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수원(水源)으로의 도착
『변두리』(유은실 소설, 문학동네 펴냄, 2014)
나의 수원(水源)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을 동네 사람들은 ‘대나무집’이라고 불렀다. 할아버지가 죽제품을 만들었던 까닭이다. 대나무들이 켜켜이 누워서 산을 이룬 넓은 마당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나들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동생과 나의 일과였다.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대나무 마루에서 낮잠을 잤고, 장난을 치다 손이나 다리를 다치면 대나무 속살을 붙여 지혈을 했으며, 대나무로 갖가지 소꿉놀이 도구를 만들어 놀았다. 열한 살 때까지 대나무집에 살면서 내 모든 일상은 ‘대나무’와 연결되어 있었다. ‘대나무집 손녀’로 십 년을 넘게 산 것이다.
이 대나무집에서 죽제품만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대나무집으로 구획된 곳에는 철공소와 비닐하우스 그리고 큰집인 우리 집과 작은아빠, 막내 작은아빠네가 함께 살던 살림집이 있었다. 위층엔 늘 기침을 달고 살던 젊은 원장이 운영하는 화실이 있었고 쿵푸를 가르치던 도장도 있었다. 다들 감추고 싶어도 감추어지지 않는 삶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 주며 살 수밖에 없는 투명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허술하고 남루한 삶을 영위했기에 부끄러움과 슬픔과 아픔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셈이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수원(水源)’을 찾을 때면 나는 이 대나무집을 떠올린다. 분명 좋은 기억도 많을진대 이때를 떠올리면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과 근원적인 두려움에 시달렸던 기억이 먼저 찾아온다. 아마도 어린 시절이기에 ‘첫 경험들’이 삶의 곳곳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첫 경험들은 대부분 이해할 수 없는 죽음과 이별, 싸움과 질투, 배고픔과 거짓말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수원이 슬픔과 아픔만으로 점철된 기억이라면 삶의 언저리에서마다 이를 소환하긴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나의 수원지는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게끔 만드는 강력한 힘, ‘그리움’을 품고 있다. 첫 경험과 그것을 극복했던 치유의 기억을 다시금 체험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하기에 유은실의 장편소설 『변두리』는 삶을 버티게 해 주는 원형, 나의 수원이 어디쯤인지 묻는 계기가 되었다.
붉은 선지와 하얀 아카시아꽃
유은실은 소소한 일상을 통해 삶의 진실을 관통하는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드러낼 줄 아는 작가다. 이번에 소설로 출간된 『변두리』 역시 그러한 자연스러움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흔히 이런 주제와 배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땐 감정과잉을 보이거나 억지 눈물을 자극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감정을 고조시키다가도 적절한 절제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 마치 삶의 고비에서 마음을 추스르듯이 말이다.
1985년, 서울 어느 변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난한 자들의 일상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각각의 에피소드들 속에 삶의 진실을 향한 예리한 통찰이 숨어 있다. 이러한 작가의 통찰은 이야기 중간중간 툭 끼어들지 않고 작품 전반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일상을 작위적이지 않게 그리되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일 것이다.
서울의 변두리 황룡동, 도살장 근처에 살고 있는 수원이네 가족과 그 이웃들은 선지와 같은 부속물을 먹으며 살고 있다. 아이들에게 도살장 근처에 산다는 건 부끄러움과 고단함, 질퍽한 삶의 진실을 너무나 빨리 깨닫게도 하지만, 그러하기에 어디서든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는 아카시아를 닮기 위해 첫꽃날 부지런히 용비봉에 오르는 희망을 품게도 한다. 소설 초반에 붉은 선지 들통을 엎어 피칠갑을 하는 수원·수길 남매는 중반을 넘어서 첫꽃날 흐드러지게 핀 하얀 아카시아꽃을 따먹는 장면에 이르러 진정한 성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긍정적인 면만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성장의 모습도 그러하다. 성장의 양면이 바로 아카시아이다. 엄청나게 큰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아카시아나무의 뿌리는 예상을 깨고 희고 가늘고 무척 약한 것이었다. 믿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도 쉽게 아카시아나무의 뿌리가 뽑혔던 것이다.
