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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한분 : 황종섭대종회장(24세) 촬영한분 :황일석(25세)
◈독오 선생 휘 협 의 도학치심 을 닦아온 서안(책상)
선생이 만년에 이 서안을 후손중 병오생 者에 전전 하라는 유명이 있으므로 역세를 전 하고 있다.
독오선생 사실
◈2008년 발행 창원(회산)황씨 족보240페이지 참고
◈조상님의 협자는 뜻맞을 협(火夾)자 이온데 요즘 컴퓨터에 그 글자가 생성되지
안으매 그냥 한글로 협자로 기록 합니다.
독오선생의 휘는 협 이요 자는 락부(樂夫)이니 려조명신 휘 석기(石奇)의 후손으로
칠원에 시거(始居)한 현령공 휘 석건(碩健)의 5세손이다.
1606년음력3월5일 유동 세제에서 출생하니 어릴적부터 자질이 초범하고
기상이 탁월 하여 문당부노 들의 총애를 받아 왔다.
1616년선생나이 11세 되는해 부친을 따라 창원향교애 갔다가 글짓기 시험에 등삼이 되어모인 선비들을 놀라게 했다.
무오년 3월에 13세로 내간상을 당하고 잇따라 7월에 외간상을 당하여 치상범절이 예(禮) 에
어긋남이 없었고 조모를 모셔 봉양함에 성효를 다 하고 치가에 가훈구잠 으로 가도를 세웠다.
학문을 하되 과거공부는 힘쓰지 않고 수기치인에 전심하여 봉제사에
성경을 일삼아 길흉사는 몸소 묻고 와병을 앓는 사람은 은근히 돌봐 주었으며 매사에
근신하여 기만함이 없고 몸가짐이 겸손하여 외식이 없으며 망영된 말을 싫어하고
착한말을 즐겨하여 문전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모두 감화되어 여남안연 이요
관서부자 라 칭송하니 이로써 선생의 고매한 인품을 가히 알수있겠고
문송 조선생 미수허선생 같은 당세명현들과 교분이 두터웠으니 그 학문과 덕행을 또한 짐작 할수 있을 것이다.
또 임진병란에 회신된 덕연서원을 중건함에 성력을 다 하였고
퇴계이선생 성학십도를 수모하여 십도전 을 지어 상목의 자(資) 를 삼았다.
1680년음력4월29에 하세하니 향년75세라 선생의 몰세후 17년 1696에
사림이 유동에 사우를 지어봉향하고(구:용산사,지금:상봉서당) 또 사림이
덕연원방 에 별사를 지어 1698년음력10월26일에 입향 하였으며 문집
약간권이 세전한다.
덕연별사 다례일은 매년 음력3월초정 이요 상봉서원 다례일은 매년 음력3월5일이다.
끝으로 선생애송시(愛誦詩)를 여기에 적어 둔다.
-夜 坐 詩-
창너머 오동달이 그윽한 나를 찾아
주위를 성역(聖域)처럼 천진(天眞)을 볼라더라.
한가닥 피운향불 한동안 서릿더니
노변에 구불구불 대기속에 사라 지네.
-杜 鵑 詩-
가고싶은 고국땅에 가지못한 촉왕(蜀王) 영혼이여
달밝은 공산(空山)에서 원한을 하소연 하구려
봄바람도 이내 한을 녹일수 없다말가
두견(杜鵑) 꽃에 지연 눈물 천방울 만방울
---후손 철주(喆柱) 삼가 씀 (약역(略譯)---
독오선생 행장
2008년 발행 창원(회산)황씨 족보254페이지 참고
선생의 휘 는 협 이요 자는 낙부시니 고려명상 황상(黃裳)의 후예시다.
벼슬이 끊이지 않아 오세조 현령 휘 석건(碩健)공이 동래정씨 부윤홍손의 따님을 맞이하여
칠원에 사시니 드디어 칠원사람이 되었다.
