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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암의 생명기행(26)
미국 서부 해안, 제임스타운 그리고 요세미티
*미국의 서부 해안길
세도나 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LA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엔 렌트카를 빌려서 서부해안을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4월은 꽃피는 계절이라 난초계열의 노란꽃들, 나팔꽃, 유채꽃 등이 초원에 가득했다. 태평양 바다를 끼고 달리는 산 구릉엔 넓은 초원이 이어지고 목장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넓은 들판엔 지평선 멀리까지 이어지는 밭들이 있어서 풍요로웠다. 밭의 검은 흙이 매우 기름질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서쪽으로 보이는 태평양 바다는 우리의 동해안과 이어진다. 간간히 물개 떼들이 나타나서 볼거리를 제공했다. 우리의 동해안에도 6:25 전에는 이런 물개 떼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환경오염 때문인지 아니면 물개의 개체가 줄어서인지 근래에는 전혀 볼 수 없다. 그런 어린 때의 기억 때문에 물개 떼들을 보자 저절로 환성이 터져 나왔다. 물개 떼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엔 길 언덕에 전망대를 설치하고 망원경까지 시설해서 물개 떼들을 잘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자연환경을 보호하려는 미국의 노력은 해안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관광객들이 해안의 경치를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그저 잡풀뿐인 초원이라 해도 일정하게 만들어진 길이 있어서 그 길만을 사용하게 했다. 경치가 아름다운 모랫벌의 경우도 대부분 공원으로 정해져 있어서 함부로 드나들 수가 없었다. 표를 끊어야 하고 정해진 취사장, 휴지통,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저녁때가 되어 샌시미엔(San Simeon)에 숙소를 잡았다. 해수욕장이 개설된 곳이라 여러 개의 모텔들이 밀집해 있었다.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 뜻밖에 한국 사람이 경영하는 모텔을 발견했다. 모텔의 여주인은 경기도 의정부 출신이란다. 1977년 28세 때 이민을 와서 온갖 노력 끝에 이제 모텔의 주인이 된 것이다. 모텔의 방은 70여개 되고 방 1개의 값은 70불이었다.
저녁을 먹고 여유시간에 모텔 여주인의 과거담을 들었다. 6남매의 차녀인데 부모는 의정부 금오동의 미군부대 옆에서 작은 여인숙을 경영했다. 부친이 첩을 얻어 모친을 박대하는 바람에 자식들은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래 집이 싫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는 GI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미국이민을 온 처음엔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다. 열심히 일하고 알뜰히 저축해서 편의점을 차려서 자립했다. 다른 편의점보다 낫다는 평을 듣기 위해서 다른 상점이 갖지 못한 다양하고 좋은 물품을 갖추어야 했다. 멀리 LA까지 가서 좋은 물건을 구입하여 고객들에게 서비스했다. 그 돈으로 농장을 구입했다. 남편이 멕시칸인데 매우 근실하고 채소박사로 알려진 사람이어서 농장 경영에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그런 노력으로 제법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노후를 편하게 보내려고 이 모텔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이민자 중에서 성공한 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 허스트 캐슬(Hearst Castle)
샌 시미엔에는 미국의 언론재벌인 허스트의 성채가 있다. 이른바 “허스트 캐슬”이다. 허스트 캐슬의 원주인이었던 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사업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취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골동품 수집이다. 세계 각지에서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하고 여러 채의 저택을 짓거나 박물관을 임대하여 자신의 소장품을 전시했다. 그는 성공한 광산 기술자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1850년대 구입했던 부지 위에 1919년 ‘허스트 캐슬’ 건축 공사를 시작했다. 이 공사를 통해 1947년까지 약 30년에 걸쳐 총 5채의 저택이 지어졌으나 현재까지도 일부 건물은 미완성의 상태로 남아있다. 그는 1951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허스트 캐슬 관광은 먼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표를 구입하면 영화관과 기념품점이 있는 건물로 들어서게 된다. 입장권에는 시간이 기재되어 있으며 이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고 허스트 캐슬이 있는 곳을 향해 약 10여분간 산길을 올라간다. 산 위에 대저택이 나온다. 18개의 객실이 있고 실내는 스페인풍과 지중해풍으로 꾸며져 있다.
