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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5일 성탄 제 2 강 메시지(아산 UBF)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누가복음 2:1-2:20
누가복음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공항에 혹은 기차역에 누가 마중 나왔는가? 그것을 보고 얼마나 환영하는지 얼마나 우리와의 관계를 중시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만왕의 왕 우리 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달려와 맞이한 사람들과 그들에게 주신 성탄메시지를 오늘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전해 준 성탄 메시지를 통하여 예수님을 기쁘게 만나시기를 기도합니다.
1. 밤에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 ‘옥타비아누스 황제’입니다. 그의 외할머니의 남동생 즉, 옥타비아누스 어머니의 외삼촌이 줄리어스 시저입니다. 시저에 의하여 양자가 되었고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한 안토니우스군을 악티움해전에서 제압하였습니다. 황제가 된 후 내치에 힘써서 대단히 유능한 황제로 평가 받습니다. 옥타비아누스 때부터 AD 180년 까지 로마 사람들은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이 기간 동안 로마는 융성하였습니다.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호적명령을 내렸습니다. 인두세를 징수하기 위하여 정확한 인구조사가 필요 하였습니다. 로마 안에 사는 사람들은 호적하여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마의 호적은 거주지에서 하는 것이었지만 유대인들이 가문 중심으로 해왔으므로 그들의 희망에 따라 유대인의 호적 방식을 허락해주어 유대 사람들은 각자 본적지로 가서 호적 하였습니다(2,3). 호적 하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행렬에 갈릴리 나사렛의 목수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호적명령에 따르기 위하여 생업을 중단하여야 하는 많은 사람들은 고달팠을 것입니다. 요셉은 임신한 마리아를 데리고 장거리 이동하여야 하므로 긴장하고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부담스러운 명령이지만 호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미가서 5:2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구속사와 세속사를 구분하고 별개의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만, 말씀을 보면 세상 역사가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는 배경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사람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원망과 미움, 불평이 생겨나고 마음이 불안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이루시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직접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의미입니다. 다윗왕의 고향입니다. 베들레헴에는 만삭의 산모가 몸 풀러 들어갈 수 있는 방 한 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야 했습니다. 바닥에 눕힐 수 없어 아기를 누인 곳은 말이 사용하는 말구유였습니다. 구유에 뉘인 예수님의 모습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슬픔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일생 슬픔의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하늘 영광을 가지신 만물의 창조주께서 누울 곳이 없어서 말구유에 누우신 것을 보십시오. 이사야 53:3 후반절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멸시 받으신 것은 멸시 받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귀히 여김 받지 못한 것은 귀히 여김 받지 못하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멸시받는 우리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 우리의 마음을 둘 때, 멸시 당하는 우리에게 은혜가 임합니다.
2. 구세주 예수님(8-14)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데, 베들레헴 사람들은 방 하나를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마중 나올 사람을 택하시고 오늘 태어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의 사자를 보내어 메시지로 알려주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할 사람들로 밤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목축하는 사람들에게 법정 증언을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유대사회에서 하층민으로 대우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목자들은 예수님 맞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야 성탄의 메시지를 밤에도 깨어 양떼를 돌보고 있는 목자들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9~12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 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캄캄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같이 모든 사람이 잠에 빠져있을 때 오히려 깨어 있었던 목자들에게 주신 메시야 탄생 메시지는 구체적으로 어떠합니까?
