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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년이 끝나는 6월, 마지막 학교에서 마지막 학생과 치료 순서를 끝내고 학생을 자신의 반으로 돌려보낼 시간이다. 몇 개월의 걸친 심사숙고 끝에 23년 이어오던 언어치료사의 직책에서 은퇴하기로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지금 막 치료를 끝낸 학생의 교실은 계단을 내려가 복도의 끝에 있다. 물론 교실까지 내가 동반을 하겠지만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묻는다.
Do you know how to go back to your classroom(너희 교실을 찾아 갈 수 있겠어?)
Me not know(전 몰라요). 학생이 답한다. 가는 길을 모른다고, ‘I don’t know’라고 답하려는 것인데 이렇게 엉뚱한 단어의 조합이 나온다. 영어를 쓰지 않는 지역의 사람들까지 대부분의 사람이 이제는 다 알만한 말을, 영어만 쓰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가 5년을 들으며 자랐는데 정확히 흉내를 못 내는 것이다. 언어발달 장애의 한 모습이다. 늘 하던대로 나는 아이의 문장을 고쳐주려다 짐짓 멈춘다. 이제 이 학생과 같이 교실로 돌아가면 다시는 없을 순간인데 그냥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걷고 싶었다.
손에 매달려 걷는 학생의 이름은 트메라(Tamara), 편모 밑에서 언니와 함께 자라는 학생이다. 선생님들은 트메라의 언어 외에도 여러 다른 면의 성장미숙을 걱정하지만 트메라는 늘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무언가 쉬지 않고 조잘대고 있다. 언어장애가 있는 학생들도 옆의 학생들과 똑같이 할 말이 많다. 일부의 학생들은 나름대로 절절한 장애의 원인을 품고 있기도 하다. 자폐증, 불의의 사고로 인한 뇌 손상, 아니면 극심한 빈곤으로 발육 지진등이 몇 가지 예가 될 수 있다. 원인에 상관없이 나는 각 학생의 필요에 따라 정확한 발음을 내는 법도 가르치고, 단어를 엮어 문장으로 말하게 하고, 하물며 말을 못하는 학생은 손으로 그림을 짚어가며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치려 애써왔다.
내가 학생들과 치료 중에 한 훈련들은 이제 트메라를 교실로 돌려보내면 다시는 할 일이 없다. 마치 지나간 세월 내가 띈 발자국들처럼 매일 반복되는 내 삶의 일부였지만 구체적으론 기억에 남지 않을 시간들이다. 그렇다고 긴 세월에 걸쳐 만났던 어린 학생들이나 그들의 부모들과 엮어 온 삶까지도 내 생각과 마음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남들은 저절로 되는 과정을 애써서 배워도 남과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은 온 가족의 아픔이고 아이들의 영혼을 다칠 수 있는 어려움이다. 허지만 내가 보아 온 이 곳의 많은 부모들은 크게 동요치 않고, 본능적인 따뜻함으로 자식들을 보호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은 생긴 그대로 사랑 받는 사람임을 확인하게 되고, 남과 다르다는 사실을 그냥 자신의 한 특성으로 받아들인다. 지난 20여 년 매일 내 방을 들어 온 아이들은 한결같이 밝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물론 아이들에게 그런 자존감을 허락하기까지는 그들이 속한 사회와 어른들의 생각과 행동들이 영향을 미친 결과이기도하다. 캐나다의 교육정책은,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일반 교실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정상적인 친구들 안에서 생활하면서 각 학생에게 필요한 특수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법으로 정해놓았다. 편견 없이 아이들에게 전해진 관심과 사랑은 그들이 가진 부족한 능력보다는, 긍지 있는 사람의 평온과 천진함이 더 얼굴에 돋보이게 그려주었다.
