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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에서 플라톤의 언급이 없다...
왜일까?
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4권. 17세기, Le dix-septième siècle1-702
제3장, 데카르트와 데카르트주의 Descartes et le cartesianisme 41-113
1절 생애와 작품들La vie et les oeuvres 41-46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귀족 가문의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 삐에르(Pierre Descartes, s.d.)는 종교 전쟁에서 싸웠다. 그의 아버지 죠아셈(Joachim Descartes, 1563-1640)은 1586년에 브르타뉴 의회의 의원이었다. 그의 부인 쟌 브로샤르(Jeanne Brochard, 1566경-1597)는 쁘와띠에 지역 사령관의 딸이다. 둘 사이에 3자녀가 있었다. 둘째이며 맏아들인 삐에르(Pierre Descartes, 1591-1660)는 아버지를 계승했고, 르네는 셋째였다. 1604년에서 1612년에 그는 라 플레쉬 학교에 학생이었다. 이 학교는 앙리 4세(Henri IV, 1553–1610)에 의해 세워졌으며 제수이트들이 가르쳤다. 그는 여기서 마지막 3년동안에 철학교육을 받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을 논술로, 요약으로, 주석하는 것이었다: 첫 해에 오르가논, 둘째 해에 자연학의 여러 권들, 셋째 해에 형이상학과 영혼론이다. 전통에 따르면 이 교육은 신학을 준비하게 되어 있었다.그 둘째 해에 그는 그것들에 더하여 [독일 제수이트, 수학자] 클라비우스(Clavius, 1538-1612)의 최신 논문에서 수학들과 대수학을 배웠다.
1616[스물]년에 프와띠에 대학에서 법학 시험들을 통과하였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소소한 재산 덕분에 모든 물질적 근심으로부터 벗어나, 마치 그 시대의 많은 신사[귀족]들처럼, 그는 1618년[스물둘]에 그 당시 스페인에 적대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모리스 드 나소 군주의 군대(dans l'armée du prince Maurice de Nassau)에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1588년 생이며 캉 대학의 의학 박사인 베크만(Isaac Beeckman 1588-1637)과 우정을 맺었다. 그의 일기는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데카르트가 자기와 더불어 수학 문제들과 자연학-수학의 문제들에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1619년[스물셋]에 데카르트는 개신교도인 모리스 드 나소(Maurice de Nassau, 1567-1625)와 관계를 벗어나, 카톨릭인 막시밀리안 1세(Maximilien Ier, de Bavière, 1573-1651)가 보헤미아 왕에 대항하여 결성한 군대로 갔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서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1578-1637)의 황제 대관식에 참석했다. 울름 가까이의 독일 마을에서1619년 11월 10일에, 그가 말하기를 “열정에 들떠서 자신이 찬탄할 과학의 토대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표현은 과학들에서 통일성을 도입할 수 있는 보편적 방법을 지칭한다. 데카르트는 이 순간에 신비적인 열정의 시기를 통과하였다. 그는 아마도 울름의 수학자 파울하버(Johann Faulhaber, 1580-1635)를 매개로 해서 장미십자단(l’Association des Rose-Croix)에 가입했을 것이다. 장미 십자단은 구성원들에게 의학에 대한 무상 훈련을 규정하였다. 이 시기에 수고본들의 제목은, 몇 줄만 남아있지만, 의미심장하다: 감각적 사실들에 근거 하는실험들(les Experimenta), 뮤즈들에 근거하는 파르나수스(le Parnassus), 신적인 사물들과 연관 있는 올림피카(les Olympica)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예언적 몽상을 갖던 시기의 싯구가 있다. 거기서 그는 학생시절에 외웠던, 라틴 시인들의 문집 속에 나오는 아우소니우스(Ausone, Ausonius, 309-394)의 싯구를 읽었다. “나는 이 생애에서 어떤 길을 따라갈 것인가?( Quod vitae sectabor iter?)” 이 구절을 그는 철학적 자기 소명의 기호로서 해석했다. (42)
1619년[스물셋]에서 1628년[서른둘]까지, 데카르트는 여행을 했다. 1623년[스물일곱]부터 1625년에 그는 이탈리아 로레뜨(Lorette)의 성당에서 성지순례를 완성했다. 이 성소에서 그는 자기 꿈의 찰나에까지 갈 것을 맹세했었다. 1626년부터 1628년까지 그는 파리에 체류하면서 수학과 굴절광학에 전념했다. 아마도 그 당시 그는 미완성으로 남긴 소작품을, 정신지도 규칙들(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을 썼을 것이고, 이 책자는 1701년에 출판되었다. 그리고 포르-르와얄 논리학(Logique de Port-Roya, 1662)(4부 2장, 1664)은 이 책의 XII규칙과 XIII규칙을 번역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추기경베릴(Pierre de Bérulle, 1575–1629)은 오라트와르 수도회를 세웠고, 자유사상가들에 반대하는 종교 소송에 봉사하도록 철학적 탐구들에 대해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42)
