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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위대한 전도(1971.2019.5.26)
행 21:37-40
오늘은 우리 감리교회를 창설하신 요한 웨슬리(John Weslry)목사님이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하시고 회심하신 기념 주일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우리 감리교를 창설하신 목사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드리기 전에 먼저 웨슬리 목사님에 대하여 간단하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1703. 6. 17일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 목사인 사무엘 웨슬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1735년 그의 나이 32세에 미국의 조지아 주로 선교사로 출발을 하였다가 2년 만인 1737. 12. 22일 귀국을 하였습니다. 그는 조지아 주의 선교에 실패를 하였다는 자책감에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1738. 5. 24일 저녁 8시 45분 올더스케잌 거리에 있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교회에 참석을 하였는데 이 때 예배를 집례 하는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을 때에 그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이때에 비로소 완전한 구원의 체험을 하였고 주님이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이 내주 하시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791. 3. 2일 88세를 일기로 죽을 때까지 53년 동안 영국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치면서 복음을 증거하였고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며, 빈민 선교와 감옥 선교 등을 중점적으로 하여 많은 호응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웨슬리는 나중에 그가 운영하던 신성 클럽과 모든 속회 활동을 통하여 감리교를 창설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으로 인하여 웨슬리 자신은 물론 영국 사회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매년 5월 24일을 전후로 하여서 그 주일을 웨슬리 회심 기념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은 웨슬리가 영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예수님과 뜨거운 만남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감리교회는 이와 같은 뜨겁고 열정적으로 영혼구원의 정열을 불태우던 웨슬리 목사님으로 하여금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웨슬리 회심 281주년을 맞이하여 웨슬리 목사님의 전도 구호였던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말씀대로 열심히 전도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말로만의 전도가 아니고, 사상과 관념적으로 만의 전도가 아니고, 실제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전도하여 영혼구원의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바울의 전도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너는 내 자녀라고 선언해 주신 것이 소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나라 비밀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에게는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맡은 일꾼으로서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은사를 주십니다. 은사는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몸(교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시는 선물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신 은사에 대해 감사하고 그 은사를 주신 목적에 따라 활용하면 됩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을 잡아 죽이려는 성난 무리들이 나옵니다. 35절에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감 이러라’ 어떤 좋은 말도 통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준비된 대상에게 전도하기도 쉽지 않는데 극도의 악감을 가진 대중에게 쇠사슬에 매인 최악의 조건에서 바울이 어떻게 전도했는지 본문이 우리 전도자에게 주는 메시지가 큽니다. 바울은 어떻게 전도했나요?
1. 바울의 전도는 천부장의 권세를 받아서 했습니다.
바울이 영내로 진입하려는 순간 그는 천부장에게 할 말이 있으니 들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 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그는 헬라어로 말하였으며, 천부장은 그의 유창한 헬라어 실력에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천부장은 바울을 보고 이전에 소요를 일으켰던 애굽의 무식한 반란주동자가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전에 애굽의 거짓 선지자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리겠다며 소요를 일으켰다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그 악명 높은 애굽의 반란주동자가 아닌 것을 확인하기 위해 ‘네가 이전에... 애굽인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37절‘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여기서부터 바울의 변론이 시작됩니다. 지금 로마 안토니아 부대가 있는 계단으로 쇠사슬에 묶여 군인들의 손에 끌려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가 현재 있는 위치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곳이라 자기를 죽이려고 따라오는 폭도들의 모습이 잘 보이는 장소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장소를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는 강단으로 선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에게 변론의 기회를 달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사명감을 보게 됩니다. 그의 관심은 매를 맞든 안 맞든 좋은 형편에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관심입니다. 사도바울의 관심은 오직 복음을 전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무리에게 매를 맞고 겨우 생명을 구한 상황에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자신의 억울함이나 섭섭함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게 합니까?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명의식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하시려는 일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오해하거나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듣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명의식에 사로잡혀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딤후4:2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행20:24절‘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딤후 4:7절‘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바울은 자기사명에 충실한 복음 증거자였습니다. 복음증거의 사명은 바울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최선을 다해 복음을 증거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합니다. 주님께서 열매를 찾으시는 날 주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원받은 바울도 귀하게 여기시지만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그들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바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천부장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바울이 손짓하자 백성들이 종용하여 말씀을 듣는 것도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이 보이십니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긍휼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전해야합니다. 이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그럴 때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과 주님의 마음을 보시기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도 사명을 감당하면서 인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내하다보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천부장에게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천부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쇠사슬에 결박된 죄인의 몸에서 너무나도 세련되고 교양이 넘치는 헬라어의 악센트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깜짝 놀란 천부장은 ‘당신이 헬라 말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에 헬라어는 로마 제국권 내에서는 공통언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문화인에게 국한되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무식한 폭동인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천부장의 관심은 치안 책임자로서 치안을 방해하는 사람을 체포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래 전에 쿠데타를 일으켜 4천명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갔던 애굽 사람이 아직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을 보고 혹시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들어서 그에게 묻습니다.
