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진행과 관점에 따른 분류
예배의 갱신은 예배 순서 몇 가지를 집어넣고 빼고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예배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게 정립되고 거기에 기초한 예배갱신의 원리가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이 원리들을 바탕으로 하여 예배의 요소들과 그 요소들의 순서를 정할 때에 비로소 좋은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먼저 한국교회의 예배를 철저히 분석하고 그 다음에 예배를 갱신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할 원리들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예배형태가 필요할 것이다.
1. 구어적(口語的)인 예배냐 상징적인 예배냐
한국 개신교의 예배는 지나치게 '듣는 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개신교 예배가 소위 '말씀 중심'의 예배이다 보니, 중요도에 있어서나 시간의 분량에 있어서 설교가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또한 설교 이외의 순서도 대부분 '구어'(spoken word)에 의존하여 있다. 한국 개신교 예배는 '말'로 시작하여 '말'로 끝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예배가 '구어'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진행될 때 과연 '하나님,' '그리스도의 임재,' '하나님의 나라'등의 영적인 실재들이 설교를 포함한 인간의 언어에 의해 정확하고 올바르게 표현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예배에 참가하고 있는 회중이 과연 인간의 언어를 통하여 이들 영적 실재들에 대하여 얼마만큼이나 이해하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가? 예배의 표현양식이 언어를 통한 청각적 차원에만 의존할 때에 그만큼 예배의 풍부함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복음은 들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여질 수도 있다. 시각적 보조물을 사용하는 것은 복음선포에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예배는 후각, 미각은 물론 촉각까지도 사용하는 다차원의 표현양식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회중은 말하고 듣는 것뿐만 아니라 보고 만지고 냄새맡고 맛보는 5감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현존을 더 풍성히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예배의 구어적 차원뿐만 아니라 비 구어적 차원을 또한 회복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예배를 보다 더 상징적이고(symbolic) 은유적이고(metaphoric) 시적(poetic)인 것이 되게 할 수 있으며, 그 예배가 영적인 실재들에 관해 풍부함을 가지고 회중들에게 다가올 수 있게 될 것이다.
2. 산만한 예배냐 진행감 있는 예배냐
예배는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군더더기나 어색함이 없이 매끈하고 진행감(sense of progression)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의 요소들이 적절하게 선택되어야 하고, 이 선택된 요소들은 논리적이고 매끄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의 논리적 배열과 진행감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의 원칙이 준수되어야 한다.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순서들이 예배 순서 중 어디에 들어가야 할지 명백한 지시는 성서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위탁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행위 즉 헌신의 다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주목적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설교 직후에 오는 것이 보다 더 논리적이다. 그 외에도 앉고 일어서는 동작, 눈을 뜨고 감는 순서 등은 예배학적인 고려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배열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심이 우리의 예배를 매끄러운 흐름과 진행감 있는 예배로 만들어 줄 것이다.
3. 초점이 흐려진 예배냐 초점이 뚜렷한 예배냐
좋은 예배가 되기 위해서 하나의 예배는 하나의 주제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의 모든 순서는 이 하나의 주제를 지향하도록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의 예배 모습은 이와 거리가 있다.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설교의 주제가 예배의 주제라고 생각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생각은 예배의 현실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는 설교자의 의도가 예배 인도자와 기도자 그리고 성가대에게 미리 전달되지 않고, 따라서 각 참여자들이 제각각의 주제와 관심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즉흥적 기도냐 쓰여진 기도냐
예배는 단순히 예배집을 읽거나 주보를 따라 그대로 훑어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기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기도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예배 공동체가 기도할 때에 누구의 목소리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대표로 말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 그것을 듣기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제창형식(unison)이 되어야 하는가? 또, 기도는 쓰여진 것을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눈을 감고 즉흥적으로 하여야 하는가? 공 예배에서는 목사가 기도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평신도 지도자도 기도할 수 있는가? 주중의 기도회에서 행해지는 기도는 주일 공 예배에서 되어지는 기도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진지하게 숙고하여야 한다.
