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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새살로
植民主義史學 형성 배경과 과정
일본, 아시아 '지배'를 자국의 '책임'처럼 위장
Ⅰ. 머리말
한국 역사학계는 아직도 식민주의사학의 잔재를 말끔히 지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민족의 기원과 민족 문화의 원형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혼란을 겪고 있고 국사교과서에는 이에 대한 매우 모호한 내용이 실려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바르게 지도해야 할 관계 부서들은 침묵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청소년들의 올바른 자아의식 형성은 기대할 수 없다. 잘못된 역사인식 속에서 올바른 역사의식은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근대 학문으로서 한국사연구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먼저 이루어졌다.
한국은 19세기 후반부터 제국주의 형태의 일제 침략에 시달려야 했고 20세기 초에는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지배를 받아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일본인들은 자신의 침략행위와 지배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양한 논리를 개발하고 그것을 역사해석으로 뒷받침하려 하였다. 역사해석이 식민지 지배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연구는 출발부터 본질이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사료들이 인위적으로 인멸되었고 남겨진 사료들은 자의적 해석을 통해 희석·왜곡되었다. 그리고 이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역사논리로 체계화 한 것이 바로 식민주의사학이다. 따라서 식민주의사학은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영구화 할 목적 하에 한국 고유문화와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한국사의 원형을 왜곡하고 날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의 할퀴고 찢겨졌던 상처를 치유한다는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사 본래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서 식민주의사학의 극복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다. 그간 한국의 역사학계는 일제의 역사침략에 부단히 맞서 왔다. 그러나 초기 식민주의사학을 극복하려던 노력들은 논리상의 한계와 일제의 탄압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광복 이후 195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는 남북분단과 6·25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한일관계사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특히 역사학자들의 학문적 배경은 한국사를 바르게 정리하는데 큰 장애가 되었다. 일본의 조선사편수회 활동에 참여한 학자들이 광복 이후 한국 역사학계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국사교과서에서 그 잔영을 말끔히 지우지 못하고 있다. 늦었지만 자책하는 자세로 한국사의 왜곡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원형을 복원하고 새로운 한일관계를 설정해야 하겠다. 식민주의사학이 형성되는 배경과 과정에 대한 이해는 식민주의사학의 본질을 규명하고 그 잔영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선행돼야 한다. 따라서 필자는 식민주의사학 극복을 위한 문제제기 차원에서 이에 대한 선학들의 연구 성과들을 종합 정리하여 체계화 해보고자 한다.
Ⅱ. 일본의 한국인식과 침략논리
1. 막부 지식인들의 자아인식과 국학연구
근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 논리의 싹은 막부시대 일본 지식인들의 심화된 자아인식과 국수주의 역사인식으로부터 발아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임진왜란 이후 국제질서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서구 제국주의의 대외 팽창을 동경하고 이를 일본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모델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시아에 대한 멸시와 인접국가에 대한 침략이 약육강식의 국제질서 속에서 일본의 생존을 위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이를 합리화하는 논리로 역사학이 동원됨으로써 후일 식민주의사학으로 발전하여 체계화되고 있다. 일본은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중국 중심의 華夷秩序 속에서 外夷의 범주에 속해 있었다. 그러한 일본에서 자신의 동질성에 대한 탐구가 가속화된 것은 장기간의 戰國時代를 마감하고 오래 지속된 평화 속에서 문화의 동질화가 진행되던 에도 막부시대(1603~1867)였다. 이 시대 지식인들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즉 그 때까지 중국을 內로 봄으로써 일본을 外에 해당시켜왔던 전통적 화이질서를 부정하는 시각의 태동이었던 것이다.熊澤蕃山(구마자와 반잔: 1619~1691)은 일본이 중국에 비해 크기가 작고 시기가 뒤떨어졌을 뿐, 일본이 外인 이유가 부덕이거나 야만인 탓은 아니라는 시각을 제시함으로써 일본과 중국의 본질을 비교하였다. 이는 곧 중국과 대등하다는 일본의 자기인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일본 우위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九夷 안에서는 조선, 오끼나와(琉球), 일본이 가장 우수한데 그 삼국 중에서는 일본이 가장 빼어나다.… 四海 안에서는 일본에 버금가는 나라가 없다. 이것은 天照皇·神武帝의 덕이다.
이처럼 <일본서기>를 기준으로 하는 역사의식에 기초하여 중국 이외의 나라 중에서 일본이 가장 빼어나서 중국과 비교될 수 있다는 의식을 바탕에 깔고 조선은 일본보다 열등하다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뒤에 일본의 역사는 至高至善의 역사이며 이와 대비되는 중국의 역사는 무질서와 비정통의 표본으로 규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17~18세기 일본의 국학자 지식인들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일본 중심으로 다시 정의하면서 조선이란 한마디로 가여운 존재로 비하되었던 것이다.
山鹿素幸(야마가 소코: 1622~1685)은 일본 역사에서 단절 없는 日本王家의 대통은 일본이 중국보다 오히려 진정한 문명의 중심지 곧 중화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 했다. 따라서 일본·중국·조선 가운데 일본이 가장 우월하며 外朝인 중국은 조선보다는 나으므로 수호·선린의 상대가 될 수 있으나 조선은 자격미달이라는 주장을 폈다.
무릇 武勇함을 가지고 삼한을 평정하고, 本朝(일본)에 공물을 바치게 하고, 고려를 쳐서 그 王城을 함락시키고, 일본부를 異朝(조선)에 설치하여 그 무위를 사해에 빛나게 한 것은 上代에서 近代까지 일관해 온 일이다.
그들이 활약했던 17세기 후반은 막부권력이 확립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화폐경제의 발전이 武士생활의 궁핍으로 이어져 봉건체제의 내부 모순이 서서히 표면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일찍이 이러한 幕藩體制의 내부 모순을 감지한 그들이 상황극복을 위해서 <일본서기>에 기초한 조선 멸시관을 하나의 지적 담론으로 대두시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山鹿素行에 의하면 고대조선·신라·백제는 모두 일본의 藩臣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선린의 상대가 아닌 지배·복속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神功皇后의 조선정벌과 豊信秀吉의 조선정벌도 쉽게 합리화될 수 있었다.하나의 지적 담론으로 자리 잡은 국학자들의 국수주의 사상은 일본인들의 민족정신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지만 그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그르쳐서 극단의 조선 멸시관을 배태시켰다. 그리고 明治시대 이후 일본의 大韓帝國 병탄과 대륙침략 과정에서 이를 합리화하는 논리의 유력한 관념이 되었던 日鮮同祖論으로 이어졌다.
2. 西勢東漸에 대한 위기의식과 海防論
18세기 말 구미열강의 동양진출에 따른 위기감이 높아지자 조선 멸시관이 오히려 침략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소위 海防論이 그것이다. 처음 해방론을 주창한 林子平(하야시 시헤이: 1738~1793)은 1785년에 <三國通覽圖說>을 저술하여 조선을 북해도(蝦夷)·오키나와(琉球)와 더불어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을 지킬 방패막이로 자리 매김하고 국방상의 견지에서 조선을 연구할 것을 주창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침략론들은 19세기에 접어들어 구체화된 방책으로 발전되었다.海防이나 攘夷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본의 방어를 위해서는 열강의 침략에 앞서서 조선과 기타 여러 나라를 차지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佐藤信淵(사토오 노부히로: 1769~1850)은 <宇內混同秘策>속에서 “세계 만국 중에서 황국이 공략하기 쉬운 토지는 중국의 만주보다 쉬운 것은 없다. … 이미 韃靼(몽골)을 취득한다면 조선도 중국도 다음에 도모할 수 있다”고 하였다. 勝海舟(카츠 카이슈우: 1823~1899)는 유럽인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연합이 필요하며 그에 앞서 조선과 연합해야 하지만 조선이 일본의 요망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정벌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平野國臣(히라노 쿠니오미: 1828~1864)은 <回天管見策>에서 “우선 삼한을 치고 다시 府를 任那에 세워 이로써 다시금 先規를 회복하여 …”라고 하였다.吉田松陰(요시다 쇼인: 1830~1859)은 <幽囚錄>속에서 “조선을 책망하여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게 하여 옛날의 盛時와 같이 해야 한다. … 豊信秀吉이 조선을 伐함을 되풀이하여 … 북으로는 만주 땅을 끊고 남으로는 대만·필리핀(呂宋)을 거두며 더 나아가 진취의 기상을 보여야 한다.”고 하여 조선 정복을 시작으로 하는 ‘전방위침략론’을 역설하였다.
