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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문학 특집 (우제봉 시인 조명)
시, 바람, 연모의 현상학
- 청암靑巖 우제봉의 시세계
신익선/문학평론가⸳문학박사
1. ‘시’의 서사
시인의 언어는 언어의 원천이다. 시인이 진설해 놓는 언어를 통한 이미지가 사상思想을 앞서고 개념槪念을 초월하는 까닭이다. 통상, 철학이 새로운 개념의 전개라면 시는 정신의 언어적 표현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기실 시는 정신과 육체라는 인간의 영육에 대한 이원성이 아닌, 정신을 초월한 그 이상의 존재, 이를테면 신비한 영혼이라든가 혼령의 현상학이라 하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한 자리에 북 박혀 서 있는 ‘바위가 길을 가고, 나무가 길을 가는’ 이성과 인식을 뛰어넘는 초자연적 현상이 벌어지겠는가. ‘바위’나 ‘나무’처럼 어찌 ‘세상 모든 것들이/제 길을’ 가고, 우제봉 시인 역시 평생 ‘시인의 길’을 걸어왔다고 시집 서두부터 태연하게 단언할 수 있겠는가. 충남 예산군 대술면에서 태어나 지금도 대술 고향 집에 살아가는 청암 우제봉은 그의 세 번째 시집인 『가을 은행잎』 서문에 명확하게 그를 선언하면서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연다.
바위는 제 길을 간다
나무도 제 길을 간다
세상 모든 것들이
제 길을 간다
나도 내 길을 간다
꽤나 오랜 세월
황소처럼 뚜벅뚜벅
시인의 길을 걸어왔다
가면 갈수록
미궁에 빠지는 시인의
길을 걸으면서
영원히 남을
옥석을 찾으러
눈에 불을 켜본다.
-「서문」 전문
사람만이 ‘길’을 걷는 게 아니다. 인간만이 이 지구상에서의 인생길을 살아가는 게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서로 왕래하고 소통하며 살 듯이 ‘바위’도, 그리고 ‘나무’도, 서로 왕래하고 서로 소통하며 산다. 우주 만물이 다 제각각 ‘제 길’을 걸어가며 산다. 그러나 일반 여느 사람들 눈에 안 보이는 ‘바위’의 이동, 그리고 ‘나무’의 외출을 본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서문의 화자가 세속을 초월한 시각과 풍류를 지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무언가 새로운 시안詩眼이 뇌리를 칠 때만이 표현 가능한 시의 언어인 것이다, 더구나 시인 스스로가 일, 이년 후에 구순九旬이란 점을 상기해 보면 이런 언어의 설정은 한 여름철 산골짜기 냇가 반딧불처럼 반짝거린다. 그러고 보니 실제로 정말 반딧불인가. 시집의 초입에서부터 그런 고백을 듣는다. ‘나도 내 길을 간다.’라고 말한다. ‘꽤나 오랜 세월/황소처럼 뚜벅뚜벅/시인의 길을 걸어’왔음도 직시한다. 직설적으로, ‘꽤나 오랜 세월’, 노년의 시간에 닿도록 ‘황소’처럼 시인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의 길’이라 한다. 아득하여라, ‘시인의 길’이라니, ‘시인’은, ‘시인의 길’은 음지陰地나 맹지盲地 정도가 아니다. ‘시인’은 음습陰濕하고 음험陰險하며 독충에 물리면서 밀림지대를 알몸으로 통과하는 것, 그 이상의 험로가 예정된 운명 아니랴. 아찔하여라. 아무런 대책 없이 그 길을 들어서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상처투성이 시인의 길을 준비하고 있는 것 아니랴. 그리하여 ‘시인’, ‘시인의 길’은 누구나 막론하고,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고 고대하는 꽃길이 아니다. 그 반대다. 고난의 가시밭길이 점철될 길의 여정이 예고되어 있다. 그것이 시인이 지상에 살아가면서 등에 짊어지고 일생을 살아가는 생애의 숙명이다. 그래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시’의 탄생은 험난한 개인사를 담보한다.
