는데, 경봉은 그것도 역시 누군가의 악업을 자신이 대신 씻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전쟁의 와중에서도 대월은 사명당 동상 건립을 추진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작업할 인부들의 쌍소리와 잡담소리가 경봉의 방까지 들려왔다. 미안했던지 대월은 경봉에게 와서 양해를 구했다.
“오늘부터는 절이 좀 시끄러울 것이오. 동상을 몇 토막으로 나누어 석고 부을 틀을 짜야 하니 그렇소. 기술자를 겨우 찾아내 불러왔소.”
“부족하다는 경비는 조달이 되었소?”
“전쟁 중이라 지지부진하지만 그래도 스님 덕분에 이렇게 시작하게는 됐소이다.”
“이 자리에 사명당 동상이 선다면 경부선 기차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회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더. 그것만도 엄청난 포교가 될낍니더.”
“이해를 해주니 고맙소.”
“불사를 하자면 시끄럽겠지... 걱정하지 마소. 난 아무래도 극락암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소.”
“간다면 잡지는 않겠소만 전쟁 중이니 잘 생각해 보시오. 그곳도 공비들이 출몰하는 산중이니 말이오.”
그러나 경봉은 당장 극락암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대신 극락암에서 여는 법화살림법회는 전쟁과 상관없이 계속 이어갔다. 어떤 날은 법회에 경찰과 공비가 함께 섞여 있기도 했다. 통도사에 파견된 경찰이 경봉을 흠모하여 극락암 법회에 와 있었고, 지난 정월달 자정에 들이닥쳐 생필수품을 강탈해 갔던 공비도 와 있었던 것이다.
경봉은 모른 체 <법화경>을 한 줄 한 줄 외우며 설법할 뿐이었다.
''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받는 이것이요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내가 하고 있는 이것이네.
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
누구나 향상(向上)하려고 하는 것은 생래적인 소원이니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뉘우치고 반성하고 또 시간을 아껴가며 진실을 추구하고 법문도 열심히 듣거라. 저 태양이 한 점의 구름이라도 끼면 밝지 못하듯이 내 마음 가운데 어두움이 있으면 밝은 지혜로 비추어서 멋들어지게 살아야 한다.’
한 법당에 서로가 누구인지 모른 체 앉아 있던, 왜 총구를 서로에게 겨누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밤낮으로 쫓고 쫓기던 경찰과 공비는 마침내 경봉의 이러한 법문에 이르러 감화를 받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기도 했다.
‘사람됨에 있어 겉모습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것이 열다섯 가지가 있다. 사람이 어질되 같잖은 이가 있고, 마음이 온량하되 도둑질하는 이가 있고, 태도는 공손하나 속으로는 거만한 이가 있고, 겉으로는 겸손하고 삼가지만 속으로는 공손함이 없는 이가 있고, 마음은 자상하고 세밀하나 인정이 없는 이가 있고, 마음은 맑고 맑되 정성이 없는 이가 있고, 좋은 꾀는 잘 내나 막상 일을 당해선 결단성이 없는 이가 있고, 정성이 있는 듯하나 신용이 없는 이가 있고, 황홀한 마음을 가지되 도리어 충실한 이가 있고, 남의 마음을 격동을 잘 시켜서 공로와 성과가 있는 이가 있고, 외모는 용맹스러우나 실은 겁이 많은 이가 있고, 엄숙하고 삼간 듯 해보이나 일 처리는 경솔한 이가 있고, 겉으로는 성을 잘 내나 속으로는 침체되고 게으른 이가 있고, 세력도 없고 모습도 졸렬해 보이나 이르지 못함이 없고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이 다 이루는 이도 있다.
한나라 때에 명장 한신(韓信)은 천하를 바로 잡을 뜻이 있었으나 몹시 가난하여 매일같이 회음성 밖 시냇가에서 낚시질이나 하며 소일하였다.
그 냇가에 노파 몇 사람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 노파들 중 한 표모(漂母)가 한신을 불쌍히 여겨 매일 밥을 주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한신에게 밥을 주었다. 한신이 크게 감격하여 말했다.
“이 은혜를 꼭 보답하는 날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노파는 한신의 말을 듣자마자 핀잔을 주었다.
“육신이 멀쩡한 녀석이 제 입 하나 못 먹고 사는 주제라 하도 불쌍하게 보여 밥 몇 끼 주어 본거야. 은혜에 보답을 한다고? 그따위 소리는 하지도 말아라.”
또 회음성 안의 백정 패거리 중에 평소부터 한신을 업신여겨 온 녀석이 하루는 이렇게 시비를 걸었다.