이들의 이념 속에는 조선이 본래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일본서기>식 역사 인식과 일본 국방상의 위기극복을 위한 정치 목적의 침략사상이 강하게 배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막부시대 국학자 지식인들의 이념과 논리가 막부 말 명치 초의 변혁과정에서 하나의 행동논리로서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 즉 이들의 세계관과 조선관이 새로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속에서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 제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명치정부가 출범하면서 정한론으로 표출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 지배논리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이는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극단의 결과를 초래한 위험한 사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明治維新과 征韓論
明治維新을 통해 정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하급 무사들이 누적된 일본의 국내문제를 밖에서 해결하려는 방책으로 구상된 것이 이른바 征韓論이라는 점에서 19세기 후반 일본의 국내정세는 한일관계를 규명하는데 간과할 수 없는 영향요소로 고려되어야 한다.1853년 6월 미국의 東印度艦隊 사령관 페리(M. C. Perry: 1794~1858)가 4척의 군함을 이끌고 三浦(미우라)반도의 浦賀(우라가)에 도착하여 미국의 국서를 수리하라고 요구한 이래 15년 간 일본 정국은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安政條約 체결을 위시한 막부의 독단과 尊王·攘夷 세력 탄압이 지사들의 분노를 촉발시켜 막부타도운동과 討幕戰爭으로 이어졌다. 이는 또 幕藩體制에 내재하였던 모순으로 인한 봉건제도의 몰락 및 해체와 맞물려 막부정권이 붕괴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막번체제의 대표적인 모순은 年貢米 總量의 증가에 따른 가혹한 농민생활의 피폐와 世襲身分制·封建割據制에 따른 문물의 정체 등 두 가지로 집약된다. 18세기 이후 쌀 생산고는 점감해 가는 추세였는데도 연공미 총량은 늘어만 갔다. 지배계급에 속하는 무사들이 생산·유통으로부터 유리되어 城下町에 모여 사는 소비 집단이 됨으로써 쌀을 지배기구의 재원으로 하는 봉건체제는 쌀 생산량이 점감하는 상황 하에서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냈고 이는 농민폭동을 유발시켰다. 이러한 모순을 직시한 山縣大貳(야마가타 다이니) 같은 사상가들은 막번체제 그 자체를 근본부터 변혁하려는 사상을 펴게 되었다.세습신분제는 신분차별을 통해 인간의 능력을 억압하고 유능한 인재등용을 저해하는 불합리한 것으로 막부를 정체시키는 한 요인이 되고 있었다. 또한 봉건 할거체제는 인접 번과의 교류를 외면함으로써 문물의 전파와 발달에 장애가 되었다.
명치정부는 이러한 막부체제의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새로운 조처들을 취하였는데 그 가운데 版籍奉還·廢藩置縣·藩兵解消 등은 정한론 대두의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처음 신정부가 성립되었을 때 각 번은 여전히 번주의 지배하에 있었고 번주들은 번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중앙정치에 강력한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유신정부는 번의 존재 때문에 내부적 통일이 깨질 것을 우려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長州(죠오슈)의 木戶孝允(키도 타카요시), 薩摩(사츠마)의 大久保利通(오오쿠보 요시미치), 土佐(토사)의 板垣退助(이타가키 타이스케) 등이 획책하여 1869년 2월 薩摩·長州·土佐·肥前 등 4번의 版(版圖: 領土)과 籍(戶籍: 領民)을 정부에 바치겠다고 上表하였다. 그리고 다른 번들도 이에 따랐다. 이를 版籍奉還이라 한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번을 없애고 번주를 藩知事로 임명함으로써 유신정부의 지방관을 삼았다. 이를 일러 廢藩置縣(藩을 없애고 3府 72縣의 府縣을 설치)이라 한다. 이로써 중앙집권체제가 되면서 번주의 정치적 발언권은 소멸되었다. 봉건적 주종관계가 해소된 것이다. 폐번치현은 무사계급에게는 심대한 타격이었다. 봉건제도 폐지과정에서 정치적 지도권을 상실한 40~50만에 이르는 무사계급의 처리가 심각한 정치·사회 문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1871년 이후 무사계급의 경제상의 궁핍이 이들의 지위보장 문제와 겹쳐서 이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협요소가 도사리고 있었다. 새로 출범하여 그 기초가 대단히 미약하였던 유신정부는 국내에서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을 찾지 못하고 밖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 대상으로 주목한 것이 조선이었다. 특히 지금까지 애국의 대상이었던 자기 나라 정부를 상대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보다는 밖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절실히 바라는 무사계층이 앞장서서 조선을 침략하고자 했고, 그 관념상의 지주로서 武士道精神을 표방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皇國史觀에 기초한 우월 민족주의로 무장되어 있던 무사들에게는 조선은 멸시의 대상에서 이제 당면문제를 해결해야할 침략의 대상으로 바뀌어 조선정벌은 불가피한 것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명치정부의 대한 외교정책은 이러한 일련의 배경 하에서 추진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조선 조정의 書契拒斥과 국교회복 거부는 침략명분을 찾지 못하고 있던 일본에게 좋은 구실이 되어 정한론으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사상은 일본의 국내 문제 해결의 연장선상에서 배태되고 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4. 脫亞論과 大東合邦論
제국주의 형태의 침략사상 태동은 막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식민주의사상체계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의 福澤諭吉(후꾸자와 유키치)의 脫亞論과 樽井藤吉(타루이 토우키치)의 大東合邦論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탈아론과 대동합방론은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 지식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시각의 전환과 일본에 대한 새로운 자아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명치개혁에 의해 전통사상의 권위가 붕괴되면서 오직 문명만이 인간 행동과 사상의 새로운 가치기준이라는 관점에서 서구식 개혁을 통한 일본의 문명화가 이들의 사상을 주도하였다.동양과 서양의 구분은 단순히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양을 지배하려는 서구제국주의 음모를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오리엔탈리즘도 동양을 지배하려는 서양의 권력의지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동양이란 의미가 야만으로 날조됨으로써 야만에 대한 문명의 지배가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서양에 대한 이러한 인식구도는 19세기 후반 일본의 아시아관 정립에 그대로 모방되었다. 오직 문명만이 인간 행동과 사상의 새로운 가치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문명의 원천이 서구였으므로 그것의 가치기준도 당연히 서구였다. 이처럼 당시 일본인들은 정치·경제·법률·교육·풍속에 이르기까지 서구식 개혁론을 주장하지 않는 분야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인식 속에서 일본이 선택한 것은 일본의 문명화·서구화를 통한 아시아의 지배였다. 즉 유럽이 선택한 방식 그대로 일본도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아시아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막부 말기 여러 차례 서구를 돌아볼 수 있었던 福澤諭吉은 문명수준을 기준으로 하여 국가를 文明國·半開國·野蠻國의 세 가지 틀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문명의 목적은 오로지 나라의 독립에 있으며 독립한 자는 타인의 독립을 도와야 한다는 입장에서 문명화된 일본이 未開 혹은 半開인 청과 조선의 문명화와 독립을 돕고 아시아를 지배할 책임이 있다고 하는 아시아지도론을 펴게 된다.福澤諭吉은 “서양 열강들은 다 기독교 국가이면서도…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국중심주의이다”고 지적하고 국가는 국가이익을 맨 먼저 추구해야 한다는 현실주의 입장에서 세계를 분석하였다.
그는 壬午軍亂에 이어 甲申政變이 실패로 돌아가자 개화파를 지원한 조선의 근대화정책이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아시아주의에서 탈 아시아주의로 선회하였다. 즉 인접국가에 대한 정책을 개조론에서 탈아론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의 탈아 구상은 결국 제국주의 실현의 구상이며 탈아 논리는 이를 위한 전쟁 정당화 논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탈아론은 바로 아시아부정·아시아지배 논리였다. 같은 시기에 大東合邦論을 주장한 樽井藤吉(타루이 토우키치)은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아시아 보전의 담당자로서 일본의 임무를 동종민족의 단결이라고 강조하였다.
즉 아시아 제 민족이 단결한다면 西勢東漸에 대한 방어가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우선 자주국 조선이 일본과 합방해야 하며, 老大國 청이 小利를 버리고 合縱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함으로써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을 막자는 논리였다.그가 구상한 연대 또는 일체화 방법은 合邦과 合縱이다. 합방은 민족 간 일체화의 논리이고 합종은 국가 간 연대화의 방법을 말한다. 그는 대동합방론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국민성과 지리 조건을 합방의 지배 조건으로, 당시의 국제정세를 합방의 필요(결정)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일본은 和를 귀하게 여기는 經國의 표본이다. 조선은 仁을 중시하는 정치원칙을 지닌 나라이다. 和는 物과 相合하며 仁은 物과 相同한다. 그러므로 양국 간의 친밀한 情은 본래부터 자연스레 나온다. … 日朝 양국은 그 땅이 脣齒의 관계이고, 그 勢는 수레의 두 바퀴이며, 情은 형제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義는 붕우에 비길만하다. … 저 백인들이 우리와 같은 황인종을 전멸시키려는 징후가 역력하다. … 그러나 이것에 대항해 이기는 길은 동종 인이 일치단결한 세력을 배양하는 길뿐이다.”
