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예술가들
신명옥
멀리서 숲을 바라본다. 잔가지가 아스라한 안개를 품고 몽롱한 졸음에 잠겨 있다. 꿈꾸는 것들은 평화롭다. 꿈꾸는 동안 생각은 높은 곳으로 모이고, 먼 곳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엷은 안개가 낀 숲은 고요해서 조심스럽다.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점점 안개에 스며들어 나도 안개가 된다. 이곳에선 세상이 조그맣게 보인다.
안개 걷히고 숲이 나를 보고 있다. 숲 냄새를 맡으며 걷다보면 나도 어느새 숲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거니는 동안 만나는 나무들과 새들과 구름과 바위들에게 잊고 있던 감탄사들을 돌려준다.
생각이 막혀서 마음이 복잡할 때, 길이 보이지 않아 고통스러울 때, 숲은 나를 숲으로 끌어들인다. 낙엽이 무릎까지 쌓인 숲을 걷던 날, 갑자기 내가 누구인지, 어디쯤 떠내려가고 있는지 보였다. 덧없이 흘러가 버린 시간이 슬펐다. 더 늦기 전에 꼭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그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숲을 찾았다.
숲은 항상 멀리 있다고 생각하였다. 숲을 찾아가려면 시간을 내야했으니까. 어느 날 가까운 공원을 지나가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나무 사이로 길고 호젓한 흙길이 보였다. 큰 숲 못지않은 그윽한 길이었다.
공원 숲에서 오솔길을 발견한 날부터 나의 일상이 바뀌었다. 비록 크지 않지만 언제나 거닐 수 있는 숲길이 가까이 생긴 것. 나무사이로 걷기 시작한 뒤부터 나는 행복해졌다. 조밀한 도시에서 가까이에 나만의 공간이 있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지.
백사장에 앉아 무한 속에 놓인 나를 바라보던 시절. 바다를 떠나온 후로 그리움을 앓았다. 늘 허전했던 마음이 숲길을 가진 후로 안정되었다. 가로수 길을 걸어가면 냇물이 흐르는 곳에 닿는다. 도시는 주변의 자연을 열어놓으며 점점 살기 좋은 터전이 되어가고 있다.
밤의 숲에서 만나는 달은 다정한 얼굴이다. 달은 태고부터 세상을 보아왔으니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보름달을 가리키며 소원을 빌라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달을 좋아하던 어머니의 기억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더욱 반갑다.
과학이 말하는 달은 지워버리고 나는 달을 나의 느낌대로 생각한다. 몸이 물질로 만들어졌지만 정신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달도 광물질로 만들어졌지만 큰 영혼을 갖고 있다고. 달과 내가 나누는 것은 영혼과 영혼의 공감이라고.
어릴 때 읽은 동화 중에서 숲속에 들어가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던 구절이 잊히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그곳이 화두에서 말하는 무심해지고 평온해지는 장소라면 나는 그곳을 수없이 와본 것이다. 또한 언제나 올 수 있는 것이다. 숲에는 언제나 그곳이 있다.
그늘을 잃어버린 겨울나무들이 우중충하게 서있다. 단조로운 그림자가 길 위에 빗금으로 누워있다. 빗금을 건너가며 주위의 나무들을 돌아본다. 이곳에 모여 있어 나에게 숲이 되어주는 나무들을 불러본다.
숲 입구에 서있는 모과나무들에게 손을 흔든다. 봄이 되어 표피의 갈색무늬가 들뜨면 녹색 이 드러난다. 갈색으로 말린 껍질 뒷면에는 하얀 알들이 슬어있다. 긴 가지를 들고 말린 껍질을 툭툭 쳐서 떨어뜨리곤 했다. 갈색과 자색과 녹색으로 둥글게 구부러진 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즐거웠다. 봄에는 자그마한 분홍 꽃들로 아름답다. 가을에는 가지 끝에 노란 달들이 걸려있다. 떨어진 달을 주워 창가에 놓으면 상큼한 향기가 은은하게 퍼진다. 그 향기에 기대어 달의 정원을 거닐기도 하였다.
마다마디 잘린 향나무 옹이가 주름진 눈으로 보고 있다. 묘하게 구부러진 가지와, 크고 깊은 옹이가 마법사의 모습 같다. 오래 보고 있으면 주문에 걸릴 것 같다. 그 옆에 일그러진 옹이는 오싹해서 빠른 걸음으로 지나친다. 가늘게 뜬 현자의 눈을 가진 옹이 앞에서 골치 아픈 문제의 답을 묻곤 했다. 요즘은 맨 끝에 서있는 볼록한 옹이가 좋다. 아이처럼 둥근 눈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꽈배기 무늬로 짜인 수제 스웨터를 걸친 대왕참나무. 가을이면 내 앞에 후드득 도토리를 떨어뜨린다. 지금도 어느 구석에는 도토리들이 숨어 있다. 보물찾기 하듯 도토리를 찾아 움푹 파인 뿌리 사이에 모으는 일이 즐거웠다. 시간낭비라 생각도 했지만 신기하게 마음이 공기처럼 가벼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느 해부턴가 도토리를 보아도 모아놓지 않는다. 이제는 이곳을 걷는 것으로 충분히 무심해진다.
