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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을 넘어 (이케다 SGI 회장과 마음의 유대)
대한민국 서울
국제창가학회(SGI)는 세계적으로 크게 발전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이케다(地田) SGI 회장이 멤버 한 사람 한사람과 맺은 ‘마음의 우대’에 있다. 새롭게 연재하는 ‘지평선을 넘어’에서는 이케다 SGI 회장이 해외를 방문한 역사를 소개하며, 스승과 원점을 새긴 세계의 벗이 인간주의의 파동을 일으키는 ‘지금’을 이야기한다.
‘대은(大恩)의 나라’의 벗에게 행복 있으라
세계에서 손꼽히는 도시로 주목 받는 서울, 남서부에 위치한 구로구는 산업과 유통의 중심지로 서울의 발전을 이끈다.
구로구에는 한국SGI 본부와 이케다기념강당 그리고 화광신문사 등이 있다.
최근 한국광포는 이곳을 ‘심장부’로 하여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올해도 벌써 3,500명이 넘는 청년을 확대했다. 인간혁명의 철리(哲理)를 바탕으로 행복과 평화의 연대를 넓히는 SGI운동은 사회에 커다란 공감을 넓히고 있다.
지난 5월, 서울 국회의사당 국회의원회관에서 SGI와 ICAN(핵무기 폐기 국제 캠페인)이 공동 제작한 ‘핵무기 없는 세계를 향한 연대-용기와 희망의 선택’전을 열어 이수성 전(前)국무총리가 개막식(5월 21일)에 참석했다.
이수성 전 총리는 “이케다 SGI 회장과 맺은 깊은 우의(友誼)로 참석했습니다. 우리는 SGI와 손잡고 좋은 사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하고 기대를 보냈다.
한국 SGI는 왜 계속 발전하는가.
김인수 이사장이 이렇게 말한다.
“일찍이 이케다 SGI 회장은 ‘한국이 발전하는 이유는 한 사람 한사람의 신심이 우뚝 섰기 때문이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겠다고 각오한 신심에 무량한 복덕이 쌓인다’ 하고 따뜻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광선유포는 내가 하겠다!’는 사제서원에 불타는 동지의 연대가 이체동심의 단결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SGI 회장은 1990년 9월(서울), 1998년 5월(서울), 1999년 5월(제주도) 이렇게 세번 한국을 방문했다.
2000년, 한국SGI는 법인설립을 허가 받았다.
지금은 SGI가 사회에서 두터이 신뢰를 받고 있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
2012년 11월, 화광신문 1000호를 축하하며 SGI 회장이 ‘화광(和光)’의 휘호와 함께 진심을 담아 한국 벗을 격려했다.
김은란 부인부장은 ‘화광’이라는 두 글자에 담긴 SGI 회장과 동지에 대한 마음을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나 같은 민족끼리 일으킨 한국전쟁 등, 처참한 20세기 한국의 역사를 두 번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한국에서 새로운 세기에 평화의 빛을 비추리라’ 하는 결의를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전쟁의 위협에 놓인 조국에서 광포를 추진하는 사명과 책임은 매우 큽니다.”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제2대 회장이 취임한 1951년, 한반도는 같은 민족끼리 피를 묻히는 비참한 전란(1950~1953년)을 겪었다.
“한탄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문화 대은의 나라’의 민족을 누가 구한단 말인가!”
이웃 나라에서 들리는 민중의 통곡소리에 가슴 아파하며 안온을 기원하는 도다 제2대 회장의 마음이 동지의 가슴을 깊이 울렸다.
‘동포의 행복을 위해 공헌하고 싶다’ 1950년대 후반부터 재일교포와 한국 출신 사람들이 사랑하는 조국에 불법(佛法)을 넓힌다.
1963년에는 전국 회원이 약 1,000세대로 성장했다.
그러나 당시는 한일기본조약(1965년)이나 관계협정을 체결하기 전이어서 일본 문화를 매우 강하게 경계했다.
