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 은평구 녹번동의 유래
- 가난한 이들을 위한 녹봉 -
녹번동碌磻洞이라는 이름은 통일로에 위치한 녹번리 고개에 얽힌 두 가지의 유래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조선 시대 조정의 관리들이 설이나 추석 명절 때가 되면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조정에서 받은 녹봉의 일부를 여기에 가져다 놓은 데서 유래되었고, 두 번째는 녹번현綠磻峴에서 연유하였다.
『동국여지비고』산천조山川條에 의하면
<綠礬峴 在追慕峴北 石壁産自然銅 折骨者多採用 唐將軍過此 謂以萬夫莫開云
녹번현 재추모현북 석벽산자연동 절골자다채용 당장군과차 위이만부막개운>
이라 기록되어 있다. 즉
<녹번현은 추모현 북쪽에 있다. 석벽에서 자연동이 나오는데 뼈가 부러진 이들이 많이 캐어 약으로 사용한다. 당나라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한 사람이 지키면 1만 사람이 있어도 열지 못한다"고 했다.>
는 말이다.
녹번동 고개 마루터기 산1번지 일대 석벽에는 골절이나 뼈가 약한 사람에게 특효가 있는 속칭 산골山骨 (일종의 자연동)이 산출되어 산골고개라고 한 것이다. 지금은 의약의 발달로 이용 가치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예전에는 음력 3월 3일이나 9월 9일이면 많은 사람이 찾아 유명했다. 당시를 돌이켜 보면, 정부에 채광 허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채굴하던 광산이 서울 한복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시민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녹번현의 석벽은 통일로 대로변으로 길이 확장됨에 따라 입구가 협소해져 요즘은 별로 눈에 뜨이지 않게 되었다. 한편 녹번동은 은평구의 행정 중심지로서 은평 구청, 서부 경찰서, 서부 소방서, 국립 보건원, 은평 문화예술회관 등이 있다.
녹번동 고개
● 은평구 연신내의 유래
인조가 친히 마중을 나오다
동쪽에 있는 불광사 쪽에서 녹번동과 대조동 쪽으로 흘러내리는 연서천延曙川의 뜻이 우리말로 풀이되어 연신내가 되었다. 35년 전만 해도 여름밤이면 횃불을 밝혀 게를 잡고 비 온 뒤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맑고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이곳에는 예전에 연서역延曙驛이 있었는데 그에 얽힌 고사가 흥미롭다. 조선초 인조반정 때에 장단長湍(현 경기도의 군) 부사府使 이서李曙가 반정 거사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니 인조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마중을 나와 영서역迎曙驛으로 불리웠다. 사람들은 이서의 연착과 이서를 만날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 하다 하여 기이한 참지讖地라 하였는데 훗날 영서역의 지명이 연서延曙로 바뀌었다. 연신내가 복개되고 연신내 사거리를 중심으로 지하철 3호선과 6호선이 개통됨에 따라 활발한 상권이 형성되었으며 연서시장과 공원 등이 있다.
연서역, 의주대로의 첫 역
● 은평구 갈현동의 유래
지맥으로 물이 양쪽으로 흐르는 마을
갈현동葛峴洞은 가루개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어서 가루개 또는 갈고개로 불리었으며, 갈현이란 이름도 본토박이 땅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갈'은 갈림(分분 또는支지)을 뜻하는데, 관악산과 청계산을 잇는 지맥에 의해 물이 양쪽으로 나뉘어 흐르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곳에 칡이 많아 생긴 이름이라는 말도 있다.
약속을 어겨 벌을 받은 벌이 고개
벌이 고개 또는 벌고개는 은평구 갈현동의 서쪽 끝 궁말에서 서오릉西五陵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이르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유래가 전한다. 조선조 제19대 왕 숙종이 별세하자 서오릉으로 묘소(명릉明陵)를 정하고 현 갈현동 308번지 고개를 넘어 관을 내릴 것을 지관이 하관 담당자에게 명하였다. 그러나 하관 생원이 이를 어기고 고개를 넘기 전에 관을 내리자 하늘이 노하여 천둥과 번개를 치고 무수한 벌떼가 나타나서 하관 생원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후 이곳을 벌 고개라고 하였다.
한편 용의 좌측 어깨 부분에 해당되는 서오릉의 땅을 일반 백성들은 밟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를 어길 때에는 상당한 벌을 주었다고 하여 벌이고개라고도 하였다.
서오릉과 벌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