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르 체제에 저항했던 푸쉬킨
모스크바의 유서깊은 귀족집안 출신인 푸쉬킨은 이미 10대 때부터 시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귀족 자제들을 위한 왕립기숙학교인 리베이를 졸업한 뒤 18세 때인 1817년부터 외무부에서 번역관으로 일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진보적 문학모임에 참여하고 혁명적 인사들과 교류하며 짜르 체제하의 러시아의 사회상을 비판적으로 풍자하는 <자유>(1817), <농촌>(1819) 등 저항시들을 발표했다.
이 때문에 짜르의 미움을 산 그는 1820년 러시아 남부 흑해연안의 오데싸로 추방된다. 그곳은 몇 년 뒤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의 아내가 되는 마리야 집안의 영지가 있는 곳이었다. 발콘스키 공작은 1825년 12월 14일, 짜르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일으킨 데카브리스트 난(데카브리는 러시아어로 12월. 그래서 12월 당원들의 난 또는 혁명으로 불림. 데카브리스트는 영어로는 Decemberist)의 주역중 한 사람. 난의 실패로 그는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며 마리아는 이듬해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편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떠나 수십년을 그곳에서 살게 된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에 맞서 싸운 조국전쟁에 참전했던 발콘스키 공작은 기품있는 태도로 인해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 속의 주인공 안드레이 발콘스키 공작의 모델로도 여겨지는 인물이다. ---.
푸쉬킨은 오데싸에 있을 때인 1823년 시(詩)뿐만 아니라 그의 최고의 소설인 <예브게니 오네긴>의 집필을 시작했다. 이 소설은 <벨킨 이야기>와 더불어 1830년에 완성되었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그 후 차이코프스키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져 더 유명해졌다.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하일 글린카의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도 푸쉬킨의 작품이 원작이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한 세기도 더 지난 후 극작가 피터 셰퍼의 작품 <아마데우스>(1979)에 영감을 주었다. <아마데우스>는 1984년 영화로 만들어져 한층 유명세를 탔다.
푸쉬킨은 오데싸에 있을 때인 1824년 국외 망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해 집안의 영지인 미하일로프스코에 유폐되었다. 그후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진압된 다음해인 1826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사면으로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그는 늘 당국의 감시를 받았으며 작품들도 검열을 피할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일찌기 남러시아로 추방되지 않고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면 그의 성향상 데카브리스트의 난 때 연루되어 죽거나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데카브리스트 난으로 5명이 사형 당하고 116명이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푸쉬킨은 이가운데 25명과 친척, 56명과 친구 관계였다.
푸쉬킨은 1827년 페테르부르그로 돌아온 후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그의 혁명가 친구들과 당국의 이혼 종용에도 불구하고 남편들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따라간 혁명가들의 젊은 부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시베리아 광산 깊은 곳에서
시베리아 광산 깊은 곳에서도
명예로운 인내심 높이 지켜라
그대들의 고통어린 노동과
마음의 분투는 헛되지 않으리니
불운의 충직한 자매, 희망은
지하감옥의 어둠속에서도 깨어날 것이고
그대는 기쁨에 뛰리라
기다리던 그 날은 오리라
사랑과 우정이 어두운 속박의 문을 넘어
그대들에게 넘칠 것이오
내 자유의 목소리가 지금 그대들의 감방
그 굴속까지 다다르듯이
무거운 족쇄가 바닥에 떨어지고
감옥은 무너지리니
자유가 문에서 그대를 맞을 때
형제들이 그대에게 검을 내어 주리라
비극의 시작이었던 나탈리야와의 결혼
푸쉬킨은 32세 때인 1831년 13세 연하인 나탈리야 곤자로바와 결혼했다. 나탈리야는 그가 “현기증을 느꼈다”고 표현했을 만큼 빼어난 미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와의 결혼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미모 덕에 사교계에서는 높은 인기를 누렸으나 남편인 푸쉬킨의 문학적 작업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푸쉬킨은 결혼을 할 때도 빚을 내어 거액의 혼수금을 궁핍한 처가에 줘야했고, 결혼 후에는 사교계에서 각광받는 아내의 뒷바라지를 위해 계속 큰 돈을 들여야 했으므로 경제적으로 늘 쪼들렸다.
황제 니콜라이 1세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여 궁정행사에 늘 그녀가 참석하기를 바랬다. 그 덕에 푸쉬킨은 시종보라는 관직도 얻었다. 돈에 쪼들리던 그는 1835년 무렵에는 황제에게 3만 루블을 빌리기도 했다고 한다.
다소 늦은 결혼인데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푸쉬킨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게다가 어느날부터인가 나탈리야가 미혼의 조르쥬 단테스와 밀회를 즐긴다는 소문이 돌았다. 단테스는 프랑스군 장교였다가 러시아로 망명한 망명귀족. 푸쉬킨은 분노하여 아내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후 단테스가 나탈리야의 언니와 결혼해 둘이 동서지간이 됨으로서 사태는 진정되는 듯 했다.
그러나 단테스는 결혼 후에도 나탈리야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어느날 푸쉬킨은 ‘간통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야유조의 익명 편지까지 받았다. 푸쉬킨은 화를 참지 못했다. 1837년 1월 27일 오후 결국 권총 결투가 벌어졌다. 결투에서 푸쉬킨은 치명상을 입고 이틀 후인 1월 29일(양력 2월 10일) 오후 2시 45분 38년의 짦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주인공 오네긴의 친구 렌스키는 어느날 오네긴이 자기의 애인인 올가에게 접근하여 두 남녀가 히히덕거리자 분노한 나머지 결투를 신청한다. 그러나 결투에서 렌스키는 오네긴의 총을 맞아 죽고 만다. 푸쉬킨의 삶도 자신이 쓴 소설처럼 그렇게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누군가 말했다. 푸쉬킨은 시로는 “삶이 그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여전한 러시아인들의 푸쉬킨 사랑
푸쉬킨이 죽은 지 두 세기가 가까워 오고 있으나 러시아에서 그의 인기는 여전하다. 러시아인의 푸쉬킨에 대한 사랑과 자랑은 변함이 없다.
러시아인치고 푸쉬킨의 시 한 두 편 암송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예브게니 오네긴> 등 그의 소설의 줄거리와 등장인물을 줄줄이 꿰는 사람도 흔하다고 한다.
러시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전국에 20군데가 넘는다. 모스크바에는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푸쉬킨의 옛집을 이용한 푸쉬킨 기념관 외에 프레치스첸크 거리에 그가 살아온 흔적들을 보여주는 각종 자료들이 전시된 웅장하고 현대적인 푸쉬킨 박물관이 있다.
한편, 결투에서 푸쉬킨을 죽인 후 러시아인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됐던 단테스는 달아나듯 프랑스로 돌아갔다. 나탈리야는 푸쉬킨이 죽은 7년 후인 1844년 나이 많은 뾰뜨르 란스코이 장군과 재혼해 두 아이를 더 낳았다. 푸쉬킨과 나탈리야 사이에는 네 자녀가 있었다. 니콜라이 1세 황제는 나탈리야가 재혼한 직후 란스코이 장군을 근위대장으로 임명했고, 이들 부부가 낳은 첫 아이의 후견인이 돼주었다고 한다. 나탈리야는 51세 때인 1863년 세상을 떠났다.
미인 아내를 얻은 것이 비극의 씨앗이라고 하지만 그것 역시 그의 운명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푸쉬킨은 그의 커다란 문학적 업적과 더불어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같은 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펌글]
▲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 사진 오른쪽 에메랄드 빛 건물이 푸쉬킨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