1628년[서른둘]의 말에, 데카르트트는 홀란드에서 혼자서 탐구하기 위하여 은거하였다. 1644년 프랑스로 여행을 제외하고, 여러 번 체류지를 바꾸기는 하였지만, 1649년까지 홀란드에서 머물렀다. 1628년에서 1629년까지 그는 자신의 자연학의 토대들을 마련하고자, 신의 현존과 우리 영혼의 현존에 관하여 “형이상학의 작은 논문”을 썼다. 1629년[서른셋]에 그는 자연학에 전념하기를 중단했다. 그 당시 그는 세계론(Traité du Monde)를 썼으며, 사람들은 1633년 까지 그의 서신왕래에서 이 논제에 대한 진행과정들을 추적할 수 있다. 1629년에 관찰된 환일(parhélie 幻日)들의 현상들에 관한 그의 반성들은 그를 자연의 모든 현상들에 - 인간과 인간 신체의 설명에 이르기 위해 행성들의 형성, 무게, 조수운동 - 대해 순서대로 설명하는 데로 이끌었다. 그 당시 자기 계획들을 변경해야만 할 사건이 생겼다. 갈릴레이(Galilei, 1564-1642)가 지구의 운동을 주장했기 때문에 교황청 교리성에 의해 단죄를 받았다. 그가 메르센(Marin Mersenne, 1588-1648)에게 1633년 7월 22일의 편지에서 “그것은 나를 매우 놀라게 했고, 나는 나의 원고 모두를 불태우고자, 또는 적어도 어떤 사람에도 보지 못하게 하고자, 거의 결심했다…. 나는 고백하건데 만일 지구의 운동이 거짓이라면, 나의 철학의 모든 토대들도 또한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지구 운동은 토대들에 의해 분명하게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머지를 완전히 불충분하게 함이 없이 그것[지구운동]을 나의 논저로부터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지구운동은 나의 논저의 모든 부분들과 그만큼이나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존저는 데카르트의 원고 속에 남아있었고, 1677년에서만 출판되었다. (43)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자연학을 인식하게 할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 시론들, 기상학(Météores), 굴절광학(Dioptrique), 기하학(Géométrie)이 1637년에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 1637)을 서문으로 나왔다. 그 시론들은 그의 사유에서 “그에게 갈 길을 준비하게 하고 또한 냇물을 건너기에 수심측정하게 하는 데” 용도로 쓰인다. 사실상 1635년에 끝낸굴절광학에서는, 1629년에 계속된 탐구들로서 유리를 세공하는 기계에 관하여; 1632년에 작성된 한 장으로서 굴절에 관하여; 세계론에 해당하는 장의 전개로서 시각에 관하여 등을 포함하고 있다. 기상학(Météores)은 1635년 여름에 구상되었고, 에 기하학(Géométrie)은 1636년에 기상학을 인쇄하는 동안에 구상되었다. 작품 전체의 초기 제목은 “우리의 자연[본성]을 보다 높은 정도의 완성으로 고양할 수 있는 보편과학의 기획이다. 굴절과학에 더하여 기상학과 기하학에서 저자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호기심 많은 재료들이 설명되었는데, 그러한 설명은 연구를 해보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할 정도였다.” 데카르트가 그것에 대체한 것은 “방법서설이다. 그것[방법]의 이법을 잘 인도하고 또한 과학들을 진리를 찾아가기 위한 방법서설에, 이런 방법들의 시도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을 보탠다.” (43)
1641년에 라틴어로 나타난 제1철학의 성찰들, 신의 현존과 영혼의 불멸의 증명(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in quibus Dei existentia et animae humanae immortalitas demonstrantur, 1641)은 1640년에 완성되었다. 데카르트는 아주 많이 신중하였는데, 메르센에게 편지쓰기를, 성찰들이 자신의 자연학의 모든 토대들을 포함하고 있고, 신학자들을 잘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성찰들을 젊은 홀란드 신학자인 카테루스(Johan Caterus, 1590–1657)와 소통했다. 1640년 말에 그는 메르센(1588-1648)에게 성찰들을 카테루스의 반대들과 그의 응답을 보태어 보냈다(첫째 반대들); 그의 의도는 메르센이 이 저술을 신학자들에게 알리게 해서, 즉 “작품에 대한 그들의 판단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이고, 또한 일반에게 공개에 앞서서 변경, 교정, 첨가해도 좋을 것을 그들로부터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는 소르본 대학의 신학자들에게 편지를 앞서 보냈다. 그는 그 신학자들에게, 불경들에 반대하는 자신의 증명들의 단호한 성격을 가치있게 하면서, 그들의 동의를 구했다. 이리하여 메르센은 여러 신학자들의 반대들(둘째 반대들)을, 홉스(1588-1679)의 반대들(셋째 반대들), 아르노(1612-1694)의 반대들(넷째 반대들), 가상디(1592-1655)의 반대들(다섯째 반대들), 다양한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반대들(여섯째 반대들)을 수집했다. 저술은 출판되는데, 뒤에는 데카르트에 대한 반대들과 그에 대한 응답들을 수록하였다. 마치 사람들은 소르본대학의 동의를 그러나 부당하게 예측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겉표지의 밑에 박사들로부터 시인받음(cum approbatione doctorum)이라고 인쇄했다.이런 언급은 1642년 판에는 사라졌다. 그 책의 제목은 변경되었다. - 신체로부터 구별된 영혼들(Animae a corpore distinctio)는 불멸하는 영혼들(Animae immortalis)을 대체했다. 게다가 이 편집본은 아르노에게 응답 속에 성체식의 이행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메르센은 초판본에서 그것을 삭제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수이트 부르댕(Pierre Bourdin, 1595-1653)의 반대도 실었다(일곱째 반대들). 마지막으로 서신은 다른 반대들이 있음을 알게 한다. 이 반대들에는 익명의 히페르아스피스트(Hyperaspistes)의 반대들과 오라트와르 신부인 지비외프(Guillaume Gibieuf, 1583–1650)의 반대들도 있다. 프랑스어 첫 번역 판본은, 데카르트가 부분적으로 검통하고서, 1647년에 나타났다. 그리고 또 1661년 판본은 일곱째 반대들을 포함하고 있다. (44)
