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일등박문을 위해 일을 한 안중근
상제께서는 도주 조정산에게 천명(天命)을 내리고 화천하셨다. 도주께서는 천명을 받들고 만주 봉천(奉天)에서 공부에 전념할 즈음 일본의 이등박문이 만주대륙을 침략코자 만주를 방문하였다. 일종의 방해꾼이었던 것이다.
일제는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에 정치, 경제, 사회, 및 문화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조선의 숨통을 조여왔는데 일본의 조선 침략의 그 머리에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가 있었다. 그는 을사보호조약의 일등공신이었고, 조약 체결 후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이등박문의 야욕은 조선이 목표가 아니었다. 그는 조선뿐만 아니라 아시아 대륙을 삼키고자 하는 야망을 품고 먼저 조선을 삼키고 그 다음에는 만주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그 야욕을 실현시키고자 이등박문은 흑룡강성(黑龍江省)의 성도(省都) 하얼빈(哈爾濱)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상제께서 의도하시는 범위를 넘는 일이기에 이등박문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상제께서 하루는 대흥리에 계셨는데 안내성(安乃成)으로 하여금 곤봉으로 마룻장을 치라 하시며 가라사대 “이제 병고에 빠진 인류를 건지려면 일등박문이 필요하고 이등박문이 불필요하게 되었느니라.” 하셨는데 그 뒤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할빈역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에게 암살되었도다.
― 전경 행록 5장 5절
이등박문은 일본 현대사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서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이며 일본의 추밀원(樞密院) 의장을 역임한 자이다.
추밀원이란 일본 천황의 최고자문기관으로 의회나 내각을 간섭하는 실질상 최고 실력기관이다. 그는 추밀원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905년 조선으로 건너와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케 하여 ‘조선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통감으로 부임하여 한일합방(韓日合邦)의 기초공작을 수행하였던 것이었다.
그 후 1909년 통감을 사임하고 다시 일본 추밀원 의장이 되어 만주시찰을 겸하여 러시아 재무대신과 회담을 하기 위해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으로 갔던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 대륙을 집어 삼키려는 일본의 야욕을 실행하기 위한 이등박문의 음모가 숨어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조선에 만족하지 않고 만주대륙까지 삼키고 이것을 발판으로 중국대륙 전체를 삼키고자 했던 것이다.
상제께서 일본에게 ‘일시천하통일지기(一時天下統一之氣)’를 붙여주셨던 것은, 일본을 통해 서양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고, 또 그들로 하여금 조선에 들어와 조선의 폐습을 일소하고 신문명을 일으키는 개혁을 일으키도록 하고자 함이셨다. 일본의 전 세계를 장악하려는 야욕은 그야말로 분에 넘치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 할 일을 다 한 이등박문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리하여 안내성으로 하여금 곤봉으로 마룻장을 치라 하신 것이다. 곤봉은 옛날 포졸들이 죄인을 포박하거나 다룰 때 사용하던 짧은 몽둥이로 곤봉으로 친다는 것은 치죄(治罪)를 의미한다. 더 이상의 일본의 대륙진출을 진행시킬 필요가 없으므로 안중근 의사로 하여금 이등박문을 잡는 공사를 바로 안내성의 이름에 의미를 담아 보신 것이다.
안(安)은 성(姓)이고 내(乃)는 아무개의 뜻이 있고 성(成)은 이룬다는 뜻이다. 즉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안 아무개가 이룬다’는 뜻이다. 안씨 성을 가진 안중근을 시켜 일을 이루겠다는 상제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상제께서는 종도들의 이름에 의미를 담아 공사를 보신 예가 많으셨는데 이름이 적당하지 않으면 이름을 고쳐서 쓰시기도 하셨다. 안내성의 경우도 그랬다. 안내성의 본명(本名)은 안내선(安乃善)으로 성격이 우직하여 ‘평생불변 안내성’이라 하였다.
안중근의 성격도 또한 우직하였다. 안중근은 여순감옥에 수감당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고 항변하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상제께서 이 공사를 보시면서 “이제 병고에 빠진 인류를 건지려면 일등박문이 필요하고 이등박문이 불필요하게 되었느니라” 하셨다.
‘박문’은 ‘방문’으로 발음이 되어 ‘일등’이 방문하면 되지 ‘이등’이 방문할 필요가 뭐 있느냐는 뜻이다. 병고에 빠진 인류를 건지려면 ‘일등’이 만주를 방문해야 하고 ‘일등’이 방문했는데 ‘이등’이 방문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일등박문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이것은 바로 강증산 성사로부터 광구천하(匡救天下)의 대임(代任)을 이어 받으실 도주(道主) 조정산(趙鼎山)의 만주 방문을 말하는 것이다.