그가 주장하는 한·청·일 삼국의 협력방식은 동일하지 않았다. 즉 한일 간에는 합방이지만 청일 간에는 합종이었다. 다민족국가인 청과 합방할 경우 청국을 구성하고 있는 타타르족, 몽골족, 티베트족 등 소수민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여 사실상 청국의 해체를 의미하므로 청과 합방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것은 합방의 주체는 국가가 아닌 민족이었고 민족 상호간에는 자주·대등한 결합이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樽井藤吉의 주장은 환상이었고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1910년 6월 재간한 <대동합방론>의 재간 요지에서 “합방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때까지 숨겨왔던 침략 의도를 노골화하였다. 그는 과정과 방법만 달리 했을 뿐 일본의 아시아 맹주론과 동일한 목적과 결과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아시아의 희생을 전제로 한 일본의 아시아지배가 마치 아시아의 문명·개화를 위한 일본의 책임인 것처럼 위장되었다.
그래서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이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문명과 야만간의 전쟁인 것처럼 호도하면서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전개한 일본은 청일전쟁·러일전쟁·대한제국 보호국화·병탄 등 일련의 침략행위를 통해서 침략논리를 현실화시켜 나갔다. 일본의 이러한 침략논리는 한국병탄에서 멈추지 않고 만주사변·중일전쟁·아시아제국에 대한 침략의 정당화 논리로 확대되고 마침내는 대동아공영권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치논리에 접목된 일본의 皇國史觀
Ⅲ. 식민주의사학의 연원과 태동
1. 일본의 한국사 연구 배경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일본은 청국과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특히 서구세력의 동진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일본 정계에서 한국을 장악하지 못하면 아시아대륙의 패권을 장악할 수 없다는 논리에 공감대가 형성돼가고 있는 분위기였다. 이에 따라 일본 학계의 시선이 모두 한국에 집중되었다. 역사학뿐 아니라 언어·지리·법제 등 여러 부문에서 한국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한국사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19세기말 근대사학의 도입과 함께 일본의 한국사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면에서 시도되었다. 하나는 일본사의 연구를 위해서 한국사를 탐구하려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동양사의 일부로서 한국사를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전자는 일본의 국가기원과 역사 발전을 알기 위하여 한국사와의 관계를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이 일본의 한국침략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봉사함으로써 본래의 목적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후자는 역사학자들이 학문적 지조를 유지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객관성을 상실함으로써 한국고대사의 올바른 인식에 실패하였다. 이 시대 일본의 한국사연구의 일반적인 경향과 특징을 정리해 보면 첫째, 한국사연구가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편중되어 있다. 그것은 이 시기에 한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국학이 제기한 문제가 큰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둘째, 출발 당시는 실증주의·합리주의를 표방하면서 문헌고증을 통해 기존의 고대사해석을 비판하고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곧바로 정치논리에 묻혀버렸다.
이는 역사학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일본의 불행이었다 하겠다.셋째, 白鳥庫吉(시라토리 쿠라키치)의 경우 비교언어학적 연구를 통해 일본민족이 세계에 유래가 없는 독자적인 존재이며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발전했다는 ‘일본민족의 독자성’을 주장하였다. 이는 일선동조론과는 전혀 배치되는 이론이다. 넷째, 그들의 한국사연구는 국학의 전통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다. 이는 정치·사회 분위기가 전통 역사상을 타파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 정치논리에 접목된 역사논리 · 皇國史觀
일본인들이 침략 및 지배논리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정치논리에 접목시킨 최초의 역사논리가 황국사관이라 할 수 있다. 그 개념을 정리해 보면 일본민족은 天孫民族이며 萬世一系의 日王만이 일본의 통치자가 되고 일왕과 국민의 관계는 君臣關係인 동시에 父子關係라고 보는 역사상으로 요약된다.황국사관은 <일본서기>에 기초한 역사상이다.
<일본서기>는 일본의 古典 중 고대 한일관계사 해석의 기준이 되는 정사로서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식의 출발점이자 모든 침략논리의 근원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인들의 고대 한일관계사 해석의 진의와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서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日本書紀>는 720년에 완성된 관찬사서로서 일명 <日本紀>라고도 한다. 이 책은 일본의 <六國史> 가운데 최초의 기록으로서 神代부터 696년까지 다루고 있다. <일본서기>는 서문이나 발문이 없으며 편수 책임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志나 列傳도 없다. 編年體로 쓰여 진 이 책은 傳을 가미한 것이 섞여 있어서 다른 사서에 비해 손색이 많아 僞書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일본서기>의 古寫本에는 卜部家本 및 그 계통의 것과 卜部家에 속하지 않는 것 등 두 가지가 있다. <일본서기>는 크게 나누어 백제 본위의 기사와 일본 본위의 기사로 구분된다. 그런데 津田左右吉(츠다 소우키치)이 ‘<일본서기>에 있는 백제중심의 기사를 개정하지 못했던 것’을 한탄하였고, 末松保和(스에마츠 야스카즈)가 <일본서기>에 대하여 ‘求眞的 태도를 가지면 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게 된다.’고 한 실토에서 일본 역사학계가 일본 고대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얼마나 기피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일본 역사학자들은 일본 고대사 연구과정에서 예외 없이 한국 고대사를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이 일본에게는 최초의 외국이었으며, <일본서기>의 내용이 한국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 학자들이 한국고대사에 대하여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조작·전설이며 한국은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 두 나라의 식민지 내지 예속국이었다는 전제를 달고 있다는 점이다.<일본서기>를 체계 있게 해석하여 황국사관의 초석을 다지고 이를 침략논리로 발전시킨 장본인은 黑板勝美(쿠로이타 카츠미)이다. 그는 津田左右吉(츠다 소우키치)과 함께 일본 고대사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로서 명치시대부터 1945년까지 일본 고대사학계와 일본정부의 주장을 대변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의 전국 각지 名族舊家를 찾아가서 비장의 사료를 강탈하여 今西龍(이마니시 료우)과 함께 일본어판 조선사 간행을 기획·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황국사관에 입각한 역사, 또는 1910년 일제에 의한 한국의 국권침탈을 합리화하는 역사를 쓰기 위해서 고대조선과 단군 관련 기록들을 없애버린 장본인이다. 그가 설명하는 일본의 국가기원은 다음과 같다.
◦ 천조대신부터 국사를 시작해야 한다. 천조대신 이래 황통이 대대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경정 국사의 연구 총설, 1931).◦ 천조대신에 관한 기사는 전혀 신화라 하더라도 그러한 신화에는 일본국사의 서광이 바로 떠오르고 있다(경정 국사의 연구, 1932).◦ <일본서기>는 역대의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사의 명칭으로, 실로 「日本國體」의 존엄성을 뚜렷이 한다(훈독 일본서기의 서언, 1928).◦<일본서기>에는 武烈천황의 행적을 暴虐無道라고 평하고 있는데 … 일본의 역대천황은 국민을 사랑하고 아직도 포학한 천황은 없다. … <일본서기>의 기재는 어떤 오류이다. … 같은 시대의 백제 末太王의 사적이 잘못되어 <일본서기>의 본문에 들어왔다(경정 국사의 연구, 1932).
그는 神功皇后의 존재와 신라 정벌기사를 역사적 사실로 인식시키고, 推古 때 섭정을 지낸 聖德(쇼토쿠)태자의 공덕을 明治와 대비시켜 일본역사의 발전과 지속성을 강조함으로써 일본국민에게 크나큰 역사적 긍지를 심으려 하였다. 또 한국은 서기전 750~250년경에 중국의 식민지로부터 출발하였으며 중국세력의 쇠퇴로 인하여 처음으로 백제·고구려·신라 등의 국가들이 탄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국가형성에 대한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春秋戰國時代에 조선에 支那人이 와서 식민지를 만들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일어난 것은 지나의 세력이 쇠퇴하여 비로소 조선 민족 속의 문화가 앞선 자가 세력을 얻음으로 가능했다(<조선의 역사적 고찰>, 1921).
◦일본은 문자가 발달한 중국과 직접·간접으로 교통하였다(<경정 국사의 연구 총설>, 1931, p.50).
◦일본과 지나와의 교통은 백제를 중개로 하여 행해졌다(<경정 국사의 연구>, 1932, p.76).
◦백제는 고구려의 압박에서 피하려고 일본국에 의지하고, 일본국은 백제에 의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막으려고 가능한 한 백제를 보호하였다.(<경정 국사의 연구>, 1932, pp.58~59, p.74.)