자기의 생각을 넓은 영역에 침투시키기 위한 이런 끈질긴 노력에서, 게다가 개인적인 야망을 훨씬 넘어서, 그의 작품에 대한 깊은 가치가 있다는 감정과 관대함이 있다. “그 진실한 관대함은 한 인간이 그가 합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이 평가되게 하는 것이다.” 1642년에 그는 호이겐스(Christiaan Huyghens, 1629–1695)에게, 라틴어로 쓴 세계를 출판할 의도를, 그리고 그것을 철학 대전(Summa philosophiae)이라 이름 붙일 의도를 증거 하는데, “이제 자기를 박해했던 학교 사람들의 대화 속으로 보다 쉽게 스스로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이 대전이란 철학의 원리들(Principia philosophiae, 1644)이며, 1644년에 나왔다. 그 책에서 그는 옛 제수이트 스승들의 동의를,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다른 철학을 퍼트리기 위하여 가장 좋은 위치를, 탐구한다. 수도원장 삐꼬(Claude Picot, 1614-1668)의 프랑스어 번역은 1647년에 출판되었다. 그 번역에는 이런 철학의 일체 계획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에서 번역자에게 보낸 편지가 앞에 나온다. (45)
이 찰나에서부터, 데카르트의 주의를 끌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은 도덕적 문제들이었다. 보헤미아의 몰락한 왕인 프레데릭의 딸이며 홀란드에서 은신처를 찾았던 엘리자베스(Élisabeth de Bohême, 1618-1680) 공주와 그의 서신교환은, 그에게는 최고선에 관한 그의 생각을 전개할 기회였다. 그리고 서신 교환은 1649년에 출판된 그의 마지막 작품인 정념론(Des passions)에 이른다. (45)
홀란드에서 긴 체류는 논쟁들 때문에서 자주 갈등을 일으켰다. 1637년의 시론들은 과학적 사건들의 중요한 소식전달자(기자)인 메르센 신부에 의해 학자들에게 소통되었다. 그리고 그 시론들은 굴절광학에 관하여 모어(Henry More 1614–1687)와 홉스(Hobbes, 1588-1679)의 비판들을 그에게로 끌어왔다. 기하학은 프랑스 수학자들, 즉 페르마(Fermat, 1605?-1665)와 로베르발(Roberval, 1602-1675)과 더불어 아주 날카로운 톤으로 행한 토론의 기원이었다. 이 수학자들은 젊은 파스칼이 활동하던 영역에서 데카르트를 거의 공감하지 못하게 하였다. 데카르트는 그가 받았던 도전들에서 한 번 더 자신의 방법과 자기의 솜씨를 풍부하게 제시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열렬한 제자 본(Florimond de Beaune, 1601-1652)을 발견했다. 그는 기하학의 주석들을 달았고, 수튼(Frans van Schooten, 1615–1660)에 의해 라틴어 번역과 함께 1649년에 주석본이 나왔다. (45)
홀란드에서 행정관들과 대학교수들은 데카르트 철학의 성공에서 그들의 교육의 위험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위하여 폭력적으로 투쟁했다. 논쟁은 유트레이트 대학에서 의학 교수인 레기우스(Regius, 1598-1679)와 신학자인 보에티우스(Voetius, 1589-1676)사이에서 시작했다. 데카르트 옹호자인 레기우스는 “심지어 자연학에 대한 개별적인 강의들을 하고나서, 한 달도 거의 안 되어 학생들이 옛 철학을 완전히 조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혼란들은 1642년 3월 17일 유트레히트 시의 상원이 이런 철학을 교육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처럼 되었는데, “우선 왜냐하면 철학이 새롭기 때문이고, 그 다음으로 왜냐하면 철학이 젊은이를 오랜 정상적인 철학으로부터 방향을 돌리게 하기 때문이고… 마지막으로 왜냐하면 이 철학이 거짓이며 부조리한 다양한 견해들을 공포하기 때문이다.” 이 찰나에서부터 데카르트는 개인적 공격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스스로 방어하였다. 그는 1645년에 그로닝그 대학에서 완전히 무죄임을 밝혔다. 그러나 반복적인 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유트레히트 사법관들은 데카르트가 보에티우스에게 보낸 편지를 중상모략이라 선언했던 그들의 판결에 포기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레기우스에서 어떠한 도움도 발견하지 못했다. 레기우스는 그의 철학을 잘못 이해했고, 그는 1647년에 그의 영혼에 관한 주제들을 공격해야만 했다. 1647년 공격은 레이드 대학으로부터 왔다. 그 대학에서 신학자인 레비우스(Revius, 1586-1658)는 그를 법에 의해 벌 받는 범죄인 신성모독(le blasphème)이라고 고발했다. 데카르트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프랑스 대사에게 호소해야 했다. (46)
그는 홀란드에서 체류 하였는데, 프랑스로 세 번 짧은 여행을, 1644년, 1647년, 1648년에 여행 하는 동안에만 멈췄다. 둘째 여행에서 그는 젊은 파스칼(Pascal, 1623-1662)을 만날 것이고, 그가 나중에 쓰기를, 그는 그에게 수은을 사용하면서 진공에 관한 실험들을 행할 생각에 영감을 불어 넣어 줄 것이다. 그리고 이 여행에서 마자랭(Mazarin, 1602-1661)은 그에게 연금을 수여했지만, 그에게 지불된 적은 없었다. 그의 셋째 여행에서는 고등법원의 프롱드(Fronde Parlementaire, 1648-1649) 와 바리케이트가 쳐진 날과 마주친다. 그는 파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가 말하기를 파리의 공기는 “철학자들의 사상들 대신에 괴물들(chimères)을 생각하려고 하였다. 나는 파리에서 자신들의 견해에 자신들의 계산에 속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보편적인 질병이다.”(AT, V, 133).
