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거라사’입니까?
“설교할 때, 성경지명(地名)이 나오면 슬쩍 넘어가곤 했었다.
그러나 이젠 성경을 더 잘 이해할 것 같다.”
“셀라를 골란고원 쪽이라고 열심히 설명했었는데,
확인하고 나니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현장을 돌아본 사람도 현장설명이 쉽지 않은데
하물며 보지않고 설명하고자 한다면 더 어려울 것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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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에는 거라사(Gerasa)라 불려지던 옛 지명이 현재 제라쉬(Jerash)라는
이름으로 암만의 북쪽 약 5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북길르앗산지의 중심부에 있는 고대도시의 유적을 탐방할 수 있다.
길르앗산지에는 상수리나무들이 많고, 그 열매는 돼지들이 좋아하는 사료라고 한다.
고대에는 더 울창했었다고 하니 돼지를 방목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가끔 멧돼지를 보았다는 사람을 만나 볼 수 있는 길르앗산지다.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던 흔적이 발견된 제라시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 지역을 점령한 다음부터
그리스식 도시들을 세우고 그리스 언어, 문화, 제도를 도입했다.
데가볼리는 영어로 Decapolis 즉 10개의 도시국가라는 뜻인데 ...
갈릴리 호수와 요르단강 동편유역에 번성하던 도시연맹으로 경제,
군사적 유대관계로 맺어진 10개의 도시들을 말한다.
후에 로마의 아라비아주에 편입되었던 데카폴리스에 속한 열 도시로
스키토폴리스(벳스안), 힙포스, 라파나(지금의 시리아 에르 라페),
카나타(시리아 텔 엘 아샤리), 디울, 아빌라(요르단 텔 크웰베),
가다라(요르단 움 케이스), 펠라(요르단 타바카트 파힐), 게라사(요르단 제라쉬),
필라델피아(요르단 암만)를 꼽는다.
간혹 다마스커스나 카피톨리아스를 포함시키는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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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를 방문하게 되면
먼저 유적지 남쪽 하드리안의 성문(AD129)이 손님을 맞이한다.
데가볼리시대 당시의 제라시 상주인구를 약 일만 팔천 명으로 추산하는데,
단번에 일만 오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마차경기장이 있고,
거대한 아르테미우스 신전이나 주피터 신전의 유적 규모로 보아
데가볼리의 중심도시로서 유동인구는 수 없이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폐허가 되어버린 대성당이나 세례요한교회, 혹은 쌍둥이교회 등 십여 개의
교회의 흔적은 비잔틴시대에 왕성한 기독교 도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기장을 지나 남문을 통과하면 널찍한 원형광장이 있고 빙 둘러선 돌기둥들이
방문자들을 환영하듯 도열해 서 있다.
그 가운데로 맥시무스 카르도(Cardo maximus)가 남북으로 벋어있다.
서쪽 언덕으로 3천명 좌석의 남쪽 극장이 있고, 그 옆에는 제우스 신전의 유적이 있으며,
오른쪽 언덕으로는 소규모의 박물관이 있다.
2세기에는 중앙거리 양 옆에 돌기둥들을 세워 주랑을 만들고
안토니누스(Antoninus Pius 138-161)를 기려서 안토니아나 길이라고 명명했다.
도심의 서편 높은 언덕에는 아르테미스(아데미) 신전을 웅장하게 세웠다.
주피터신전보다 규모가 훨씬 커 보인다. 신들의 세계도 여성상위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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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두로 시돈지역에서 데가볼리 지역으로 오셔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낫게 하셨다(막 7:31-37).
그래서 데가볼리(Decapolis) 지역은 예수님의 사역지이기도 하다.(막5:20, 마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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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즐룬성 남쪽에 있는 성모마리아교회에는 전승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그 모친 마리아와 함께 이 지역을 방문했고,
예수님이 주민들을 만나는 동안 마리아는 작은 동굴에서 휴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 동굴을 중심으로 성모마리아교회가 건립되었고, 주후 2000년 교황 요한바오로2세가
이곳을 방문하고 카토릭의 성지(聖地)로 지정했다. 제라시에서 멀지 않다.
그동안 전해오던 전승(傳承)을 역사적으로 인정한 사건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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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제라쉬(거라사) 지역을 찾아가면, 그 중심지 계곡에 실낱같은 작은 시내가
굽이굽이 가파르게 흐르고 있는데, 한때는 “황금의 강(Golden River)”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렸다. 이 강(?)물줄기는 얍복강에 합류한다.
“여기가 군대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가 호수에 빠져 죽은 사건의 현장인가요?”
“어느 지점에 돼지 떼가 빠질 만큼 거대한 호수가 있었을까요?”
지금은 그럴만한 호수가 없다. 다만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지형지세와
지금의 지형을 동일시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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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에 따라서는 거라사 대신 게르게사(지금의 쿠르시)라는 학설도 있다.
갈릴리 호수와 가까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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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라 돼지사건이 있었던 장소는
많은 논란을 일으켜 왔다. (거라사로 된 사본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호수근처에 거라사라는 이름의 땅은 없었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는 (갈릴리)호수 동편해안 힙푸스(Hippus)지방의
겔게사(Gergesa, Kursi)요 다른 하나는 “가다라”이다.
가다라는 요단강과 게팔세마(Kefar-Semah) 사이에 위치한
해안(갈릴리)의 돌출부분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 해안은 경사가 가파르다. 그래서 돼지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길로 내리달아 몰사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가다라 주민들은 이방인들이었으므로
돼지 치는 일에 유대인들처럼 거리끼지 않았다.”
<요하난 아하로니 외 1인, 아가페 성서지도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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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라사는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금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채
요르단의 유명 관광지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觀-
하드리안의 문
제라시남문
퇴역군인들이 가끔 퍼포먼스를 한다.
경기장
광장
광장 기둥들
대성당 입구에서 멀리 극장과 쥬피터신전
3천석 규모의 로마극장
군악대(퇴역 군인들)
아르테미우스(아데미)신전
북쪽 극장
첫댓글 고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