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새로 만들어진 이름뿐인 광교(廣橋).
1899년 鍾路에서 南大門 구간의 電車가 가설되면서 광통교(廣通橋) 동쪽에 電車線路가 놓이게 되어 일부 훼손(毁損)된다.
1910년 8월에는 電車線路를 복선화(複線化)되면서 광통교(廣通橋) 위로 電車가 다니게 만들어진다.
이에따라 철근콘크리트橋로 확장됨에 따라 광통교(廣通橋)는 도로(道路) 밑에 묻히게 되어 사람들 눈에서 사라진다.
1923년 淸溪川 공사 때 廣通橋 北側 교대(橋臺) 한 가운데를 뚫고 下水管을 박아 下水를 排出하게 만든다.
解放이 되었지만 1958년에는 淸溪川을 완전히 복개(覆蓋)하고 그 위로 고가도로(高架道路)까지 만들게 된다.
廣通橋의 난간(欄干)만 창경궁(昌慶宮)으로 옮기고 廣通橋라는 다리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2005년 高架道路가 철거되고 淸溪川이 복원되면서 95년만에 廣通橋의 옛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都市 近代化에 밀려 원래 있던 자리를 내주고 윗쪽으로 100여M 올라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직까지 신경쓰지 않았던 過去의 大事件이 알려지게 된다.
廣敎 다리를 건너 乙支路쪽에 옛날 廣通橋의 모습을 縮小해서 만든 模型이 있다.
縮小한 模型 廣通橋의 說明文.
옮겨진 廣通橋의 모습.
지금의 다리는 원래보다 약 1M가 짧아졌다고 한다.
廣通橋의 다리아래 모습을 보여주고자 따로 물이 흐르게 하여 다리 아래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다.
물론 비가 오거나 하여 水量이 많아지면 廣通橋아래로도 물이 지나간다.
해태상은 다리부분이 훼손되어 보수를 했다.
다리 난간은 거의 훼손되었고 一部가 昌慶宮이나 景福宮에 버려져 있다가 복원되면서 찾아왔다고 한다.
다른 대부분의 것은 다시 새로 만든 것이다.
옆에 있는 "기사대준"(己巳大濬)이라 쓴 돌은 원래 있던 것이 아니고 광통교 다리 교각(橋脚)에 있는 글자를 옮겨 쓴 것이다.
庚辰地平(경진지평) : 경진년인 1760년(영조 36)때 청계천 바닥을 평평하게 준설한 것.
癸巳更濬(계사경준) : 계사년인 1833년(순조 33)때 다시 청게천을 준설한 것.
己巳大濬(기사대준) : 기사년인 1869년에 크게 준설사업을 한 것을 써 놓은 것이다.
아래로 내려가서 본 광통교의 모습.
"어? 이게 뭐야?"
淸溪川 복개판(覆蓋版)을 뜯어내고 廣通橋를 옮기기 위해 살피던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아니 다리를 만드는데 왜 이런 장식(裝飾)을 했지?"
다리의 양쪽 교대(橋臺)에 이상한 문양(紋樣)이 양각(陽刻)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리 위도 아니고 물이 흐르는 다리 아래에 이런 문양(紋樣)을 만들어 놓은 理由는 뭘까?
그것도 아름다운 문양(紋樣)을,,,,,
우리나라의 어떤 다리도 이런 모습을 가진 다리는 없다.
이것을 日帝時代에 한 차례 조사한 일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日本 學者들도 그 理由를 알아내지는 못하고 말았다.
現地를 답사한 조사팀은 부랴부랴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 東奔西走한 결과 엄청난 사연(事緣)을 찾아내게 된다.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1408년(太宗 8) 5월 24일 太祖 李成桂가 세상을 뜬다.
그러자 太宗 李芳遠은 곧바로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姜氏)에게 복수의 칼을 빼어든다.
"姜氏가 어찌하여 王后더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더냐. 廢位하여 平民으로 하라"고 命한다.
1409년(太宗 9) 2월 23일.
太宗은 드디어 神德王后 姜氏를 정동에서 "사을한"(沙乙閑)이란 곳의 산기슭으로 천장(遷葬)한다.