사세조 충순위 휘 완(琬)이 분성배씨 전적 세적의 따님을 맞아
아들 인의 사겸(士謙)을 두시니 선생의 증조이다.
인의공의 예빈시부정 상주 주세곤의 따님을 맞으셨고 조부는 참봉여식(汝埴) 이니
부사직 김해김천영의 따님을 맞으셨고 아버지 휘 원록(元錄)의 증직판결사 로서
영산신씨 현감 갑의 따님을 맞아 선조 39년 병오 삼월오일에 칠원 유동리에서 선생이 나시니
어릴때부터 용모가 초범하여 보는이 마다 특이함을 알았다.
병진년나이 열한살때 아버지를 따라 창원 향교에서 논문을 냈더니 입상권 내에 들어
모든 선비들이 귀히 여겼다.
무오년 열세살 때 삼월에 어머니 상을 당하고 칠월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지극히 애통함과 근엄한 예법에는 인읍이 칭찬하였다.
조모를 모시고 제매를 거느릴때 근근한 성의를 다하여 가사를 정리하고
제매 가취에 도리를 다 하더니기사년에 조모 김씨의 상을 당하여 초종범백은 주자례를 따랐다.
평생 봉제사 접빈객에 간곡한 정성을 다하시고 향당 길흉간에 경조를 친히하여
상하의 차별이 없으시고 남의궁곤에 도와 주기를 좋아 하셨다.
조간송 허미수 양선생으로 정계를 맺어서 서간 왕복에 경모하는 성의가 도저 하셨다.
선생이 계시던 뜰앞에 벽오동 한그루 심어놓고 그 집을 독오당이라 하니 대게
오동에 달이 솟는 뜻을 취하심 이라.
그 쇄락하신금기를 엿볼수 있다.
주도면밀 하신 규범은 비록 예전 군자라도 어찌더 하리요.
오호라 하늘이 무심하여 경신년 사월 십구일에 향년 칠십오세로 세상을 떠나시니
부음듣는 사람마다 눈물짓지 않는 사람 없느니라.
유동 선산 후록에 장례하셨다.
배위는 벽진이씨 부호군 휘 도일 의 딸인데 1녀를 두어 진사 곽수진에게 출가 하고 재취부인은
진주하씨 이용의 따님으로 일남 이녀를 두셨으니 자에 응형(應亨)은 무과를 하셨고
배위는 함안조씨 징성의 딸로서 5자2녀를 두셨다.
선생은 근우하신 인인 군자로서 의표가 장엄하고위엄이 높으셨으며 모든 일에 근실하고
신후함은 속임이 없고 정직한 행동 화평한 처사는 외식을 꾸미지않고 남의 착함을 즐기시며
남의 아름다움을 찬동하여 문전에 출입하는 사람마다 감화하지 않은자가 없었다.
공자 말씀에 십실지업에 반드시 충신한이있다 하더니 다행히 이러한 십실에
이 같은 충신 한분이 있으니 실로 국가의 뿌리요 사람의 모범이라.
불초한 내가 문하에 가르침을 받은지몇년이라 느끼고 사모함은 그지없어 졸렬한 붓으로 언행의 만일을 위와같이 기록 하노라.
---정축3월 문생 상산 주맹헌(周孟獻)근찬---
주맹헌 : 과거에는 힘쓰지 않고 의리지학을 오로지 숭상하였다.
또 병란에 허물어진 주세붕(周世鵬)의 원묘(院廟)를 중건하였는데 1676(숙종 2)년에 `덕연(德淵)`이라 사액받았고,
주박(周博)·배석지(裵錫祉)·배세속(裵世續)·황협(黃협(火+夾)) 등 4현을 별사(別祠)에 배향하였다.
그는 또한 평생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독오선생문집 요선시문
제목: 두견
선생께서 11세때 창원 글방에서 지은시
가고 싶어도못가는 촉망제의 혼이여
밤 달 빈산에 하소연으로 속 푸는듯
한은 동풍에 들어가도 오히려 없어 지잖아
두견화 꽃위에 눈물 흔적 낭자 하네.
