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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꼬리
신익선
솔직하게 말한다면 수필 쓰기는 내게 형벌이다. 나는 앞으로 수필만큼은 절대 쓰지 않겠다. 지나온 과거 삶의 발자취가 괴로워서다. 내가 하찮게 여겨 내다 버린 무수한 시간과 무수한 경제적 손실이 바늘처럼 나를 찔러대기 때문이다. 나를 알몸으로 노출 시키는 수필의 서사가 나는 두렵다. 두려움, 진실로 이 말은 진심이다. 그동안의 삶에서 내가 이루어 낸 일은 없다. 대신에 내가 쓰러져 절명 근처에 도달했던 기억만이 사무치기 때문이다. 절명 근처였으니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이다.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 내세울 이력도 없다. 하여, 나는 어디 원고청탁에서 이력을 기재하여 달라 하면 겨우 두세 줄의 이력만 쓴다. 출생지하고 학력, 등단한 년도 정도가 전부다. 그 외에 쓸 말이 없다. 내가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를 내세우고 박수받을 눈곱만치의 욕망도 없다. 명예는 물론 심지어 나의 건강 따위를 바라는 일도 없다. 더 일을 벌려놓거나, 더 무엇을 확장 시켜야겠다는 계획도 없다. 언제나 고요에 거한다. 그래서인가. 오늘에 이르러 나는 이제 나를 놓아버리고 싶다. 나의 과거지사도 이쯤 하여 온전한 자유로 놓아주고 싶다. 어쨌든 나의 과거도 나와 함께 오랜 세월을 나와 더불어 살아 오지 않았는가.
그러한 내가 어느 날 우연히 낮은 음색의 비가悲歌를 들었다. 즉시 맑디맑은 음색과 잔잔한 멜로디, 그리고 혜은이 가수 특유의 청아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수십 번에 걸쳐 리바이벌하여 들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이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 사이로 서른 댓 살이다. 노래 가사와 멜로디에서 서른 댓 살 나 자신의 영상이 스쳐 흐르고 있었다. 삼십 대의 나, 서른 살이 지난 나를 보았다. 내가 삼십 대라니, 그 싱싱하고 푸르렀던 무렵의 나라니, 서른 살이 지났을 무렵의 나라니, 아니, 나에게도 과연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갑자기 보리밭이 펼쳐진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까치내 숲에는 토끼풀이 군락 지어 있었다. 그 옆 밭에는 딸기밭이 있었다. 홍성고등학교를 에워싼 산이었다. 아주 아늑한 숲이었다. 나는 자주 거기에 갔었다. 그런 공간, 지상에는 없을듯한 새로운 그런 나라가 뇌리에 떠 올랐다. 그를 열어주면서, 비가는 말할 수 없이 아득하고 아늑한 공간 속의 유영으로 나를 호출하였다.
회고하면 너무나 철부지였던 삼십 대였다. 비교적 늦은 연령대였던 그 해,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육군 소장에 불과하였던 풋내기 전두환 장군이 군사정권 실세로 부상한 그해 12월에 결혼하고 연이어 삼 남매를 두었다. 당연히 먹고 사는 일에 충실해야 함은 당연지사였으나 나는 돈 벌고 돈 모으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직원들을 둔 터미널에 연접해 있는 여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풍족하였다. 매일 만실이었던 넘치는 풍요를 저축하고 피땀 흘려 시 공부를 하였더라면 얼마나 그럴듯했을까. 그러나 나는 그런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얼마나 꼴 볼 견이었겠는가. 이를 공개하기란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그 창창한 푸르른 시절에 나의 하루의 주된 일과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상 음주 가무였다. 삼십 대에 나는 이미 남들이 평생 쓸 돈을 다 썼으니, 그를 일러 도대체 무어라 표현한단 말인가. 지금까지도 나의 그 아둔함과 무능, 어리석음과 기고만장, 후회와 통탄을 일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할 정도다.