특히 쓰여진 기도냐 아니면 즉흥적인 기도냐의 문제는 예배학에서 큰 논쟁거리 중의 하나이다. 기도는 인쇄된 형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을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성령의 역사하심에 맡겨 눈을 감고 즉흥적으로 하여야 하는가?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교단적 차원의 예배집에 인쇄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기도자가 개인적으로 미리 준비한 것을 읽는 것인가? 만일 성령의 역사하심에 맡기기 위해서 즉흥적으로 기도하여야 한다면, 그렇다면, 즉흥적인 것만이 성령의 역사인가? 이런 질문들은 매우 첨예한 토론의 주제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쓰여진 기도문은 이미 3세기초의 것부터 발견된다. 물론 이때에 예배를 인도하고 회중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은 감독(bishop)이었다. 예배에서 그가 기도할 때에는 미리 주어진 기도문을 읽되, 본인이 원하면 쓰여진 그대로 읽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기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재량권은 정해진 범위 안에서의 재량권이었다. 감독이 비록 자신의 언어로 기도한다 하더라도 주어진 기도문과 같은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4세기를 넘어오면서 기도문은 쓰여진 채로 확정되었으며 이는 종교개혁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하는 것처럼 눈을 감고 즉흥적으로 하는 기도는 16세기에 영국의 청교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어 일부 개신교회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5. 전통적인 예배냐 토착적인 예배냐
예배는 '전통'과 '문화'라는 두 가지 축을 함께 가져야 한다. 전통이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2천 년 동안 예배가 끊임없이 변화 발전을 이루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디에서든지 그것이 '기독교의' 예배로서 인식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예배의 전통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초대교회의 예배전통이야말로 모든 교회의 예배가 본받아야 할 귀중한 유산을 포함하고 있음을 현대교회는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교회들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초대교회의 전통들을 예배에 반영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예는 현대 교회들의 예배에서 회복된 '성만찬 기도'이다. 4세기에 사용되었던 성 바질(St. Basil)의 성만찬 기도는 성공회의 성만찬 기도 D로, 그리고 로마 카토릭의 성만찬 기도 IV로 부활되었으며, 로마 카토릭의 성만찬 기도 II는 3세기초에 로마에서 씌여진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에 나오는 성만찬 기도의 부활이다. 이외에도 미국 연합감리교회나 미국 장로교회 등 많은 개신교회들은 성만찬 기도의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초대교회의 요소들을 대거 포함시킨 성만찬 기도를 만들어서 예배에 사용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예배전통을 회복한 또 다른 예는 바로 '말씀과 성만찬'으로 이루어진 예배의 이중적 구조이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말씀과 성례전이 균형을 이룬 이상적이고 성서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 서방교회에서는 말씀을 약화시키고 성례전만을 강조하였으며, 종교개혁자들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성례전을 약화시키고 말씀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태어난 개신교회들이 1년에 단 몇 차례의 성례전을 거행하는 '말씀중심'의 예배를 드려온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말씀과 성례전'으로 구성된 초대교회의 예배전통을 재발견하게 되었고, 이로써 많은 개신교회들이 성만찬을 매주일 예배의 정규순서로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초대교회 예배의 핵심이었던 말씀과 성례전의 균형이 다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6. 짜여진 예배냐 융통성 있는 예배냐
바람직한 예배를 위한 두 번째 원리는 계획성과 융통성의 적절한 배합이다. 예배는 정교하게 계획되고 짜여져야 한다. 예배 인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예배는 하나의 연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계획된 예배라야 한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회 예배의 모습은 그렇지가 못하다. 목회자와 회중에게 공히 각인된 것은, '예배란 설교를 듣는 것'이다. 예배를 이렇게 이해하다보니 목사는 목사대로 자기가 할 설교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또한 회중은 회중대로 '앉아서 설교를 듣기'만 잘하면 예배를 잘 드린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 다른 순서들은 장식물이나 보조순서로 전락된다. 이것은 결코 좋은 예배라 할 수 없다. 