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판토.
국제법에 나오는 유명한 판례 코르푸해협사건의 무대 바로 아래 펠로폰네소스반도가 만들어 낸 천연의 피항처.
여기에서 지중해 세계를 마감하는 대해전이 벌어졌다.
지중해에서 각축을 벌이던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일으킨 또 하나의 거대한 충돌.
레판토해전은 세계사를 장식한 대규모 해전중의 하나다.
고대부터 이용되던 갤리군선(벤허에 나오는 군선을 연상하면 된다)이 주력이 된 마지막 해전(그 이후는 캐리비언의 해적에 나오는 범선 포함들이 원거리에서 포격전을 수행하다가 충돌전법도 가끔 사용하는 그런 싸움으로 바뀌었다. 명량에 나오는 충무공 휘하 판옥선의 충파전법과도 유사하다).
나폴레옹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기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한 트라팔가르해전과 충무공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 한산도대첩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사즉필사의 정신으로 왜군의 바닷길을 막아낸 명량해전에 버금가는 해전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인류역사상 처참하고도 장엄한 해전이 그것 뿐이었을까.
페르시아와 고대 그리스가 벌인 최초의 동서대전에서 바다를 무대로 한 살라미스 해전과 케사르 사후 로마제국의 패권을 둘러싼 악티움 해전 등 고대사의 해전도 있고, 영국정벌에 나선 스페니쉬 아르마다를 플리머스에서 시작하여 칼레를 거쳐 그라블리느에서 궤멸시킨 드레이크의 해전과 네덜란드 함대를 궤멸시키고 세계를 영국의 내해로 만드는데 기여한 크롬웰의 해전 등 근대사의 초입에 벌어진 해전들과, 일본이 노쇠한 러시아에게 치명타를 입히고 우리나라에서의 배타적 지배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 쓰시마해전이나 태평양전쟁에서 수세에만 몰리던 미군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미드웨이 해전, 그리고 월드컵의 열풍 속에 서해 외로운 최전선에서 꽃다운 젊음을 바다에 불사른 연평해전에 이르기까지 기억하고 싶은 해전이 어디 하나둘인가.
바다에서의 싸움은 육지에서의 싸움과 또 다르다.
불타오르면서 서서히 침몰하는 배와 운명을 같이 하는 뱃사람들의 투혼은 속세의 미련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눈 앞에서 금쪽같은 자식들을 태우고 가라앉아 가는 배의 모습을 바라본 부모들과 온 국민들이 느낀 애끓는 심정도 바다라는 특수상황이라 더 비감했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플함락과 로도스섬 공략 이후 지중해의 패권을 노리는 오스만투르크는 원래 해운국이 아니었다.
해적들을 모아 급조한 함대를 가지고 오랫동안 지중해의 재해권을 잡고 있던 해양통상국가 베네치아의 아성을 넘본 것은 셀림2세의 무능과 아둔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선제인 술레이만 2세가 남긴 위업을 유지하기만 하였어도 될 것을 터무니 없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대해전을 일으키고 역사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풍신수길만도 못하다고 할 밖에.
당시 베네치아는 욱일승천의 기세를 떨치는 투르크에 맞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였다. 그런데 베네치아는 지금의 일개 도시가 아니라 아드리아해를 내해로 거느리고 오늘날 구 유고슬라비아의 영토이던 달마치아 지방을 포함하여 크레타섬과 키프로스섬 등과 그리스 해안의 중요도시를 영토로 둔 강대국이었다.
하지만 소아시아와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그리고 아라비아와 페르시아등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영토와 유럽에서 헝가리까지를 손에 넣고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폴란드를 호시탐탐 노리던 투르크에 비하면 베네치아는 열세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전단은 셀림2세가 온건파 대신들을 누르고 키프러스섬을 공략하면서 시작된다.