다시 10,11절을 보십시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범위와 대상이 모든 백성입니다.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이라 하십니다. 세상에는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 세상을 행복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자신의 행복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노력하고 애쓰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많은 사람이 행복해 하는 것 같지만, 그것 때문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누군가의 눈물이 어떤 사람에게는 환희가 되는 것도 많습니다. 월드컵에서 일본이 독일과 스페인에게 승리하자 많은 한국 축구팬들이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만 독일을 이겨보고 스페인을 이긴 아시아 국가이면 좋겠는데 일본도 이겨보았다니 즐겁지 않습니다. 아르헨티나가 우승한 소식에 브라질 사람들이 기쁘지 않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미치는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을 준비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백성의 심각한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하시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Savior! 우리를 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습니다. 우리는 구원자가 꼭 필요하였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중에 죽음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경험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죽음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를 데려간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단국대학교에 차 몰고 들어 갈 때마다 4학년 때, 살았던 역말, 북일고 쪽 산모퉁이 돌아서 걸어가시던 할머니가 떠오릅니다. 저는 지금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죽음이 데려간 사랑하는 분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슬프고, 또 때가 되면 나도 떠나고 내가 사랑한 사람들은 나를 그리워하게 될 것을 생각합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을 무력하게 합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인생을 죽은 것과 같게 만듭니다. 죽음은 염려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합니다. 죽을까봐, 죽을지도 몰라서, 누가 또 죽으면 나도 죽을 것 같아서 죽음의 권세아래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죽음이 심는 염려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합니다. 죽음이 심는 두려움은 이미 죽은 사람 같이 되게 합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까지 강력하게 지배합니다. 죽음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이 행한 잘못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그를 기억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시편 107편 10,11절은 우리 인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살아 있지만 죽을까봐 두려워 떨며 시간을 허비하고, 살아서 행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보석 같은 인생을 소모시키며 이 사람을 죽음이 데려가면 어쩌나, 나를 죽음이 데려가면 어쩌나 두려움에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것이 죽음에게 제압된 모습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고 죄는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하나님께서 죽음의 그늘에 앉아서 죽은 자 같이 되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죽을 날 까지 죽음과 같은 모습으로 삶을 허비하는 인생들에게 구원자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 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그늘에 앉아 모든 아름다운 것을 잃어버린 인생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 사랑과 은혜의 주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은혜로 보내주셨습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린도전서 15:56,57절 말씀입니다. 죄와 죽음에 사로잡혀 인생을 의미없이 소비하다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인생들에게 죽음에서 구해주실 분을 보내주셨습니다. 누구도 구해줄 수 없는 죽음의 운명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구주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모든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구주이십니까? 우리 인생의 최대 원수 사망을 이기시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며 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위대한 구원의 주 예수님의 표시, Sign이 있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입니다. 유다에 꽤 많은 아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에도 딱 그날 태어난 아기들 외에도 누워있는 아기들은 여러 집 있었을 것입니다. 구원의 주님을 알리는 표시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입니다.
이것은 구주의 구원 방법을 알려주는 표시이며,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주의 인격을 알게 하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30여 년 전 어느 사업하는 목자가 등록금이 없어 곤란한 학생 양에게 등록금을 빌려주었습니다. 사업가 목자는 양을 도운 것이 기쁘고 좋았는데, 정작 도움 받은 학생 양은 상처받았다고 하소연 하였습니다. “목자님이 전에는 말도 조심해서 했었는데, 어느 날부터 불필요한 농담을 하고 무례한 말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학생 양은 다른 곳에서 돈을 빌려와 목자에게 갚아버렸습니다. 도움을 준다. 구원해 준다 하더라도 인격과 성품이 겸손하고 정중하여야 도움과 구원이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하러 오셔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모든 백성을 해방하러 오셔서 권력자의 모습을 갖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겸손하시고 낮아지십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는 예수님의 희생과 겸손한 인격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죄를 사랑하고 어둠에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주를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망할지언정 도와 달라 하지 않습니다. 죽을지언정 나를 가만 두라 합니다. 번번히 실패할지언정 절대 물어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구주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시니 놀랍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고집을 꺾지 않고 이래로 살다가 죽겠다는 죄인을 겸손하게 섬기러 오신 것입니다. 망할지언정 구원자에게 관심 갖지 않겠다는 죄인을 오래 참아주시는 것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러 오셨으니 찬양 합니다.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셨으니 주를 찬양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지키셨으니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구주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나타났으니 찬양을 주 하나님께 드립니다. 구주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다 헐어주셨으니 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죄를 사랑하고 본성대로 살기를 고집하는 멸망의 인생을 참고 인내하며 도와주시니 그 은혜가 놀라워 더욱 찬양을 드립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천사들의 메시지를 들은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메시야가 오신다는 소식은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헤롯왕도 들었고, 헤롯왕을 통하여 제사장도 들었습니다. 헤롯왕과 제사장들에 의하여 예루살렘 모든 사람들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에 가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은 8킬로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들어도 움직이지 않고 들려와도 반응하지 않으며 있던 곳에 그대로가 좋다는 사람들은 늘 존재합니다. 목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자들을 통하여 계시하신 일을 가서 보고자 결단하고 움직였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빨리 갔습니다.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았습니다. 17~20절을 보십시오. 목자들은 천사들이 자신들에게 계시하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의 사자에게 들은 성탄 메시지 그대로 이루어진 놀라운 일들을 보았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탄 메시지를 들은 대로 전하여 주었습니다.