“이봐 덩치 큰 친구, 꼴은 제법인데 배짱은 빈 껍데기겠지.”
구경꾼들이 몰려오자 그 백정은 더 큰소리로 말했다.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 봐.”
한신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녀석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갔다. 이를 본 구경꾼들은 모두 한신을 바보 천치라고 비웃었다.
한신은 뒤에 유방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제와(齊王)이 되었다가 초나라로 전봉(轉封)되자 회음으로 가서 표모를 찾아 천금의 상을 내리고, 이어 그 백정도 불러서 상을 내렸다.
“네가 나를 망신을 준 데 격동이 되어서 더욱 공부를 잘 하였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다.”
겉만 보고서 사람의 사람됨을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보리심을 발(發)하려는 이들은 마음자세를 이렇게 가져야 된다.
첫째 대비심(大悲心)을 발해야 한다.
널리 일체중생을 내가 구원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나니 우리 불자들은 중생계가 다 하도록 원력을 세우되,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업이 다하고 중생번뇌가 다하더라도 내 원력이 다하지 않는 그만큼 큰 원을 세워야 대도를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 대자심(大慈心)을 발해야 한다.
평등하게 일체중생을 자비심으로 도와주리라는 생각을 가져야 되나니 각자 사농공상에서 자기가 맡은 책임을 완수하고 조그마한 일부터 헌신적으로 실천하면 밝은 사회가 이룩될 것이다. 현실생활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리 큰 원력과 큰 이상이라도 필요가 없는 것이며, 이웃과 사회가 즐거워지는 것이 곧 극락세계의 실현이지 불국토가 어디 죽어서 가는 곳이겠는가.
셋째 안락심(安樂心)을 발해야 한다.
일체중생들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태평하고 안락함을 얻게 해주려는 것으로 원력을 삼아야 한다.
넷째 요익심(饒益心)을 발해야 한다.
남을 이롭게 해주어야 하는데 요즘은 어떻게 하든지 남을 속이이려고만 한다. 모든 중생들이 악법을 다 여의고, 또한 악한 마음으로 계교를 부려서 남을 속이려는 마음을 다 없애야 한다.
다섯째 애민심(哀愍心)을 발해야 한다.
부처님처럼 고통받는 일체중생들을 연민히 여기는 그런 마음으로 두려움에 떨며 지내는 중생들을 지켜주고 보살펴야 한다.
여섯째 무애심(無碍心)을 발해야 한다.
걸림 없는 마음으로 일체중생들이 모든 장애를 다 버리고 여의도록 해주어야 한다. 일체 장애로부터 해탈한 뒤에 다른 사람들도 마음 가운데 일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원력을 세워야 한다.
일곱째 광대심(廣大心)을 발해야 한다.
넓고 큰마음을 가져야 되나니 협소한 마음으로는 사소한 일로 남과 다투고 얼굴을 붉히는 수가 있으므로 이 허공보다 넓고 천지보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 저 바다를 보아라. 바다는 산과 육지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말끔히 씻어서 개울을 거쳐 큰 강을 휩쓸어서 바다로 들어가면 더러운 것은 전부 없어진다.
여덟째 무변심(無邊心)을 발해야 한다.
하늘도 끝없고 허공도 끝없는데, 끝없고 변화 없는 마음으로 허공과 같이 용심(用心)해야 하나니 마음이라는 것은 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가더라도 간 것이 아니며 와도 온 것이 아니다. 온 것 같으면서도 온 것이 없고, 간 것 같으면서도 간 것이 없는 것을 여래(如來)라 부른다. 그러므로 부처님 명호가 열 가지인데 여래를 제일 먼저 부른다. 우리가 아무리 먼 곳을 가더라도 이 몸을 운전하는 소소령령한 이 마음자리는 온 것도 아니요 간 것도 아니다.’
한 밤중에 내려와 생필수품을 강탈했던 공비는 경봉의 법문이 더 이어지고 있었으나 눈물을 흘리며 법당 문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법문이 끝나고 나서 벽안이 물었다.
“스님, 그 처사가 대중들이 다 흩어진 뒤에도 백운암 가는 산길에 주저앉아서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백운암 처사는 아닌 듯싶은데 누구입니까?”
“자네는 알 것 없데이. 다시는 여기 나타나지 않을기라.”
공비들 중 몇 명은 밖에서 경계를 하고 대장급 4명이 삼소굴에 들이닥쳐 경봉을 위협했는데, 그는 그중에 한 명이었던 것이다.