◦일본은 정치적으로 한반도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임나에 일본부를 두어 國司를 임명하고, 일이 있으면 장군을 파견하였다(앞의 책, p.57).
◦오늘날의 진해만은 일본군 후방연락요지이며, 낙동강은 전방방어요지였고, 김해와 함안은 일본부의 소재지였다(앞의 책, pp.75~76).
◦임나는 垂仁시대부터 雄略시대를 지나 欽名시대까지 존속하다가 망하였다. 天智(서기662671년)는 드디어 한국을 포기하였다(<경정 국사의 연구 총설>, p.444).
黑板勝美의 <일본서기>에 대한 해석은 이후 황국사관으로 확립되어 일본 역사학계의 성경으로 정착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고 지배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행위가 마치 역사의 복원인 것처럼 정당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다.
3. 한국고대사 기년 조작
한국 고대사의 紀年을 황국사관에 입각하여 끌어내린 학자는 太田亮(오오타 아키라)이다. 그는 <삼국사기>의 백제사는 180년 연장되었고, 신라사는 240년 연장되었으며, 그 연대와 기재는 조작이고 허구이어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하여 한국 고전의 사료 가치를 일체 부정하였다. 또 神功皇后는 역사 속 존재이지만 <일본서기> 편자가 神功皇后를 단지 중국사서에 나오는 卑彌呼(히미꼬)에 맞추기 위하여 사실보다 120년 소급시킨 착오를 저질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의 왜와 가야는 모두 일본을 뜻한다. 따라서 신라와 왜의 교섭과 마찬가지로 신라와 가야의 교섭도 신라와 일본과의 교섭을 뜻한다.
◦백제왕의 肖古王과 近肖古王, 仇首王과 近仇首王은 동일인이고, 그 가운데 하나는 허구에 불과하다.
◦신라의 역사가가 자국의 건국을 수위에 놓으려고 신라는 波沙尼師今까지 干支 4運 240년을, 백제는 肖古王까지 간지 3運 180년을 연장하였다.
◦근초고왕(13대) 이전 백제왕의 재위 년 수는 전부 허구이고, 180년 연장·조작되었다.
◦신라 상대 왕 중 가야와 관계가 있는 왕들(婆娑·祗摩·奈解)은 확실한 왕이다.
◦朴赫居世의 60년은 허수이고, 4대 脫解가 신라의 시조이다.
◦<일본서기> 神功紀·應神紀의 백제관계 기사는 모두 120년 소급되어 있다.
◦<일본서기>의 작자는 여왕 卑彌呼의 시대가 神功皇后보다 干支二運, 즉 120년 전임을 알고 신공황후를 卑彌呼에 맞추기 위하여 응신의 태세인 己未年을 사실보다 120년 소급시켰다.
대부분의 일본인 역사학자들이 <일본서기>를 僞書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太田亮은 기년과 연대가 연장되거나 소급된 것을 제외하면 그 속에 역사적 진실이 내포되어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반면에 <삼국사기>의 기록은 조작과 허구여서 도저히 신용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와 같은 역사상을 담고 있는 그의 저술들이 朝鮮史編修會가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논리를 역사학적 측면에서 체계화하고, <조선사> 편찬사업을 한창 추진하던 시기에 나왔다는 점이다.
4. 일본 고전연구의 한계와 고민
일본고대사는 한국고대사와 분리하면 성립되지 않는다는데 일본 역사학자들의 고민이 있다. 한국의 역사를 논하지 않고는 일본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일본 쪽에서 보는 한국사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일본인에 의한 한국고대사 연구는 바로 일본고대사 연구의 일부가 된다. 근대사학이 도입된 이후 일본의 역사학계에도 일본 고전을 객관적으로 비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津田左右吉(츠다 소우키치)은 <일본서기>는 일왕과 일본국가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의도를 가진 일종의 문학적 작품으로서 장기간에 걸쳐 여러 사람에 의해서 여러 차례 變改·潤色·添削·修飾이 가해졌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그의 사학연구는 「津田史學」또는 「津田思想史學」으로까지 불려 질 정도로 명치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고대사 연구 분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시도는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에 함몰되고 말았다. 津田左右吉은 <일본서기>가 조작되었다고 하면서도 일본 고대사학자 가운데서 가장 일본고대사의 진실을 은폐하고 지능적으로 조작하여 한국사 왜곡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는 후에 그가 비판해 왔던 官學派 국사학자들과 다를 바 없는 입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가 조작되었지만 그것에 나타난 사상·풍속은 그 시대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며, 이것은 무상의 가치를 가지는 일대 寶典으로서 하나의 설화가 실제의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가치를 감소시키지 않는다(「지나사상의 연구」 <츠다(津田左右吉)전집> 28권, 1966, p.498).
◦<고사기> <일본서기>의 기록은 사실이 아닌 설화가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특수한 가치가 있으며, 그것은 실제상의 사실은 아니지만 사상 상의 사실 또는 심리상의 사실이다(「지나사상의 연구」, p.201).
◦<삼국사기>의 상대에 관한 기재는 역사적 사실로서 믿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며, 특히 新羅本紀가 후대까지 허구의 기사로 차 있는 것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치 않을 것이다(「滿鮮歷史地理硏究」 <津田左右吉全集> 11권, 1964, p.127).
◦<일본서기>에 보이는 백제왕의 이름이나 그 계보와 卽位·薨去의 기년 등은 모두 <삼국사기>보다 옳다(<일본고전의 연구> 하, 1972, p.591).
◦「歸化人」이 다수의 민중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왔다는 것은 백제의 형태로 보나 일본의 그 후의 상태로 보나 있을 수 없다(「역사학과 역사교육」 <津田左右吉全集> 20권, 1965, p.559).
◦神功皇后의 신라정벌은 상대에 있어서의 저명한 사실로서 일본의 대한정책은 이로부터 활동의 시작이 전개되며, 임나일본부의 기초도 이것에 의하여 굳건해진다(위의 「만선력사지리연구」, p127).
◦백제의 멸망은 일본의 韓地 경략의 실패를 뜻한다(위의 「역사학과 역사교육」, p.579).
◦<일본서기>의 기재 가운데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인정되는 것은 전부 백제의 사적에서 나왔다(<일본고전의 연구> 하, 1972, pp.176~177).
津田左右吉이 황국사관의 틀을 전혀 벗어나지 못한 채 한국침략 및 지배논리 옹호자로 변신한 것은 당시의 정치·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으며 이것이 일본 역사학계의 한계였다. 따라서 津田史學 또는 津田思想史學이라 불리는 그의 역사연구는 皇國史觀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식민주의사학의 체계화
Ⅳ. 식민주의사학의 체계화
1.『조선반도사』편찬 추진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병탄하여 식민지지배에 들어간 일제는 식민통치의 안정을 위해서는 지배논리를 체계화하고 이를 한국인의 의식 속에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병탄 직후부터 지배논리 체계화와 이를 전파·확산시키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식민주의사서의 편찬과 식민주의사학의 정립, 그리고 이와 병행한 식민지교육이었다.