1649년 9월에 그는 스톡홀름으로 가기 위하여 홀란드를 떠났다. 스웨덴의 크리스틴 여왕이 그를 스톡홀름에 체류하게 초청했다. 데카르트는 1650년 2월 11일 거기서 세상을 떴다. (46) (56VMC)
2절 방법과 보편 수학. La Méthode et mathématique universelle 46-56
1647년에 원리들의 프랑스어판 서문에서 데카르트는 자기의 학문을 철학의 전통적인 틀들에 따라서 분할하기를 원했고, 철학에서 논리학, 형이상학, 자연학으로 구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논리학은 학파의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모르는 진리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철학의 이법을 잘 인도하기를 배우는 철학이다. 논리학이 많이 의존하는 용법이라는 것을 위하여, 마치 수학들의 문제들에게 규칙들이 있는 것처럼, 쉽고 단순한 문제들을 다루는 규칙들을 실행함에 사람들이 오래 연습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46)
이 세 부분들로부터 어디에서 둘째 부분[형이상학]의 진술을 발견할지를, 즉 방법서설의 넷째 부분에서, 형이상학적 성찰들에서, 원리들의 제1권에서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셋째 부분[자연학]은 굴절 광학과 기상학의 대상, 세계론의 대상이 되고, 방법서설의 다섯째와 여섯째 부분의 대상이며, 원리들의 마지막 세권의 대상이 된다. 반대로 우리는 그가 여기서 말한 “논리학”을 발견하기 위하여 매우 당황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들에 또는 베이컨의 신 기관에 동화할 수 있는 어떤 기관(Organon)도 쓰지 않았다. 방법서설의 둘째 부분은 방법의 규칙들을 포함하고 매우 일반적인 부분으로 남아있다. 규칙들은 아마도 1629년에 쓰여 졌고, 미완성인 체로 남아있었다. 기하학도 있는데, 데카르트는 이 기하학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기를, 이 책은 “방법을 증명하는” 것이라 한다. 또한 이 책은 문제의 해결에서 방법을 전시하면서가 아니라 사용하면서, 그 방법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방법을 수학들의 기술(la techinique)에 권리상 순수하고 단순하게 동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학들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데, 수학들 그 자체로서, “불임의 수들과 상상적인 도형들”의 성질들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을 다른 많은 중요한 대상들에게 확장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절차들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 항상 데카르트는 수학들을 방법 자체로서가 아니라, 방법의 열매로서 소개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확신하건데, 이런 방법은 유일한 자연에 의해 인도된 고등한 정신들에 의해 눈치로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간 영혼은 나도 모르는 신적인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유용한 사유들의 초기 씨앗들은 맡겨져 있었고, 따라서 종종 씨앗들이 반대의 연구에 의해 상당히 무시되고 질식되었을 지라도, 그 씨앗들은 자발적인 열매들을 생산한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가장 쉬운 과학들에서, 즉 산술학과 기하학에서 본다.” (47)
역사적으로 그의 수학적 발견들의 경이로운 진수가, 있는 그대로 어떤 재료로서 “그의 사유들을 순서로 인도하기 위하여” 보편적 방법의 발견에 앞서는지 또는 뒤지는지를 아는 것은 어렵다. 그 경이로운 진수가 1619년 베크만의 가까이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리고 그 진수는 1637년에 기하학 속에서 방정식의 이론에 이르렀고, 그리고 1638년에 접선들(탄젠트)의 문제에 관해 편지에 이르렀다. (47)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방법 속에서 “연습하는” 데 쓰여 마땅한 통속적 수학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사람들이 수(le nombre)와 크기(la grandeur)를 대상으로 삼았던 순수수학들과 천문학, 음악, 광학과 같은 응용수학들로 나누었던 것[수학]들이 있다.우선 데카르트는 응용 수학들에 의해 이끌려 졌고, 1619년에 우리는 그가 무거운 물체의 낙하에서 속도의 증가에 대해, 음악의 현들에 대해, 단지의 밑바닥에 있는 액체의 압력에 대해, 그리고 나중에 굴절의 법칙들에 대해 전념했음을 안다. 그의 탐구들은 이 찰나에 마치 케플러와 갈릴레이의 탐구들처럼, 자연 법칙들에 대해 수학적 표현의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유는 이어서 아주 다른 방향으로, 즉 보편적 수학의 관념으로 향하였다. 보편 수학은 통속 수학들, 수들, 도형들, 별들 또는 소리들에 의해 연구된 개별 대상들을 수용하지 않았고, 단지 순서와 척도만을 고려했다. 순서(l’ordre)에 따르면 한 항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다른 항의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척도(la mesure)에 따르면 대상들은 동일한 한 단위(une même unité) 덕분에 서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 (48)
따라서 그 철학자가 방법을 연습하기 위하여 실행해야만 하는 이런 보편 수학이 무엇인가? 그것의 근본적인 관념은 기하학의 마지막에 표현되어 있다: “수학적 진행들에 관해서, 사람들이 둘 또는 셋의 초기 항들을 가질 때, 다른 항들을 발견하는 것은 불편하지 않다.” 하나의 진행(une progression)은 본질적으로 뒤의 것은 앞선 것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배열된 일련의 항들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경우에서 순서는 각 항을 마땅한 자리에 놓도록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항들에게 할당된 자리에 의해서 알려지지 않은[미지의] 항들의 값을 발견하게 해준다. 그 순서에는 발명하고 창조하는 능력이 있다. 데카르트는 방법이 순서 속에서 있다는 것을 찾아낸 첫째 철학자는 아니다. 라무스(Ramus, 1515경-1572)이래로 보다 더 평범한 관념은 없다. 그러나 앞선 논리학자들에게서, 순서는 이미 발견된 항들의 다소 임의적인 성향이다(t. I, 688). 데카르트에게서 그 진행은 정신의 어떠한 임의적 관점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항들의 자연[본성]에 내속하고 또한 항들을 발견하도록 하는 순서의 전형을 표시한다. (48)