그러나 그 시절, 나는 한 여인을 만났다. 실제로 이건 만나고 말고 따질 게 없는 만남이다. 홍성고등학교 정문 근처, 내가 사는 정남향의 연립주택, 나는 1층에 살았고, 2층에는 고등학교 교사 부부가, 그리고 사십 대 중반의 그녀는 3층에 살았으니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조건 적 만남이다. 나보다 예닐곱 살 연상의 그녀는 늘씬했다. 계절 따라 바뀌는 그녀의 스프링코트와 바바리코트는 현관 바닥을 스칠 듯 지나쳤다. 그때마다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화장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니다. 화장품 냄새라는 표현은 실례다. 향수다. 야릇한 향수가 내 코를 자극하였다. 늘 그랬다. 나는 원래 체질상 여약女弱이다. 여자는 무한 신비스럽다는 게 나의 기본 시각이다. 그런 내게 향수를 날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늘 어지러웠다. 그녀는 짐작조차 못 하였겠지만, 그녀가 지나간 뒤에 나는 언제나 코를 벌름거리며 비틀거렸다. 그러다가 알게 되었다. 그녀가 충남 홍성에 조직되어 활동하는 글 쓰는 그룹인 「홍주문학회」 소속 여자 회원이라는 것이다.
무수히 피어나는 봄꽃 중에서 진달래 꽃술보다 더 황홀한 꽃술은 없다. 매년 봄, 진달래꽃을 볼 때마다 요즘도 나는 차를 멈추고 넋을 잃는다. 가슴이 설렌다. 꽃술에는, 진달래 꽃술에는, 혈관을 치고 우주에 퍼져나가는 숨 가뿐 호흡이 있다. 밀밭길 같이 걷는 호젓한 내음이 있다. 수줍은 웃음을 띠고 언덕 등성이에서 기다리는 설렘이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솟구쳐 오르는 신명이 있다. 기쁨은 그리하여 진달래 꽃술의 내밀한 안방에 기거하는 기이한 영상이다. 그렇게 진달래가 피어날 즈음이었다. 치마꼬리다. 순전히 그건 치마꼬리다. 앳된 나는 여인의 치마 꽁무니를 쫓아 난생처음으로 글쟁이들의 집합체인 홍주문학회에 갔다.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앉으면 앉고 서면 섰다. 그녀의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만 댕기다가 결국, 그날 처음 나갔던 문학회에 입회하였다. 실은, 문학회에 입회하기 이전부터 나는 철칙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무조건 한 달에 한 편 이상의 시편을 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썼다. 습작 노트가 수십 권 분량, 연립주택 서재에 쌓여 있던, 키 높이로는 1 미터 정도, 분량이 당시에 있었다. 등단은 못 하였으나, 혼자서지만 시 쓰기를 계속해 온 연륜이 적지 않았다. 그 뒤로 그 단체의 사무국장을 맡았고 결국에는 내가 대전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였던, 오래전 작고하신 박명용 선생을 초빙하여 내 손으로 홍성문인협회를 창립, 한국문인협회 초대 홍성지부장이 되었다가 한국예술인단체총연합회 홍성지회장을 겸하였다.
철딱석머리없는 천방지축, 엉터리 시인 나부랭이가 오래도록 평온히 시를 쓸 수 있었겠는가. 너무너무 다정하고 친밀하였던 노인 한 사람에게 속아서 나는 나의 사업체를 상실하였다. 햇살이 반짝이는데 돌연 천지가 캄캄하였다. 원래 어리버리 한데다 돈 쓰기에 이력이 난 나는 대낮의 어둠에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다. 지천명이었다. 죽음을 갈망하였지만, 노모에다 아이들까지 겹쳐 자살도 어림없는 노릇이었다. 지천명에 이르러 나는 꿈꾸는 듯한, 끝을 모르는 나락으로 추락하였다. 수중에는 단 한 푼의 돈도 없었다. 속아서 진창에 넘어진 실정을 모르는 개도적들이 나를 일러 온갖 모함에다 멸시, 조롱을 퍼붓고 있었다. 익히 그를 들었다. 나는 그런 말 따위에 부화뇌동할 여유가 없었다. 급했다. 우선 당장 먹고 살아야 했다. 글도 써야 했다. 혹독한 시류에 쫓겨 나는 내가 온 힘으로 씨뿌리고 다져왔던 정든 마을, 홍성을 떠났다. 홍성성결교회 장로직임과 건설회사 대표이사직임은 단숨에 추풍낙엽, 그 뒤로 정처 없이 대처로 내몰렸다. 그러나 나는 고요하였다. 정신 차려 건축일 하기에 전심전력하였다. 그렇게 만 십오 년 동안을 대전, 논산, 보령을 떠돌다가 을미년(’15년) 5월, 만신창이 된 몸을 이끌고 비로소 예산의 덕산 가루실마을에 정착하였던 그해 일이었다. 홍성 불란서안경원 코너를 돌다가 그녀를 만났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너무나 오랫만의 만남이었다. 서로가 몹시 반가워했다.