허스트 캐슬을 둘러싸고 '에스폴라나데(Esplanade)'라는 산책길이 꾸며져 있다. 이 길에는 허스트가 수집했던 각종 조각품이 전시돼 있는데 이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이집트의 보호의 여신이자 파괴의 여신인 세크벳의 조각상이다. 이는 3000년 이상 된 조각품으로 허스트가 이집트에서 직접 가지고 온 것이란다.
다음 코스인 메인 테라스와 '카사 그란데(Casa Grande)'. 허스트 성에서 가장 큰 건축물인 카사 그란데는 얼핏 보기에 거대한 수녀원과 같이 보인다. 특히 정문은 16세기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단철로 실제 수녀원에 있던 것을 옮겨와서 설치했다고 한다. 1층 내부에는 손님 접대용 방이 있고 2층에는 객실과 도서관 3층에는 허스트의 개인 거실, 침실, 화장실, 응접실 등이 갖추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둘러볼 곳이 바로 실내수영장. 로마 수영장이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이곳은 수영장 타일의 디자인을 이탈리아 라벤나에 있는 플라시디아 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타일과 실내장식 모두 이탈리아에서 수입된 것이다.
허스트 캐슬은 한 개인이 건립한 거대한 성채이긴 하지만 역사성이 없어서 그저 부자집 이상일 수 없었다. 다른 나라에서 보는 궁궐의 역사성과 전통성과 비교하면 어딘가 허술하다. 미국이란 나라가 워낙 역사가 일천하다 보니 이런 건물을 역사화하여 관광상품으로 내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페블 비치(Febble Beach), 그리고 제임스 타운
‘허스트 캐슬’을 구경하고 ‘산 시에멘’ 모텔의 여주인이 소개하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차를 몰았다. 벨몬트의 살리나스 포구라고 하는데 그 여주인이 초기에 정착했던 모양이다. 멕시칸 음식이 뛰어나서 LA에서 새프란으로 가는 관광객들이 모두 그곳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귀띰한다. 살리나스강이 흐른느 포구로 가자면 페블비치를 경유해야 한다. 페불비치는 해안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특히 세계적인 골프장이 있다. 세계 10대 골프장의 하나라고 하는데 경치가 좋은 페블비치의 해안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절경이 골프장의 성가를 올리는 모양이다. 우리가 가는 날 골프경기가 있었는데 세계 제일의 골퍼 타이거 우즈가 출전하고 있어서 구경꾼이 엄청 몰려온다고 했다. 한국의 최경주도 출전한단다.
페불비치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거의 되어서인데 길거리에 승용차가 넘쳐서 도저히 제 길대로 달릴 수 없었다. 그래서 길을 우회해서 한참 돌아서 겨우 페불비치 시티에 도착했다. 도시의 이름처럼 해안의 조약돌들이 아름답고 날씨가 맑아서 많은 관광객들이 해안가에 몰려 있었다. 4월이지만 날씨가 맑고 햇살도 따가워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모래밭에 뒹굴고 즐겼다.
페블비치 시가지를 한 바퀴 돌고는 곧바로 벨몬트로 갔다. 살리나스 강이 흐르고 작은 포구를 찾아서다. 페블비치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곳이다. 모텔 여주인이 가르쳐 준 필립스샵은 우리의 해산물 식당에 해당되는데 온통 사람들로 붐비었다. 소문이 나서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다. 멕시코 스타일의 숩-과, 매운탕 비슷한 음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특정 음식을 먹기 위해서 몇 백리 길을 달려간 것은 평생 처음이다.