제목:오동나무와 대나무
창가의 오동나무 봉황이 앉을 만큼 자랐고
두둑의 대나무는 가을에 의당열매 영글지
봉황새가 어느 때나 날라올까 하고
추운날에 무릎을 안고 앉아 기다리네.
제목:밤에 앉아서
작은 창에 가을 달은 은자에 걸맞은데
경지에 이른 깨달음은 고요한곳이 진리네.
한심지 작을 향이 엉키어 움직이지 않는데
화로에 구불구불 오르는 연기 엷은 향기네.
수석동을 지나며 허 둔 암을 생각하다.
은자의 의자에는향기 오히려 나는데
바위타고 흐르는 물 저절로 방아질이네.
생각나는 사람 만나지보지 못하고
홀로서서 추운소나무를 어루만지네.
제목:장암(藏岩)의 수석의 기록
17년 여름에 내가 칠원(柒原)에 우거하면서 그시골의 선비 황생(黃生) 배생(裵生)과 더불어
장수암수석을 관광하려고 동(洞)의 四~五리를 들어갔다.
산은 깊고 골짜기는 긴데 무성한 숲이 많고 높은 절벽과 기이한 바위에는 담쟁이가 많았다.
돌이 홀로서서 푸르게 숲 밖으로 높이 솟은 것이있는데 장암(藏岩)이다.
그 아래에는 시냇물이 맑고 얕은데 피라미가 많이 있었고 그 위는 석만(石灣)이요
그 아래는 석우로 적석이 많았다.
그사이에 담수(潭水)가 있었다.
나는 두 생도와 돌 위에 앉아 서로 더불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곳은 따라 걸을만하고
저곳은 발을 씻을 만하다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산비가 내리는데 골짜기가 어둡고 석동의 연기 낀 오속길이 그림 같았다.
그 위에 돌밭[石 田]을 일궈먹고 사는 산촌이 있는데 거기서 하철을 만드는 자가
그곳에 살면서 또 자손을 기르고 있었다.
대개 옛 시대에 반드시 명예에서 도망하고 세상을 피하는 자가 이곳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로 인하여 장암이란 이름이 있어 후세에 전하게 된 것이다.
골짜기에서 나오면「유동 」이라 하는데 황씨가 대대로 살면서 구업으로 삼는다고 한다.
◈하철을 만드는자 : 참된 정기를 타고 나서 이를 잘 보존하며, 억세고 날랜 기운을 가진 이를 만드는자.
---기록한분:양천 미수 허목은---
미수허목은 찬성 자(磁)의 증손으로, 별제 강(橿)의 손자이고, 현감 교(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1615년(광해군 7) 정언옹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아버지가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했으며,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 2)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했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하므로 이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으로 해설한 《심학도 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 堯舜禹傳授心法圖》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그의 사후 1688년 관작이 회복되고, 숙종은 예장(禮葬)의 명령을 내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했으며, 자손을 등용하도록 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림·글씨·문장에 모두 능했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 東事》·《방국왕조례 邦國王朝禮》·《경설 經說》·《경례유찬 經禮類纂》·《미수기언 眉叟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嵋江書院)이 마전군(麻田郡)에 세워졌으며 나주의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제향됐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제목:송당(松堂) 조간(趙澗)의 운(韻)에 화답하다.
강 매화의 꽃 소식이 이르니
봄바람에 떠나는 한이 싹트네.
벽산에 소요할 것을 꿈꾸고
배구의 맹서에 해가 저무네.
이로부터 망년 계를 맺었는데
어찌 먼저 태어난 형을 논하랴!
두 둥실 오동위에 뜬달이
분명히 양쪽의 정을 비춰주리.
제목:원운을 붙이다.
황생을 못본 지가 오래되니
싹트는 인색함 없에기 어렵네.