시인에게 있어 시집이라는 언어의 일대기, 시어라는 일생의 여정은 그리하여 흔히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사계四界에 맞닿아 있다. 즉 세계를 이루는 기본적인 네 가지 물질들인,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을 알몸으로 감내하는 일이 거의 숙명적으로 전개된다. 그 이외에도 생살이 터지는 삶을 이름한다. 시인은 무한한 자신만의 심적 고뇌로 뒤덮인 동토의 ‘겨울’이라는 ‘여로’를 걷는 자들인 것이다. 한없이 ‘쓸쓸하고 외로운’ 자들의 이름, 출구가 안 보이는 ‘긴긴 터널’을 통과하는 이들의 이름인 것이다. 또다시 더더욱 아득하여라. 그렇기에 ‘시’, 그리고 ‘시인의 길’이란, 시인 자신의 고독한, 필연적으로 무한 고독하여야 할 생애 내내 ‘시’ 쓰는 일 말고는 모든 것이 다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다. 그를 직시한 아래의 몇몇 시편을 보자.
①고독하고 가슴 저미는 아픔의 나날
쓸쓸하고 외로웠네
긴긴 터널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네
한여름 천지를 불덩이로 달구던
그 태양이
오늘도 허공에 매달렸는데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어둠에 누운 밤에도 춤추네.
-「겨울」 전문
②길 위를 걸었다
어제도 걷던 길
오늘도 그 길 위에
두툼한 침묵으로 족적을 남겨 보지만
갈구하는 무지개는 저만치 누워서 웃고
화사한 꽃들이 펼쳐진 길
늘 멀리서 춤추고
걸음은 비몽사몽 잠결이었나
구비마다 피땀 흘린 우여곡절 곡예
노을진 영혼 상실의 무게로 눌리고
모든 꿈이 떠난 쓸쓸함만 가득한
이 황량한 길 위에서
초라하게 찢긴 육신
정처 없이 떠나는 한 조각 구름이었나
-「여로」 전문
길, ①의 시편에서 등장하는, ‘고독하고 가슴 저미는 아픔의 나날’을 만나는 일은 ‘길’에서 얻은 ‘길’의 서곡序曲이다. 눈에 뒤덮여 ‘길’이 드러나지 않는 ‘겨울’에 이르러서야 화자는 지나온 봄, 여름, 가을을 회상한다. 지상의 사계를 걸어오면서 맞닥뜨린 ‘겨울’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보는 일이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회상하는 ‘쓸쓸하고 외로웠네/긴긴 터널은/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네’어조가 숙연함을 갖게 한다. 겨울 황혼, 우제봉 시인은 평생을 교육계에 봉직하면서 시인의 길을 걸어와 겨울에 서 있다. 일생 순간순간마다 진실로 선하고 진실하며 정의롭게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온 ‘길’은 외견상 평온하였다. 그윽하였다. 그런데 시인의 겨울이 어째서 ‘쓸쓸하고 외로운’ 것인가. 어째서 ‘긴긴 터널은/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인가. 간단하다. 그것은 일 년이라는 사계 중에서 ‘겨울’이 동토凍土이기 때문이다.
‘겨울’의 ‘길’은 필연적으로 질척거린다. 내려 쌓여 있는 눈이 서서히 녹아 물이 되어서이다. 그 모양새가 흡사 ‘아픔’을 참아가면서 살아가는 이 땅의 ‘시인’ 군상을 표상한다. 지상에서 시인의 아픔이란 흡사, ‘한여름 천지를 불덩어리로 달구던’ 계절을 지나서 ‘눈’ 내리는 ‘동토’의 생애를 살아가기 시작하는 「겨울」 시편 풍경과 유사하다. 시인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외로운 자의 호칭이다. 자랑이나 박수받을 일 등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일찍이 백석 시인은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일부)이라 썼다.
그와 여일하다. 우제봉 역시 ‘시’, 그리고 ‘시인의 길’을 걷지 않았다면야 ‘긴긴 터널’이, 그리고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 순간들을 저토록 가감 없이 명료하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시’, 그리고 ‘시인의 길’을 품었기에 언어의 눈,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어둠에 누운 밤에도 춤추는’ 것이다. 여기서 ‘눈’은 ‘언어’의 은유다. 누가 알겠는가. 시인은 그의 흉중에 무수한 언어의 눈보라를 간직하고 산다. 언어는, ‘어둠’이 내리면 모든 이들이 눕지만, 시인의 ‘언어’는 저 스스로 ‘춤추기’를 그치지 않는다. 이 말은 쉬이 붙잡히지 않는 무수한 언어의 영상. 무수한 언어의 이미지에 대한 시인의 안타까운 촉수를 나타낸 문장이다. 심란하고 안타까운 것도 각자 춤추는 손手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춤추기’는 우제봉의 일생 전반을 회고하는 시편인 ②의 시편, 「여로」에서도 여일하게 드러나는 표현이다. ‘오늘도 그 길 위에/두툼한 침묵으로 족적을 남겨보지만/갈구하는 무지개는 저만치 누워서 웃고/화사한 꽃들이 펼쳐진 길/늘 멀리서 춤추고’의 시행이 그것이다. 이 시편에서 ‘춤추는’ 주체는 누구인가. 전항 「겨울」의 ‘침묵’인가, ‘무지개’인가. 실제로 그건 ‘꽃’이다. 여기서 ‘꽃’은, 「겨울」 시편에서의 ‘눈’이다. 시인이 갈구하는, 갈망하는, ‘무지개’는 잡히지 않는다. ‘화사한 꽃들이 펼쳐진 길’이 있지만, 화자는 그 길에 진입하지도 못한다. ‘멀리서 춤추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문장 역시 ①의 시편처럼, 쉬이 붙잡히지 않는 무수한 언어의 영상. 무수한 언어의 이미지에 대한 시인의 안타까운 촉수를 쓴 문장이다. 심란하고 안타까운 것도 각자 춤추는 손을 갖고 있다, 에 필적한다. 붙잡지 못한 언어들에 대한 시인의 안타까움이 읽히는 대목이다.