38절‘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여기에 나오는 애굽인은 주후 54년 경 네로황제 때, 3만 명을 거느리고 감람산에 웅거하여 로마정부를 정복하려고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입니다. 그는 자기의 명령 한마디로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고, 또 로마군대를 내어쫓고 유대를 독립시킨다고 호언장담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항상 몸에 칼을 지니고 다니며 군중 속에 섞여 다니다가 저명인사들을 암살하는 로마정부를 깜짝 놀라게 했던 거짓 선지자입니다.
본문에는 사천 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반란군의 인원은 삼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총독 벨릭스 군사에 의해 일부는 죽임을 당하고 일부는 생포되고 그러다가 이리저리 흩어져서 광야를 거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때에는 한 사천 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천부장은 바울이 그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여 물었습니다. 바울은 즉시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이 물음에 사도 바울은 ‘아니요 나는 유대사람입니다’하고 자기의 정체를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39절‘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나는 유대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천부장이 ‘난을 일으켰던 애굽인이 아니냐’는 물음에 분명히 대답한 것입니다. 그 난을 일으킨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라’ 바울은 자기가 시골 촌놈이 아니고 다소성의 시민권자라고 했습니다. 당시 다소는 소아시아 지방의 헬라사상의 중심지로 교양 높은 도시로서 훌륭한 대학이 있고, 큰 도서관이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은 다소성에서 출생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기의 고향이나 문화의식을 자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 천부장의 오해를 빨리 풀고 자기가 서 있는 이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선용하여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로마의 시민권자임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알리면 즉시 풀어 주어 그를 안전한 곳에 피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현장 복음 증거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기 때문에 천부장에게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청원입니다. 바울이 그냥 외치지 않고 천부장에게 말할 권세를 받아서 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전달하려면 말할 권세를 받아야 합니다. 그 권세는 지혜로 얻어집니다. 열심히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곳이든 조직이 있고 그 조직을 관장하는 자가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 권세 있는 천부장이 허용했으니 누가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행22:30에 총독을 대신해 산헤드린 공회까지도 소집할 정도였으니 당시 로마의 식민 치하에서 예루살렘을 담당한 천부장의 권세는 막강했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또 말할 권세는 사랑으로 얻어집니다. 사랑하면 온유한 자가 정복한다 했듯 말할 권세가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할 때 전도의 기회는 많아지고 전도의 힘은 더 강해집니다.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우스갯소리도 통합니다. 실수해도 청중이 다 알아서 좋게 해석합니다. 더구나 설교자를 위해서 생명 걸고 기도까지 해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능력으로 말할 권세가 얻어집니다. 말씀 전달에 능력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요? 고전2:3-5에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두려워 떤 이유는 사람 무서워서가 아니라 인간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만 나타나기 원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설교자가 가장 힘든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르짖고 또 부르짖습니다. 이렇게 말씀의 권세를 받아서 할 때 비로소 훌륭한 메신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 주시면 어떤 사람들도 그 말씀 앞에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교회학교 교사들은 기도가 아니고는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아이들이 양같이 변합니다. 어른들은 체면이라도 있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도 없고 영적 분위기 그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아이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피곤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달래도 안 되고 회초리를 들어도 안 됩니다. 기도부족입니다. 그래서 떠들면 내 탓이요 떠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처럼 권세를 받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천부장에게 길리기아 다소성 시민으로 그 권리를 요구한 것처럼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니 하나님께 그 권세를 요구할 자격이 있습니다. 천부장의 권세도 이러했거늘 오순절에 베드로처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권세를 받아서 한다면 그 파워란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2.바울의 전도는 가장 높은 위치에서 했습니다.