그런데 하나의 수학적 문제에서, 값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인 미지의 크기들은 문제의 자료들 속에서 암묵적으로 정의된 관계들에 의해 알려진 항들에 항상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기하학의 1권에 해법이 포함되어있는파푸스(Pappus, 290경-350경)의 문제는, 가장 단순한 형식 하에서 3직선이 위치가 주어지면, 하나 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부터 사람들은 선들 위에, 선들과 더불어 주어진 각도들을 만드는 직선들을 그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마치 첫 두 직선들의 생산이 셋째 직선의 정방형에 동일한 것과 같다. 그러면 “알려지지 않은[미지의] 선과 알려진[기존의] 선 사이에 어떠한 차이를 고려함이 없이도, 사람들은 순서가 지시하는 대로, 어떤 점에서는 선들이 서로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모두들 중에 가장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동일한 양을 두 방식으로 표현하는 수단을 발견했던 데까지 어려움을 따라가야만 한다. 이것을 방정식이라 이름 짓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알려지지 않았던 선들을 가정했던 방정식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러한 방정식들을 틀림없이 발견한다.”(AT, VI, 372.) “자연적” 순서는 이처럼 분명하기 때문에, 미지의 값은 방정식의 해법에 의해 해결된다. 이리하여 순서의 발명적 능력은 진실로 방정식들의 기법(l’artifice, 인위)에 의해 증명된다. (49)
보편 수학은 그 당시에 여러 기술적 난점들을 극복해야만 했다. 첫째로, 보편 수학에 연결된 기학적인 모든 표상들로부터 대수학을 구별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제시하면 기하학을 열었다: 즉 만일 a와 b가 직선들을 표현한다면, a x b 즉 a2은 사각형 또는 정방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b가 단위에 속하듯이 a에 속하는 다른 직선이라는 것이다. 지수(un quotient, 몫)과 근(une racine)은 마찬가지로 직선들을 표현한다. 일반적 방식으로 조작들의 결과들은 항상 직선들이다. 둘째로, 방정식들의 해답의 방법들을 깊이 탐구해야 하는데, 방정식들 그 자체로 다루어야 하고 사람들은 부호들(les symboles, 상징들)을 어떠한 기하학적 크기[도형]와 연관시키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기하학 3권의 첫 절반 부분의 목적이다. 마지막으로 장소들의, 즉 선들의 구축작업과 같은 기하학적 문제들의 해답에서 이런 방법의 풍부성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그 선들의 모든 점들은 주어진 속성로과 관계를 맺는다.여기에 소위 말하는 분석기하학(la géométrie analytique)이 있다.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수학적 작품을 가끔 이 분석기하학에 (잘 못) 환원하고 있다. 사람들은 좌표의 기법(l’artifice, 인위) 덕분에 어떻게 한 직선의 모든 점들이 규정될 수 있는지를 안다. 만일 사람들이 비규정적인 두 직선 사이에 계수적(constant, 상수적) 연관을 안다면 말이다. 두 직선의 교차점들은 각각이 곡선의 점들을 부여한다.이리하여 모든 문제는 두 직선들 사이의 연관의 법칙에 의존한다. 그 연관은, 사람들이 이미 보았듯이, 대수학이 다루는 수단들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곡선들의 성질들 또는 속성들의 인식은 대수학적 계산에 귀착되었다. (49)
그러한 것이 보편 수학이다. 이 수학의 절차들은 오늘날 과학의 실체 안에 들어있다. 그러나 보편 수학은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간단한 대상들에게 그것의 적용[응용]일 뿐이다. 데카르트의 방법, 그것은 보편 수학 그 위에서 그것을 생성하게 하고, [또한] 그것은 지성이 자신의 고유한 자연[본성]을 다루는 인식이며, 따라서 자기 훈련의 조건들이다. 지혜는 “삶의 각 상황에서, 지성이 우선 의지에게 자기가 취해야할 방편을 제시한다”(규칙들, I.)는 점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은 자기의 빛을 증가하게 해야만 하는데, “학파의 이런저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제시하는 모든 대상들에 관하여 굳건하고 진실한 판단들을 운반하는 방식으로 규제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인식하는 능력들 가운데, 지성, 상상작용, 감관, 기억들이 잇다. “지성만이 진리를 지각할 수 있다.”(규칙들, XII.) 따라서 우선 현자가 전념해야 하는 것은 단지 지성의 인식이다. 데카르트가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물들의 성질들을, 즉 광물질과 다른 비슷한 물질들의 변전작용들을, 아주 많이 정성스럽게 연구한다. 반면에 소수의 사람들이 겨우 지성에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보편 과학에 전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철학자들은 지성의 자연에 관하여 성찰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어느 네오플라톤주의자처럼 존재들의 형이상학적 층위들에서 자기 위치를 규정하기 위해서도, 게다가 어는 소요학파학자처럼 감각작용들로부터 관념들의 형성작업의 메카니즘을 찾기 위해서도, 지성에 전념하지 않는다. 우리가 곧 보게될 이 두 질문은 18세와 19세기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꽁디약은 관념들의 기원도 발생도 알지 못했다고 데카르트를 비난하지 않았던가?) 그는 그것에 대해 배려하지 않앗다. 그리고 그에게서 예지(l’intellectus)는 설명해야할 실재성이 아니라, 출발점이고 지지점이다.과학들은 그 자체들 사이에서 그것들의 대상들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자체와 동일한 지성의 다양한 형식들 또는 국면들처럼 구별되는 것이다. (규칙들, I.) (50)