시인은 일생에 걸쳐 걸어온 길을, ‘걸음은 비몽사몽 잠결이었나’로 귀착시킨다. ‘구비마다 피땀 흘린 우여곡절 곡예/노을진 영혼 상실의 무게로 눌리고’라는 지극히 절망적인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초라하게 찢긴 육신’인 시적 화자가 ‘모든 꿈이 떠난 쓸쓸함만이 가득한’ 지경을 보는 것이다. ‘황량’의 의미가 ‘길’을 걸어오면서 일생을 동고동락한 나의 육신이란 결국, 늙고 노쇠하여 ‘초라하게 찢긴 육신/정처 없이 떠나는 한 조각 구름이었나’의 의문에 닿는다. 외견상 표현이 의문이지 실질은 ‘한 조각 구름’이라는 결론이다. 이 역시 불가의,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부운자체본무실浮運自體本無實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에 맞닿아 있는 식견이다. 생이란 한 조각 구름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것이다. ‘바위’는 결국 ‘한 조각 구름’의 희⸳노⸳애⸳락喜怒愛樂 일상이 사람의 덧없는 일대기였다는 알게 된다. 그 깨달음의 시편, 「여로」를 비롯하여 무수한 시편들로 환생하여 이들이 하나로 뭉쳐 다시 우제봉 ‘시’의 서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2. ‘바람’의 서사
우제봉 시 세계에서 줄기차게 거론되는 하나의 음조가 세월歲月이다. 날이 새면 바뀌는 밤과 낮, 흘러가는 해와 달, 즉 광음光陰을 뜻하는 세월은 그 안에 시간을 품은 단어다. 지나고 보면 시간의 집합체인 세월은 사람 일대기에서 그 모든 것이 그야말로 순식간임을 깨닫게 한다. 세월은, 시간을 포괄하는 일 년, 십 년, 백 년을 순식간에 삼켜버린다. 그리하여 세월은 삶의 일체를 흡입하고 소멸시켜 버리는 불가항력적 마성을 갖고 있다. 우제봉 시인이 세월에 대하여 거명한 몇몇 시편을 보자
만 가지 빛들
무성하게 자라 출렁이던 빛들
가슴을 설레이는 향기
황홀한 꽃으로 피지 못한 채
송두리로 뽑혀
산산이 부서져 파편으로
허공중에 흩날리는구나
-「세월 1」 일부
억겁의 세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길만 달려온 그대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야 할
그 불변의 길
한 번쯤은
탈선을 바라는 어리석음
비웃지 마오
머리 위에 백년을 이기도
어제의 청춘
하염없이 봇물로 터지는
그리움이어라.
-「세월 5」 전문
초침이 누구를 위해서 멈추겠는가
절름절름 저는 듯 저는 듯
멈출 듯 멈출 듯
멈춘 듯 멈춘 듯
해거름은 더욱 더
걸음을 재촉했다
황혼은 미로 속에 몸을 묻고 통곡했다
사랑을 노래한 뭇새들
황홀한 하루를 접었다
빈 들판 어디쯤 누웠던 바람
사무치는 열정으로 깃발 흔든다
싸늘한 냉기
어름이 된 어둠
방안에 가득하다
향기 잃은 삶의 언저리
마디마디 아리다
아 적막강산 숨결의 흐느낌.