이외에도 한국교회는 한 주간에도 여러 번 드리는 예배의 홍수 속에서 목회자와 회중이 모두 단지 습관적으로 예배에 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모습으로 드리는 예배는 존엄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정과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배는 매번 치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되고 점검되어져야 하며,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예배는 이처럼 치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융통성은 예배가 인간의 차원을 넘어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 주는 일종의 여백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잘 계획되고 준비된 예배라고 하더라도 실제 예배의 상황에서는 보다 더 좋은 선택을 위하여 이미 계획된 것을 초월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예컨대 찬송가는 꼭 정해진 것만 불러야 한다거나, 아니면 찬송을 부를 때에 반드시 1절부터 4절까지 책에 있는 그대로 불러야만 한다는 생각은 수정되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찬송가를 바꾸어 부를 수도 있으며, 1절부터 4절까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를 수도 있다. 또 1절 혹은 3절만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떼제(Taize) 공동체는 짧은 찬송가를 수십 번씩 반복하여 부르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때에 몇 번을 부를 것인가는 그때그때 결정한다. 이렇게 열려진 마음을 가지고 순간 순간 성령께 의지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참여할 때에 단조롭지 않고 역동적인 예배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배의 인도자이다. 물론 회중과 인도자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심정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예배의 융통성이라고 하는 여백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배 인도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예배 인도자는 영적으로 민감하여야 하며, 순간순간 성령에 의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7. 구경하는 회중이냐 참여하는 회중이냐
예배의 일차적인 요소는 사람들이다. 초대 교회의 예배는 공동체의 행위였으며 성직자들이나 기타 인도자들만의 예배가 아니었다. 아무리 앞에서 열심히 예배를 인도한다고 하여도 회중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좋은 예배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회중이다. 회중이 누구냐에 따라 예배가 달라진다. 필자가 미국 유학시절에 경험한 바에 의하면, 뉴욕의 같은 길 위에 위치해 있는 같은 교회라 하더라도 한인들의 교회와 남미인들의 교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예배를 보여준다. 한인들의 교회는 전형적인 한국의 개신교회들처럼 '점잖게'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반면에, 남미인들의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일어나서 몸을 흔들며 찬송을 부르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만큼 예배에서 회중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요소는 회중이다. 회중이 얼마나 예배를 이해하고 참여하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예배갱신을 위해 가장 먼저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이다.
*기타 분류
1. 시간에 따른 분류
새벽 예배: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새벽기도회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는 365일 예배적 자세로 살아가는 적극적인 신앙인의 자세로 이해된다.
수요 예배: 흔히 3일 예배나 기도 예배로 불린다.
금요 예배: 보통 철야기도회를 겸하고 있다.
주일 예배: 대예배 혹은 정식예배로 불리지만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주일 아침 예배는 전 성도가 함께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려진 듯하다. 대예배 소예배 이런 것은 예배학적으로 맞지 않다. 하지만 메인 기능을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주일 오후 예배: 원래는 저녁예배였으나 최근 오후로 많이 변하는 추세다.
주일 저녁 예배: 산업화 다원화되면서 저녁예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2. 규모에 따른 분류
가정 예배 : 보통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가족 중심 예배다.
구역 예배 : 주중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작은 구성으로 구역별로 이루어진다.
회중 예배 : 주일 혹은 약속된 날에 전 성도가 모이는 것을 말한다.
연합 예배 : 개 교회보다는 지역 교회가 연합한 대형 예배를 말한다.
3. 특별 예배
헌당 예배, 목사 안수 예배, 결혼 예배, 장례 예배, 개업 예배, 졸업 예배, 입학 예배, 득남, 득녀 예배, 파송(여기에도 여러종류가 포함된다) 예배, 기타 감사 예배, 부흥 예배, 찬양 예배, 기도 예배, 서원 예배 등 다양한 예배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