누구나 인생의 한 시점에서 가진 능력들을 잃고 조금씩 장애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신체적인 능력일 수도 있고, 기억이나 판단력을 잃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언젠가 내 앞에 다가 올 그런 날들에 나는 “me not know” 라는 트메라의 마지막 문장을 기억할 것이다. 그 엉뚱한 문장은 자신도 누구도 탓하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을 믿고 용기 있게 자라가는 예쁜 아이들을 기억시켜 줄 것이다. 또 그 문장은 내가 열정을 가지고 살았던 시절을 상기시켜 주기도 할 것이다. 내가 성인으로 오랜 세월 많은 책임을 감수해 낸 것은 부모님이 주신 사랑과 이끌어 주신 교육의 힘이었다면, 이제 차츰 닥아올 노년을 살아갈 지혜는 내 곁을 거쳐간 어린 학생들에게서 얻으려고 한다.
후각 속의 고향
서울의 한 친구가 구정 인사로 보낸 이메일에, 자신이 만들었던 음식의 메뉴를 같이 실었다. 녹두 빈대떡, 깻잎 고기전, 생선전, 갈비, 뭇국, 북어 양념구이, 해파리 겨자채, 굴비구이, 연어말이, 더덕생채…… 하면서, 내 생각을 하며 먹었다고 했다. 친구 집 잔칫상에 올랐던 음식 이름들을 되뇌니 맛있는 냄새가 코끝에 맴돌며 나의 모든 감각이 그리움으로 채워진다.
이제 중년이 된 친구의 생활을 가까이서 보지 못하고 살아도, 친구가 차린 음식 이름들을 들으며, 내 후각 속에 숨어 있던 기억들은 쉽사리 기름 냄새를 뒤집어 쓰고 며칠씩 일하는 친구의 모습도, 단정히 차려 입고 설 상에 모여 앉은 그의 가족들도 그려 볼 수 있게 해준다. 이제 나는 한국을 떠난 지 40년이 넘었다. 일이 년에도 수 없이 모습을 바꾸는 도시를 뒤로 하고 온 나에게 고향이라 정의할 수 있는 실체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내 기억에서 잊을 수 없는 몇 명의 사람들과 공유하는 추억과 어디서든 감각을 자극하면 되살아나는 기억들이 내 마음 속에 숨어 있다가, 필요할 때 위로를 주는 고향의 역할을 한다.
교육청의 언어치료사로 새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잭키라는 선생님이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다. 답을 듣자마자 만면에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김치 이야기를 꺼낸다. 자기는 토론토대학 기숙사에 살 때 룸메이트가 한국 학생이었단다. 밤늦게 출출해지면 그 친구가 전기밥솥에 밥을 지어 김치와 같이 먹곤 했단다. 밥은 뜨겁고 김치는 맵고, 입 안에서 불이 나는 것 같은 그 밤참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졸업 후 선생님이 되고, 결혼하고, 아기를 임신했을 때도 얼마 동안 입덧을 불같은 김치밥으로 달래며 지냈다고도 했다. 지금도 어쩌다 내가 김치를 조금씩 갖다 주면, 받자마자 교무실에서 통을 열어 손가락으로 김치를 집어먹곤 한다.
잭키에게 김치를 밥 위에 얹어 먹던 경험은 언제고 그의 미각에 살아있는 기억이다. 그녀는 김치 이야기를 들으면 금새 입안에 침이 고이며, 대학생이 되어 처음 온타리오 북쪽의 작은 마을을 떠나 학문의 세계로 날개를 펴며, 독립을 꿈꾸던 시절을 되살릴 것이다. 또 김치는 그녀에게는 모르던 세계를 향해 과감히 손을 펼쳐 보았던 젊은 시절의 오기와 이상을 상징하는 맛이 되었다. 잭키도 나처럼 혀끝에 살아나는 기억에 의지하여, 언제고 쉽게 동양인 아가씨 룸메이트를 생각하며 그를 향한 애정도 간직해 갈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서 눈을 돌려 주위를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태어난 곳을 떠나 세상을 전전하며 살고 있는가 알 수 있다. 세계 각 곳에서 이민 온 사람들, 전쟁이나 내전을 피해 안전한 곳을 찾아 온 난민들, 공부를 위하여 떠돌아다니는 유학생들, 일자리를 찾아 움직이는 직장인들. 우리가 태어난 곳, 자라난 곳은 고향이라고 해도 필연적으로 떠나야만 하는 일이 많다. 물처럼 흘러 다니며 사는 현대인에게 고향의 역할을 하는 것은, 어디에서 누구와 살던 사랑 담긴 관계를 이어가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기억들을 가슴에 쌓아두는 일일 것이다. 작은 기숙사 방의 침대에 걸터앉아 뜨거운 밥과 김치를 나누어 먹던 기억은 각자 집을 떠나온 두 아가씨가 만들어 낸 따듯한 마음의 고향이다.
