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 사랑굿 -
원동역 2
- 정도영
풋풋한 이십 대를 엉너리치게 하던 역두
무궁화호 등살 타고 매화를 피우거니
선술집 교태는 어디 불콰하던 남정네들
그 횟집 그 국밥집 좌표일 뿐, 삼십 성상
"그대는 여교사라 거친 역도 따사롭소"
구포행 기차를 타랴, 수다에 빠져들던 곳
*정도영: 2009년 ‘시조 세계’ 등단. 수상으로 2009년 경남시조백일장 장원, 2019년 한국여성문학대전 최우수상.
사랑은 다시 시작되었다. 가슴에 밀려드는 주체할 수 없는 환희와 밥을 먹지 않아도,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신비스러운 기운에 나는 마치 비단결을 걷는 기분이었다. 길을 가다 어떤 험상궂은 남자와 어깨를 부딪쳐도, 지하철 좌석에 가방을 던져놓고 앉는 무례한 아줌마의 행태에도 나는 그저 미소가 나왔다. 해맑은 어린아이처럼, 어스름 달빛이 비치는 가운데 망망대해에 떠 있는 돛단배처럼 나는 비로소 비현실적인 존재가 되었다.
수많이 주고받은 문자들, 복도를 걷다 비켜선 걸음에서 묻어나는 사랑의 애틋한 감정들, 식당에서 멀리 앉아 밥을 먹다 우연히 마주친 눈길에서도 나는 행복했고, 늘 이 과분한 사랑에 눈물이 흘렀다. 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동료들과 바깥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맛있는 반찬이 나오면 어김없이 그녀가 생각났다. 동창회에서 가든파티를 할 때 나는 또 그 분위기 속에 그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나는 그녀의 언저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겨울이 넘어가고 있었다. 금요일 퇴근 후, 간단한 식사와 반주를 하고 나서 그녀와 함께 광안리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겨울이라지만 오랜만에 삼한사온 중 따뜻한 하루였다. 해가 지면서 바람이 약간 불었지만, 서로의 코트 안에 교차로 손을 넣었기에 그리 춥지 않았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는 광안대교의 지나치는 차들을 보며 말없이 걸었다. 침묵 속에서 나는 충분한 교감이 우리 둘을 연결해주고 있음을 느꼈다.
“날 느끼고 있어?”
나는 행여,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 있다는 착각에 그녀에게 물었다.
“충분히 느끼고 있어요.”
놀랍게도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날 밤, 카페에서 다소 무례하게 했던 나의 행동 때문에 나는 그녀와 키스 이상의 생각을 않기로 작정했다. 사랑하면 만지고 싶고, 안아보고 싶고 그런 거지만, 이제 나는 그녀와 정신적 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나만의 착각이었다.
갑자기 파도가 그녀 쪽으로 확 밀려왔다. 깜짝 놀란 그녀가 어머, 하며 나에게 안겼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내 입술 가까이 다가왔고 그녀의 뭉클한 가슴이 내 가슴에 닿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몸이 아니라 체취였다. 마침, 그녀의 무릎까지 찬 파도 때문에 그녀의 신발은 물론, 코트 밑부분까지 물에 젖어버렸다.
나는 어이없게도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느끼고 싶다.”
신발의 물기와 모래를 털어내느라 내 어깨를 잡고 한 손으로 고군분투하던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말았다.
“뭘요?”
사실 말을 해놓고선 나는 몹시 민망했다. 그래서 대답 대신, 그녀의 신발을 뺏었다.
“왜 그래요?”
“허락해주기까지 신발을 안 줄 거야.”
나의 이런 엉뚱한 말에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뭘 허락해주기 바라는데요?”
나는 머리가 쭈뼛거렸지만, 솔직한 감정을 나타내는 것도 사랑이라 생각했다.
“오늘은 같이 자고 싶어.”
그러자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없이 목젖이 보일 만큼 웃었다.
“뭐에요? 애처럼. 나더러 재워달라구요?”
아주 기가 찬 표정이었다.
“미치겠다고. 지금, 난.”
말이 끝나자 그녀는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뭐라 할까, 경멸? 아니면 철없음을 꾸짖는 마치 엄마의 눈빛 같은 거였다.