점심 후에 요세미티로 가기 위해서 고원지방으로 들어섰다. 캘리포니아 중부 고원지방은 끝없이 펼쳐진 목장지대다. 끝없는 초원, 끝없는 목장, 끝없는 과수원. 무엇이든 지평선 멀리까지 이어진다. 포도밭이든 사과밭이든. 한가히 풀을 듣는 목장 소, 양, 염소. 그리고 작은 마을에는 으례 트랙터나 콤바인 같은 농기구가 한데 모아져 있다. 풍성한 농촌을 실감나게 한다. 더러는 경비행기도 볼 수 있는데 농약을 살포하거니 씨를 뿌릴 때 활용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우리의 농촌과 비교가 안 된다. 그런 목장지대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다음날도 같은 풍경을 지닌 농촌을 끝없이 달려야 했다. 한낮이 되어 제임스타운(Jame's town)이라는 시골 도시에 도착했다. 작은 시골 마을인 셈이다. 한 낮이었는데 행인들의 걸음걸이가 그렇게 한가할 수 없었다. 서부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 시골도시 풍경이었다. 카우보이모자를 쓴 보안관이 어슬렁거리고 까페 앞엔 뚱뚱한 식당 주인이 흰 캡을 쓴 채 사람 좋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한낮의 햇살 때문인가? 한 떼의 사람들이 정장을 하고 몰려간다. 아마도 결혼식이 있었는가 보다. 우리는 그 풍경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이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식당 안으로 들어가 햄버거를 시켰다. 햄버거는 가장 미국적인 음식이다. 원래는 독일에서 개발되었다고 하는데 가장 짧은 시간에 먹을 수 있고 가장 많은 영양가를 지닌 음식이며. 가장 간편한 방법으로 운반할 수 있다. 세계 28000개의 대리점이 있는데 미국문화의 침투는 바로 이 햄버거의 침투로 대변될 정도란다.
남자들은 같은 식당의 카운터 쪽 바에 들어가서 백포도주를 청했다. 카운터에서 술잔을 나르던 웨이터가 우리를 반기며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사우스 코리아라고 했더니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굳(good)을 연발한다. 의자에 앉아 있던 뚱보 하나가 다가와 이곳을 찾은 매우 드믄 한국인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어서 김정일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우리가 노굳(no good)이라고 했더니 자기와 생각이 같다며 악수를 청한다.
카운터의 뚱보주인이 기분이 좋아서 싱글거리며 생맥주잔처럼 큰 컵에다 백포도주를 가득 따라준다. 그 맛이 너무 좋다. 포도주맛이 좋다고 칭찬했더니 이곳 제임스타운의 명물 포도주라고 한다. 원래 이곳은 동광산이 있어서 한 때는 4,5만 명의 인구였지만 광산이 폐쇄되고는 4,5천의 인구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부터 있던 포도주 공장은 그대로 있어서 아주 질 좋은 포도주를 생산한단다. 인근 사람들이 모두 그 포도주를 애용한다고 한다.
포도주가 워낙 맛이 좋아서 나는 생맥주잔 같이 큰잔으로 계속 마셨다. 백포도주여서 겉으로 보기에는 색깔이 생맥주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이곳 공장에서 바로 내온 것인데다가 차게 식혀 있어서 매우 신선했다. 내가 계속 마셔대니 웨이터는 기분이 좋다면 더욱 듬뿍듬뿍 포도주를 따라준다. 한 컵에 거의 반병 이상 들어간다. 그러니 나는 두 병도 넘는 포도주를 거뜬히 마신 셈이다.