-「세월 6」 전문
통상 시편에서 자주 접하는 ‘세월’ 용어는 식상함이 일반적이다. 단어가 주는 중량감으로 시어가 질식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갓 알에서 부화한 새의 울음과 마지막을 준비하는 새의 울음이 어찌 여일하겠는가. 석양에 지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내일 아침에 다시 저 태양을 볼 수 있을 것인가를 가늠하는 시선의 잣대는 다르다. 더구나, ‘만 가지 빛들/무성하게 자라 출렁이던 빛들/가슴을 설레이는 향기/황홀한 꽃으로 피지 못한 채/송두리로 뽑혀’ 휑한 상태의 시적 화자의 인식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루 형용키 어려운 ‘만 가지 빛들’, ‘가슴에 설레던 향기’가 사라지고 ‘꽃’을 피우지 못했음을 직시하는 현실은 고통스럽다. 화자의 존재는 ‘파편’이라는 자기확인에 이르러 가중된다. 연작시 형태로 쓴 「세월 1」 시편은 그러므로 자아를 상실한, 목표에서 벗어난, 세월의 아픔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탈선’을 이야기하는 「세월 5」의 전문은 세월 속에서 만난 ‘그리움’의 표출 시편이다. 여기서 ‘탈선을 바라는 마음’은 진실로 현실에서 벗어난 일상적 탈선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일상의 그럴듯한 기대를 깨부수고 원래의 자리로 회귀하길 비는 기도문의 일종이다. 이 시편에서 시적 화자가 바라는 것은, ‘그대’를 향한 염원이다. ‘그대’는 기도의 대상이다. ‘억겁의 세월/비가 오나 눈이 오나/외길만 달려온’ 사람을 지칭한다. 이래서 ‘그대’는 가장 가까운 그 누구를 지칭한다. 이런 기도문은 ‘세월’ 속에 속절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듯하여도 ‘시’는, ‘시인’은 예리한 촉수를 지닌 춤사위가 있음의 반증이다. 그러하다. 그냥 지나쳐가듯 사라지는 「세월」도 흉중이 있다. 그 흉중에는 분명히 터놓고 말 못 할 그리움이 산다. 그리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를 쓴다. 시인이 하염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묻혀 ‘그립다’는데, 여기에 무슨 문제 있는가. 누군가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그 안위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우제봉 시인이 아니고서는 연상하기 어려운 시편이다.
「세월 6」에 이르러 시적 화자는 ‘흐느낌’을 적는다. ‘적막강산의 흐느낌’이다. ‘황혼은 미로 속에 몸을 묻고 통곡했다/사랑을 노래한 뭇새들/황홀한 하루를 접었다//빈 들판 어디쯤 누웠던 바람/사무치는 열정으로 깃발 흔든다’며 먼저 ‘미로’를 거론한다. 시인의 삶은 ‘미로’다. ‘길’이 존재하지만 선명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다. ‘길’이 있지만 찾을 수 없는 미로다. 그것이 밤의 ‘통곡’ 이유이다. 더하여 ‘미로’와 ‘통곡’은, ‘빈 들판 어디쯤 누웠던 바람’으로 환치된다. 이 시편에서 ‘바람’은 어둠의 ‘통곡’과 잃어버린 ‘황홀’, 그리고 사무치던 ‘열정’의 다른 이름이다.
‘바람’은 화자가 지나간 세월을 회고하며 상실감을 느끼기에 무겁고 질식할 것 같은 중개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다 ‘싸늘한 냉기/어름이 된 어둠/방안에 가득하다//향기 잃은 삶의 언저리/마디마디 아리다’의 ‘냉기’가 더친다. 추운 기운은 늙은 삭신을 더욱 춥게 한다. 아아, ‘시’는, ‘시인’은 시적 화자를 내세워 냉기 어린 방에서 냉기에 갇혀있다. 혼자서 느끼는 고독 이상의 아린 상태, 즉 ‘어름이 된 어둠’을 벗어나려 하지 않고 ‘마디마디 아린’, 시인만의 아린 ‘냉기’를 곱씹는다.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의 흉중은, 「세월 6」에 이르러 이처럼 냉기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우제봉의 ‘세월’에 대한 회포의 연속성은 「산속 풍경」 연작시 작품에서도 여일하게 펼쳐진다.
덧없는 세월만 퍼 담은
초라한 황혼
미련하게도 어쩔 수 없이
어제 걸어온 길 오늘도 걷고
내일 또 다시 그 길 위에 서야 할
황혼의 언덕에서
절름거리는 내 인생 앞에
초록의 빛들이 우르르 몰려
한바탕 벌려놓은 잔칫상
가슴에 부듯하게 안기는 그 젊음
모두 가지란다.