초대총독 寺內正毅(테라우치 마사타케:1910. 8~1916. 10)는 부임하자마자 舊慣制度調査와 史料調査에 착수하는 한편『조선반도사』편찬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는 후임 총독들에 의해『조선사』편찬사업으로 이어졌다. '朝鮮史' 편찬사업은 寺內正毅가 추진한 '조선반도사' 편찬부터 1937년 '조선사'35권이 완성되고 1938년 3월 사업이 종료될 때까지 23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되었다. 그들은 왜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방대한 사업을 추진하였을까. 다음의 '조선반도사' 편찬요지에 그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야만 미개의 민족과 달라 독서 屬文에 있어서 결코 문명인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고래로부터 사서가 많고, 또한 새로이 저작한 것도 적지 않다. … 이와 같은 사적들이 인심을 고혹케 하는 해독은 참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이와 같은 사적들의 絶滅을 강구한다는 것도 徒勞일 뿐 아무런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같은 사적의 전파를 격려하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라리 舊史를 禁壓하는 대신에 公明的確한 사서를 만드는 것이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가 새롭게 현저할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새로운 사서를 편찬하지 않는다면 조선인은 함부로 합병과 관련이 없는 사서, 또는 합병을 저주하는 서적을 읽을 뿐이며, 이리하여 풀이 무성하여지듯이 몇 해를 지나면 언제나 눈앞에 보던 습성에 젖어 오늘날의 밝은 세상이 합병의 은혜에 기인된다는 것을 망각하고 함부로 구태를 회상하고 도리어 개진의 기력을 상실할 우려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된다면 어떻게 동화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
한국인이 함부로 독립국의 옛 꿈을 갖지 못하게 하여 선량한 제국의 신민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동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조선반도사'를 편찬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시작하여 1937년에 완성된 '조선사'35권은 막부 말 국학자·해방론자들의 한국인식, 명치시대의 한국 침략논리, 일본 근대사학 성립 이후의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자의적 해석 등이 종합되어 소위 식민주의사학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그리고 이후 '조선사'는 근대사학의 입장에서 편찬된 최초의 한국 역사 사료집으로서 한·일 양국의 부정적 한국사상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인의 자아형성에 커다란 해악으로 작용하여 왔다. 따라서 한국인이 독립의 꿈을 버리고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순응케 할 목적으로 편찬된 '조선사'는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마땅히 그 시효가 마감되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아직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한일관계 악화의 불씨가 되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에 대한 세계인의 잘못된 인식의 기초가 되고 있다.일제는 조선의 관습과 제도조사라는 명목으로 1910년 11월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그들이 지목한 불온서적 압수에 나섰다. 서울에서는 종로일대 서점을 샅샅이 뒤졌고, 지방에서는 서점·향교·서원·班家(兩班家)·勢家(勢道家)를 뒤졌다. 압수대상 서적은 단군에 관한 기록을 포함한 조선 고사서·조선지리·애국충정을 고취하는 위인전기·열전류 등이었고 '미국의 독립사', 張志淵의 '大韓新地誌', 李埰丙의 '애국정신', 申采浩의 '을지문덕' 등이 집중적인 수난을 받았다. 총독부 취조국은 자신들의 한국지배에 필요한 일부 서적만을 남기고 모두 불에 태워버렸다.
寺內正毅는 총독부 취조국에 이어 참사관실이 관장하던 관습·제도조사업무를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반도사' 편찬을 담당시켰다. 1916년 중추원 소속 한국인과 동경·경도제국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편찬체제를 정비하고, 같은 해 7월에 「朝鮮半島史編纂要旨」를 발표하였다. 이 요지에서 일제는 편찬사업이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임을 분명히 하고 편찬의 주안점은
첫째, 日本人과 朝鮮人이 동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것과
둘째, 상고에서 조선(李朝로 표현)에 이르는 群雄의 興亡起伏과 역대의 革命易姓에 의하여 衆民이 점차 疲憊하게 되고 貧弱에 빠지는 실황을 서술해서 今代에 이르러 聖世의 혜택에 의해서 비로소 인생의 행복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술할 것 등에 두었다. 편찬을 맡은 학자들에게 내린 편사지침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반도사'는 편년체로 한다.
② 전편을 上古三韓, 삼국, 통일 후의 신라, 고려, 조선, 조선최근사의 6편으로 한다.
③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 사설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위의 지침에서 ①항은 사서편찬의 골격과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 지침은 후일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편수강령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한국사에 대한 지식이 적은 일인 학자들로서는 특수 분야에 대한 고도의 전문지식을 요하는 紀傳體로는 편찬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며 사료가 방대한 한국사를 紀事本末體나 綱目體로 힘들게 편찬하는 것보다는 이미 編年體史書로 편찬되어 있는 王朝實錄이나 承政院日記 등 기존의 기본사료로 재구성하는 것이 용이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사에서 상고사를 부정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겠다. 특히 단군과 관련된 기록들을 철저히 수집하여 불태운 후 이러한 기록을 요구하는 한국인들의 주문을 회피하는 데는 역사적 사실의 발생 연도가 확실해야 하는 편년체가 가장 적합하였기 때문이었다.
②항은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한민족의 발전역량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각 시기마다 외세에 의한 지배의 역사를 강조함으로써 한민족은 스스로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인 것처럼 호도하려는 것이었다. 상고 삼한을 설정한 후 여기서 고대조선을 완전히 삭제하고 원시시대로 구분하여 한국사가 漢의 지배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왜곡하였다. 삼국시대 속에는 삼국 및 加羅시대라는 항목을 설정하고 ‘일본의 保證時代’라는 부제까지 붙여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강하게 부각시켰다. 특히 ‘三國’이라는 용어를 부각시켜 삼국 이외의 영역국가들을 부정하였고, 통일신라를 강조하여 발해를 우리 역사에서 제외시켰다. 또 조선 최근사 하한을 ‘일본보호정치시대’로 이름 붙여 사서의 편찬 의도가 병탄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임을 노골화 하였다.
③항의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史話·史說 등을 일체 무시하라는 지침은 한국의 역사에서 일본의 국가기원보다 앞서는 부분을 삭제하겠다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부대사업으로 '朝鮮人名彙考'와 '日韓同源史'의 편찬에도 착수하였다.조선총독부는 중추원을 앞세워 다시 전국에 걸친 사료수색을 감행하였다. 수많은 인원과 비용을 들여 수색·압수·불태웠지만 사료는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것이 계속 발견되어 1918년까지 오로지 사료수집에만 매달려야 했다. 따라서 일제는 사료수색을 계속사업으로 연장하고 1919년부터 본격 편찬사업에 들어가려는 과정에서 3·1운동이 발발함으로써 중단되었다.
2. 조선사편수회 설치와『조선사』편찬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齋藤實(사이토 마코토)은 1922년 12월 훈령 제64호 「朝鮮史編纂委員會規程」을 제정·공포하여 새롭게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有吉忠一(아리요시 츄우이치)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는 15인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李完用, 朴泳孝, 權重顯 등이 고문이 되고 長野幹(나가노 칸), 小田幹治郞(오다 칸치로우), 今西龍(이마니시 료우), 稻葉岩吉(이나바 이와키치), 松井等(마츠이 토우), 栢原昌三(카시와바라 쇼우조우) 등 일본인과 鄭萬朝, 劉猛, 魚允迪, 李能和 등 한국인을 위원으로 위촉하였다. 黑板勝美(쿠로이타 카츠미), 三浦周行(미우라 히로유키) 등은 지도고문이 되었다. 뒤에 內藤虎次郞(나이토우 토라지로우)이 지도고문으로 추가되었다.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에 의하면 內鮮의 역사 전문가를 위촉하여 수사사업을 개시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1923년 1월 8일 총독 齋藤實과 정무총감 有吉忠一이 임석한 가운데 黑板勝美의 사회로 제1차 위원회를 개최하여 「편찬강령」을 결정하고 다음과 같이 한국사의 시대를 구분하였다.제1편 삼국이전제2편 삼국시대제3편 신라시대제4편 고려시대제5편 조선시대 전기제6편 조선시대 중기제7편 조선시대 후기여기서 1916년 1월 '조선반도사' 편찬사업 착수당시에 설정하였던 시대구분 중 ‘상고 삼한’을 단순히 ‘삼국이전’이라는 제목으로 묶어 놓았다.
이는 한국 상고사를 부정하려는 의도라 하겠다. 한국인 학자들이 외면하여 조선사편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齋藤實은 조선사편찬위원회 명칭을 ‘조선사편수회’로 개칭하는 한편 근거법령의 격을 높여 1925년 6월 일왕 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공포함으로써 조선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이어서 7월에는 진용을 개편하였다.
