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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씨 이야기5 /파트리크 쥐스킨트 (독일)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세월의 흐름에 맞춰 성장해 나갔다. 그 무렵-적어도 내 생각으로는-최고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고, 어떤 때는 내가 세월을 앞질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조차 했다! 키가 거의 1미터 70에 육박하고 있었고, 몸무게는 49킬로그램이었으며, 신발은 41을 신었다. 학교는 고등학교 5학년에 올라갈 차례였다. 그림 형제 동화집도 다 읽었고, 모파상의 작품도 반은 읽었다. 담배도 조금 피울 줄 알았으며, 오스트리아의 여왕에 관한 영화도 극장에서 두 번이나 봤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도 들어갈 수 있고, 부모를 동행하지 않고 혹은 보호자와 함께 가지 않아도 밤 10시까지 유흥업소에 있어도 된다는 허가증인 (16세 이상)이라는 빨간 도장이 찍힌, 그렇게도 고대하던 학생증을 받을 날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다. 3차 방정식도 풀 수 있게 되었고, 라디오 수신기의 수정 검파기도 조립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갈리아 전기 De bello Gallico)의 서두와 오디세이의 첫 줄을 달달 외워 말할 수도 있었다. 사실 마지막의 것은 내가 그리스어를 한 단어도 배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할 수 있었다. 피아노는 디아벨리나 끔찍스럽던 헤슬러의 곡은 더 이상 치지 않았고, 블루스나 부기-우기 외에 하이든, 슈만, 베토벤, 혹은 쇼팽처럼 유명한 작곡가의 곡들을 쳤고, 미스 풍켈 선생님이 가끔씩 난리 법석을 떨어도 냉정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 마음속으로 빙긋이 웃으며 그런 시간이 빨리 지나가 주기를 바라는 여유까지 생기게 되었다.
나무에 기어오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 대신 내 소유로 자전거도 한 대 갖게 되었다. 그것은 원래 형의 것이었는데 손잡이가 경주용 자전거라서 밑으로 휘어지고 기어가 3단까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타고, 나는 우리 집에서부터 미스 풍켈 선생님네 집까지 가는 데 걸리는 최단 시간이었던 13분 30초를 12분 55초에 끊음으로써-내 손목시계로 재어 본 결과-35초 이상이나 단축하였다. 나는 정말-최고로 겸손하게 말해 보더라도-속도와 지구력에서뿐만 아니라 기교 면에서도 눈부신 훌륭한 자전거 주자가 되었다. 손을 잡지 않고 타기, 손을 잡지 않고 커브길을 돌기, 정지 상태에서 회전하기, 급브레이크로 방향 바꾸기 등을 할 수 있었고 회전으로 인해 생기는 효과들은 이젠 내게 아무런 문제도 야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짐을 싣는 곳 위에 서서 달릴 수도 있었다. 사실 하나도 쓸모 없는 짓이기는 했지만, 나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신뢰를 갖게 한 기계적인 회전 충격 보존력을 확실하게 인정하도록 만든 예술적인 행위였다. 자전거 타기에 대한 나의 의구심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인 측면에서 완전히 해소되었다. 나는 그야말로 열광적인 자전거 주자였고, 내게 있어서 자전거 타기란 날아다니는 것과 거의 다름없는 일이었다.
물론 내 인생의 그 시기에도 내 삶을 씁쓸하게 만드는 일이 있기는 하였다. 특히 따져 보자면, 첫째, 초단파로 송신되는 라디오 수신기를 마음대로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목요일 저녁 10시에서부터 11시까지 방송되는 재미있는 형사극을 못 듣고, 그 다음 날에야 등교 버스 안에서 내 친구 코르넬리우스 미켈한테서 제대로도 아닌 엉터리에 가까운 프로그램 내용을 뒤늦게 들어야만 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둘째, 우리 집에 텔레비전 수상기가 없다는 점이었다. (텔레비전 수상기를 우리 집에 들여놓을 수는 없다) 라고, 주세페 베르디가 죽은 해에 이 세상에 태어난 아버지가 천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텔레비전은 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습성을 망쳐 놓고, 눈을 나쁘게 만들기도 하고, 가족 생활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사람을 전반적으로 멍청이로 만들기 때문이다) 아타깝게도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주장을 반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최소한의 문화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예를 들자면 (엄마가 최고야), (라씨) 혹은 (히람 홀리데이의 모험) 등을 보려고 코르넬리우스 미켈네 집을 종종 찾아가야만 했다.