반지르르한 피부가 그대로 드러난 간지럼나무. 추울 것 같다. 같은 목과 같은 과의 나무들끼리 무리지어 서있는 이 숲에서 이방인처럼 혼자 서있다. 숲을 돌다 멈추어 균형 잡힌 수형과 깨끗한 수피를 감상하곤 한다. 분홍꽃이 필 때는 환상적이다.
검은 껍질이 때 낀 것처럼 지저분한 산수유가지들. 떨어진 빨간 열매들이 겨울숲길을 보석처럼 장식한다. 노란 망울로 맨 먼저 봄을 알려준다.
방울나무는 이 숲에서 가장 키가 크다. 덩치도 가장 크다. 물에 푼 신문지를 한주먹씩 붙인 것처럼 껍질이 울퉁불퉁 두툼하다. 길게 쭉 뻗은 두 다리를 높이 들고 물구나무 서있다. 양쪽 발바닥에 까치둥지가 놓여있다. 겨울에는 빈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방울들이 보인다. 나는 숲 끝에 서있는 이 나무에서 턴을 한다. 나무의 기운이 내게 전해지는 것 같다. 두 손 모으고 빙글빙글 돌때는 내 기도가 나무를 타고 하늘에 닿는 것 같다.
매끄러운 회색 실크 수트를 걸친 느티나무들이 넓은 공터에 돌아가며 서있다. 아이들이 배드민턴을 치다 가지에 셔틀콕이 걸려 자주 수난을 당한다. 지금도 우듬지에 돌 던지고 흔들고 발로차도 떨어지지 않은 하얀 공이 보인다.
가느다란 가지들이 엮어놓은 그물망 속으로 엷은 햇살이 들어온다. 나무가 벗어놓은 잎을 밟는다. 퇴색해가는 시간의 시체 같은 나뭇잎들, 떨어진 주검들이 쌓여 썩어가는 숲, 숲은 시간의 무덤이고 요람이다.
오솔길에 개개비가 떨어져 있다. 천천히 썩어가는 모습을 매일 지켜보는 일이 괴로워서 나뭇가지로 나뭇잎에 싸서 매미 껍질들이 다닥다닥 붙은 덤불 아래 묻어주었다. 죽은 쥐나 죽은 매미들도 그곳에 모아 흙으로 덮어 주었다. 죽음 앞에서 더 나은 생명도 못한 생명도 없다. 모두 똑같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지에 매달렸을 때는 귀처럼 보이던 나뭇잎들이 바닥에 떨어진 나무의 발처럼 보인다. 가지 끝에서 공중을 거닐던 얇은 발들, 허공을 흔들던 발들. 겨울은 수많은 발을 잃고 나무가 움직이지 못하는 시간. 바닥이란 나무의 발들이 떨어져 낡고 바래어 바스라지고 썩어가는 장소다. 그러나 나무의 발들은 어떻게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눈이 몇 번 쌓였다 녹은 후 숲은 묵상에 잠겨있다. 깊은 애도기간이 지나고 다시 꿈꾸기를 시작하는 중일 것이다. 새로 태어날 싹에 관하여, 그들에게 전해줄 빛깔에 관하여 골몰히 생각하며 빈자리를 쓰다듬는 중일 것이다.
벌레가 갉아놓은 나뭇결이 톱밥처럼 흘러나온 잣나무가 보인다, 혹독한 시간을 견디는 중이다.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나무는 점점 캄캄한 동굴이 되어간다. 그렇게 잘려나간 둥치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해인사에 갔을 때 숲에 쓰러진 고목을 보았다. 세 아름 넘는 둥치가 천년쯤 살았을 것 같았다. 바닥에 쓰러진 거목을 보는 일이 놀랍고도 가슴 아팠다. 신화 속에 나오는 거인 같았다. 나무가 살아온 세월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오래 산 능력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물과 공기로 꾸준한 자기관리와 긍정적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죽음의 순간이 오고 만 것이다. 덩치만큼 수많은 벌레들이 오랫동안 그 속에 집을 지을 것이다.
이 밖에도 공원 숲에는 많은 나무들이 있다. 박태기나무, 복숭아나무, 자두나무, 감나무, 매실나무, 중국단풍나무, 벚나무, 목련나무, 쥐똥나무, 넝쿨장미, 사철나무, 찔레나무 등등. 이들도 돌아가며 황홀한 개인전을 펼치는 숲의 예술가들이다.
눈 쌓인 나무 사이를 걷는다. 수직으로 서있는 검은 나무들과 수평으로 펼쳐진 하얀 바탕 속으로 움직이는 점이 발자국을 남긴다. 무한 속을 점 하나가 걸어가는 그림 같다. 눈이 녹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발자국들. 무수한 점들이 이곳을 지나갔고 지나갈 것이다.
곧 사라진 색깔들이 찾아들 것이다. 푸른 잎으로, 색색의 꽃으로, 숲은 두툼한 그늘을 가질 것이다. 나는 아늑한 그늘 속에서 빛깔에 맞는 꿈을 꾸며 잠깐씩 졸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