마음의 고향을 만드는 일은 이웃에서도 이루어진다. 앞집 쌍둥이네는 쿠바에서 온 사람들이고, 그 옆에 치과 집은 그리스 사람들이며, 우리 바로 옆에는 이태리 가족들이 살고, 또 그 옆에는 중국 사람들이 모두들 부지런히 살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 올 시간이면 누군가 집에 있는 엄마가 스쿨버스 정류장에서 아이들을 모아 자기 집으로 데려다 간식을 먹이곤 한다. 누가 집에 있었나에 따라 아이들은 그리스 빵을 먹을 수도 있고, 중국 국수를 먹을 수도 있다. 일 년에 두어 번 거리를 막고서 동네 파티를 하면 길 한복판에 테이블이 차려지고 집집마다 자신들의 전통음식을 한 접시씩 들고 나와 밤늦게 까지 흥겨운 잔치를 한다. 집에서는 모두들 엄마 아빠가 떠나온 고향의 삶을 옛 이야기처럼 들으며 살지만, 아이들은 이 거리에서 유아기의 추억을 만들며 자라간다.
집에서 잠시만 나가도 멕시코, 이란, 이태리, 월남, 자메이카 등 온 갓 나라 식당들을 지나치게 된다. 이 도시에서 마음 문을 열고, 이웃에게 밝은 얼굴을 주다보면 언젠가 내 후각을 스치는 이 많은 음식 냄새들은 다 누군가와 보낸 좋은 시간들을 기억케 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세계가 하나가 된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고향을 키워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어머니의 서사시
오늘 시어머니께서 이를 뽑으셔서 저녁시간에 죽을 들고 들려보았다. 이미 잠자리에 드셨다가 나오셔서 반갑게 맞아주신다. 피곤하실 텐데 앉으셔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곧 이야기는 큰 손주아이가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어쩌면 그리 쏙 빼어 닮았는지, 씨 도둑은 할 수 없다고 하시며, 늘 듣는 이야기를 하신다.
이제 90이 넘으신 어머니는 요사이 몇 가지 같은 이야기를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거듭해서 들려주신다. 그렇다고 특별히 기억력이 없으시거나, 치매 증세가 있으신 것도 아니다. 단지 외출을 하시거나, 만나는 사람 수가 줄어들면서 생활은 단순해지셨고, 대신 혼자 지내시며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시는 시간이 많아졌을 뿐이다.
늘 하시는 대로 이야기는 신혼 때 부대 옆에 방을 한 칸 얻어 사셨는데, 도시의 언니가 부부싸움만 하면 동생 집으로 들이닥쳐 새신랑이 집에도 오지 못했던 이야기로 이어졌다. 당신의 어머님과 아버님이 오빠들이 몇 명씩 있었는데 두분 다 막내딸인 본인 앞에서 세상을 뜨셨다는 이야기, 또 직장 생활을 하실 때 부하 직원이 출산 후 젖이 넘쳐흘러 점심시간에 집에 보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던 일 등 끊이지 않고 이어가신다. 이야기 중에는 남편의 전사 후, 6개월짜리 아들을 데리고 혼자 피난길에 오르는 가슴 아픈 일들도 있지만, 특별히 애타하시거나 후회스런 마음을 표현하시는 일도 없다. 그냥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늘 비슷한 순서로 엮어나가신다. 얼마큼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어머니는 좀더 진지해 지시며, “그래도 이렇게 좋은 곳에 와서 살면서, 지난 40여 년 너와 내가 한 번도 얼굴 붉힐 일 없이 이리 사랑 속에 살고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말은 이야기가 대강 끝이 나고 있음을 제시한다.