김인수 이사장이 당시의 상황을 말한다.
“특히 1960년대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문화’를 차가운 눈으로 보았기에 때문에, SGI에 대한 편견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형사가 감시하는 가운데 회합을 열었고, 근거 없는 협의로 체포되고 구속된 선배도 있습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왜 일본 종교를 믿냐’고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반드시 학회의 정의를 선양하는 날이 온다고 믿으며 이를 악물고 더 분발했습니다.”
한국의 동지는 앞이 보이지 않는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강한 의지로 교학을 연찬하며 신심을 깊게 했다.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이쿄신문 등에 실린 SGI 회장의 지도를 번역해 배부하고 함께 진지하게 읽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 힘쓰며 학회의 진실을 이해시키자!’고 서로 맹세했다.
1970년에 들어서 멤버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사회봉사활동을 추진했다. 모내기나 추수를 돕는 ‘농촌일손돕기 운동’과 ‘자연보호활동’에 힘썼다.
1969년에 입회한 김은란 부인부장은 당시 초등학생으로 중상과 편견이 휘몰아치는 속에서도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는 ‘창가의 어머니들’의 뒷모습을 보고 자랐다.
“한국광포의 ‘겨울’인 가장 힘든 시대를 꿋꿋이 견딘 선배들에게 더없이 감사합니다. 심한 욕설을 듣고 무시당해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사람들에게 봉사한 초창기 부인부들. 그 불굴의 ‘웃음의 힘’이 오해와 편견이라는 벽을 깼습니다.”
1979년 12월, 드디어 동지의 노력이 열매를 맺었다. 식량 증산에 공헌한 일을 기려 농수산부장관이 표창장을 수여했다.
1984년 1월에는 ‘농촌일손돕기운동’으로 대통령 표창장을 수상했다.
◇
한국의 동지가 고대한 ‘광포의 봄’이 드디어 찾아왔다.
1990년 9월 21일, SGI 회장이 문화교류를 위해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김인수 이사장은 SGI 회장의 첫 한국방문이 “회원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심어주어 전진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한다.
“지금부터입니다. 이 방문으로 한일우호의 문을 엽시다!”
SGI 회장은 깊은 결의를 가슴에 품고 도쿄후지미술관 창립자로서 서울 중앙일보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서양회화명품전’ 개막식에 참석했다.
축하연에서 인사할 때 한국 각계를 대표하는 지성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말했다.
“귀국은 일본 문화의 대은인입니다.”
“예로부터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뿜어져 나오는 문화와 광채가 얼마나 선명하게, 얼마나 풍성하게 일본의 여명을 밝혀주셨습니까.”
“저는 오늘 귀국과 우호의 ‘첫걸음’을 새겨 감개무량합니다. 앞으로도 성심성의껏 양국의 ‘문화의 길’을 열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결심입니다.”
SGI 회장은 한국을 향한 깊은 경애(敬愛)와 한일우호를 위한 정열이 알려져 단번에 SGI에 관한 이해가 넓혀졌다.
이때, SGI 회장과 회담한 삼성미술문화재단의 신현확 이사장(전 국무총리)은 이렇게 감상을 말하며 만남을 기뻐했다.
“뛰어난 문화인인 이케다 SGI 회장의 뜻은 앞으로 양국이 문화교류를 통해 서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튿날 22일 저녁 무렵, SGI 회장이 귀국길에 올랐다. 짧게 머물렀지만 벗의 마음에는 울리고 있었다.
한일우호의 신념을 관철하는 SGI 회장의 말이, 한국 사람들을 경애하는 진심 어린 행동이, 동지의 행복을 바라는 자애가.
그리고 모두 새롭게 맹세했다.
“다음에 이케다 SGI 회장을 한국에 모실 때까지 반드시 ‘인간혁명의 실증’을 보여 우리 지역에 신뢰의 꽃을 피웁시다!”