“이봐요. 최 림 씨! 두 번 다시 그런 말 하면 나, 앞으로 안 볼 거에요. 알겠습니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내 손에 있던 신발을 뺏었다. 이쯤에서 나는 그만두어야 했지만, 이상하게 조금 화가 나면서 오기가 생겼다.
“그게 뭐 어때서? 우린 지금 느끼고 있잖아. 그리고 사랑하고 있고. 성인 남녀가 어떻게 정신적으로만 사랑하겠어? 이 정도에서 육체적인 사랑도 필요한 것 아냐?”
하지만 그녀는 대꾸도 없이 도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마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별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술을 마실 거로 예상했기 때문에 차는 회사주차장에 두고 나왔다. 그녀는 버스를 탈 요량으로 도로를 지나 모텔 등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나는 이쯤에서 미안함 반, 조급한 마음 반으로 그녀의 화를 풀기 위해 재빨리 그녀 곁으로 붙었다.
“여기, 이런 곳에 가고 싶어요?”
갑자기 그녀가 모텔 주차장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여기까지도 우리, 많이 온 거예요. 이 이상은 더…….”
나는 대충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되었다. 그녀는 정색하고 내게 뭐라 뭐라 말했지만, 그녀의 말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느낀 것은 희미한 가로등 아래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고혹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욕망일까 아니면 욕정일까. 아니, 애써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내 가슴 속의 무언가 날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주체할 수 없었다. 날 바라보며 계속 이야기하는 그녀를 무작정 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주차장 담벼락에 밀치고 그녀의 뺨과 입술에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처음엔 완강히 거부하던 그녀는 내 사랑과 애정을 몸으로 확인하자 스스로 핸드백을 놓았다. 그녀의 몸은 떨고 있었고, 그녀의 몸, 모든 세포는 열리고 있었다. 호흡이 매우 거칠어지면서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내게 맡기고 있었다. 어느새 내 입술은 그녀의 풀어헤친 가슴을 향했고 손은 그때처럼 그녀의 스커트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그때처럼 제지하지는 않았다.
“아!”
내 입술이 가슴에서 목, 입술쯤 올라왔을 때 그녀는 신음하듯 말했다.
“그래도 안 돼요. 다음에, 이다음에.”
하지만 이미 욕정에 사로잡힌 나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핸드백을 주워,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금만 더 가면 모텔 주차장 쪽 뒷문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뒷문에서 낯설지 않은 사람을 만난 것이다. 같은 빌딩 1층, 보세사 사무실에 근무하는 김 대리가 어떤 여자와 함께 나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여자는 같은 사무실 여직원이었다. 김 대리는 기혼이었고 옆에 있던 여자 역시 얼마 전에 결혼했다. 그와 여자는 당연히 나와 유희를 알고 있었다. 네 사람이 불륜의 현장, 모텔 주차장에서 마주쳤으니 굉장한 낭패였다. 행여 먼 거리에서 만났다면 모른 척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과 우리는 가까운 거리였다.
“과장님!”
김 대리가 창백한 얼굴로 날 아는 체하였다. 여자는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돌리더니 급하게 승용차 쪽으로 피해버렸다. 나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새 유희는 당황한 내게서 핸드백을 빼앗아, 그대로 뒤돌아서서 뛰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그가 인사를 함에도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래, 다음에 보세.”
그도 무척 당황스러운 표정이었기에 나는 이쯤에서 자리를 옮기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버스정류소에 그녀는 서 있었다. 창피함과 미안함 때문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날 보더니 그녀는 의외로 웃었다. 그 웃음이 어떤 의미인 줄 몰라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그녀가 내 팔짱을 끌었다.
“봐요. 아직 때가 아니잖아요.”
나는 그녀의 위트에 비로소 안심되었다.
“미안해. 내가 미쳤나 봐.”
“사랑하는 사람에겐 미안하다는 말은 하는 게 아니래요.”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 져왔고, 멀리서 버스가 오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와 그녀는 되도록 조심했다. 옆 사무실의 김 대리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 또한 같은 사무실 유부녀와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들은 분명 로맨스를 하는 것이고, 상대인 우리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하고 몰아세울 가능성이 있었다.
연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직 확실한 내막을 잘 모르지만 언제 어디서든, 그녀의 폭탄 발언이 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술에 약했다. 술에 취해 직원들 앞에 나와 유희 사이를 까발린다면,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나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될 수 있는 대로 사무실 근처뿐만 아니라, 무산 시에서 그녀를 만나는 것을 포기했다.