흡사 연인처럼 우린 서로가 손 붙잡고 밀착해서 인근 다실에 들렀다. 나는 고희가 코앞이었고 그녀는 팔순이 코앞이었다. 다실에 들어가 앉자마자 그녀는 홍성문인협회 회장직임을 맡고 있다면서 대뜸, “신 회장님 존경해요.”라고 말했다. 이유를 몰라 궁금해하는 내게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그 이유를 말하는데 들어보니 아주 급한 일로 나한테 얼마의 돈을 차용했다 한다. 그 돈을 내가 채근하지 않아서 못 갚아드렸다고 한다. 내가 쓰는 글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를 존경한다는 말은 순전히 꿔간 돈을 안 갚아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몰랐으나 좀 허망했다. 그보다도 내가 놀란 것은 연립주택 아래 윗집 인연으로 만난 그녀는 그때까지도 그 연립주택에서 살고 있다 했다. 무려 사십여 년 이상을 산 것이다. 2층의 부부 교사는 각각 홍성교육장, 아산교육장을 지내는 중이라고 하면서 그녀는 부군의 병세가 중하여 꼼짝 못 하고 집에서 간호하는 중이라 전언했다. 그 틈새에 이혼한 아들이 남겨놓은 어린 손자 둘을 양육하는 중인데 큰 손자가 단골로 경찰서를 들락거려 고심 중이라는 말도 했다. 인생은, 삶은,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을 뒷치닥거리하다가 우주에서 오직 단 한 번만 허락받은 목숨을 쓸쓸히 소멸시켜가는 것이다.
그 후 얼마 있다가 그녀가 부군의 부음을 알려왔다. 나는 홍성병원의 원무과장인 아들에게 일러 문상을 하라 하였다. 그 전화번호를 입력해놨었는지 얼마 안 있어 그녀의 부음을 알리는 문자를 받았다고 아들이 알려왔다. 다시 아들에게 일러 문상을 명했다. 그럼 왜 나의 어머니 유고 시와 아이들 셋을 여윌 때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그녀에게 연거푸 문상 갔는가. 게다가 문상 가기 이전, 홍성 불란서 안경원에서 그녀를 만난 이후, 그녀 생전에 나는 별거 아니지만, 정성으로 금일봉을 드리곤 했다. 문학판에, 내가 문단에 선 것은, 순전히 그녀의 치마꼬리 덕분 아닌가. 키 크고 치렁한 머리가 허리에 닿았던 그녀가 노쇠해져서 방광의 합병증으로 겨우 운신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구면의 그녀와 나는 만나자마자 동화 속으로 흡입되듯 현실을 떠나 문학의 유토피아 세계로 몰입하곤 하였다. 그녀와 난 서로 사랑한 건 아니지만,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무덤덤하였으나 서로를 잊지 못하였던 우리의 오랜 관계는 궁극에 이르러 그녀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으나 회고하면 재삼 참 감사한 일이다. 그녀로 인하여 나는, 나를 미치게 만드는 문학의 저 영원한 은하계로 달려갈 수 있었다.