공교롭게도 그런 프로그램들은 거의 초저녁 시간대에 방영되어서 8시가 되어야 뉴스의 시작과 함께 끝났다. 하지만 나는 8시가 되면 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식탁에 앉아 저녁 먹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사람이 같은 시간대에 동시에 서로 다른 장소에, 더구나 자전거로 7분 30초나 달려야만 될 만큼 떨어져 있는 장소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므로-손을 닦는 것은 고사하고서라도-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내게서 의무와 욕구의 전통적인 갈등을 야기하던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프로그램이 끝나기 7분 30초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매번 극적인 클라이막스를 놓쳐 버리고- 집으로 가건, 혹은 끝까지 보고 앉아 있다가 결과적으로 저녁 식사 시간에 7분 반을 늦게 도착하여 어머니의 꾸지람을 감수하거나 텔레비전으로 인한 가족 생활의 마비에 대한 아버지의 일장 훈계를 각오를 해야만 했다. 사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 무렵의 내 생활은 그런 비슷한 일들로 인한 갈등의 점철이었던 것도 같다. 언제나 어떤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거나, 도리상 해야 되거나, 하지 말아야 된다거나, 차라리 이렇게 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든가..... 언제나 나는 뭔가를 해야 되다는 강요를 받았고, 지시를 받았으며,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만 했다. 이것 해! 저것 해! 그것 하는 것 잊어버리면 안돼! 이것 끝냈니? 저기는 갔다 왔니? 왜 이제서야 오니?..... 항상 압박감과 조바심, 언제나 시간이 부족했고, 무슨 일이든지 항상 끝마쳐야 되는 시간이 미리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아주 가끔씩만 편안한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그 무렵에는..... 하지만 나는 지금 한탄에 빠져들면서 젊은 날의 어떤 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빠른 손길로 뒤통수를 긁어 주고, 어쩌면 가운데 손가락으로 그 문제의 자리를 가만히 몇 대 때려 주고는, 내가 본래 무엇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 정신을 집중하여 좀머씨와의 마지막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씀으로써 이 이야기의 끝을 맺고자 한다.
그것은 코르넬리우스 미켈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본 다음 집으로 향하던 어느 가을날의 일이었다. 그날의 프로그램 내용은 시시해서 시청자가 끝이 어떻게 맺어질지를 미리 알 수 있는 것이라서 나는 저녁 식사 시간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게 하기 위해서 8시 5분 전에 미켈네 집을 나섰다.
어스름한 빛이 이미 들판에 가득 깔려 있었고, 서쪽에만 호수 위로 하늘에 잿빛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무렵 나는 우선은 자전거의 라이트에- 전구, 갓 혹은 전선에-고장이 잦았던 것이 한 가지 이유였고, 다른 이유로는 발전기를 작동시키면 바퀴의 회전이 엄청나게 방해받아서 집에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1분 이상 더 걸릴 수 있기 때문에, 그날도 불을 켜지 않은 채 자전거를 탔다. 사실 내게는 불빛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길은 내가 자면서도 훤히 알 수 있는 길이었다. 그리고 캄캄한 밤중이라도 길가의 울타리나 길 반대편의 덤불 숲보다는 길이 더 까만 색이었으므로 안전하게 달리기 위해서 가장 까만 곳만 달리도록 신경만 쓰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초저녁에 몸은 손잡이 쪽으로 잔뜩 구부린 채 기어를 3단에 놓고 귓전에 바람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달렸다. 약간 서늘했고 습기가 차 있었으며 가끔씩 연기 냄새 같은 것이 났었다.
