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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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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문화 스크랩 수은 이홍조선생
혜명 추천 0 조회 101 11.06.01 01: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수은 이홍조 선생

가문의 내력
이홍조는 고려 말기의 명현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0대 후손으로 그 아버지는 이인도찰방을 지낸 해산공(海山公) 이문영(李文英)이다. 어머니는 풍산유씨로 임진왜란의 명재상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딸이다.
부인은 영양남씨(英陽南氏)이고, 2명의 아들과 8명의 손자, 그리고 22명의 증손자를 두었다. 퇴계 학파에서 학문으로 이름 높은 대산 이상정과 소산 이광정은 현손이다.
아버지를 여의고 형과 헤어짐
이홍조는 4세에 아버지를 잃었으며, 6세에는 형 이창조(李昌祚)가 외가인 안동으로 글 배우러 떠나자 헤어지게 되었다. 이때 형이 작약 꽃가지를 꺾어서 머리에 꽂아주고 갔는데, 형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늘 그 꽃가지를 안고 울었다. 꽃이 시들고서도 눈물이 마르지 않자 이를 본 사람들이 장차 형제간의 우의가 돈독한 군자가 될 것임을 알았다.
어머니를 여읨
21세 때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렀다. 극진한 효성으로 몸이 수척할 대로 수척해져 거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자 친척들이 걱정하여 그만 절제하기를 권했지만 끝까지 그만두지 않고 3년상을 무사히 마쳤다.
가족의 흩어짐
임진왜란이 끝난 후 아버지 이문영이 경기도 수원시 남양 대장동 해망산 밑으로 이주했다. 그 후 장자인 형 이창조의 후손들은 그대로 남양에 뿌리를 내렸고, 둘째인 이홍조는 외가인 안동에 터전을 마련함으로써 집안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홀로 계신 형수를 먼저 생각함

이홍조는 항상 청빈함을 추구해 재물에 대해서 담담했으므로 집은 늘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듯 가난하면서도 형 이창조가 죽은 뒤에는 물려받은 노비가 바친 공선을 고스란히 형 집으로 보내고 자기는 포목 자투리 한 조각도 차지하지 않았다. 살림이 쪼들려 한번은 집사람들이 그 절반이라도 집에서 쓰기를 청했으나 “홀로 계신 형수께서 어려운 살림을 꾸리기에 그것을 다 드려도 넉넉지 못할 형편인데 어찌 차마 그것을 나누겠는가. 내가 있는 동안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소호리 한산이씨의 유적

 

한산 이씨(韓山李氏)의 세거 터전은 일직면 소호리(蘇湖里)이다. 병풍처럼 두른 대석산(大夕山)을 진산(鎭山)으로 그 남쪽 기슭에 자리 하며 앞에는 광활(廣闊)한 들녁이 펼쳐진 가운데를 멀리 황학산에서 발원된 미천이 옥산을 거쳐 마을앞을 스쳐간다.

이곳에 입향조는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이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비롯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수은(睡隱)은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목은(牧隱)이색(李穡)선생의 위패와 함께 모시고, 대산과 소산은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하고 춘추 향사를 치른다. 서산서원은 일직면 원동에 있고 고산서원은 남후면 무릉리에 위치한다.

소호리 한산 이씨는 수은 이홍조를 입향조로 하는데 그의 11대조인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유학의 거벽으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내다가 귀국하여 도첨이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냈으며 원의 황제에게 건의하여 고려의 처녀를 뽑아가는 악폐를 없애고 시문(詩文)의 대가로서 [죽부인전]을 지었으며 그 아들 목은(牧隱)이색(李穡)이 14세에 진사에 오르고 과거에 장원하여 원에서 벼슬 하다가 귀국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다난(多難)한 국사(國事)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니 쇠퇴해진 유학을 진흥시키는데 공이 크고 문장은 일세(一世)를 울렸다. 또한 절의로 여말 삼은의 한사람으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더불어 너무나 이름이 높았다. 그의 아들 종학(種學), 종덕(種德), 종선(種善)이 고려에서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지내다 고려의 왕실을 위하여 순절(殉節)하였다. 종덕의 아들 맹진(孟畛)이 세종 때 좌찬성(左贊成)으로, 그 증손 윤번(允蕃)은 대사간을 지내는 등 한산 이씨는 소호리파의 직계선세만으로 명망높은 인물이 많았다.
광해 때 대북이 나라를 휘저어 세상이 어지럽자 수운은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 서산서원(西山書院)[경상북도기념물 제43호]

안동시 일직면 원동(院洞) 오산(烏山) 동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1771년(영조47)에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목은영당인 서산사를 세웠고, 1960년에 사림(士林)의 발기(發起)로 서산서원(西山書院)으로 승격하여 목은(牧隱) 선생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따라서 선생 10대손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선생을 종향(從享)하였다.

현재 목은 선생의 영정(影幀)과 목판(木板) 등이 보관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인 강당(講堂)이 있고, 숭덕사(崇德祠), 내삼문(內三門)이 있는데 서재(西齋)는 강수재(講修齋)로 영귀헌(詠歸軒)이라 하고, 동재(東齋)인 존양재(存養齋)를 역락헌(亦樂軒)이라 한다. 그외, 외삼문(外三門), 전사청(典祀廳), 주사(廚舍)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원의 사당(祠堂)인 숭덕사(崇德祠)에는 목은 선생의 영정을 봉안(奉安)하고 있다. 이 영정은 사진본이다. 진본은 도난 방지를 위하여 종가댁에 별도 보관한다.
  


▣ 고산서원(高山書院)[경상북도기념물 제56호]

고산서원은 남후면 무릉동에 위치한다. 18세기의 대학자 문경공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을 추모하는 곳으로 정조 13년(1789)에 사림(士林)의 공의(共議)로 고산서원이 건립되었으나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撤廢)령에 훼철(毁撤)된 것을 다시 복설(復設)하였다. 그러나 향도문 앞에 있었던 정허루(靜虛樓) 14칸은 세우지 못했다.  뒤에 와서 선생의 아우인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을 추향(追享) 했다.

서원의 정문을 향도문(嚮道門), 동재(東齋)는 백승각(百承閣), 서재(西齋)는 임청헌(臨淸軒)이라 한다. 그리고 호인당(好仁堂)이 있으며 사당(祠堂)은 경행사(景行祠)이고 그 동쪽에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우측 담밖에 주사가 있으며 대산께서 일찍이 여기서 강학(講學)하던 고산정사(高山精舍)가 우측에 자리한다.

고산서원은 그 옛날 대산이 강학하던 고산정사의 자리로 건너편 깍아지른 만장암(晩將岩) 백길 절벽아래 미천(眉川)물이 넓게 고여작은 호수를 이룬 귀담(龜潭)의 경치가 아름다워 애상(愛賞)할만 하였기에 대산은 이곳에 정사(精舍)를 지었던 것이다.

이곳의 풍광은 빼어났지만 서원앞 강건너에는 신작로가 나고 교통량 증가로 굉음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귀담(龜潭)에는 겨울철이면 학생들의 빙상(氷上)경기장(競技場)으로 활용되고 여름에는 보트 놀이로 유원지(遊園地)가 되어 버려 옛날의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만장암에는 측백나무가 자생하여 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수 옥 정

 

 

 

 

 

서 산 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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