제임스타운의 시골다운 풍경과 넉넉한 인심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이 도시를 세운 사람이 제임스냐고 묻자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서 미국엔 제임스타운이란 이름의 도시가 제법 된다고 한다. 지도로 위치를 찾아보니 웬걸, 제임스타운이란 도시가 한 둘이 아니다. 각 주마다 하나씩인 셈인데 뉴욕, 버지니아를 비롯해서 노스 다코다, 노스 캐롤라이나 등 20여 곳이 넘는다. 영국군 장교인 죤 스미스미 대위가 자신이 점령한 식민지 마을에 영국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따서 제임스타운이라고 이름 붙인 것도 십여 개 된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 마을 이름은 오랜 세월 지형과 더불어 만들어지는 게 보통인데 이곳은 이렇게 특정인의 이름을 따서 급조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요세미티의 불탄 소나무와 자연의 생명력
차는 점차로 산악지대로 들어선다. 산악지대로 옮아갈수록 나무의 모양도 다르다. 드디어 국립공원 요세미티에 이르렀다. 요세미티 계곡은 1만 년 전부터 인디언이 살아왔다고 한다. 그들은 요세미티 계곡을 “하품하는 입”으로 불렀고 “요세미티”란 “곰”을 뜻하는 말인데 야생 곰들이 자주 출몰한다고 한다. 미국서도 드문 고산 밀림지대인 셈이다. 곰이 너무 많아서 민가에 피해를 주는 일이 많아 11월과 12월의 두 달 동안은 곰사냥이 허용된다고 한다. 음식물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주의가 여러 곳에 나붙었다. 야생 곰이 그것을 먹으려고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요세미티의 자연풍광은 하늘을 찌를 듯한 소나무와 낙엽송 비슷한 루카투스의 밀림과 그리고 바위산이 중심이다. 겹친 바위산엔 제각기 이름이 붙여져 있다. 대장바위, 구름바위, 둥근 돔, 보초바위, 종탑바위 등등이다. 그리고 740여 미터에 이른다는 면사포 폭포가 절경을 이룬다.
원래 인디언들이 살던 이곳에 1851년 백인 금광탐사단이 들어왔다가 인디안에게 살해당한 일이 있었다고 하다. 그것을 빌미로 미국 정부의 기병대가 파견되어 인디안들을 몰살시키고 이곳을 장악했다고 한다. 1854년에 주립공원이 되고 1889년 링컨 대통령 때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불탄 소나무 밀림이다. 빽빽한 소나무 밀림이 불에 타서 불탄 나무그루가 그냥 서 있다. 그런데 이 불탄 소나무의 밀림이 관광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미국 당국은 이 불탄 소나무를 그대로 보존하여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소나무는 한 번 밀림을 이루면 다른 나무들이 자랄 수 없을 만큼 성장이 빠르다. 그렇게 자란 소나무가 나무 그늘을 만들고 마른 솔잎을 바닥에 깔고 송진을 내뿜고 하면 활엽수같은 다른 나무들은 아예 자라지 못한다. 나무뿐 아니라 풀잎들도 자라지 못한다. 그렇게 되니 풀잎을 뜯어먹고 사는 토끼나 노루 같은 짐승도 살지 못하고 심지어는 작은 벌레들마저도 살 수가 없다. 그만큼 소나무 숲에서는 소나무 이외의 다른 생명들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횡포를 막을 방법은 산불밖에 없다. 자연은 이런 경우를 대비해 두었다. 소나무는 송진을 내뿜는데 때로는 이 송진 덩어리가 소나무 옹이에 뭉쳐져서 볼록렌즈와 같은 역할을 한다. 투명한 송진 방울에 햇빛이 굴절하면 빛은 송진의 볼록렌즈를 통과하면서 소나무속에 불씨를 심게 된다. 처음엔 송진과 더불어 나무속에 밴 송진에 불이 붙고 그것이 점차 번지면서 소나무는 불기둥이 된다. 그리고 이 불이 마른 솔가지에 옮겨 붙어서 산불을 일으킨다. 한번 산불이 일어나면 바닥에 마른 솔잎이 쌓여 있어서 그 불길이 대단하다. 이렇게 하여 생긴 자연 산불이 소나무숲 전부를 태우는 것이다.
미국 헌법에 자연 산불은 인위적으로 끄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생태계의 변화를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대체로 300년 주기로 자연산불이 크게 번지는데 이렇게 소나무가 타서 없어지면 그 밑에서 자라지 못했던 활엽수들의 씨앗이 날아와 싹을 틔운다. 풀잎도 자라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오랫동안 살지 못했던 다람쥐, 사슴, 사자 등의 동물들도 찾아와서 산은 다양한 생명으로 풍성해진다.
어떤 나무 열매는 단단한 껍질에 싸인 채 이런 때를 기다려 수백 년 동안 소나무 그늘에서 근근히 생명을 부지해 온다고 한다. 그러다 산불이 나는 때를 계기로 드디어 껍질을 벗고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연, 그리고 그 자연을 이루는 생명이란 얼마나 위대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