키프러스섬은 교통의 요충지이자 소금의 생산지로서 통상국가인 베네치아에게는 보물단지이지만 투르크에는 별 가치가 없는 땅이었다. 그래서 온건파 대신들은 키프러스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받던 조공금에 만족하자는 의견을 내었지만 헛된 공명심에 불타는 젊은 술탄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베네치아가 통상국가로서 번영하는 것이 상업적 재능이 부족한 투르크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멍청한 지도자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피를 헛되이 흘리게 하고 국가의 번영을 가로막는지 또 한번 보여준 사례이다.
멍청한 지도자는 또 있었다.
에스파냐의 필리페2세는 기독교세계의 맹주 자리를 놓고 프랑스와 다투는 것으로 모자라 지중해에서 번영을 구가하는 베네치아를 집어 삼켜 이탈리아 반도를 자기 수중에 넣겠다는 야심으로 사사건건 베네치아와 대립각을 세운다.
사실 베네치아가 동방무역을 장악함으로써 에스파냐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강온전략을 통하여 투르크의 침략을 저지하는 베네치아에 대하여는 따로 사례를 하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한편 이단재판소 소장 출신의 교황 피우스 5세는 십자군이라는 허망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기독교국가의 연합을 주선하지만 종교개혁의 불길이 치솟은 유럽대륙에서 교황의 입지는 좁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로마 주재 베네치아 대사의 헌신에 힘입어 베네치아는 에스파냐 베네치아 교황령 주축의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투르크에 숫적으로 절대 열세에 놓인 상황을 호전시키고 키프러스 구원에 실낱같은 희망을 갖게 하는데 성공한다.
투르크의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베네치아 대사가 연금상태에서도 국익을 위하여 온갖 외교교섭을 병행하고 투르크 내부의 정황을 본국에 알리는데 진력한다.
우리나라 외교관들이 그들의 반에 반 정도만 되어도 얼마나 좋을까.
연합함대가 가까스로 구성되었지만 세부적인 문제를 놓고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
무엇보다도 사령관에 뽑힌 필리페 2세의 이복동생 돈 후안 공이 필리페 2세의 지시로 친척들의 배웅이라든지 사령관기 수여식 등 하찮은 일로 천금같은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만다.
그러는 와중에 키프러스섬에서 외부의 지원이 철저히 봉쇄된 채 농성전을 펼치던 베네치아 사람들은 전원이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사령관은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바닷물에 여러 차례 담궈 죽이는 형벌을 받는다.
술레이만 2세가 로도스섬 공방전에서 항복한 성 요한 기사단이 군장을 갖춘 채 퇴거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던 것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역사를 보면 무능한 군주나 지도자는 잔인하고 비열한 점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러한 사건들을 읽으면서 머리 속에는 자꾸 임진왜란을 겪은 우리나라가 떠올랐다.
정통성의 컴플랙스를 떨쳐 버리지 못한 선조의 무능과 신하들에 대한 의심 그리고 잔인함은 필리페 2세와 셀림 2세의 합체인 듯 여겨진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에서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항복하면 타 지역으로의 퇴거를 허용한다는 회유책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백성들의 전면에 서서 싸우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과 압록강을 넘지 못해 안달하는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선조의 모습이 오우버랩되어 참으로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래도 우리에겐 자랑스런 충무공과 그 부하들이 있다.
선조를 닮은 못난 지도자는 또 있었다.
국부라고 치켜 세우는 이승만은 잔인한 독재자이면서 겁쟁이이고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였다.
4.19 학생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끝까지 발악하다 군대가 돌아서자 허겁지겁 망명길에 오른 늙은이.
6.25의 와중에서 일본으로 도망을 가지 못해 안달을 하던 그가 무슨 국부의 자격이 있다는 것일까.
처참한 전장에 나서는 장졸들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쓸데 없이 시간만 낭비하거나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 유능한 장수들을 절망시키는 위정자들의 패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승리의 기약도 없이 오로지 나라를 지킨다는 일념에서 피를 뿌리면서 죽어간 수많은 영혼들.