고문에 李完用(후작), 權重顯(자작), 朴泳孝(후작), 李允用(남작), 服部宇之吉(핫토리 우노키치), 黑板勝美(쿠로이타 카츠미), 內藤虎次郞(나이토우 토라지로우), 山田三良(야마다 사부로우), 速水滉(하야미 히로시) 등을 위촉하고 현직 정무총감이 실무를 총 지휘케 하였다. 그리고 경무국을 동원하여 위협·공갈·매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인 사학자들에 대한 포섭공작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확대 개편된 조선사편수회에 한국인은 앞에서 열거한 고문 외에 李軫鎬, 劉猛, 魚允迪, 李能和, 李秉韶, 尹甯求, 金東準, 洪熹, 玄陽燮 등이 편성되었다.조선사편수회는 사무소를 총독부 중추원에 두고 1925년 8월 1일 1차 위원회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조선사편찬위원회가 1923년에 결의한 시대구분을 다시 조정하여 제1편 ‘삼국이전’을 ‘신라통일 이전’으로 끌어내리고, 2편을 통일신라시대, 3편을 고려시대, 4편을 조선시대 전기, 5편을 조선시대 중기, 6편을 조선시대 후기로 편성함으로써 7편에서 6편으로 줄인 것이다.특히 편수를 줄여 ‘삼국이전’과 ‘삼국시대’를 ‘신라통일 이전’으로 묶은 것은 서기 7세기 이전의 한국 고대사 상한 연대를 끌어내려 종래 일본 역사학계에서 주장하였던 대로 한국의 고대국가 출발을 3~4세기에 맞추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영토 지배뿐만 아니라 민족까지도 일본에 동화시키려 하였던 일본인들에게는 그들의 역사보다 무려 1700년 이상 앞서 있는 한국의 상고사를 없애는 것이 매우 중요한 당면과제였기 때문이었다. 또 神功皇后 삼한정벌과 임나일본부 한국지배설도 조선사 편찬을 통해 사실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조선사편찬 실무를 맡았던 사람들은 일본인으로는 今西龍(이마니시 료우), 末松保和(스에마츠 야스카즈), 稻葉岩吉(이나바 이와키치), 鶴見立吉(츠루미 류우키치) 등 20여 명이었고 한국인 학자는 1927년에 포섭된 李丙燾(修史官補), 1928년에 포섭된 申奭鎬(修史官)를 포함하여 洪熹, 具瓚書, 趙漢稷, 李能和 등이 실무에 참여하였다. 崔南善은 널리 알려진 인물임을 감안하여 일본내각에서 결의한 임명장을 받고 1928년 12월 20일 마지막으로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조선사'가 완간될 때까지 시대구분 문제를 놓고 지속적으로 일본인 학자들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한국의 상고사 삭제를 막아보려고 노력하지만 일본인 중심으로 진행되는 편찬사업에서 실효를 거두기에는 역부족이었다.'조선사' 편찬 과정에서 그들은 舊奎章閣藏書, 李王職도서관과 총독부 도서관 소장도서, '조선반도사' 편찬당시 중추원에서 수집한 도서 외에 1922년부터 인원과 예산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출장, 조사하고 1926년에는 史料採訪內規까지 작성하여 한국 전역은 물론 일본과 만주에 이르기까지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 결과 1938년 3월 현재로 연 출장일수 2,800일, 수집된 사료 4,950책, 사진 4,511매, 文鎭·畵像·扁額類 453점 등 막대한 량의 자료가 수집되었다. 그 외에도 黑板勝美의 주선으로 그때까지 구입한 것은 古文書類 61,469매, 古記錄類 3,576책, 古地圖類 34매, 古畵類 18권을 포함한 53매 등이었다. 이렇게 수집된 사료는 複本類作成凡例를 제정, 중요한 사료는 등사하여 복본을 작성하였다가 편찬 자료로 삼았는데 1938년까지 그 수가 1,623책에 달했다.'조선사' 편찬은 1차 편찬위원회에서 10개년 계획을 세워 1931년에 완성할 계획이었으나 관동대지진(1923) 때문에 2년 연장하여 1933년에 완성하기로 수정하였다.
1925년 6월에 관제를 개편하면서도 예정된 기간 안에 사업을 완료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중요한 사료가 더욱 많이 발견되고 편찬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자 부득이 1년을 연장하였다가 편수회의 희망에 따라 1년을 추가 연장하여 1935년에 완성할 계획을 세웠다. 그 후 사료가 더욱 불어나서 당초 예정한 것보다 5책 5권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다시 2년을 추가 연장하여 1937년에야 겨우 완성하였다.
분량 면에서 최초 계획은 조선사 30권(약 500쪽×30권=15,000쪽)을 완성할 예정이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16년이 걸려서 '조선사' 35권(2만4천 쪽)과 '朝鮮史料叢刊' 20종, '朝鮮史料集眞' 3질을 편찬하여 1938년 3월에 모든 사업을 완료하였다. 인쇄는 원본과 대조, 교정하는데 편리한 점을 고려하여 서울에 있는 조선인쇄주식회사에서 1931년부터 1937년까지 '조선사' 35책을 인쇄하고 '조선사료총간'과 '조선사료집진'은 다른 인쇄소에 맡겨 인쇄하였다.'조선사' 간행 목적은 이를 널리 세상에 유포시켜 과거 ‘그릇된 관념을 바로잡고(독립의지와 저항의식을 없애고-필자 주), 올바른 지식(왜곡된 역사지식-필자 주)을 얻게 하는데’ 있는 것이므로 이 책의 반포에는 특별히 신경을 써서 인쇄회사로 하여금 염가로 판매하도록 하였다.
또 편수회로부터 직접 배포하는 경우에는 주로 도서관, 학교, 한국사 연구자 등에 한하여 널리 일반에게 이용되도록 하는 방도를 강구하였다.편찬과정에서 심의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위원회의 심의를 생략하고 주로 稻葉岩吉, 洪熹, 中村榮孝 등 3인의 수사관과 촉탁 今西龍 등 4인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으로 되어 있으며 문체는 일본문으로, 편사체제는 편년체로 쓰여 졌다.
3. '조선사' 35권의 성격과 해악
한국의 역사학계와 한국인의 역사인식에 미친 '조선사' 35권의 해악은 실로 심대하다. 따라서 한국사를 바르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이를 극복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그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첫째, '조선사' 35권은 식민주의사관을 조장하는 사료집이다. 이 서적은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때문에 '조선사' 35권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사상은 식민주의사관이다. 식민주의사관은 한국의 역사를 정치·문화면에서의 타율성, 사회·경제면에서의 정체성에 입각하여 보려는 주체성이 결여된 역사관이다. 이 역사관은 한국인에게는 자아를 상실케 하여 민족 고유의 진취적 기상을 무디게 하고 소아 이기주의에 안주케 한다. 또 일본민족에게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볼 능력을 상실케 하여 우월 민족주의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위험한 사관이다.
일본민족이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둘째, '조선사' 35권은 역사의 진실이 심하게 왜곡된 역사서이다. 원래 '일본서기'가 율령국가체제를 확립하면서 일왕중심의 지배체제를 굳히기 위하여 조작·윤색·개변된 역사서임은 일본의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조선사'를 '일본서기'에 맞추기 위하여 한국사의 상한연대를 고의로 끌어내려 조작하였다는 사실은 시대구분 수정과정이 말해주고 있다. 그 결과 '조선사' 35권은 한국민족의 기원에 대해 혼란을 조성하여 정체성을 상실케 하고 있다. 특히 삼국이라는 용어를 강조하여 한국 고대국가들 중에서 삼국 이외의 영역국가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또 삼국이 모두 3~4세기에 가서야 고대국가체제를 갖춘 것으로 되어 있다.
한국에는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가 없었던 것으로 서술하여 마치 한국민족이 신석기시대에 외부로부터 이주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셋째, '조선사' 35권은 한국의 역사를 수록한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사서로 볼 수 없는 역사서이다. 왜냐하면 '조선사'는 오직 일본의 식민지지배정책을 뒷받침하도록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사편수회에 한국인들이 참여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친일 정치인들이거나 일본인들에게 포섭된 학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역할은 일본인들에 의해서 철저히 무시되거나 배제되었다. 따라서 이 서적으로는 한국인의 올바른 옛 모습을 비춰볼 수 없다.
넷째, '조선사' 35권은 한국을 세계적으로 악선전하는 문서이다. 일제는 이 책을 제작하여 자기들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선전하는데 이용하였다. 그 결과 세계 각국은 한국이 유구한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역사가 시작되면서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아 온 민족, 한국의 역대 왕은 중국이 임명하였고,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최근에 독립한 신생독립국 정도로 인식하여 이를 역사교과서에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조선사' 35권이 끼친 해악이다.
식민주의사학의 논리체계
Ⅴ.식민주의사학의 논리체계
1. 식민주의사관과 식민주의사학의 개념
일본은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는 식민지지배정책을 한국에서 시행한 나라다. 일제의 모든 정책과 논리들은 한국과 한국인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지배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을 영구히, 그리고 완전하게 지배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일제가 추구한 정책의 기조는 한국인의 민족성과 민족의식을 제거하여 민족문화를 말살하는데 지향되고 있음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논리체계가 식민주의사학으로 정리되었다. 따라서 식민주의사학은 근대 한일 간의 역사적 성격을 특징짓는 용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李基白은 “식민주의사관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된 韓國史觀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은 한국민족의 자주정신·독립정신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짜여 진 것이었다. 한국사회의 객관적 진리를 존중하기보다는 현실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것이었다.”고 정의하고 있다.위의 정의를 정리해보면
① 일제의 ②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③ 왜곡된 한국사관이 식민주의사관이라는 것이다.