물론 내가 그렇게도 시집 원고를 달라 하여도 안 주고 운명한 그녀이지만, 그녀가 있었기에 나는 문학판에 입문한 것이다. 그녀로 하여 나는 지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소중한 이름인 글쟁이로 내가 오늘날 글을 쓰는 것 아니랴. 시골의 작은 문학회는 그러므로 한 문인에게 있어 영원한 생명의 둥지인 것이다. 문학회가 있었기에 글을 배우며 글 써가는데 큰 동기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지역 문학회의 존재는 내 던져서는 안 되는 영원한 자신만의 문패인 것이다. 결단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는 소중한 자산이란 이야기다. 그래서 가입 안 하였으면 모를까, 한 번 문학회에 가입한 문인은 누구나 막론하고 소속된 그 문학회와 결혼한 것과 같다. 결혼이 어디 좋다고 헤헤거리고 싫다고 박차고 나가는 단순 게임이랴. 결혼이 깨지면 그만이듯 문학판을 나가면 글쓰기도 종 친다. 시골문학회라고 얕잡아보거나 깔보지 말고 처신에 신중해야 한다. 지역 문학회를 경홀히 여기고, 타지역문학회에 열중하는 일은 생뚱맞은 바보짓이다. 우선순위가 틀린 것이다. 어려워도 내 살림살이는 내가 하는 것이다. 못 나도 내 아들이 내 제사를 지내준다. 내 가정을 소홀히 여기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천부당만부당한 어불성설이다. 불성실한 이들의 단골 메뉴는 늘 대동소이하다.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 댈 것 만들기에 능숙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간단하다. 그런 문인은 결국, 글쓰기를 지탱하지 못한다. 글이 그 사람을 뱉어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도 역시 깨져버리고 남는 게 없다.
그런 점에서 시골 문학회의 존재는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나 감사한 이름이다. 「비가」의 가사처럼 ‘잊혀져 가는’ 이름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시골의 작은 문학회가 있었기에 어리석은 나도 고은, 신경림, 김광림, 임영조, 박재삼 시인 등등과 밤새워 대작하며 시의 불꽃에 영혼을 들이밀 수 있었다. 더하여 글 세계의 무한한 신비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지금은 김광림, 임영조, 박재삼 시인, 그 외에도 무수한 시인들이 이미 오래전 고인이 되셨으나 나의 문학판의 근저에는 그처럼 고인이 된 그녀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우 낯익은 노래, 혜은이의 「비가」를 지상을 떠난, 내가 만났던 시인들과 그녀에게 올린다. 지상을 떠나 우주의 어느 가까운 나라에 가 있을 그녀에게 그녀의 치마꼬리를 생각하며 나즉히 노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그 이름을 끝내 부르지 못해
그리움 하나로 잊혀져 가는 내 이름 석자
등을 돌려 내게서 등 돌려 가는 사람이여
그래 말 없이 떠나라 다신 돌아오지 말아라 비가
바람에 스치우는 그대 그리운 말 이젠 잊으리라
노을 한 자락에도 떨어지는 이 눈물을 씻어지리라
살다 살다 외로워질 때 나보다 더 그대 외로울 때
그때 그리워지리라 잊혀진 내 이름 석자
(후렴)
바람에 스치우는 그대 그리운 말 이젠 잊으리라
노을 한 자락에도 떨어지는 이 눈물을 씻어지리라
살다 살다 외로워질 때 나보다 더 그대 외로울 때
그때 그리워지리라 잊혀진 내 이름 석자
‘이름’이 있으나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이름을 안고 사라진다. 자기라는 개체의 소멸이다. 소멸이 있기에 삶은 일견 황홀하고 일견 안타깝다. 아늑한 공상의 나라, 백 번을 더 들어도 혜은이 가수의 위 「비가」는 새로운 공상을 불러일으키며 무한 가슴을 친다. 나도 모르게 자주 이 노래를 부르며 가슴 치며 나는 그녀를 그린다. 설사 그녀가 못 들을지라도 「비가」를 불러주면서 거칠고 메마른 광야를 달려온 나의 고단할 시어들을 불러모아 더불어 정성껏 그녀에게 띄워 보내곤 한다. 벚꽃이 진 사월의 창밖에는 철쭉이 한창 꽃 몽우리를 불려가고 있는 새벽이다. 지상과 우주에서 그녀와 나누는 치마꼬리의 옛 음률도 서서히 새 아침의 눈을 뜨는데 치마꼬리 탓일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나날이, 그리고 나를 써가는 글들이 나는 너무나 신비하고 너무나 감사하기만 하여 “노을 한 자락에도 떨어지는 이 눈물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음을 「비가」처럼 나즉히 고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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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최종 교정분을 다시 올렸습니다.
신익선 문학박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