젊은 나이에 산화한 이들도 안타깝거니와 베네치아의 총사령관이 75세의 노령에도 굿굿이 최일선에서 석궁을 당기고 허벅지에 박힌 화살을 뽑아드는 모습은 처연함마저 느끼게 하였다.
명량영화가 보여준 최민식의 충무공 연기는 빼어나긴 했으나 우리의 마음 속에 그려진 충무공의 모습을 채워주진 못했다.
투르크측은 외견상 연합함대의 규모를 웃도는 전력을 갖추었으나 전투력은 물량적 요소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닌 법.
레판토 만 안에 숨어서 지연전을 펼치자는 투르크측 백전 노장 해적출신들의 진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공명심을 위해 전 함대를 사지로 몰아넣은 투르크측 총사령관 알리파샤도 멍청한 지도자의 반열에 넣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최후까지 최전방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고 불퇴전의 각오로 동행시킨 두 아들까지 포로로 잡힌 것을 보면 동정심이라도 생긴다.
명량에서도 왜군쪽에 구루지마 해적 출신 미치후사가 등장하였는데 충무공을 경적하다 패착을 두는 점에서 레판토의 해적 울루지 알리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레판토해전에 참여한 연합함대의 규모를 보면 갤리군선 204척, 갈레아차 포함 6척, 소형 쾌속 프리깃함 50척, 대형 수송범선 30척, 대포 1815문, 선원 13000명, 노잡이 43500명, 전투원 28000명이었고 투르크측은 함대 규모나 전투원 수에서 이보다 1.5배 내지 2배 가량 우세하였다.
1571년 10월 7일 하루 종일 싸운 결과 투르크측은 울루지 알리가 겨우 4척의 배를 이끌고 도주하였을 뿐 나머지는 모두 수장되거나 나포되는 등 연합함대측의 대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연합함대측도 전사자수 7500명, 부상자수(여기에는 나중에 동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도 포함된다) 8000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특히 가장 열심히 싸운 베네치아는 전사자 4836명과 부상자 4584명의 손실을 입었는데 특히 귀족 출신 지휘관들 대다수가 전사하여 그들의 애국심과 책임감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투르크측 손실은 포획한 갤리군선 117척, 포획한 소형군선 20척, 전사자 8000명, 포로 10000명, 투르크 배에서 사슬에 묶인 채 노잡이로 혹사당하던 기독교 포로 석방자 15000명에 달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전쟁의 포성을 모르고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국내외적 환경은 포성은 없지만 살벌한 전쟁터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진정 국가와 사회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면 망망대해 외로운 배 위에서 목숨을 바쳐 싸우던 사람들의 마음을 닮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후방에서 지원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함께 깨달아야 할 것이다.
지도자가 되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안달할 것이 아니고 자신의 역량을 잘 가늠하고 맡은 일을 완수해 나가는 자세를 갖는 것이 우선이다.
어느 국가가 강성해졌다고 자만해서는 안된다.
엉터리 지도자들이 판을 치고 그들에게 부화뇌동하는 멍청한 국민들이 많아지면 금방 무너져 내리고 만다.
레판토해전의 승자와 패자 모두 그 후 쇠퇴기에 들어섰고 특히 에스파냐는 무적함대를 잃고 세계사의 주류에서 밀려났다.
절호의 기회를 무산시킨 것은 필리페2세의 무능함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였으리라.
베네치아도 나폴레옹에게 멸망당하고 오늘날 처럼 이탈리아의 일개 도시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역사 앞에서 겸허해야 함을 다시 느낀다.
이 책은 저자가 발굴한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하여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는데도 힘쓰고 있지만 소설적 흥미도 가미하여 주인공들의 사랑과 애국충정이 가슴 뭉클하게 그려져 있다.
지하철에서 정신 모르고 책을 읽다가 하차할 역을 지나칠 정도로 재미도 있음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