아카시아는 보통 나무보다 두 배는 빨리 자라지. 바위 옆에 있어도 끄떡없이 살아. 가물어도 안 죽고, 물난리에도 안 죽는다고. 어디서든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는 게 바로 아카시아라구.
『변두리』(문학동네, 2014), 96쪽
황룡동 어른들은 첫꽃 안에 아이들을 아카시아처럼 강인하게 만드는 기운이 담겨 있다고 믿어서 첫꽃날이 되면 아이들을 용비봉으로 올려 보냈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 아카시아나무의 뿌리는 연약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아이들은 하얗게 피어난 아카시아꽃처럼, 어디서든 잘 적응하는 아카시아처럼 내성이 길러지고 있었다. 용비봉 아카시아가 곧 황룡동 아이들인 것이다. 태생적으로 가늘고 흰 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끄떡없이 자랄 수 있는 튼튼함을 키우고 있는 아카시아. 이러한 기반은 용비봉 아래에 있는 도살장에서 나오는 붉은 선지가 밑거름이 되어 주었으리라. 붉은 선지로 대변되는 이들의 삶은 누추하고 냄새나고 고단하지만, 또 그만큼 생생히 살아 있고 알맹이처럼 단단한, 누가 뭐래도 ‘중심’에 가까운 삶이다.
이 이야기의 또 다른 미덕은 변두리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소소한 일상이 그대로 우리 인생에 대입될 만큼 강렬하며 보편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변두리’란 제목으로 시작해 ‘도살장-집-길-산-병원-구민 체육 센터’를 거쳐 결국 ‘나의 수원’으로 귀결된다. 즉 삶의 원형인 도살장에서 출발해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집을 거쳐, 현실의 고단함을 잊게 해 주는 첫꽃날을 맞이하기 위해 성장의 문턱에 선 아이들은 길을 나선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이들을 홀린 것처럼, 아카시아꽃이 아이들을 이 세상 한 꺼풀 뒤에 있는 이상한 나라로 데려가는 것’이다. 판타지의 세계에 다다른 아이들은 좀 더 단단해지기 위해 첫꽃을 따먹지만 아이들은 이미 저 아래 도살장에서부터 아카시아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병원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그동안 가려졌던 처참한 진실에 눈을 뜨게 하고, 가진 자들은 주민과 아이 들의 작은 판타지이자 치유처인 용비봉을 구민 체육 센터로 둔갑시키기 위해 아카시아나무를 밀어 버린다. 하지만 아카시아 숲만 사라지고 그렇게 원하고 원했던 상숙이네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포클레인의 발길질로 낡은 집에 더욱 금이 간 상숙이네지만, 가물어도 안 죽고 물난리에도 안 죽는 아카시아처럼 결국엔 꿋꿋하게 살아남지 않을까? 황룡동 사람들의 삶 역시 그러할 것이다.
나는 엄마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1985년 8월의 마지막 토요일 밤, 사라진 아카시아 숲 쪽으로, 무너지지 않은 상숙이네 집 쪽으로.(221쪽)
『변두리』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모든 소설이 그러하듯 이야기의 구체성 이면엔 삶의 진정성을 껴안는 상징 또한 품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인 위 구절에서도 전체 이야기를 품고 있는 주제가 응집되어 중의적인 상징성을 띤다.
그리고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인 ‘나의 수원(水原)’은 드디어 수원(水原)으로 도착한 주인공 수원의 모습을 보여 주며 막을 내린다. 수원은 자신의 별명인 천하장사 강장군처럼 ‘성큼성큼 걸어나’갈 것이다. 사라진 아카시아 숲 쪽으로, 무너지지 않은 상숙이네 집 쪽으로. 삶의 진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의 변수와 아이러니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사람이 있는 그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성장해야 할 이유가 바로 ‘사람’에 있기 때문이다.
『변두리』에서 수원이 도살장에서 삶의 원형을 보았듯, 나 역시 대나무집에서 삶의 원형을 다시금 확인하고 힘을 얻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운명처럼 여겨진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그리움이 손짓하는 ‘나의 수원’은 어디쯤에 있는지 찾아보길 바란다.
송지연
오랫동안 어린이 책을 만들어 왔고, 작년 한 해 동안 <어린이와 문학> 서평방에서 동무들과 신 나게 서평 공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