청년과 함께 평화의 대도를
이케다 SGI 회장 부부가 탄 비행기가 나리타공항 활주로를 달려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서울 김포공항. 처음 한국을 방문하고 8년이 지난 1998년 5월 14일, 시계바늘은 오후 2시를 지나고 있었다.
SGI 회장을 초빙한 곳은 한국 굴지의 명문대인 경희대학교이다.
소카(創價)대학교 창립자로서 방문한 SGI 회장에게 경희대학교는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이것을 기점으로 경희대학교와 소카대학교의 학술, 교육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지금까지 소카대학교에서 서른두 명, 경희대학교에서 스물일곱명이 교환학생으로 양쪽 대학교를 왕래했다.
그 중 학술계나 경제계 등에서 국제적으로 활약하는 인재가 많이 나왔다.
1998년 5월 15일 오후,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크라운홀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식이 열렸다.
당시 경희대학교 1학년생이던 이규선 씨는 “대학부로서 꿈에 그리던 일이었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의 뒤를 이어 민중의 행복과 평화에 기여하는 인재가 되자고 굳게 결의했습니다” 하고 말한다.
청춘의 맹세를 가슴에 품은 이규선 씨는 지금 의사로서 사회에 공헌하는 길을 걷고 있다.
수여식장에는 경희대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대학부 대표자들도 보였다. 김익환(노원권 지구부장) 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당시 서울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익환 씨는 법조의 길을 지망했지만 시험 점수가 오르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교내담당으로서 또 남자부로서 날마다 공부하면서도 짬을 내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멤버를 격려했다. 또 한국 SGI 대학부신문 ‘청람’의 기자로 활약하고 우인에게 홍교하기도 했다.
그때 SGI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수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동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수여식에 참석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SGI 회장과 만났다. 김익환 씨는 수여식장 거의 한가운데쯤에 앉았다. 그날의 감동이 지금도 가슴에 선명히 남아 있다.
경희대학교 창립자인 조영식 박사가 “소카대학교는 세계의 많은 대학을 이끌며 실로 진정한 정신교육을 근간으로 훌륭한 교육을 펼치고 있습니다.” 하고 힘주어 말했다.
수여식의 의의를 경희대학교와 소카대학교가 ‘하나의 가족’으로서 ‘한일우호의 신시대’를 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SGI 회장은 “일본인의 편협한 섬나라 근성을 키워온 큰 요인은 확고한 ‘철학’이 없는데 있으며, 또 ‘국가주의’라는 왜곡된 교육에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인간주의’ 철학과 교육의 연대를 명심해서 세계에 펼쳤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한일 양국과 아시아, 환태평양 청년들을 위해 ‘교육’과 ‘철학’의 대도를 더욱 깊게 더욱 넓게 열겠다고 결의합니다” 하고 말했다.
깊은 존경을 기반으로 만대의 우호와 평화를 목표로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 수여식장에는 찬동하는 박수가 울려 퍼졌다.
김익환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신심근본으로 철저하게 지성을 단련해 이케다 SGI 회장과 조 박사의 ‘평화정신’을 다음 세대로 계승해야 한다고 결의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2000년 서울대학교를 졸업, 2005년에 5번의 도전 끝에 훌륭하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지금은 서울에 있는 사무소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커다란 신뢰를 받고 있다.
◇
김은철(양천권 부남자부장) 씨는 “저에게는 잊지 못할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사진은 SGI 회장이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동국대학교를 촬영한 사진이다. 동국대학교 교내담당들은 SGI 회장과 새긴 유대로서 그 사진을 대대로 소중하게 전했다.
“사진을 볼 때마다 이케다 SGI 회장이 ‘그대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고 격려해주시는 듯 해 용기가 솟아납니다.”
김은철 씨가 2학년일 때, 동국대학교 교내담당이 되어, 캠퍼스평화문화활동 등에 온 힘을 쏟았다.