-「산속풍경 1」 전문
훔뻑 땀흘리는 햇볕이
지천으로 넘치는데
컴퓨터로 계산해서
달게 마신 쪽빛 나무들이
이슬 내리는 어둠을 몰고 오는
바람으로 뽀얗게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눕는다.
-「나무들」 일부
우제봉 시인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예산군 대술지역은 강원도가 무색하리만치 산으로 형성된 고장이다. 마을과 더불어 산이 살아간다. 아침 태양이 저물어가는 황혼이면 산도 산 그림자를 늘리며 ‘덧없는 세월만 퍼 담은/초라한 황혼’을 감싸 안는다. ‘초라한’이란 형용사는 화자의 주관적 표현이다. ‘미련하게도 어쩔 수 없이/어제 걸어온 길 오늘도 걷고/......./황혼의 언덕’역시 시적 화자의 주관적 표현이다. 그러나, 봄이다. 봄이라는 단어는 없으나 ‘절름거리는 내 인생 앞’을 물들이고 있는 색깔이, ‘초록의 빛들이 우르르 몰려/한바탕 벌려놓은 잔칫상’이란 봄의 직설적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이는 그다음 시행에 등장하는 ‘젊음’을 수식한다. 이는 다시 온통 푸르름으로 채색되어가는 봄철 ‘산속 풍경’에서 보는 푸르름이다. 옛날의 ‘젊음’을 새로이 만나면서 듣고, 말하며, 쓴 우제봉의 희망이다. 노년의 ‘세월’ 속에는 이처럼 싱그러운 초록과 싱그러운 기운도 공존하는 것이다.
산속이 그처럼 싱그러운 초록으로 싸여 있을 즈음이면, 산속의 ‘나무들’은 그 숲의 주인이다. 주인 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일이다. 일하느냐, 안 하느냐의 가름만으로 주인 여부를 단번에 식별할 수 있다. 손님이나 타인은 내 논밭에서, 내 집에서, 일하지 않는다. 오직 주인이라야 ‘흠뻑 땀 흘려’ 일한다. 우제봉은 산속에서는 ‘햇볕’이 일한다고 본다. ‘햇볕’ 또한 산의 주인인 셈이다. 숲의 ‘나무들’은 그 ‘햇볕’을 ‘달게 마신’다고도 본다. ‘쪽빛 나무들’이란 나무들의 성장을 말한 시행이다. 한여름철 장마철을 지나고 나면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 지나 백로白露 절기가 오고, 그다음부터 이슬이 내린다.
우제봉은 산속의 나무들 모두가 ‘이슬 내리는 어둠을 몰고 오는/바람으로 뽀얗게 목욕을’ 하고는 잠자리에 눕는다고 한다. ‘나무들’을 잠재우는 목욕이다. 목욕물은 ‘바람’이다. 보조관념에 지나지 않는 바람이 의인화한다. 나무도 잠자리에 눕는 존재로 변화하는 까닭은 오로지 그런 이유에서다. 딴은, 성서의 전도서 1장에서는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전도서」 1장6절)는 존재로 묘사한다.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에서 오직 ‘바람’만이 천지간을 횡행하면서 때로는 ‘폭풍우 속의 신의 목소리’ 가 되는데 이때 폭풍우는 ‘불꽃을 발하고 사막을 진동시키며 숲을 벌거숭이로 만들기도 하는’ 존재이다.(「시편」 29장)
바람의 존재는 일생을 술과 여자와 동성애 속에서 시를 쓰다 죽은 프랑스의 폴 베를렌의 첫 시집, 『사투르누스 시편』에 나오는 ‘바람’과 같다. 젊은 날의 폴 베를렌은 이렇게 ‘바람’을 쓴다. ‘그리하여 나는 돌아가리라/나를 데려가는 찬 바람을 따라서/ 이리저리 뒹구는 낙엽’이라고 쓴다. 첫 시집이라 별로 판매되진 않았지만, 시집출판 당시 프랑스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뒹굴던 그 ‘바람’은 다시금 태초로 돌아가, 인간의 콧구멍에 자리를 트는(창세기 2장) 존재로 뒤바뀐다. 이에의 귀결이 바로 우제봉이 거명한 ‘세월’이다. 결국 ‘세월’의 본질이란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어디론가 흘러가 버리고 마는 광음의 조정자인 ‘바람’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집합을 일러 덧없는 세월 속에서 삶을 관조하는 청음 우제봉 시인의 애처로우나 간절한 눈빛, 그리고 시안의 동공이 만들어낸 생의 응집력이자 우제봉 시편 특유의 시 세계 중 하나인 ‘바람’의 서사라 하겠다.