①은 식민주의사관이 제국주의시대의 일본인들 시각에서 보는 역사관이라는 의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인이나 지금의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이 한국에 대해 식민지지배를 하고 있을 당시의 일본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②는 식민주의사관이 왜 나왔느냐 하는 배경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일본인들이 식민주의사관을 체계화한 목적을 말하는 것으로서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임으로 순수한 역사관으로는 볼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③은 왜곡된 한국사관이다. 진실이 왜곡되지 않은 것은 식민주의사관이 아니다. 그리고 식민주의사관은 한국사를 보는 관점이다. 일본사를 보는 관점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것은 황국사관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이처럼 일제가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사를 왜곡하여 해석하는 관점이 식민주의사관이고 이를 체계화한 논리체계가 식민주의사학이다. 따라서 식민주의사학은 한국 역사에서 타율성과 정체성을 과장하여 부각시키고 주체성과 진취성을 폄하하여 한국 역사발전의 독자성을 부정하는 것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식민주의사학의 핵심논리로, 일선동조론과 임나일본부설을 배경논리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핵심 논리他律性論
식민주의사학의 핵심 논리는 他律性論과 停滯性論이다. 이중 타율성론은 한마디로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한국민족 스스로의 역량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세의 간섭과 영향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하는 관점이다. 즉 한국의 수천 년 역사는 북쪽의 중국·몽골·만주와 남쪽의 일본 등 이웃한 외세의 침략과 영향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는 것이다. 일제는 이를 설득력 있는 역사이론으로 정당화하기 위하여 한국사에서 보이는 타율성 요소들을 뽑아내어 그것을 한국사 주류로 서술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반면 한국사에서의 자주성을 애써 지우거나 축소시켰다.
특히 고대사는 태고로부터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부터, 남쪽은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시작된 모습으로 정리되었다. 즉 북쪽은 箕子·衛滿·漢四郡 등 중국세력이 지배하였고 남쪽은 神功皇后의 삼한정벌을 전후하여 수세기간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하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안출해 냈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비단 고대사뿐 아니라 그 이후까지도 확대 적용하여 한국사에 있어서 외세의 역할을 강조하고 그 외세에 의하여 타율의 역사가 강요되었다는 논리로 정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만선사관과 반도적성격론이다.
만선사는 중국사연구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주장하였고 그 중에서도 白鳥庫吉(시라토리 쿠라키치)과 稻葉岩吉(이나바 이와키치)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白鳥庫吉은 滿鐵 내 朝鮮地理歷史調査室을 통해 만선사 성립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한국사 연구에서 출발하여 1890년대 후반에 연구대상을 만주사·몽골사·서역사·중국사로 옮겼고, 林泰輔(하야시 타이스케)도 甲骨文字 연구로 중국학에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白鳥는 만철 총재 後藤新平(고토우 신뻬이)를 설득하여 1908년 만철 동경지사 내에 조선지리역사조사실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서 한국과 만주 경영에 필요한 많은 학문적 연구가 쏟아져 나왔다.稻葉岩吉은 「만선사체계의 재인식」(1935년)에서 조선에서 발생한 큰 역사적 사건은 모두 대륙 정국의 반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만선사관에 의해 형성된 이러한 역사인식체계는 식민주의사관의 핵심적인 논리 중 하나인 타율성론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경제·문화 등 일체가 외래 세력이 압도하는 영향 하에 이룩되어 한국 독자의 것은 없다는 논리로 발전하였다.
이는 한국인에게는 자주성이 없다는 사고의 논거가 되었던 것이다.만선사관과는 다른 입장에서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력하게 내세운 논리가 반도적성격론이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지배 현상을 숙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저항의지를 포기케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논리이다. 이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는 三品彰英(미지나 쇼우에이)이다. 그는 '朝鮮史槪說'(홍문당, 동경, 1940) 서설에서 ‘조선사의 타율성’이란 제하에 한국사의 성격을 附隨性·周邊性·多隣性으로 규정하였다. 즉 한국사의 최대 형성 요인이 반도라고 하는 지리적 조건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에 가까이 부수된 이 반도는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반드시 대륙에서 일어난 변동의 여파를 입음과 동시에, 또한 주변적 위치 때문에 항상 그 본류로부터는 벗어나 있다. … 또 이같이 주변적임과 동시에 다린적이었던 조선 반도의 역사에 있어서는 이 두 개의 반대 작용이, 혹은 동시에 혹은 단독으로 미쳐서 아주 복잡다기한 양상마저 나오게 하고, 동양사의 본류로부터는 벗어나 있으면서, 항상 1개 내지는 그 이상 세력의 여파가 폭주적으로 미치고, 때로는 2개 이상 세력과의 항쟁에 시달리고, 때로는 하나의 압도적 세력에 지배되었거나 했다. … 발전이라고 하는 사적 관념에 의해서 조선사를 이해하고 논하려 할 때 우리는 여기에 변증법적 역사발전의 족적이 심히 결핍하고 있음을 감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또 반도적 성격은 대외 투쟁 관계뿐만 아니라 외교관계·국내정치·문화면에서도 나타나 소위 事大主義라고 하는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외교관계에 있어서 사대주의가 기본이념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일 의존하고 있던 隣邦세력에 변동이 생기면 그것이 곧 국내 정치세력에 영향을 미쳐 政爭이 나타나고 史的 전환의 중대 시기가 되는 바 한국사에 나타난 親明派·親淸派·親日派·親露派 등이 그 예라는 것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사의 타율성 요소는 문화 창조 면에서도 나타나 한국의 문화는 종주국의 것을 모방한 것 외에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한국사에서 자주성을 부정한 후 어차피 누군가에 의해서 지배를 받아야 한다면 핏줄이 가장 가깝고 온정적인 일본의 품에 안기는 것이 한국 본연의 재출발을 가능케 하여 반도라는 지리상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되지 않겠느냐는 논리로 그들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하려 했던 것이다.
停滯性論
정체성론은 타율성론과 함께 식민주의사학의 핵심 논리를 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이 왕조의 교체 등 사회 변혁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구조 면에서 아무런 발전을 하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 사회로의 이행에 필요한 봉건사회를 거치지 못하고 전근대 사회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설명되는 것이다. 福田德三(후쿠다 요쿠조우)은 러일전쟁 전 한국을 여행하면서 얻은 견문과 자료를 근거로 하여 「朝鮮の經濟組織と經濟單位」를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근대 사회의 성립을 위해서는 봉건제의 존재가 불가결하다.◦한국이 근대화에 늦어 혼미하고 있는 근원은 조선에 봉건제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사를 비교하여 19세기말 20세기 초의 한국의 사회 경제적 발전단계는 일본 봉건제가 성립되었던 鎌倉(가마쿠라: 1185~1333)시대보다 오랜 고대 말 10세기경의 藤原(후지와라: 794~1185)시대에 해당한다.사회경제사학에 의하면 역사는 대체로 원시공산사회, 고대노예사회, 중세봉건사회를 거쳐 근대자본주의사회로 발전한다고 설명된다. 福田의 주장대로 20세기 초의 한국이 10세기 말 즉 일본의 고대 말에 해당된다면 아직까지 봉건제조차 성립되지 않았다는 뜻이 되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확실히 정체된 사회 경제구조를 가진 것임에 틀림없다고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李萬烈의 지적이다.
경제학자 福田德三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사연구자들도 한국사회가 정체되었다는 논리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河合弘民(가와이 코우민) : 병탄후의 한국문화는 전적으로 일본의 藤原(후지와라)시대와 동일한 상태이고, 한국사의 현상은 藤原시대의 단계에 정체해 있다.◦山路愛人(야마지 아이진) : 한국인의 모습은 奈浪朝(710~784) 때 일본인의 모습을 상기케 한다(1904).◦喜田貞吉(키다 사다키치) : 1920년대 한국인의 생활과 풍습은 平安(헤이안: 794~1185)조의 일본인의 그것과 비슷하다(「庚申鮮滿旅行日誌」).旗田巍는 이들이 한국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근저에는 일선동조론의 의미를 강하게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찍이 수백 년 전에 일본인이 행했던 생활양식이 조선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이것은 역사의 진보에 수백 년의 차가 있었다 해도 일본인과 조선인과는 본래 同樣의 생활양식을 가진 同祖·同源의 민족이라고 하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따라서 키다의 ‘헤이안조론’ 즉 ‘정체론’은 ‘일선동조론’을 강화시키는 의미도 지녔다.”
福田德三의 뒤를 이어 黑田巖(쿠로다 이와오)은 「朝鮮經濟組織と封建制度」(經濟學論考, 1923)를, 稻葉岩吉(이나바 이와키치)은 '朝鮮文化史硏究'(1925)를 발표하였다. 특히 만선사의 입장에 섰던 稻葉岩吉은 한국에 봉건 제도가 없었다는 것을 지적함과 동시에 한국 사회의 발전수준은 일본보다 약 600년 낙후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만열은 “정체성론은 단순히 한국사의 사회 경제적 낙후성을 지적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국사회를 낙후된 사회로 규정한 다음 이렇게 정체된 한국 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한 일본제국주의 역할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려는데 그 저의가 있는 엉뚱한 논리의 비약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일본의 한국사연구자들은 한국사의 추악한 면, 어두운 면, 숙명적인 면을 강조하여 식민지지배 하에 있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역사에 긍지를 잃고 민족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도록 엉뚱한 논리를 비약시켰다.