1998년 5월, 경희대학교의 수여식에 참석해 SGI 회장에게 받은 ‘언제까지나 건강하게, 몸을 소중히 해주세요’ ‘부모님에게 효도를!’이라는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김은철 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입회하여 묵묵히 학회활동에 힘쓰는 어머니 등뒤에서 신심을 배웠다. 어머니는 고난과 마주하면 늘 ‘함께 근행하자’고 격려해주셨다.
SGI 회장의 ‘효도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머니의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감동의 마음을 잊지 않고 보은의 인생을 관철하자!’고 맹세했다.
김은철 씨는 이듬해인 1999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어능력시험에서 최고점을 취득해 일본인 우인을 홍교하기도 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에 있는 기업에 취업해 중국어도 습득했다.
지금은 서울에 있는 전자부품회사에서 일하며 국제사회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1997년에 한국SGI의 직원이 된 김효진(성남권 지구부인부장)씨는 이듬해인 1998년 5월, SGI 회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운영요원의 한 사람으로서 번역 등의 작업을 맡았다.
“SGI 회장은 숙소에 돌아와도 밤늦게까지 일하며 모든 행사에 만전의 준비로 임하셨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전하며 반석이 되는 한일우호의 미래를 열자는 스승의 예사롭지 않은 기백과 결의에 저도 자세를 바로잡았습니다.”
서울에 머물던 SGI 회장은 늘 음지에서 분투하는 행사요원에게 마음을 쓰며 감사와 진심 어린 격려를 보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온 힘을 다하는 사람에게 빛을 보내는 스승의 자애를 보고 인간주의의 리더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경희대학교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를 축하하는 편지가 각국의 리더와 식자에게서 잇달아 도착했다. 김효진씨는 그것을 직접 눈앞에서 보고 깊은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세계에서 이토록 칭찬 받는 인물이 ‘우리 스승’이라는 긍지와 기쁨이 가슴에 넘쳐흘렀습니다. 당시 미입회이시던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우인과 불법대화에 도전했습니다. SGI의 훌륭함을 좀처럼 이해해 주지 않아 안타까웠지만 경희대학교에서 이케다 SGI 회장에게 수여한 학위가 저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가져 다 주었습니다.”
결혼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김효진 씨는 지금 한국SGI의 기관지 ‘화광신문’에서 번역을 도우면서 매주 열다섯 명 이상의 우인에게 화광신문을 보내고 있다.
SGI 회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대화한 아버지도 몇 년 뒤에 입회했다. 그리고 김효선 씨의 모습을 보고 신뢰해 지금까지 열명이 넘는 우인이 입회했다.
◇
경희대학교에서 수여한 학위를 게기로 지금까지 한국의 각 기관에서 많은 현창이 SGI 회장에게 보내졌다.
수여할 때, 회장은 늘 ‘귀국의 모범시민으로서 성실한 사회공헌을 관철하는 한국SGI의 벗과 영예를 서로 나누고 싶다’고 신념을 말했다.
두 번째 한국을 방문하고 나서 발표 한 ‘수필 신∙인간혁명’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멤버는 사랑하는 동포의 마음에 행복과 평화의 철학의 종자를 심으려고 용감하게 신념의 발걸음을 개시했다.”
“불법자(佛法者)로서 사회공헌을 위해 국토대청결운동과 농촌돕기운동, 자연보호 등의 활동에 끈기 있게 실천했다.
지금 멤버에 대한 신뢰와 칭찬의 꽃들이 이 지역 저 지역에 피어 향기를 내고 있다.”
“한국의 벗은 승리했다. 한국에 희망의 봄이 온 것이다.”
한국에 머문 지 3일째인 5월 16일에는 한국의 인도단체인 ‘밝은사회국제클럽’에서 가네코 여사에게 ‘에메랄드상’을 수여했고, 5월 17일에는 SGI 회장과 조영식 박사가 두 번째로 대담했다.