용산에 큰 약속을 두었는데
낙수에 깊은 맹서 맺었었지
나이에 비록 선후가 있으나
속마음은 바로 아우와 형이네
어느때나 봄 날고 가을밤에
술 나누며 다시 정을 논할까?
제목:달밤에 뱃놀이를 요구하다.
용 쑥 한 터럭이 새 가을에 움직이는데
숲과 구렁에 서늘함 생기고 돌길이 깊네.
이 밤에 강상의 절을 찾고 싶은데
그대에 청 하노니 달밤에 편주를 띄워주게.
제목:얼음 보내준 것을 사례하다.
한 조각 맑은 얼음 내목을 상쾌히 하니
삼복다림 고열이 서리 가을로 변했네.
친구의 두터운 의를 무엇으로 보답할지
다시 평생의 계약을 닦을 것을 원하네.
제목:덕연서원을 중수한 뒤에 지은 운(韻)
운동의 규모는 덕원에서 인연 한것
남긴 책이 해동의 난을 수습 하였네.
그동안 얼마나 경영의 힘을 허비했나
오늘날 거듭 사당모양 새로움을 보았네.
제목:퇴계 이선생 성의 성학시도 병풍 뒤에 쓰다.
도산선생 마음공부 일생의 공이
성학의 열 폭 그림 동방으로 온 우리도학
요순임금 요순백성 그 뜻을 미뤄다가
임금님 앞에 올려 요순정치 계도 하였네.
독오 선생 묘표
사진제공한분 : 황종섭대종회장(24세) 촬영한분 :황일석(25세)
선생의 휘는 협이요 자는 낙부니 창원사람이다.
그 상조는 황상(黃裳)이니 고려의 명 신이다.
이로부터 고려조를 지내고 조선에 들어와 대대로 이름난 문인 이였고 오세조 휘 석건(碩健)은 벼슬이
남해현령에 그치고 처음으로 칠원현 유동리에 복거 하였다.
증조부 휘 사겸은 통례원인의요 조부 휘 여식은 예빈시참봉이요 아버지 휘 원록은 벼슬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유행(儒行)으로써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영산신씨 현감 갑의 따님에게 장가 드시다.
부인은 숙덕이 있고 행실이 얌전 하였으며 선조 39년3월갑술에 선생을 낳으니 어릴적부터 총명하고 부모에게
효성있어 구태여 가르치지 않아도 문리가 일찍 났으며 십여세때 부터 선고의 친구들과 편지로 서로 응수 하였다.
나이 열세살 때 거듭 내외상을 당하여 곡하고 슬퍼하는 것을 어른과 같이하고 장식과 제사를 모두
예법을 따랐으며 조모 김씨를 받들어 그 정성을 다했다.
조모 김부인이 나이천년(명대로 사는 것)에 돌아가시니 선생이 무거운 상제옷을 입고 거상절도가
다른 사람보다 지나친 행실이 있었다.
여러 동생들을 잘 키우고 사랑하며 잘 가르쳐 주고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다 시기를 놓치지 아니하였다.
동생 열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동생 이는 군자감정을 받았고 매서 이덕고는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동생 이는 군자감정을 받았고 매서 이덕고는 문과에 급제하니 문희연을 베풀어 경축하였으며
토지를 갈라서 주었으며 돌아서 가신 부모의 유지를 받들어 여러 조카들을 가르치되 자자하여
게으름이 없어 그 행할바를 혼미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다.
행당에 있어서 친구들과 교제할 때 그 착한 것은 아름답게 여기고 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유벽하고 궁색한 지방으로 하여금 오히려 예속을 존중히 여기고 그 갈바를 살필줄 알게하니
그 또한 가히 귀한 일이더라.
일찍 간송 조선생과 미수 허선생을 좇았노니 두 선생이 모두 벼슬과 지위를 꺾고 유로 더불어
사귀니 선생이 훈도와 감화에 있어서 얻은 이익이 매우 많았다.
선생이 젊은때 부터 과거를 보지않고 세속이 흠모하는 바를 돌보지 않았다.