도주 조정산은 광구천하를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 만주 봉천으로 ‘방문’했는데, 이등박문이 역시 1909년 10월 26일 대륙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실행에 옮기기 위해 만주를 방문하였던 것이다.
만약 당시 이등박문의 생각대로 일본이 만주를 장악하였다면 도주께서는 만주에서조차 광구천하를 위한 공부를 할 수가 없었을 것이므로 이러한 것을 미연에 막으신 것이다. 즉 상제께서는 ‘일등’의 신분으로 만주를 ‘방문’하는 도주님의 방해자를 제거했던 것이었다.
한편 안중근은 자기 자신이 구천상제의 천지공사에 쓰이리라고는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신명에 의해 이러한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 1905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때는 상제께서 광구천하를 하시고 계실 때였다.
즉 상제님은 천지공사를 준비하기 위해 광구천하를 하신 것이며, 이때를 맞추어 안중근은 ‘일등박문’을 위해 ‘이등박문’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안중근은 나라를 구할 결심을 하고 중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산동성(山東省)과 상해(上海)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연히 황해도에서 같이 선교활동을 하던 곽 신부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교육을 통해 백성들의 의식을 일깨워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충고를 받아들여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1906년 3월 진남포로 이사하여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우고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안중근은 이 무렵 나라의 사정을 보아 교육만으로 망해가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해외로 건너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력으로 투쟁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1907년 진남포를 떠난 안중근은 간도(間島)지방을 거쳐 러시아 땅 연해주(沿海州) 지방의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1908년 봄 안중근은 그곳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의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패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안중근은 간신히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왔다.
안중근은 다시 엔치아 부근의 카리 마을에서 동지들을 모아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왼쪽 약지를 끊어 맹세하였다. 안중근과 김기룡, 강기순, 정원주, 박봉성 등 12명은 왼쪽 약지(藥指)를 잘라 피로써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쓴 뒤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1909년 가을 어느날, 안중근은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등박문이 러일전쟁 승리 후 한국을 강제로 일본에 합병시키고 만주는 물론 중국 전체를 집어삼킬 계획으로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협상을 하려고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순간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죽이고 일본의 침략 야욕에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7시경 안중근은 하얼빈 역(驛)에 도착하였다. 이등박문이 탄 차는 오전 9시에 역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었다. 검문이 삼엄(森嚴)했다. 검문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안중근은 행사장에서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러시아 관리를 우연히 만났던 것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러시아 관리와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며 걸어가는 안중근을 의심하는 경계병은 없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은 권총을 지닌 채 삼엄한 수색을 뚫고 무사히 행사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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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왼쪽)·안중근에게 저격당하기 바로 직전 하얼빈 역사에 내려서는 이토 히로부미(오른쪽)
오전 9시. 열차가 도착하였다.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일본 총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등박문이 기차에서 내렸다. 이등박문은 러시아군 의장대를 사열한 후 환영객들로부터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안중근은 러시아군 뒤에서 이등박문을 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이등박문이 10보 정도 떨어진 거리에 왔을 때 권총을 꺼내 이등박문에게 3발을 쏘았다. 이등박문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수행하던 의사가 응급처치를 했으나 그는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
안중근 의사는 “코레아 우라!”(한국 만세)라고 러시아 말로 외치고 러시아 헌병들에게 순순히 체포되었다.
이등박문이 대한제국의 안중근이 쏜 총에 맞아 사살되었다는 소식은 언론보도를 통해 곧 전 세계에 알려졌다. 특히 중국인들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義擧)에 몹시 놀라워했다. 당시 중국은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세력과 일본의 침략을 막을 길이 없어 막막했고, 내부적으로 사분오열(四分五裂)하여 붕괴(崩壞)되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대한제국의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저격하여 중국 만주를 통째로 삼키려던 야욕을 분쇄했으니 중국으로서는 ‘10억의 인구가 하지 못한 일을 안중근이 이루었다’고 경탄해마지 않았던 것이다.
이등박문이 죽자 일본의 만주점령 계획은 무산되어 버렸다. 안중근의 거사로 인해 일본의 만주침략은 이후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20년이나 뒤로 미루어졌던 것이다.
만약 이 때 이등박문이 만주로 침략하여 정복하였더라면 대륙은 아마 일본의 발아래 짓밟혔을 것이다. 그리고 도주 조정산께서 공부하신 만주 전체가 전쟁터로 변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상제님의 천지공사 도수를 풀어 병고에 빠진 천하창생을 구하기 위해 천지대도를 창도하실 도주께서 무사히 공부를 마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야욕이 대륙 전체에 뻗쳐 나중에 걷잡기 어렵게 될 터이니 이러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상제께서는 안중근을 통해 이등박문을 제거하는 공사를 보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