마지막 날(5월 18일)에는 서울 구로구에 잇는 한국SGI 본부를 처음 방문 했다. 이날 사제의 새로운 원점이 새겨졌다.
대은인의 나라
대문화 스승의 나라에
영광이여 있으라!
우리 한국의
불사(佛師 <子>)에게
행복 있으라!
서울 구로구에 있는 한국SGI 본부에는 이케다 SGI 회장이 쓴 시가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1998년 5월 18일, 처음 본부를 방문한 기념으로 SGI 회장이 벗에게 보낸 시다.
이날은 두 번째 한국 방문 마지막 날이었다. 오전에 SGI 회장은 동지가 기다리는 본부로 향했다.
오정해(중랑권 지역부인부장) 씨는 당시 무궁화반으로서 본부에 출동했다.
“정말 이케다 SGI 회장과 사모님이 오신다고 생각하니 감격스러워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SGI 회장이 처음 한국을 방문한 지 8년, 오정해 씨는 이날을 목표로 열심히 학회활동에 힘썼다. 지역중등부담당으로서 벗을 격려하고 회합에 평소보다 7배가 넘는 벗을 결집하기도 했다.
꿈에 그리던 스승과 만남을 새겼다. 오정해 씨는 이날을 원점으로 우인 열다섯명에게 불법(佛法)을 알리고 넓히며 아버지도 입회시켰다.
고난의 언덕도 있었다. 결혼하고 10년 뒤, 남편이 갑자기 직장을 잃었다. 부부가 제목을 부르고 학회활동에 힘쓰는 속에 남편은 전에 다니던 직장보다 더 좋은 조건의 회사에 취직했다.
현재 오정해 씨는 지역부인부장으로 청년을 육성하고자 힘쓰고 있다. 두 자녀도 한국SGI 음악대에 입단해 후계의 길을 걷고 있다.
◇
그 순간 떠나갈 듯한 갈채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눈물을 참으며 삼색기를 흔드는 벗, 동지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웃는 벗, SGI 회장의 차가 본부에 도착했다. 천천히 정문을 지나 환영하는 사람들 앞에 멈췄다.
당시 여자부였던 노진영(안양권 지부부인부장) 씨는 그 때의 상황을 기억한다.
“SGI 회장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감사합니다. 이렇게 올 수 있어서 정말로 기쁩니다’ 하고 거듭 말하고 한 사람 한사람을 바라보며 맨 앞줄에 있는 사람들과 악수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청년부에게는 ‘효도를 부탁합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노진영 씨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다. 날마다 ‘일가화락’을 기원했지만 실직하고서 술만 드시는 아버지가 견딜 수 없이 싫었다.
“이케다 SGI 회장이 ‘효도를 부탁합니다’ 하고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마주하는 일조차 피하려고 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SGI 회장과 만나 뒤, 노진영 씨는 바로 아버지와 대화했고, 아버지의 깊은 고독과 슬픔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뒤 아버지와 대화하는 시간을 늘리며 다정하게 다가갔다.
“가족의 진심이 전해져 7년 전에 아버지가 입회했습니다. 그 모습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그날 SGI 회장의 말씀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습니다.”
또 2001년 노진영 씨는 뇌출혈로 쓰러졌지만 후유증도 없이 완치되었다. 두 번의 커다란 체험으로 ‘기원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음은 없다’고 깊이 확신했다.
지금 노진영 씨는 지부부인부장으로 지역에 신뢰를 넓히고 있다. 아이들이 다녔던 유치원 원장도 포교했다.
◇
본부에 도착한 SGI 회장은 정원에 한국 국화(國花)인 무궁화를 심었다. ‘간디상’을 제막한 뒤, 한국의 번영과 동지의 행복을 기원하며 각지 대표와 근행회를 했다.
근행회가 끝나자 SGI 회장은 참석한 벗에게 깊이 인사했다. 맨 앞줄에 앉은 노신사를 단상으로 초청해 손을 잡고 환영했다.