"사을한"(沙乙閑)은 지금의 貞陵이 있는 산골짜기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의 정릉주변에는 아파트가 밀집해 있지만 올라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당시에는 그곳이 얼마나 깊은 산속이였는지 짐작이 간다.
이것이 太宗의 뜻이지만 모양새는 "의정부"(議政府)의 상언(上言)에 의해서 行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議政府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옛 諸王의 陵墓가 모두 都城 밖에 있는데, 지금 貞陵이 城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使臣이 거처하는 太平館에 가까우니,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
하였으므로, 太宗이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太宗은 정릉(貞陵)을 성 밖으로 옮기되 石物은 모두 파뭍으라 命한다.
즉 陵이 아니므로 石物을 놓지 말고 일반인과 같게 만들라는 것이다.
또한 陵앞에 있던 丁字閣을 허물어 太平館의 별채를 짓도록 命한다.
또한 원찰(願刹)인 흥덕사(興德寺)의 규모도 줄여서 나라를 위한 寺刹로 만든다.
實錄에는 또
"貞陵의 제사와 기신재제(忌晨齋祭)는 나라에서 행함이 마땅하지 않으므로,
이에 전세(田稅) 5결(結)을 주어 그의 족친(族親)들로 하여금 맡아 하도록 윤허(允許)되었다"
하였는데, 이것은 文書上의 이야기이다. 그곳은이미 陵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이곳에 제사를 지내거나 절을 하는 자는 엄히 다스린다"는 太宗의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후 貞陵은 오랫동안 아무도 찾지않는 버려진 폐총(廢塚)으로 변하고 만다.
원래 廣通橋는 토교(土橋)였다고 한다.
아마도 나무로 건널목을 하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다리가 아닐까 한다.
신덕왕후(神德王后)의 墓를 산골짜기로 몰아 낸 다음해인 1410년.
큰 洪水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이에 議政府에서 광통교(廣通橋)를 돌다리(石橋)로 만들어 줄 것을 太宗에게 아뢴다.
이때 太宗은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된다.
神德王后가 있던 貞陵의 石物들을 使用하면 일거양득(一擧兩得)이 아닌가.
太宗은 命한다.
貞陵에 있던 石物을 모두 가져다 다리를 만들라고,,,,,
이래서 淸溪川에 最初의 돌다리인 廣通橋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石橋의 기초가 무척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정교(精巧)한 문양(紋樣)이 있다.
어느 것은 일부 紋樣이 훼손되어 있기도 하다.
아마도 다리를 만들면서 돌을 거칠게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돌 가운데의 이 문양(紋樣)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언듯보면 연꽃이 막 피어나는 모습같기도 한다.
이 돌은 貞陵의 陵을 돌려서 陵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병풍석(屛風石)인 신장석(神將石)이다.
그런데 이 돌들이 이 광통교(廣通橋)의 기단(基壇)에 꺼구로 있는 것이다.
끝과 중간에 살짝 튀어나온 돌은 병풍석 사이 사이에 넣는 돌로 "우석"(偶石)이라고 한다.
이 돌 또한 어느 것은 바르게, 어느 것은 꺼구로, 어느 것은 잘라서 사용되었다.
우석(偶石)
그나마 屛風石이 바로 세워진 모습.
일부는 잘라서 사용하기도 했고,
이렇게 거꾸로 세워넣기도 했다.
이후 都城안의 모든 사람들이 廣通橋를 밟고 다니니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철저하게 능멸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원래 우리나라는 예부터 정월 대보름에 한 해의 액운(厄運)을 없게 해준다는 "다리밟기" 놀이가 流行했다.
이것을 太宗이 이 鑛通橋에서 行하도록 권장(勸奬)했다고 한다.
매년 정월대보름을 前後해 夜間에 주로 하는 "다리밟기"는 신분 구별 없이 누구나 참여했다.
문헌 자료에 따르면, 이곳 廣通橋에 수많은 행렬이 이어졌으며 人山人海를 이뤘다고 한다.
다리밟기 놀이를 할때는 "야간 통금"(夜間 通禁)도 늦춰 주었다고 한다.
정말로 太宗의 복수는 이토록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