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허대선사 >
1904년 천장암으로 돌아온 스님은 만공스님에게 법을 전한 후 북녘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도(悟道)를 이룬 뒤 30대 중반에서 40대말까지는 호서에서, 50대는 영호남에서 법을 편 스님이 북녘으로 향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대산 월정사와 금강산을 거친 스님은 안변 석왕사에 잠시 머문 뒤 자취를 감췄다. 박난주(朴蘭洲)라는 이름으로 머리를 기르고, 승복조차 벗어버린 경허스님은 유생의 모습으로 저자에 들어갔다. 마치 심우도(尋牛圖)의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入廛垂手)와 같은 삶을 보여 주었다. 독립운동가인 김탁 집에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조선의 미래를 기약했다.
스님은 1912년 4월25일 갑산 웅이방 도하동 서재에서 입적했다. 풀 뽑는 학동들을 보다 자리에 누운 다음날 해 뜰 무렵 임종게를 쓰고 원상(圓相)을 그린 후 원적에 들었다. 세수 65세, 법납 48세였다.
마음 달이 외로이 둥글게 빛나니(心月孤圓)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光呑萬像)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光境俱忘)
다시 이것이 무엇인고(復是何物)
(임종게)
뒤늦게 소식을 듣고 찾아온 수월스님의 연락을 받은 혜월스님과 만공스님이 은사의 법구를 난덕산으로 운구해 다비를 모셨다. 진영은 예산 수덕사 금선대, 공주 동학사 조사전, 부산 범어사, 서산 천장암 등에 봉안돼 있다.
조선 말기에 태어나 생사의 경계를 열은 스님은 자유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나와 남을 구하는 근원이 ‘나’에 있으며, ‘나로부터’ 시작됨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치열한 정진과 전법은 조선불교를 다시 일으키는 씨앗이 되었다.
법을 이은 침운(枕雲).혜월(慧月).수월(水月).만공(滿空).한암(漢巖)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법맥(法脈)은 지금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후학들이 한국불교의 개화(開花)를 성취한 것도 경허성우라는 대선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불교신문, 2391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