창문앞에 한 그루 벽오동을 심으니 스스로 인하여 자호를 독오당이라 하였으며 칠십오세에 집에서
별세하시니 경신년 사월십구일 이었다.
이해 십이월 시묘에 달전동 묘향원에 장사하였다.
그후 수년에 한 고을 인사들이 사당을 유동촌에 세워 자세를 모시더라.
선생의 처음 부인은 벽진이씨 부호군 도일의 따님이니 정숙하고 단정하여 가정에 법도가 있고
딸 한 분을 낳으시고 진사 곽수진에게 시집보내였다.
다음 계실은 진양 하씨 학생 이룡의 딸이며 인자하고 온공하여 전부인 자식을 기출과 다름없이
키우고 일남이녀를 낳으시니 아들 응형은 무과에 오르고 딸은 다 선비의 처로 시집가니
재령이씨 만빈 포산 곽성위가 그 사위이다.
셋째 부인은 초계 정씨 우용지의 따님인데 아들 한분을 낳으니 만형이다.
손자는 여섯이니 두창 이창 수창 갑창 석창 정창이다.
사위 곽수진은 사남삼녀가 있으니 장남은 정이요 둘째는 섬이요 셋째는 향이요 넷째는 내라 하였다.
이만빈 곽성위는 다 아들딸이 있되 어리더라.
선생을 몸소 효도를 실천하고 행실이 독실하여 예상을 삼가이 하고 제사에는 애경의 정성을 다하여
가정에서는 내외 구별을 엄하게 하고 남의 급한 일을 주급하여 남의 궁함을 도와 그 힘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그 정성이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니 자연이 도에 암합하게 된 것이다.
선생은 가히 행실이 돈독하고 삼가이 하여 성인군자라 할 수 있노라.
나 현일은 선생의 뒤에 났으며 거주가 또 멀어서 일찍이 선생이 건강하실 때에는 서로 접견하지
못하였다.
기묘년 겨울에 희양의 귀향살이에서 은혜를 힘입어 동쪽으로 돌아와 진양땅에 우거한이 선생의
손자 두창이 그의 외형 곽 섬의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보이고 선생의 묘에 표하기를 청하거늘
나는 곽섬과도 친구라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그 가장에 의거하여 그 자취를 요약하여 쓰고
이것으로 하여금 묘돌에 각하도록 한다.
---자헌대부이조판서겸성균관제주 세자시강원찬성 제령 이현일 근술---
이현일 :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형인 휘일(徽逸)과 함께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주요한 인물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여, 이이(李珥)학파의 설을 비판했다.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독오 선생 신도비
사진제공한분 : 황종섭대종회장(24세) 촬영한분 :황일석(25세)
선생의 휘는 협 이요 자는 낙부이니 계통은 창원에서 낳으니
고려조때 이름난 재상 황상(黃裳)의 후예다.
고려때부터 이어져 오던 선생의 오대조 휘 석건(碩健)에 이르러 임자년에 장원에 올라
사헌부 감찰을 배하고 남해현령을 지내니 백성을 다스리매 청간하여 유애비가 있다.
처음 칠원 유동에 복거하여 홍매화 한그루를 심어 문중꽃을 마련하고 은행나무를 심고
단을 쌓아올려 공자의 수수의 뜻을 생각하여 이것으로 인하여 세업이 되었다.
고조 휘 완(琬)은 부사직이요 증조부 휘 사겸(士謙)은 선무랑통례원인의요 조부 휘 여식(汝埴)은
장사랑 예빈시참봉 이니 가정에서는 화합하고 검소하여 사람들이 효우문정 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휘는 원록(元錄)이니 학행이 있어 선비들의 추중한바되고 판결사를 지내시다.
어머니영산 신(辛)씨는 현감 휘 갑(갑)의 따님이며 판서 사장(斯藏)의 후예이다.