3. ‘연모’의 서사
우제봉 시 세계의 특질 중 하나는 ‘연모’라 하겠다. 이 연모는 우제봉 시편들에서 거의 모두 ‘그리움’으로 묘사되고 있다. 한, 두 편이 아니다. 무수한 시편에서 ‘그리움’이 적시된다. 일일이 그를 드러내어 평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횟수는 빈번하다. 총괄하여 부를 수 있는 이 ‘연모’는 ‘그리움’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어 있다. ‘그리움’이라는 시어는 이 시집 시편들에서 순수하고 소박하며 아름다운 문양으로 우제봉의 시적 토양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먼저, 마치 소년의 설렘처럼 소박하게 써 내려간 ‘그리움’의 연작 시편을 살펴보자.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눈길이 끌리는 것은
그리움 때문이리라
그립다 말하지 않아도
목이 타 들어가는 것은
그리워하기 때문이리라
.........중략.......
그대 빨간 장미 한 그루 심어
물을 주고 보듬는 것은
그대 죽도록 그리워하기 때문이리라.
-「그리움 1」 일부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저물어
깊은 밤
창을 때리는 바람소리가
잠을 깨우면
밀물처럼 밀려오는
외로움이 쌓아올린 탑
그대 그리움이었네.
-「그리움 2」 일부
살며시
옆에만 있어 주면
그것이 사랑이라 믿으렵니다
잠시라도 그대와 떨어져 있는시간
긴긴 세월로만 여겨져
돌아오지 못할
강물이 될까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삼복 불가마도 태우지 못한
작은 가슴
그대 그리움에
재가 될까 두렵습니다
까만 불면의 밤
소복소복 쌓이는
하얀 재가 태산이 되는 것을
그대는 아십니까?
-「그리움 3」 전문
가을의 끝자락을 잡은 세월이여
걸음을 멈춰다오
그리고 들어다오
파도에 부서지는 봄햇살이
그리운 나의 비명을
-「그리움 4」 일부
봇물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이 시집에서 ‘그리움’이 넘쳐난다. 비단 ‘그리움’이라는 제하의 연작 시편뿐만이 아니다. 시집 전편에서 광범위한 ‘그리움’이라는 단어로 도배된다. 실제로 시편에서 단 일 회만 ‘그리움’이 시편에 쓰이면 그 시편은 과수 재배에서의 적과摘果에 해당한다. 솎아내어 버린다. 시가 주는 특유의 미적 감수성이 현저히 저하되어 호기심이 증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적 근래에 창작된 연대로 읽히는 우제봉의 ‘그리움’의 시편들은 우제봉의 대체불가 시편들이라 보인다. 여린 소년의 감성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정직한 시적 형상화 모양새를 띄고 있으나 그 면면은 단적으로 절박하다. 절박함은 누구 눈치코치를 볼 여가가 없다. 누가 뭐라든 그대로 직행한다. 필연의 직진이다. ‘절박함’이 이들 시편을 주조한 연금술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립다 말하지 않아도/목이 타들어 가는 것은/그리워하기 때문이리라’의 시행은 흡사 소년의 풋사랑 그것과 같다. 설익은듯하나 풋풋하다. 마치 ‘산속에서’ 시편의 연초록 색깔을 띠고 있다. 진지하고 강렬한 것이다.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이 타들어 가는듯하다. 그 상태의 정황이 끝 연, ‘그대 빨간 장미 한 그루 심어/물을 주고 보듬는 것은/그대 죽도록 그리워하기 때문이리라.’에서의 ‘빨간 장미 한 그루’이다. 그리운 대상이 자리에 없으나 너무나 그리운 그 자리다. 그 자리에 화자는 ‘빨간 장미’를 키운다. 이는 스스로 마약 중독자라고 온 천하에 고백하여 스스로 커밍아웃한 영국의 소설가, 토마스 드 켄쉬를 닮아있다. 퀸쉬는 『아편을 먹는 한 영국인의 고백』에서 ‘자기 몽상의 일체의 대상들을 현실로 변화 시켰다’라는 고백과 유사하다.