“왜 그렇습니까?”
“내 법문을 듣고 지금까지 반대로 미쳐 헛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을기라. 그래도 그 처사는 깨달을 분(分)이라도 있으니 똑똑한 처사데이. 원래의 그가 미친 사람이겠나. 전쟁이 사람을 미쳐 날뛰게 하는 것이지.”
경봉의 말대로 그는 극락암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덕분에 극락암은 한밤중에도 공비가 출몰하지 않는 안전한 암자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목 메달아 죽은 그의 시신이 영축산 골짜기에서 발견되었는데, 통도사에 파견 나온 경찰이 부패한 시신에 총질을 하고는 소지품을 챙겨갔다.
휴전 후, 3달이 지나고 나서 경봉은 극락암 조실로 추대되었다. 그러니까 영축산에도 가을이 깊어가는 1953년 11월 3일의 일이었다. 전쟁 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극락암까지 들어와 법회 날마다 설법을 쉬지 않고 해주었던 경봉을 대중들이 선방 최고 어른으로 모시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경봉은 극락암으로 주석처를 옮긴 뒤, 첫해는 전쟁의 상처가 제 업대로 아물기를 기다렸다가 다음해 이른 봄에 시주자를 구해 가장 먼저 나반존자상을 조성하기로 했다. 전쟁으로 죽었거나 생사를 모르거나, 살아서 피난 온 사람들에게 나반존자에게 기도하도록 하여 신심과 재활의 의지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였다.
나반존자(那般尊者). 부처님의 10대 제자도 아니고 5백 나한도 아닌 우리나라 불교에서만 신도들에게 귀의를 받는 이색적인 존자를 경봉은 왜 조성하려고 했을까. 홀로 깨쳤다고 해서 독성존자(獨聖尊者) 혹은 독성님이라고도 부르는 나반존자.
하얀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유난히 긴 눈썹 아래의 눈과 입술은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어 그 모양새는 산신과 흡사했다. 일찍이 선각자 최남선(崔南善)은 삼성각이나 독성각에 모셔진 나반존자는 인도나 중국불교에 없는 ‘산신으로 변한 단군’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그것을 명쾌하게 증명하기란 쉽지 않을 터.
대부분의 신도와 스님들은 나반존자를 18나한의 하나인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로 보고 있는데, 말세의 복밭(福田)으로서 복을 주는 존자라고 믿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독성기도(獨聖祈禱)의 영험은 매우 크고 속히 이루어진다고 하여 오래 된 절에는 반드시 삼성각이나 독성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경봉은 말세의 복밭이 될 것을 염원하여 극락암에 가장 먼저 나반존자를 모셨던 것일까. 암울했던 일제강점기나 참혹한 6.25전쟁이야말로 무자비하게 불성을 짓밟고 뭉개버린 말세라면 말세였던 것이다.
경봉이 대오한 후 나반존자를 처음 친견한 곳은 운문사 사리굴이었다. 1934년 9월에 운문사에도 분규가 생기어 경봉은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원장이었지만 사태를 해결하는 책임자로 운문사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경봉은 운문사 재산권 분규보다는 사리굴에 더 관심이 많았으므로 청도에서 대절한 자동차를 타고 대천리에서 내린 다음, 다시 30리 산길을 걸어 절에 도착하자마자 점심공양을 하고는 바로 사리굴로 올라가버렸다. 호거산 산자락의 비구름은 경봉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차가운 가을비가 오려고 비구름이 산허리까지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가을비에 갇힌 경봉은 사리굴에서의 감회를 시로 읊조렸다.
시냇물 소리 밟으며 구름하늘 위로 오르니
비로소 세속생활 꿈속임을 깨달았소
누구든 삿됨을 떠나 진실한 뜻 얻는다면
온 누리 삼라만상 모두가 부처일세.
溪聲踏盡入雲天
始覺塵中過夢年
人得邪離眞實意
乾坤萬像總金仙
경봉은 사리굴 부처님인 나반존자를 참배하고 나서 신심이 솟구치자 또다시 가슴에서 우러나온 시를 읊조렸다.
운문의 고풍어린 푸른 하늘이여
들 풍경은 언제나 태평세월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고요한 산에
사리암 부처님 계시네.
雲門古靑天
野色泰平年
水寂山空處
邪離大覺仙
밤이 되어 구름이 물러가고 비가 멎자 거짓말처럼 둥그런 달이 떴다. 비를 맞고 사리굴을 오른 신도들이 달맞이를 하는지 떠드는 소리가 났다. 재를 지내며 암자 살림을 꾸려가는 주지승과 신도 사이에 오가는 큰 소리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들이 주고받는 얘기는 대충 이러했다.