선조三十九년 병오년 삼월 오일에 선생을 유동리 본가에서 낳으니 어려서 총명이 뛰어나고
나이 십여세때 벌써 어른의 의도가 있었으며 학업은 날로 진보하였다.
무오년 삼월에 내간을 당하고 칠월에 또 외간을 당하니 선생의 나이 십삼세인데도 송종과 거상을
움직이며 예절을 쫓았다.
조모를 봉양하는데 성효를 다하고 제매를 무애하여 더욱 돈독히 하였다.
기사년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뜻을 다듬고 학문을 돈독히 하며 잠기어 숨어서 수양하거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지극히 슬퍼했으며 증자의 효도를 하고싶어 하되 누구를위해 효도할까 하는
어구를 읽으며 세번 울음을 거듭하였으며 제례를 강구하여 가훈(家訓)을 짓고 종신토록 생각을
두고 동생들과 분가를 하매 옥토는 사양하여 주고 자기는 척도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의 질병과
사상을 들으면 측은히 여겨 물과 불을 구하듯 돌봐 주었다.
선생이 일찍시내에 독을 뿌려 고기잡는 사람을 보고 말씀하시되 고기도 역시 하늘에서 주신
생물인데 어찌 함부로 잔인하게 폭살하겠느냐고 한즉 어부가 감동하여 그만두었다.
신재 주문민(周文敏)공은 고향사람이다.
옛날에 서원이 있었으나 병화에 탓거늘 선생이 중건을 창논하여 존모(尊慕)의 본받을 터전을
만들었으니 처음에 향토의 풍습이 무작하였으나 선생떄에 와서 실로 진비(晋鄙)의 덕화가 있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여남(汝南)의 안자(顔子)와 관서의 부자(부자의 功子 雲함)라 말하였다.
일찍 간송(澗松) 조선생을 좇아서 도의로 교제하고 미수(眉수) 허문정(許文正)과 같이 임천(林泉)의
계가 있어 마음을 선대의 현인을 경모하는데 기울이고 기거하는 사람앞에 벽오동을 심어
그 마당앞에 현판을 걸어 말씀하시되 달이 오동위에 이르니 상서스러운 날개 어느때 오리요 하는
글귀가 있었다.
경신년 사월 십구일에 집에서 칠십오세에 돌아가시니 십이월에 유동 선영뒤에 있는 벽녹 유좌원에
장사하다.
선생이 젊어서부터 마음을 가다듬는 학문에 기울이고 도의의 문하에서 수학 강마하고 사숙하여
단정히 거처하고 숨어서 길우며 담백하여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정일(정一)두 글자를
치심의 요제를 삼아 좌우에 있는 도서를 우러러 보고 완상하였으며 비록 집안의 자제라도
그 나태한 것을 보지 못하였다 하니라.
일찍 말씀하시기를 학문을 하되 실지를 밟지 않으면 자기 집안일을 처리하지 못하며 마음이
있지않으면 만가지 변화를 수작할수 없다 하였다.
일찍 퇴계선생의 성학십도를 병풍에 그려놓고 선생의 심학공부가 진실로 여기에 있는지라 하였다.
경서의 뜻을 연구하여 그기에 감화되어 스스로 얻은 자가 질문을 하면 반드시 순수히 가르쳐
깨닫게 하였다.
애석하다 선생이 학문을 거두어서 세상에 시험하지 못하고 세상역시 선생을 알아 주는자 없었다.
그러나 선생이 몰세한지 이십년이 못되어 사림이 사당을 세우고 향례를 치르니 선생에 대한 의논이
없어지지 않았음을 가히 알수 있으며 저작한 시문도 이미 불타버려 없어지고 다만 약간의
가훈과 현판과 구잠이 있는데 그 글이 담담하고 전아하여 가히 세길만하고 가히
후세에 전달할만 하다.
부인은 벽진이씨 부호군 도일(道一)의 따님이며 평정공 약동(約東)의 후예이다.
따님 한분을 낳으니 진사 곽수진(郭壽진)에게 시집가다.