켄쉬의 탁월한 독자였던, 저 유명한 시인, ‘보들레르’는 보들레르대로 몽상의 관념에 사로잡힌 시편, ‘나를 보살피고/언제나 나를 겁나게 하는 수수께끼의 헤르메스여//너는 나를 연금술사 중에 가장 슬픈/마이더스와 같게 만드는구나//너에 의해 나는 금을 쇠로/천국을 지옥으로 변하게 만든다/흰구름의 수의 속에서//사랑하는 이의 주검을 찾아/천국의 기슭 저편에서/난 커다란 관들을 짜리라.’(보들레르 「고통의 연금술사」 전문)을 썼다. 일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금을 쇠로 만들고, 천국을 지옥으로 만드는 연금술의 이유는 ‘주검을 찾아’ 그 주검을 위하여 ‘관’을 짜는 것으로, 현재의 무수한 ‘그리움’을 스쳐 가는 행복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그리움’의 연작 시편, 2, 3, 4편에서 반복적으로 전개된다. 부르짖는 절규인가. 시인은 ‘깊은 밤/창을 때리는 바람소리가/잠을 깨우면/밀물처럼 밀려오는/외로움이 쌓아올린 탑/그대 그리움이었네.’ 라든가, ‘잠시라도 그대와 떨어져 있는 시간/긴긴 세월로만 여겨져/돌아오지 못할/강물이 될까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삼복 불가마도 태우지 못한/작은 가슴/그대 그리움에/재가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외친다. 죽음을 초월한 ‘연모’의 정념이 비밀 아닌 비밀로 담긴 시편들인 것이다. 이는 ‘연모’에 관한 한 소우주에 해당하는 인간이 대우주인 우주가 지닌 비밀보다 더 내밀한 서사로 가득한, ‘그리움’이라는 은하의 강이 존재함을 표상한다는 의미이다. 구순에 이른 시인이 마치 청년의 어조로 ‘그리움’을 연호함은 연대를 초극하는 일이다. 인간 감성을 지배하는 인간 연모에 대한 해석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연모’의 서사 시편들은 일종의 불가사의한 시편들이라 하겠다.
4. ‘개화’의 서사
슬프다. 시집 서문에서 우제봉은 ‘가면 갈수록/미궁에 빠지는 시인의/길을 걸으면서/영원히 남을/옥석을 찾으러/눈에 불을 켜본다’고 썼다. 미궁迷宮, ‘시’라는 미궁, ‘시인’이라는 미궁에 빠져서 우제봉은 평생토록 ‘눈에 불을 켜’보려고 평생 ‘시의 서사’를 펼쳐 온 것 아닌가. 언어의 불을 품고 온갖 만고풍상萬古風霜이라는 ‘세월’을 견뎌내며 아니, 기꺼이 ‘세월’에 맞서서 ‘바람의 서사’를 쓰며 살아온 길이 시인의 길 아닌가. 멍하니 눈을 뜨고 오가는 밤낮을 바라보며 ‘세월’이라는 ‘비바람’을 만나면서 쓸쓸하고 고독하게 살아온 것 아닌가. 도무지 형용할 수 없는 혼자만의 ‘그리움’에 눈물 훔치다가 벌떡 일어나 시 노트에 ‘연모’의 시편을 써오며 살아온 길이 또한 평생의 길 아닌가.
자랑스럽다. 우제봉은 누가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평생을 시, 시인의 길을 사랑하며 살아왔다. 어느 자리 어디에서도 조용조용히 ‘시’라는 불을 밝히려 노심초사勞心焦思하였다. 시를 쓰려고 애쓰며 시 속에 빠져 일생을 살아왔다. 시인의 길이 비록 ‘화사한 꽃들이 펼쳐진 길’에 들지 못하여도 조용조용히 한낮엔 땀 흘려 농사일하면서 밤이 되면 밤새워 시를 놓지 않고 시인의 길을 고수해 온 삶이다. 그 누구와 언쟁 한번 없이 ‘톡 쏘는 향이 없으면 어떠한가’ 실로, ‘보면 볼수록 눈이 부시구나’ 1연의 결구는 진실로 예산지역과 충남의 향토 문단에서 단연 내 세울만한 외침이 아닌가. 줄기차게 무용한 시, 시인의 나라의 ‘모란’이 되기를 갈망한 청암 우제봉은 우제봉 시, 우제봉 시인, 그 자체로 자랑스럽다.
톡 쏘는 향이 없으면 어떠한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그윽하게 내뱉는
향기마저 없어도 좋다
나는 이미 너에게 푹 빠진 포로다
어쩌면 그리도 화려하단 말인가
보면 볼수록 눈이 부시구나
오월의 햇살을
너 홀로 차지한양
구중궁궐 안주인처럼
자르르 흐르는 귀티에
어찌 포로가 되지 않겠는가
가슴이 설레인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험난한 인생사에 찌든
답답한 가슴이 사르르 녹는구나.