사리굴에 상주하는 나반존자의 신통력이 가끔 나타나는데, 동굴 위에서 큰 바위가 굴러 오면 큰 재가 들어오고 작은 돌멩이가 떨어지면 작은 재가 생긴다고 주지승이 자랑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지승은 독성기도를 하여 나반존자가 소원을 성취시켜 줄 때는 반드시 동굴 위에서 돌멩이를 떨어뜨린다고 얘기했다. 주지승이 얘기하니 신도들은 반신반의하면서 믿는 것 같았는데, 달맞이가 파할 무렵에 한 유식한 신도가 경봉에게 다가와 물었다.
“스님, 큰 돌이 떨어지면 반드시 큰 재가 들어오고 작은 돌이 덜어지면 작은 재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기도가 성취될 때도 반드시 돌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또 이곳 스님이 말하기를 이것은 나반존자의 신통 묘력이라고 하니 과연 그렇습니까?”
경봉은 묵묵히 앉아 있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다음 손가락을 퉁겨 소리를 내었다.
“이제 알겠소?”
“무엇을 말입니까?”
신도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만약 손가락에서 소리가 났다면 죽은 사람도 손가락이 있는데 어째서 소리가 없는가.”
신도는 경봉에게 홀린 듯 더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또 이 소리가 작은가 큰가. 만약 크다고 한다면 얼마나 크며 작다면 얼마나 작은가. 또 이 소리는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허공에서 떨어졌나. 이 손가락 퉁긴 소리의 온 곳과 떨어진 곳을 활연하게 깨달으면 돌이 떨어지는 이치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반존자의 신통력을 알고자 하는 신도에게 경봉은 폭포와 같이 거침없는 법문을 하고 있었다.
“눈병이 있는 이가 해를 보매 햇빛을 청색, 황색, 적색, 백색, 흑색 등 갖가지 색깔로 보는데, 이 햇빛은 원래 오색에 속하지 않고 어떤 빛보다 뛰어나며 고금에 초절하고 천지에 빛나서 여여히 홀로 드러났거늘 오호라 중생의 마음이 삿됨을 떠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오. 범부의 생각으로 상에 집착하여 물들어서 돌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범부소견으로 천차만별로 해석하는 것이지. 그러나 돌이 떨어지는 이치를 알려고 한다면 삿된 마음과 범부의 생각을 크게 쉬고 쉰 뒤라야 돌이 떨어지는 이치를 틀림없이 알게 될 것이오. 그래서 이 암자 이름을 사리굴이라고 하는 것이오.”
사리굴이란 암자 이름대로 먼저 삿된 생각과 범부의 마음을 떠나면 저절로 나반존자의 신통묘력을 알게 된다는 것이 경봉의 얘기였다. 경봉의 자상한 얘기는 옳았다. 삿된 생각과 범부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서 나반존자의 신통력에 의지하려고 올리는 불공과 기도는 또 하나의 망상이자 집착일 뿐이었다. 그러니 심신이 청정하지 못한 채 나반존자에게 복을 달라고 합장하고 비는 것은 바른 기도가 아닌 것이었다.
이후에도 경봉은 통도사 주지시절에 한 번, 6.25전쟁이 끝난 후 독성기도를 하기 위해 사리굴을 세 번째 찾았는데, 마지막 세 번째 참배는 감회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극락암에도 나반존자를 봉안하고 난 후 사리굴을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그때 경봉은 사리굴의 나반존자를 참배하고 산길을 내려오는 길에 ‘흰 구름 떠도는 석굴에 어떤 일이 기특한가. 나반존자의 신통이 시방세계에 두루하네.’ 라고 시를 읊조리고 나서는 묻는 이 없는데 스스로 선문답을 주고받았다.
‘신통이란 무엇인가(神通之事如何否).’
‘여기서 운문사까지 오리길이다(此去雲門半十里).’
나반존자상을 극락암에 봉안했을 뿐만 아니라 경봉은 예전처럼 선풍을 드날리고자 선방에 삽삼조사(삽三祖師) 영정을 봉안하고 선객들을 맞아들였다. 삽삼조사란 부처님의 정법을 부촉한 마하가섭을 제 1조로 하여 심법(心法)을 이어간 선종의 33분 조사를 말했다. 인도의 마하가섭에서 달마까지 28분과 중국의 혜가에서 혜능까지 5분을 합해서 선방의 선객들은 삽삼조사라고 불러왔던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