집까지의 거리에서 정확히 중간되는 지점에서- 뒤쪽의 무성한 숲과 붙어 있는 옛날의 자갈 채취 장으로 인해 그 부근의 길이 호수와 약간 거리를 두고 굽어 있었다- 자전거의 톱니바퀴에 연결된 쇠사슬이 풀려버렸다. 그것만 제외하면 아무 무리없이 작동되는 자전거에 수시로 발생하는 결함이었다. 원인은 닳아빠진 스프링이 쇠사슬을 적당히 팽팽하게 조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나는 사실 오후 내내, 결국 고치지도 못하면서 그것 가지고 온갖 씨름을 다했었다. 그래서 아무튼 자전거를 세우고 안장에서 내려 톱니바퀴와 보호대 사이에 끼워져 있던 쇠사슬을 풀어내어, 페달을 적당히 움직여 가면서 그것을 톱니바퀴에 다시 올려놓으려고 뒷바퀴가 있는 쪽으로 몸을 구부렸다. 그런 일은 어둠 속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잘 해낼 정도로 내게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그것을 고치는 과정에 생기는 한 가지 안 좋은 점이라면 그것을 하다가 손이 엉망진창으로 더렵혀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쇠사슬을 톱니바퀴에 잘 건 다음 단풍나무 숲으로 가 커다란 마른 잎으로 손을 닦으려고 호수 쪽으로 나 있는 길가로 갔다.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하나 꺾자 호수 쪽으로 시야가 탁 트였다. 호수는 마치 큼직한 거울 같은 모습으로 거기 있었다. 그리고 호수 가장자리에 좀머씨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 나는 아저씨가 신발을 신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물이 아저씨의 장화 위까지 차 있었다. 둑에서 몇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등은 나를 향하고, 산 너머에 여전히 남아 있던 마지막 노르스름한 햇빛이 한 줄기 비치고 있는 반대편 둑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그곳에 박아 놓은 말뚝 같았으며, 약간 구부러진 지팡이는 오른손에 들고 밀짚모자는 머리에 쓰고 있는 모습이 호수의 환한 수면에 검은 색 실루엣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저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발씩 한 발씩 발걸음을 떼어놓으며 세 번째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지팡이를 앞으로 옮겨 찍고, 뒤쪽을 단호히 물리치면서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치 땅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목적지를 향한 아저씨 특유의 고집스러운 성급함으로 호수 바닥이 평평한 편이었는지 아주 조금씩만 깊이가 더해 갔다. 20미터쯤 가자 물이 아저씨의 엉덩이 위까지 찾으며, 물이 어느새 아저씨의 가슴까지 차 올랐을 때 아저씨는 둑에서 던진 돌이 날아 갈 수 있는 곳보다도 더 멀리 나간 상태였다. 그렇지만 아저씨는 비록 물 때문에 속도가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쉬지도 않고,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꿋꿋하게 거의 열정적으로 걸었고, 마침내는 앞을 가로막는 물을 좀 더 빨리 헤쳐 나가기 위해서 지팡이를 집어던지고 양팔로 노를 저어 가며 앞으로 나갔다.
나는 둑 위에 서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아저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 내 모습은 아마도 뭔가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지을 수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는 놀랐다. 나는 놀랐다기보다는 내가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당혹스러웠으며,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처음에 나는 아저씨가 그곳에 서서 뭔가 잃어버린 것을 물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누가 신발을 신은 채 물 속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아저씨가 다시 앞으로 전진하였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이제 목욕을 하려는가 보다. 하지만 누가 밤에, 그것도 10월에 옷을 다 입은 채 목욕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나중에 아저씨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때 이제는 아저씨가 호수를 걸어서 건너려는가 보다라는 터무니없는 한심한 생각조차 했다. 수영을 해서 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 1초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다. 좀머씨와 수영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절대 아니었다. 수심이 100미터였고, 반대 편 둑까지의 폭이 5킬로미터인 호수의 바닥을 허겁지겁 걸어서 가로지르리라는 생각뿐이었다.