우선 이 지성을 순수 상태로 파악해야만 한다. 지성을 “상상작용으로부터 속고 있는 감관들 또는 판단들의 변할 수 있는 증거로부터” 떼어내면서 말이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지성의 두 가지 본질적 능력들을 구별할 것이다. 직관과 연역법이다. 직관은 “순수하고 주의 깊은 정신의 개념작업인데, 그 개념작업이 너무나 쉽고 너무나 분명하기에 정신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절대적으로 어떠한 의심도 우리에게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연역법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의 진리를 마치 우리가 보증했던 다른 진리의 귀결인 것처럼 이해한다. (50)
데카르트의 어휘는 전통 철학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는 그 어휘를 가지고 불가사의를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선언했다: “나는 이런 표현들에서 학파들에 의해 주어진 의미들를 거의 불안해하지 않는다.” (규칙들, III.)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온 언어 속에서 직관이란 단어는 다음 세 가지 인식을 동시에 의미한다: 판단이 항들로부터 만든 종합에 앞서서 항들의 인식, 개념의 다양한 요소들을 연결하는 통일성의 인식, 마지막으로 현재 나타나는 대로 현재하는 사물의 인식. 앞의 두 가지 경우들에서, 따라서 직관은 요소들에 도달하고, 판단들은 요소들로 형성된다. 마찬가지로 데카르트의 직관은 우선은 “단순한 자연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것은 단순 자연들로 조성된다(composer). 그가 주목하기를(규칙들, XII.), “종종 함께 결합된 여러 자연들을 검토하는 것이 그것과 다른 자연들을 분리하는 것보다 쉽다. 이리하여 예를 들어, 나는 삼각형을 인식할 수 있다. 비록 내가 이런 인식 속에서 각, 선, 등등의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결코 주목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삼각형의 자연은 이런 모든 자연들로부터 조성되었다고 또한 자연들이 이 삼각형보다 더 잘 알려진다고 – 왜냐하면 사람들이 삼각형에서 이해하는 것은 자연들이기 때문에 - 우리가 말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러나 우선 이 단순한 자연들을 주목해보자. 너비, 운동, 도형은 판단을 조성하는 개념들이 아니라, 실재성들이며, 이것들의 조합은 다른 실재성을 낳는다. 이어서 이것들의 단순성은 추상작용의 단순성이 아니다. 그리고 한 항이 보다 단순한 만큼이나 보다 추상적이기는 커녕, 진리는 그 반대이다. 예를 들어, 물체의 추상적 표면은 마치 물체의 한계[경계]인 것처럼 정의된다. 물체의 개념을 포함하는 표면은 한계보다 덜 단순하다. 단순한 자연들은 지성에게서는 환원할 수 없는 마지막 항들이며, 매우 분명하여 그 자연들은 직관에 의해서 단지 고려될 수 있지만, 보다 분명한 어떤 사물로[것으로] 설명될 수도 환원될 수도 없다. “도형, 크기, 장소, 시간 등과 같은 사물처럼 매우 단순하고 또한 자연적으로 인식되는 이런 사물들”의 “어떠한 논리학의 정의”도 없다. (AT, II, 597) (51)
데카르트에 따르면 직관은 용어들에 도달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음과 같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에 도달한다. 즉 나는 현존하다. 나는 생각한다. 공은 하나의 표면만을 갖는다. 심지어 단순하고 현존이며 사유된 자연은, 우선은 사람들이 이것[자연]을 주장하는 또 일종의 추상에 의해서만 자연을 따로 떼어낼 수 있는, 한 주체 속에서 파악된다. 예를 들면 수는 셈 한 것[사물] 속에서만 있다. 수(數)에게 경이적인 성질들을 부여한 피타고라스학자들의 “광기들(folies)”는, 만일 그들이 수를 센 사물로부터 구별로서 생각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규칙들, XIV.) 따라서 오성의 첫 진행방식은 사람들이 명제들을 제작하는데 쓰는 개념이 아니라, 확실함이 진리들에로 – 이 진리들은 직관적 인식에 의존하지만- 점점 널리 퍼지는 분명한 진리들의 직관적 인식이다. (52)
결국에는 사람들은 직관에 의해서 진리들뿐만이 아니라 진리와 무매개적으로 직관에 의존하는 진리 사이에 연결을 지각한다(예를 들어, 한편 1+3=4, 2+2=4와 다른 한편 1+3=2+2 사이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공통 용어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다음과 같다. 두 사물이 셋째 사물과 동등인 것은 그 사물들 사이에 동등이다. 이것은 이런 연결의 직관으로부터 무매개적으로 밝혀진다. (52)
그러한 것이 그의 삼중 형식 하에서 직관, “자연적 빛”, “지적 본능”이다(AT, VIII, 599). 직관에 의해서 우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그리고 무수히 많은 명제들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인식들을 획득할 것이다. (52)
이런 증명은 지적인 둘째 조작을, 즉 연역법을 수단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연역법에 의해서 “우리는 어떤 다른 사물들의 귀결이라는 모든 사물들을 이해한다.”(규칙들, III.) 데카르트의 연역법은 그 학파의 삼단논법과 아주 다르다. 삼단논법은 개념들 사이의 연결이다. 그런데 연역법은 진리들 사이의 연결이다. 삼단논법의 3항의 연결은 복잡한 규칙들에 복종되어 있고, 사람들은, 삼단논법이 결론을 내는지를 알기 위하여 규칙들을 기계적으로 적용한다. 그런데 연역법은 직관에 의해 알려지고, 그러한 명증성과 더불어 “사람들은 연결을 깨닫지 못한다면 연결을 빠뜨릴 수 있지만, 추론에 가장 부적합한 지성이라도 연결을 잘못 할 수 없다.”(AT, X, 369) 따라서 데카르트의 연역법 속에 확실한 명제들을 위한 장소만 있는데 반해, 삼단논법은 그럴듯한 명제들도 인정한다. (52)