“오늘은 임시 ‘회장’이 되어 주세요”
노신사는 초창기부터 오로지 광포를 위해 힘쓴 벗이었다. 신앙 때문에 부당하게 투옥된 적도 있다. 편견에 의한 비방과 중상도 많았다. 그러나 ‘학회의 정의는 흔들리지 않는다’ 하고 불퇴전의 신심을 관철했다.
당시, 방면남자부장으로서 그 자리에 있던 김남구(송파권 부지역장) 씨는 “이케다 SGI 회장은 우리의 노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다는 생각에 정말로 감동했습니다.” 하고 말한다.
스피치에서 SGI 회장은 규슈의 땅에 ‘한일우호의 비’를 건립하는 것 등을 제안했다. 기쁨과 찬동의 박수가 장내를 감쌌다.
그리고 한국의 동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있으면 일체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이 엄연히 증명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승리했습니다!”
“사회에 봉사하고 인간성을 넓힌다. 21세기의 불법 르네상스는 한국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나는 기쁩니다. 전 세계가 여러분을 찬탄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만나지 못한 분께 안부 잘 전해 주세요. 삼가 여러분께 최대의 경의를 표합니다. 부디 ‘즐거운 인생’을! ‘위대한 인생’을! ‘승리의 인생’을!
이때의 다정한 눈길은 지금도 김남구 씨의 가슴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1992년 부친을 병으로 잃고 다섯형제 중 장남으로서 가장 노릇을 했다. 필사적으로 집안을 지키면서도 버릴 수 없는 꿈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성악가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가족의 일도 있고 회사원을 계속 할지 꿈을 좇을 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SGI 회장의 ‘일체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말에 꿈을 향해 도전하자고 결의했다.
신심근본으로 노력을 거듭한 결과, 이듬해 1999년, 서울필하모닉 오페라합창단원으로 발탁되어 중국과 독일 그리고 일본 등에서 열린 해외공연에 약 90회 출연했다.
지난해부터는 클래식 공연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사무소의 대표를 맡아 예술문화의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그리고 부지역장으로서 홍교확대의 선두를 달린다.
◇
스피치를 마치고 본부를 뒤로 하는 SGI 회장을 현관 밖에서 많은 동지가 배웅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한국은 앞으로도 승리하겠습니다!” 손을 흔들며 벅찬 마음을 전하는 멤버.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SGI 회장은 “대단히 고맙습니다! “여러분을 잊지 않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하고 진심으로 답했다.
이날 오후 1시가지나 SGI 회장은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해 일본으로 향했다.
오사카에 도착한 뒤에도 회장의 격려는 계속되었다. 수많은 파랑을 딛고 당당한 광포의 길을 연 한국의 벗, 그 존귀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펜을 들었다.
한글을 섞어 네모진 두꺼운 종이에 이렇게 써서 보냈다.
“한국의 존경하는 동지 여러분에게 감사”
김인수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케다 SGI 회장이 써 주신 글을 볼 때마다 우리는 뜨거운 마음이 복받칩니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결의가 넘칩니다. SGI 회장은 우리 한국 동지를 격려하기 위해 이동하는 차 안이나 비행기 안에서도 한글을 연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지도자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소중히 하고 그 문화에 최대의 경의를 표해 주시는 SGI 회장의 따뜻한 격려가 있었기에 한국SGI는 오늘까지 ‘이체동심의 단결’로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사제의 만남을 새긴 지 16년, 한국의 평화와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스승의 신념은 지금, 많은 동지의 마음에 계승되어 인간주의의 연대로 크게 꽃피고 있다.
☞ 화광신문 제1079호(2014.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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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도 선생님게서 광선회관에 오셨을 때 앞에서 3번째에 앉아있었습니다. 가슴이 벅차고 스승님께 보은하겠다는 마음을 정했습니다. 화랑반 방면위원장으로 스승을 지켰다는 것이 아직도 가슴에 찡하게 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