12월 24일이면 천안 신부동 종합터미널로 가는 길, 시청 앞 신불당은 많이 붐볐을 것입니다. 평소 차가 막히지 않는 한가한 불당동 우리 집 근처에도 어제 오후 차들이 많았습니다. 마트의 케익 코너는 줄이 너무 길었습니다. 와인도 상당히 많이 팔렸다고 합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에는 두 사람의 왕이 나옵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Pax Romana’ 그는 로마의 통치아래 세계가 전쟁이 없고 평화가 유지된다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권한을 일부 원로원에 넘겨주며 존중해주었고 원로원은 군권을 장악한 황제의 양보를 찬양하며 그에게 ‘존엄한 자’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주었습니다. 그는 현명하고 타당성 있게 제국을 다스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 아래 있는 일반 백성들은 고달팠습니다. 호적명령도 임산부까지 예외 없이 복종하여야 하는 불편하고 힘든 명령이었습니다. 타당성, 합리성 이런 것들이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지 못하였습니다. 황제의 자리에 앉아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으로는 백성들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강보는 가난한 사람들이 쓰는 것입니다. 구유는 말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 사람들이 방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도 백성들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외면당하여 버려지셨습니다. 백성을 죽음에서 건져주시려고 오셨는데, 죽음을 가져온 죄 값을 그 몸으로 치르려고 와주셨는데 사람들은 방을 내주지 않았고 누울 곳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귀하신 몸을 구유에 뉘어야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가이사 아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합리적으로 타당성 있게 암담한 현실을 해결해주는 정치가, 신박한 정책을 기대하였습니다. 지난 몇 년 간, 정치와 정책이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을 우리 청년들이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가이사 아구스도처럼 되고자 합니다. 명령하고 지시하는 자리에 앉고자 합니다. 그런 자리를 바라며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법을 배우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을 존중하는 법을 모릅니다. 옳고 그름만 따지고 자기 생각, 자기주장만 합리적이며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생명과 평화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아니라 베들레헴에 한 아기로 오셔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이신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우리가 올바로 섬길 수 있는 것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자리로 갈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아지는 기적을 놀라워 합니다. 큰 역사를 이루는 기적을 바라는 사람도 많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낮아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이 오늘 말씀에 기록한 성탄입니다. 사람들이 방을 내어주지 않아 마구간에서 나신 예수님입니다. 그 귀한 몸을 뉘일 곳이 없어서 말구유에 뉘이신 것이 오늘 말씀에 기록한 성탄입니다. 이 모든 낮아지심과 희생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깊이 배우고 영접하는 성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람들 가운데 유명해지려 하기보다 오히려 자기를 조용히 감추고 주의 일을 섬기는 성탄, 좋은 회사에 취업하여 높은 연봉을 자랑하는 것을 꿈꾸기 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자 기도하는 성탄, 많은 사람을 몰고 다니려 하기보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믿음을 실천하여 성탄의 기쁨과 은혜로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과 생활과 실천을 구유에 뉘이신 예수님을 배우고 따라할 때, 예수님을 배우게 되어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와인을 따르고 케익을 자르는데 있지 않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영접하는데 있습니다. 성탄의 큰 기쁨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따라 나도 낮아질 때 임합니다. 우리의 평생이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을 배워서 성탄의 기쁨으로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요절을 한 번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Asan UBF
UB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