어느새 물이 아저씨의 어깨까지 차 올랐고 다음으로 목까지 차 올랐지만..... 여전히 아저씨는 호수 안으로 전진해 들어갔다..... 그러다가 아마도 바닥이 고르지 못해서였는지 아저씨의 몸이 불쑥 솟구치며 물이 다시 어깨까지 닿았다..... 그래도 아저씨는 그렇게 위로 솟구친 다음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가 물이 다시 목까지 찼다가, 목구멍까지 찼고 이어서 턱 위까지..... 그제서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지만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지르지도 못했다. (좀머씨! 정지! 뒤로!)라고 소리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곳에서 황급히 뛰어가지도 않았으며, 아저씨를 구할 수 있는 배나 뗏목 혹은 구명용 공기매트를 찾으려고 해 보지도 않은 채 저 멀리에서 가라앉고 있는 작은 점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아저씨의 모습은 사라졌다. 밀짚모자만이 동그라니 물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무지하게 길게 느껴지던 30초 혹은 1분이 지난 다음 몇 개의 물방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을 뿐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밀짚모자만이 아주 천천히 남서쪽을 향해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어둑어둑한 원경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오랫동안 그것을 쳐다보았다.
좀머씨가 없어졌다는 것이 알려지기까지에는 2주일이 걸렸다. 우선 제일 먼저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다락방의 월세를 받으려던 리들 어부 아저씨의 부인이었다. 좀머씨가 2주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그 아주머니는 슈탱엘마이어 아줌마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슈탱엘마이어 아줌마는 히르트 아줌마에게 상의를 했고, 히르트 아줌마는 손님들에게 아저씨에 관해서 물어 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도 좀머씨를 봤다거나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2주일이 더 지난 다음 리들 아줌마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기로 했고, 그 후 몇 주일이 지난 다음에 신문에 아저씨를 찾는 작은 광고가 아무도 그 사람이 좀머씨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아저씨의 여권용 사진과 함께 나왔다. 사진에 좀머씨는 검은 색 머리에 숱이 많았고, 집요한 눈빛과 입술에는 확신에 차고 거의 뻔뻔스럽게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 밑에 처음으로 좀머씨의 온전한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막시밀리안 에른스트 애기디우스 좀머.
잠깐 동안 좀머씨와 아저씨의 비밀스러운 행각에 대한 말들이 동네에서 주요 화젯거리가 되었다.
"완전히 돌아 버렸을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했다.
"길을 잃어버리고 다시 집으로 가는 길을 못 찾았던 것이 분명해. 아마 그 사람은 자기의 이름이 무엇이고, 자기가 어디에 사는지조차 모르고 있을 거야. "
"다른 나라로 이민 갔나 봐."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밀폐 공포증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유럽이 너무 작게 느껴져서 캐나다나 호주로 갔을 거야."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가 계곡에 떨어져 죽었을는지도 몰라."
어떤 사람들은 또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이 호수까지 미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다가 신문이 누렇게 변색되기 전에 좀머씨에 대한 이야기는 수그러졌다. 그래도 어느 누구도 그를 그리워하지는 않았다. 리들 아주머니는 아저씨의 몇 가지 물건들을 지하실의 한구석으로 몰아 넣고, 그 방을 여름 행락객들에게 빌려 주었다. 하지만 아줌마는 그런 사람들을 (여름 행락객)이라고 부르지 않고, (여름) 이라는 말이 그녀에게는 다른 생각이 들게 하기(좀머 Sommer씨는 독일어로 여름이라는 뜻) 때문이라고 하면서(도시 사람들) 혹은 (여행객) 이라고 불렀다.
나는 침묵을 지켰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아주 늦게 집에 도착하여 텔레비전의 나쁜 효과에 대한 일장 훈계를 들어야만 했을 때에도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도 역시 하지 않았다. 누나에게도 하지 않았고, 형에게도 하지 않았으며, 경찰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코르넬리우스 미켈에게조차 죽음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내가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또 그렇게 철저하게 침묵을 지킬 수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나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들었던 그 신음소리와 빗속을 걸어갈 때 떨리던 입술과 간청하는 듯하던 아저씨의 말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기억은 좀머씨가 물 속에 가라앉던 모습이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