다음 부인은 진주하씨 이용(以龍)의 따님인데 문효공 연(演)의 후예다.
일남 이녀를 낳으시니 아들 응형 은 무과에 올라 간세재라고 말 하였다.
선생이 먼저 돌아가시니 따님은 이만빈(李晩빈),곽성위(郭星緯)에게 시집보내다.
세째부인은 초계전씨 우용(禹龍)의 따님이며 아들 한분 만형은 학행이 있었다.
응형은 아들이 다섯분인데 두창(斗昌),이창(履昌),수창(壽昌),갑창(甲昌),석창(錫昌)이다.
따님 한분은 여빙거(呂聘擧)에게 시집가고 큰아들 두창은 아들이 두분이니 후(후)와 돈(돈)이다.
돈은 무과에 올라 양무 이등공신 이 되었고 따님두분은 이석용,박숙 에게 출가 하였다.
이창은 아들이 넷인데 학(학),옥(옥),숙(숙),곡(곡)이고 따님 세분은 안명노,임봉상,강공권 에게
출가 하였고
수창은 아들 셋인데 재(載),대(戴),배(培)이다.
강창은 일남 인데 규(圭)다.
석창은 이남인데 엽(엽)이다.
만형은 일남인데 정창(正昌)인데 정창은 아들 세분을 낳았는데 타(타),종(종),규(奎)이며
곽수진은 아들이 넷이니 정,섬,형,내이며 따님 세분은 이기휘,조형윤,여창화에게 시집 가니라.
증 현손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선생의 6세손 치항(致恒)이 선생의 유고와 가장을 소매에 넣어 수백리를 발섭하여 변변치 못한
나에게 명(銘)하기를 청하니 그정성이 족히 사람을 감동 시킨지라.
삼가히 서차하기를 우(右)와 같이하고 명에 가로되 거룩 하구나 독오는 남쪽땅의 뛰어난 분이다.
개연히 글을지어 전철을 오매불망하고 도의에 잠신하여 충과 신에복응 하였다.
세상이 알아주지 못함이 무슨 근심이리요 스스로얻은 공부로다.
항상 회포가 옛 사람에 있으니 천추에 오동달이다.
농환(악기이름)의 낙이요 경양의 노래로다.
거두고 시험치 않으니 어느뉘가 군자를 권할고 손자가 어질매 자신의 변변치 못함을 부끄러워 한다.
유동 언덕에 사척의 높은 빗돌에 새기니 백세에 길이 남으리라.
(상지즉위31년경인4월)
---어모장군행위종사좌장사 풍산 유심춘(柳尋春) 근찬---
유심춘 : 생졸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상원(象元), 호는 강고(江皐). 유성룡(柳成龍)의 후손으로,
유광수(柳光洙)의 아들이다.
유발(柳潑)에게 입양되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거쳐 익위(翊衛)가 되었다.
1800년(정조 24) 경연을 열어야 된다고 상소하였다.
1830년(순조 30) 왕의 하교로 3대가 과거에 급제한 것을 치하하고 돈령부(敦寧府)의 도정에 임명하였고,
1854년(철종 4) 아들 유후조(柳厚祚)가 급제하였으므로 다시 통정대부에 올랐다.
독오 선생 산소
사진제공한분 : 황종섭대종회장(24세) 촬영한분 :황일석(25세)
독오 선생 배위 백진 이씨 산소
사진제공한분 : 황종섭대종회장(24세) 촬영한분 :황일석(25세)
독오 선생 배위 초계전씨 산소
사진제공한분 : 황종섭대종회장(24세) 촬영한분 :황일석(25세)
첫댓글 1606년....
그럼 2012-1606=406년 전에 태어나셨다?
유원 달전에 있는 산소가 지금으로부터 406년전에 태어나신 우리 할아버지이시구나!!!!!!!
400년 400년이라...
내가 어릴 때 맨날 놀고 공부하던 그 상봉서당이 1696년에 처음 지으졌다는 건가?
그럼 300년이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