이런 모든 차이들은 쉽게 설명된다. 만일 사람들이 잘 본다면, 연역법의 전형은 측정의 단위를 수단으로 해서 두 크기들의 비교이다. “순수하고 단순한 직관에 의해 획득되지 않은 모든 인식은 둘 또는 여러 대상들 사이에서 비교에 의해 획득 된다…. 완전한 추론에서 우리가 진리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단지 비교에 의해서이다…. 만일 자석 속에 우리의 오성이 비슷한 것 어떠한 것으로부터 지각 못했던 한 종류의 존재가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추론에 의해서 인식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규칙들, XIV.) 미지의 사물의 자연은 알려진 사물들과 그것의 관계를 수단으로 해서 규정되고, 연역법에 의해 알려진 모든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처럼 속성이 게다가 자연으로부터 이미 알려진 주어에 속하는지를 찾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마치 진행의 항이 그 항을 생겨나게 하는 진행의 이치 덕분에 전적으로 규정되는 것처럼 주어의 자연 자체를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데카르트의 연역법은 본질들의 규정작업에 대한 문제의 해법, 즉 소요학파가 부딪혔던 문제의 해법이다. (53)
직관과 연역법은 방법이 아니다. 방법은 “진리에 반대인 오류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직관의 사용을 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우리가 모든 사물들의 인식에 이르기 위하여 어떻게 연역법이 조작되어야 하는지”를 지적한다. (규칙들, IV.) 사람들은 수학자가 명제를 증명하기 위하여 직관과 연역법이 자기의 배치에 맞는 분명한 명제들 가운데, 현재 경우에 유용할 수 있을 명제들을 선택한다는 것을 안다. 새로운 진리는 명제들의 수렴 덕분일 것이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수학자들의 비난하는 것, 그것은, 아무리 “행복한 우연”의 결실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들이 어떻게 이 선택을 조작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규칙들, IV.) 이 방법의 문제 전체는 선택에 규칙을 부여하는 것이다. “방법 전체는, 어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하여 그의 정신을 사물들을 향해 둘러보게 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그 사물들의 순서와 배치에 있다.(규칙들, V.) 진리를 보는 것도 연역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주어진 문제에 관심있는 명제들의 사물들을 착오 없이 선택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53)
사람들은 데카르트가 “규칙 VI”에서 묘사한 연습에 의하여 결과에 도달한다. 사람들은 거기서 세 시기를 구별할 수 있다. “우선선택 없이 스스로 제시되는 모든 진리들을 모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그것으로 어떤 다른 것들을 연역할 수 있는지를 점진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후자의 어떤 것들로부터 또 다른 것들을 연역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등등으로.” 이리하여 나는 연속적인 비례로 된 수들 중에서 앞선 수들을 항상 두 배로 하면서, 어떤 수들을 다른 수들로부터 연역한다. [둘째로] “그런 것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이 발견했던 진리들에 관하여 주의 깊게 반성해야 하고, 그리고 왜 사람들은 다른 것들보다 어떤 것들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는지를 또 진리들이 어떤 것들인지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이리하여 앞선 진행과정 속에서 나는 앞선 항을 두 배로 하면서 쉽게 다음 항을 발견한다. 그러나 나는 3과 12라는 두 극단들 사이에 삽입하는 비례 중항을 더욱 어렵게 발견한다. 왜냐하면 3과 12사이에 현존하는 비례로부터 중항을 결정하게 해줄 수 있는 다른 비례[항]를 연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셋째 시기)으로, “우리가 어떤 정해진 문제에 접근하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탐색에 의해 시작하는 것이 알맞을지를 이렇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규칙들에 따르면, 방법은 무엇보다, 새로운 문제 앞에서 얼마나 많은 진리들을 또한 그 해법이 의존하는 어떤 진리들을, 우리에게 알도록 해주는 일종의 도식들을 정신 속에 소유하게 하는데 있다. 그리고 “진리들을 그의 기억 속에{마치 삼단논법의 규칙처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필요할 때마다 정신들[일반인들]이 곧바로 진리들을 발견하는 그런 방식으로 정신들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순서의 발견은 규칙의 기계적인 응용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으나, 정신을 강화하면서 연역의 자발적인 능력들의 실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54)
이로부터 방법은 사물들(그 사물들의 인식이 다른 사물에 의존하지 않는)과 사물들(그 사물들의 인식이 항상 조건적이라는) 사이에서, 즉 절대적인것(l’absolu)과 상대적인것(le relatif) 사이에서 구별하는데 우리 스스로 익숙해야 한다. 게다가 이 두 용어들은 다음처럼 고려된 문제의 자연[본성]에 의존한다. 즉 기학학적 진행에서, 절대적인 것은 이법(la raison)이며, 그 이법은 절대[항]로부터 모든 다른 항들을 규정하게 해준다. 물체의 척도에서, 절대적인 것은 체적의 단위(l’unité, x3, 통일성)이다. 체적의 척도에서, 절대적인 것은 길이의 단위이다. 일반적 방식으로 절대적인 것은 문제의 해법의 궁극적 조건이다. (54)