-「모란」 전문
동시에 눈물겹다. ‘가슴이 설레인다/봇물 터지듯 쏟아지는/험난한 인생사에 찌든/답답한 가슴이 사르르 녹는’ 개화의 세계를 경험하였으나 청암 우제봉은 즉시 「금낭화」 시편으로 귀화하려 한다. 한국 시단의 주요 시인으로 자리한 시인은 아니지만 ‘덕지덕지 때 묻은 중생의 업
어디쯤에서 벗어 놓을까’ 고뇌하면서 ‘부처님 웃음으로 웃어주는 그대’, 그 ‘바람’의 관음을 짚어가면서 ‘깨끗한 영혼 심오한 그곳 깊숙이/심지 돋구어 불 밝히리’ 다짐해보다가, ‘윤회의 싹 내밀고 열반에 이르리라’면서 마지막 시, 그리고 시인의 여로를 결구하는 이것,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노시인 청암 우제봉이 평생 걸어온 고독한 시, 그리고 시인의 길 위에서 마지막으로 개화開花, 마지막 울음에 해당하는, 시의 개화를 꿈꾸는 것 아닌가. ‘윤회의 싹’을 바라보면서 ‘열반’ 곧 ‘죽음’에 이르려는 꿈, 마지막으로 시와 삶에 대한 개화의 울음을 우는 것 아닌가.
밤 새 내린 이슬로 머리 감은 그대
눈부신 햇살 받아
줄기마다
가녀린 손으로 등을 매단 초심은
덕지덕지 때 묻은 중생의 업
어디쯤에서 벗어 놓을까
숙연히 고개 숙여 고통과 번뇌
모두 털어버리려고 등불 밝히겠지
지나던 바람이 살며시 엿보면
부처님 웃음으로 웃어주는 그대
깨끗한 영혼 심오한 그곳 깊숙이
심지 돋구어 불 밝히리
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때
등마다 소원성취
가득가득 담아
복이 넘치는 행운을 안기며
윤회의 싹 내밀고 열반에 이르리라.
-「금낭화」 전문
감사하다. ‘열반’이 목전이라 할지라도 결론적으로 우제봉의 시 세계는 ‘시’의 불사조 이야기다. ‘시’ 그리고 ‘시인’에 관한 불사조 서사다. 영원한 새, 불사조는 운명할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나무 둥지로 날아간다. 그 둥지로 가서 몸을 막 비비면 깃털에서 불이 생성되는데 그 불이 붙어 결국 타 죽으면 거기서 한 줌 재가 나온다고 한다. 그 재 속에서 새로운 알이 부화하고 바로 거기에서 불사조가 탁 터지면서 하늘 높이 올라간다는 구원과 생명을 상징하는 새이다. 신화의 새, 그 불사조가 자기 생명을 불살라서 다음 생명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듯이 우제봉은 시 생명의 가교역할을 도맡아 해 온 시인이다.
회고하면, 1978년, 예산 문단에서 처음으로 글 쓰는 모임인 문학 단체가 창립될 때부터 그 창립 회원으로서 지금까지도 굳건한 충남 문단의 정신적 지주로 문단을 지켰다. 그런 점에서 우제봉은 ‘시’의 서사를 터트려 ‘세월’이라는 ‘바람’의 서사를 읊다가 청년의 심성으로 무수히 ‘그리움’이라는 ‘연모’의 서사를 가슴에 새겨온 시 이력을 가졌다. 과실을 맺는 직접적인 힘인 인因과 그를 도와주는 연緣의 합성체인 인연으로 마침내 ‘시’라는 하나의 씨앗을 발아시켜, 흙⸳물⸳바람⸳햇빛의 도움으로 개화하여 꽃을 피운 이력도 있다. 그 시인이 현재 충남 예산대술에 생존해 계신 청암 우제봉 시인이다. 그리하여 우제봉은 그 이름만으로 작금의 한국 문단에서 지극히 청정하고, 지극히 순결하며, 지극히 정갈한, ‘시’와 ‘시인’ 나라의 참 시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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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시
우제봉 선생님의 시!
시집을 발간하신다 말씀을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특집으로 우제봉 시인의 시를 조명하신 신선생님의 시평론은 매우 훌륭한 평론입니다.
오랫만에 접하는 우제봉선생님의 시!
감동적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