사랑은 그러하였다. 어제 봤지만, 오늘도 같이 있고 싶고 매일매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직장인이었고 수행해야 할 업무가 있었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려 하자 사장의 지시로 나는 장기출장이 빈번했고, 그녀 또한 각종 회의나 교육 때문에 우리가 같은 빌딩 안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럴 때면 나는 매시간 문자를 보냈고 밤에는 새벽까지 통화했다. 가까이 있으나, 멀리 있으나 우리의 사랑은 불이 붙으면서 더욱 활활 타올랐다. 나의 삶은 경쾌해졌고 내 가슴은 늘 두근거렸다.
그러던 한날이었다. 어느 정도 바쁜 업무가 끝나고 나와 그녀는 예전처럼 같은 사무실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 공간에 있게 되었다. 복도에서 혹은 식당에서 본 그녀는 마치 봄의 화신처럼 너무 예뻤다. 내가 봐도 그러니, 인근 사무실에서부터 주변 사무실까지 아직 결혼하지 못한 젊은 남자들의 구애가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녀의 책상 앞에는 늘 장미꽃이 놓여 있었고, 퇴근 시간만 되면 빌딩 정문에 그녀를 기다리는 청춘들이 가득했다.
“어떡해요?”
그녀는 한날 내게 진지하게 물었다.
“뭘 어떡해?”
“만나 줄까요? 말까요?”
나는 그녀의 능청스러움에 화가 났지만,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마음속으로야 당연히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였다.
“그대가 알아서 해.”
“정말요? 그럼, 나, 만난다. 아저씨가 화 안 내기에요.”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 염장을 찔렀다.
마침내 그녀는 다른 사무실에서 적극적으로 대시하던 어떤 녀석과 데이트를 나갔다. 나는 그날, 술도 마시지 못하는 연희를 앉혀놓고 늦은 시간까지 사랑에 대한 준칙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말았다.
“뭐에요? 과장님. 오늘 말씀하신 결론은 유희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에 화가 많이 났다는 말이네요. 맞죠?”
연희마저 내 속을 뒤집자 나는 급기야 그녀를 보내고, 혼자 여자가 있는 스탠드바에 가서 술을 마셨다. 그런데도 질투심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시간까지 그녀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은 나의 분노를 폭발하게 만들고 말았다. 결국, 내가 먼저 전화를 했으나 그녀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다음날, 나는 K 관세사 한수에게 볼일이 있는 것처럼 그녀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녀는 일찍 출근하여 컴퓨터 화면을 보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인사를 하는데 유독, 그녀는 날 모르는 척했다.
“웬일이야? 내 사무실에 다 오고.”
한수가 어깨를 들썩이며 반갑게 맞이했지만, 내 신경은 온통 그녀에게로 가 있었다.
별수 없이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아! 사무실에 커피가 다 떨어져서 말이야. 이봐요. 유희 씨! 커피 한잔 타 줄래요?”
나는 반가운 척 그녀에게 말을 걸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충격이었다.
“요새 여직원이 남의 사무실 사람에게 커피 타서 주는 것 봤어요? 과장님이 알아서 타드세요. 커피는 저기 있거든요.”
옆에 있던 한수는 그런 유희를 보고 오히려 거들었다.
“맞아. 요새 여직원은 그렇지 않지. 자, 들어감세. 내 방에서 내가 한 잔 타주지.”
나는 속에서 불이 나고 있었는데, 등에 떠밀려 한수의 방에 들어가는 날 보고 그녀는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첫댓글 이인규 소설가님 -
감동적인 작품에 감동으로 존경을 보냄 니다 - 이인규소설가님 홧팅 입니다 !! 감사합니다 !!!
협조 부탁 사항 은 -
지금 올리고있는 적품을 <문학작품>방이나 <산청 사랑>방으로 이동 시키면 어떨까요?
<산청문학원고방>은 10월경 회원님들의 산청문학 원고를 받아야하니 혼란이 없을것 같습니다. . 검토바랍니다 ^^
네, 알겠습니다. 사실, 일전 필명 대신, 작가명으로 등록하는 것, 또한 방 옮기는 것 등 컴퓨터활용 능력이 부족하였습니다.
하지만, 능력자의 도움 받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인규 작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