방법 전체는 순서[질서] 속에 있는가? 처음에는 열거(l’énumération)이다. ‘규칙 7’의 대상인 열거는 발견의 규칙이라기보다 직관의 범위를 증가하게 하는 실천적 절차인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연역은, 마치 연쇄로 된 진리들처럼, 중단 없는 운동이라고 회상한다. 이렇게 직관적으로 하나의 진리를 이웃하는 진리와 통일하는 연결을 본 후에, 사람들은 (거기에 열거가 있는데) “기억의 거의 도움 없이도 한 눈에 연쇄고리들을 파악하는 것으로 보이기에 위하여 그 여러 연쇄고리들을 급히 추적하여 따라갈 수 있다.” 연속적인 명증들은 하나이고 순간적이 된 유일한 명증으로 스스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이 유일한 명증에서, 단 하나의 관점으로 사람들은 첫째 진리와 마지막 진리 사이에 연결을 배운다. 그러나 열거는 또한 약간 다른 조작[작업]을 지시하는 것 같다: 데카르트가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스스로 제기한 목표에 연관 있는 사물들의 각각을 따로 연구해야만 한다면, 인간 각각의 삶은, 왜냐하면 사물들이 너무 수가 많기 때문이든지 또는 왜냐하면 동일한 것들이 너무 자주 우리 눈 아래 되돌아오기 때문이든지, 그러기[따로 연구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열거는 방법적 선택이며, 이 선택은 제기된 문제에 필요하지 않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것이고, 또한 사물들을 고정된 종류[분류]로 축소[환원]하면서 특히 수많은 개별적 경우들의 검토를 회피하는 것이다. 이는 예를 들어 마치 사람들이 원뿔의 모든 절단을 세 분류로 환원하는 데, 원뿔을 자르는 평면이 원뿔의 축에 따라 수직적인 평면, 수평적인 평면, 경사진 평면인 것에 따라 세 부류인 것과 같다. (55)
데카르트가 메르센에게 편지 쓰기를, “내가 물질들의 질서를 알지 못하지만, 단지 이법들(raisons 이치들)의 질서[순서]를 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AT, III, 260.)거기에 데카르트의 방법의 결정적인 특징이 있다. 생산 작용의 실재적 순서 대신에 그 방법은 사물들에 관한 우리 주장들을 합법화하는 순서로 대체한다. 이로부터 방법서설의 네 가지 유명한 규범들(les préceptes)이 나온다. 이제 그 규범들의 의미를 보는 것은 쉽다. “첫째규범은 내가 명증하게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지 못했던 어떠한 것도 진실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정신을 의심하리라는 어떠한 기회도 갖지 않았을 정도로 나의 정신에게 매우 분명[명석]하게 또 매우 구별[판명]하게 나타날 것 이외 어떠한 것도 나의 판단들에서 결코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규범은 지성의 자연적 빛 이외에 인식의 다른 모든 근원을 배체한다. 한 관념의 명석함은 주의 깊은 정신에게 이런 관념의 현전 자체이다. 판명함, 그것은 관념이 그 자체 속에 포함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며, 한 관념을 다른 관념과 혼동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인식이다. 그것은 확실히 방법을 구성하는 자연적 빛이 아니다. 왜냐하면 직관도 연역도 배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들을 사용하기만을 배울 수 있다. “둘째규범은 내가 검토해야할 난점들 각각을, 가장 잘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또 요구되는 한 작은 조각들로, 분할하는(diviser) 것이다. 셋째규범은 순서에 따라 나의 사유들을 인도하는 것인데, 인식하기에 가장 단순하고 가장 쉬운 대상들에 의해 시작하여, 마치 정도들처럼 조금 조금씩 올라가서, 가장 복잡한 인식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적으로는 서로들 간에 결코 진행될 수 없는 대상들 사이에 심지어는 순서가 있는 것으로 가정하면서” 말이다. 순서(l’ordre)에 두 규칙이 있다. 첫째 규칙은 단순한 자연들과 한 문제의 절대적인 것(l’absolu)(문제의 방정식들의 탐구)을 분간하기를 권장하는 것이다. 둘째 규칙은 충분히 말끔한 방식으로 점점 더 복잡한, - 규칙이 우리에게 알게 해준 - (방정식들의 구성 같은) 도식 종류들의 형성 작업에 참조하는 것이다. “마지막[넷째] 규범은 내가 결코 빠뜨리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아주 완전하게 나열하기들(dénombrements)과 매우 일반적인 검토들(revues)을 도처에서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 충분적인 모든 것을 방법적으로 찾아낸 열거(l’énumération)이다. 왜냐하면, 담론의 라틴어 번역에서 첨가된 단어들이 이를 알게 해주는 것처럼, 기억에 의해 일단 만들어진 증명들을 다시 다룬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증명들을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56) (56VMH)
첫댓글 데카르트를 읽고 있으면, 데카르트는 다른 생각을 했고 달리 표현하기를 했다. 그게 그 당시의 새로운 사유였다.
그런데 그가 그리스를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지 않다. 단지 라틴어로 된 글에서 그리스어를 간접적으로 읽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의 글에는 플라톤의 언급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박하기 위해서라도 언급이 있어야 한다.
그의 시대 특징이기도 하지만, 자연 즉 세계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유행하는 경향이었다.
그의 인식에서, 자연을 대하는 방법이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은 자연(세계)의 탐구였다.
프랑스위키, 데카르트 항목에서(231216)
아쭈비(François Azouvi, 1945-)는 1960부터 1996년사이에 데카르트에 관한 논문 4,402편을 검토하였다. 그 중에서 앵글로색슨 세계에서 1745편, 프랑스언어권에 1334편이 있었다. 앵글로 색슨 세계에서 문제제기들은 실체의 이원론, 언어, 관념들의 지위를 주로 다루었고, 프랑스어권의 논쟁은 방법에 관해 집중적으로 다루었으며, 논증들의 체계성, [신에 관한] 세 가지 현존 증거에 대한 특수화된 형이상학을 다룬다.
참조: François Azouvi, Descartes, symbole national et mythe universel, dans l'émission Concordance des temps, 14 mai 2011
- [아쭈비(François Azouvi, 1945-) 멕시코 태생 프랑스인 철학자, 역사가. 파리1대학에서 공부, Descartes et la France, 2002, La gloire de Bergson. Essai sur le magistère philosophique, 2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