3. 배경 논리日鮮同祖論
일선동조론은 식민주의사학이 체계화되기 이전에 나타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역사인식이다. 일선동조론은 日鮮同種論·日鮮同源論·日韓一域論으로도 불린다. 단순한 의미로는 한국과 일본이 같은 선조로부터 피를 나눈 근친관계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일선동조론은 일제에게는 자기 합리화의 철학으로, 그리고 한국에게는 굴종을 강요하는 논리로 작용하여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重野安繹(시게노 야스츠구)·久米邦武(구메 쿠니타케)·星野恒(호시노 히사시) 등 세 사람이 '國史眼'을 저술하여 神代로부터 近代에 이르기까지 한일관계를 다루었다. 여기서 그들은 막부시대 국학의 전통을 계승, 日鮮同祖論의 입장에서 한일관계를 연구하였다.
즉 出雲(이즈모)신화에 나오는 素盞鳴尊(스사노오 노미코토)이 조선의 지배자가 되었고, 稻氷命(이나히 노미꼬토)이 신라의 왕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天日槍(아메노 히보꼬)이 일본에 귀복하였고 神功皇后가 신라를 쳐서 신라왕을 굴복시켰다는 등 한일관계의 해석을 막부시대의 국학자 견해에 전적으로 밀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旗田巍(하타다 타카시)는 다음과 같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 해석으로부터 당연히 조선사에 대한 하나의 역사상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조선은 신대의 옛적부터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하는 역사상이다. 이 역사상은 곧 역사 교과서를 통하여 광범하게 일본 국민의 마음에 심어지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조선인에 대한 우월감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역사상은 조선사 연구에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조선사 연구가 전혀 없었던 시기에 일본의 역사학이 아직 전체적으로 뚜렷이 미발달된 단계에 있어서 국사 편수 과정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엄밀한 학문적 검토를 거치지 않고 국학적 전통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겨진 역사상은 그 후 오랫동안 학계·교육계에 살아 계속되었다. 더구나 역사 교육의 면에서는 패전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는 고쳐지지 않고 존속하였다.”
이후 일선동조론은 만선사관과 대립·협조하면서 식민주의사관 형성의 대 전제가 되었다. '國史眼'의 필자 星野恒은 1890년에 일선동조론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대한제국 병탄 직후에는 그것이 日韓同域의 復古라는 주장을 폈다. 그리고 많은 일제의 역사가들이 이에 동조하였다. 3·1운동이 발발하자 일선동조론은 이를 무마시키는 이론으로 다시 고조되었으며, 喜田貞吉(키다 사다키치)은 '日韓兩民族源論'을 써서 일제의 조선지배 정당성과 한민족 독립운동의 부당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일선동조론은 체계화된 학문 이론으로 볼 수 없으며 학술 가치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래 한 핏줄이었기 때문에 한국을 滿·蒙과 支那族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같은 민족끼리 융화를 꾀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일본인의 은혜를 저버리고 융화정책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3·1운동 같은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논리를 비약시키고 있다. 이후 일선동조론은 문화정치 하에서는 內鮮一體, 만주사변 이후에는 황민화정책이 추진되면서 창씨개명 등 민족말살정책으로 이어졌다.
任那日本府說
임나일본부설은 전적으로 '일본서기'에 기초한 것으로 昭和(1926~1988)시대에 들어와 末松保和(스에마츠 야스카즈)에 의해 체계화되고, 三品彰英(미지나 쇼우에이)에 의해 한층 발전된 이론으로 신공황후의 가야제국(任那) 및 신라 정벌 이후 한국 남부의 상당 부분이 그들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池內宏(이케우치 히로시)은 '삼국사기' 초기기록(高句麗本紀·新羅本紀·百濟本紀)은 모두 조작·전설이며 그 속에 역사적 진실이 없다고 단정하면서도 '일본서기'는 그 내용이 수없이 조작되어 있지만 그 속에 역사적 진실도 담겨져 있다는 모순된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池內宏의 강의와 저술은 후일 임나일본부설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4~6세기 일본이 한국에 진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은 학계의 상식이다. 大和정권이 고대 통일국가의 기틀을 이룩한 것은 大和改新(다이카개신: 645) 이후이며 8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율령제정과 奈良(나라)천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日本’이라는 국호도 7세기말(670)에 정해졌다. 4세기말에는 한국에서 대규모 騎馬戰鬪가 벌어지고 있었고 동원되는 병력수도 3~5만 명 규모였기 때문에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 金錫亨은「삼한삼국 일본열도 내 분국」설을 발표하여 일본학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임나일본부 문제는 한국사의 한 부분인 가야와 백제와의 관계, 신라와의 관계, 倭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파악되어야 하고 4세기 후반이 아닌 6세기 전반의 국제관계 속에서 규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임나일본부 문제는 현재까지 일본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실려 있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가 무엇인가 확인하는 것은 한국사 복원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末松保和의 임나일본부 고대 남한경영설이 일제의 한국에 대한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전후에도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반영되어 일본인들의 한국사 인식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관계에서 용납 안되는 식민주의사학
Ⅵ. 결론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무력을 앞세워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甲申政變·甲午倭亂·乙未事變 등 각종 사건을 거치면서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또 청일전쟁 과정에서 무력으로 한국 영토를 침범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한국의 외교권마저 침탈하여 보호국화 하였다. 1907년에는 군대를 해산시키고 결국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병탄하기에 이른다.이와 같은 일련의 침략과정을 전후하여 일본 학계의 관심이 한국에 집중되었고 한국의 역사·지리·언어·법제·풍속 등 여러 부문에 걸쳐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1887년 동경대학에 사학과가 창설되면서 근대사학 출발과 더불어 한국사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일본 조야의 모든 시선이 한국에 모아지고 있을 때였으므로 한국사에 관한 논저들이 다수 발표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일본 역사학계가 하나같이 정치인들의 침략구실을 역사논리로 뒷받침하려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黑板勝美는 <일본서기>를 기초로 황국사관을 만들어 냈고, 太田亮은 황국사관에 맞춰 한국 고대사의 기년을 끌어 내렸다. 津田左右吉은 <일본서기>가 비록 조작된 역사서이지만 그 조작이 역사 이외의 시각에서는 가치가 있다고 하여 침략행위를 옹호하는 쪽에 섰다. 池內宏은 한국 고대사를 마치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출발한 것처럼 왜곡함으로써 한국사 발전의 독자성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末松保和에 이르면 임나일본부의 남한경영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조선사』35권의 편찬을 통해 식민주의사학으로 체계화되었다.『조선사』35권은 단순한 한국사 관련 사료집이 아니라 일제의 지배논리 합리화연장선상에서 편찬된 것으로 막부말기 국학자와 해방론자들의 한국인식, 명치시대의 정한론을 위시한 침략논리, 그리고 일본 근대사학 성립 이후의 고대 한일관계사 해석 등이 종합된 식민주의사학의 결정체이다. 그것의 성격은 첫째, 식민주의사관을 조장하는 사료집이며 둘째, 역사의 진실이 심하게 왜곡된 역사서이고 셋째,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적으로 악선전하는 문서집이라 할 수 있다. 『조선사』35권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사상은 한마디로 식민주의사관 바로 그것이다.
식민주의사관은 일제가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사를 왜곡하여 해석하는 관점이며 이를 체계화한 논리체계가 식민주의사학이다. 따라서 식민주의사학은 한국 역사와 문화에서 타율성과 정체성을 과장하여 부각시키고 자율성과 진취성을 부정하는 것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 한국사는 마치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부터, 남쪽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서 시작된 것처럼 해석되고 있으며 한민족의 기원을 모호하게 정리하여 정체성에 혼란을 주고 있다. 식민주의사학은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해방론, 정한론, 탈아론, 악우론 등 비합리적인 논리에 그 뿌리를 박고 있으며 약육강식의 국제질서 속에서 일본의 생존을 위해 한국침략을 전제로 하여 태동하였다는 점에서 국제관계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역사 논리이다.
그럼에도 일제는 이를 고집하여 20세기 초 한일 양국 관계를 극단의 불행한 역사로 내몰았고 동양평화를 주창하면서 세계평화를 파괴하였다. 21세기는 동북아가 세계의 중심무대로 부상하고 있으며 지금은 한·중·일 삼국의 돈독한 협력관계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따라서 한일 양국 간에 남아있는 앙금은 서둘러 씻어내야 한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 바로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은 반성하는 자세로 한일관계 전개과정 속에 담긴 역사의 진실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한국도 자책하는 자세로 한국사의 왜곡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원형을 복원하고 새로운 한일관계를 설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