몇 년 전 터키를 여행 할 기회가 있었다. 정해진 방문지 중에 호머의 일리아드의 배경이 되었던 트로이가 들어있었다. 서구 문학의 시초고, 그리스 철학의 근거작이 되었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출산지라고 믿는 곳이었다. 입구에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나무로 만든 말이 세워져 있고, 주변에는 오랜 세월을 두고 여러 문명이 스쳐간 흔적을 남기는 유적지가 펼쳐져 있었다. 고고학자들이 파 내려간 지층을 유심히 살펴보면, 다른 종류의 돌과 연장들이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어, 그 땅에 정착했던 문명의 순서와 또 각 문명의 삶의 형태들을 보여주면서 그 곳의 긴 역사를 상상하게 해준다.
문학평론가 ‘밀만 페리’는 호머의 서사시는 호머가 앉은 자리에서 써내려 간 이야기가 아니고, 그 이전에 오랜 세월을 비슷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생긴 이야기들이라고 믿고 있다. 구설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늘 같은 내용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삶의 배경과 상황에 따라 바뀌어 갔을 것이라 말한다. 그래도 이야기가 오랜 세월 기억 되려면, 인간 삶을 상징하는 비유들이 깃들고, 전형적 표현(Formulae)들과, 어떤 일률적인 구성을 갖추면, 끝에는 서사시로 기록 되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젊은 색시가 전방에 묻혀, 어린 아이까지 데리고 생활을 할 때는, 어쩌면 느닷없이 찾아와 방을 차지하는 언니와 조카가 반갑고 위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며칠 집에 들어 올 틈이 없다고 하여 뭐 그리 큰 문제가 되리라 싶었을 것이다. 허지만 지금 어머니께서 기억하시는 그 날들은 곧 세상을 하직할 젊은 남편이 가족과 다정히 보낼 수 있었던 많지 않은 날들이 되고만 것이다. 시간은 지나고 난 다음에 그 모습이 더 확실해 진다. 어떤 날은 너무나 젊은 나이에 간 그가 가여워 생각이 나고, 간혹은 언니가 원망스러운 마음에 그 때 일이 떠오르고, 아니면, 기차에서 처음 만난 날부터 그에게 받은 젊은 날의 사랑이 그리워, 그 이야기는 어머니 뇌리를 떠나지 못하고 매일 다시 전개 되곤 한다.
어머니의 90평생은 긴 세월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일상은 머리 속에 별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허지만, 어머니의 가슴 속에는 암만 세월이 가도 삭으러 들지 않는 뜨거운 불씨들이 그의 삶의 결정체로 남아있다. 그 떨칠 수 없는 기억들을 매일 거듭 회상하시며 잊지 않고 앞에 앉은 며느리를 보며 “너와 내가 보낸 긴 세월 동안 나눈 사랑”을 이야기 하시며 말씀을 거두시는 모습은 늘 나의 마음을 흔든다. 어머니께선 이제 당신 삶의 모든 기쁨과 아픔은 누구를 사랑하는 일에서 시작되었음을 뼛속 깊이 아시게 되었을 것이다. 남편도 형제들도 친구도 모두 떠나, 이제는 그들과 같이 한 사랑의 모습은 더 바꾸어 볼 수가 없다는 애절한 마음 끝에, 어머니는 이제 당신의 곁을 지키는 자식들에게는 가슴에 쌓인 모든 회한을 담아 사랑을 고백하시며 이야기를 끝내시는 것이다.
노인에게서 그런 사랑의 고백을 받으면서도, 나는 묵묵히 “피곤하시겠어요. 이젠 주무세요.” 하며 돌아서곤 한다. 언젠가 나도 나의 삶이 한편의 서사시로 엮어 질 날이 오면, 평생 쉽게 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감추어 두었던 사랑을 뒤 늦게 되뇔 것이다.
김인숙(金仁淑) myspeechlady@hotmail.com
서울 출생, 1971년 캐나다 이주. 2006년 등단(『에세이 21』).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산영수필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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