40절‘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말로 말 하니라’ 천부장이 허락을 했습니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바울이 계단을 강단 삼아 지금까지 헬라 말을 하던 것을 히브리말로 유대인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고국어로 말을 합니다. 지금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어처구니없는 반 유대주의자로, 신성모독 자로, 반 율법주의자로 오해를 받고 저들에게 붙잡혀 성전 밖으로 끌려나와 반 죽도록 구타를 당했습니다. 지금 바울 앞에는 자기를 죽이려고 발광하는 유대인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전도자 바울은 그 동족들을 구원하고 갈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의 복음 전도에는 언제나 순서가 있습니다. ‘유대인 다음에 헬라인’입니다.
40절‘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당시 로마군의 진영은 예루살렘 성전 서북쪽 언덕에 있는 안토니아 요새였습니다. 성전도 높은 곳이지만 그곳은 더 높습니다. 돌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으니 그 위에 서면 모든 무리들이 보이고 무리들도 바울이 잘 보이니 말씀 전달로는 최적의 환경입니다.
우리 주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눅5:3에‘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요즘 교회들을 보면 예배당 바닥을 수평이 아니고 경사지게 설계합니다. 많은 수효가 모여도 설교자가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해변이니 모래밭이 경사지고 배에 올라 증거하시니 말씀이 잘 전달이 되는 구조입니다. 특별한 음향시설이 없던 그 시대지만 이렇게 지형지물을 잘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연단이나 지형지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수준이 더 중요합니다. 진정 높은 곳에서 외쳐야 합니다. 죄악에 마음을 두고서 아무리 외쳐야 목만 아픕니다. 은혜가 없으니 듣는 사람들도 힘듭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전도자는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우리 몸은 낮은 곳에 처할지라도 우리 신앙 수준은 저 높은 곳이어야 합니다.
사40:9에‘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했습니다. 여기 높은 산에 오르라는 말씀은 문자적인 의미와 함께 영적인 의미도 있다고 믿습니다.
천국에도 높은 산이 있습니다. 요한이 천국에서 천사를 따라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계21:10의 말씀입니다. 천국의 높은 산은 그냥 물리적 개념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높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수준이 높습니다. 이 높은 곳에서 외쳐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듣고 마음을 엽니다. 말씀을 듣고 흐느껴 웁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합니다. 말씀을 듣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갑니다.
영적인 세계는 흐름이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끼치려면 높은 곳에 서야 하고 은혜를 받으려면 내가 낮아져야 은혜를 받습니다. 아브라함도 멜기세덱 앞에 엎드려 절하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줄 때 무릎을 바싹 꿇어야 기적이 나타나지 나와 대등하다는 식으로 생각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 영적인 공식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면 나이 많든 적든 나보다 더 배웠든 못 배웠든 주의 종으로 인정하고 높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 신기해요. 하나님의 복이 복이 되지 않아요. 참된 메신저가 되려면 높은 곳에 오르시기 바랍니다.
3. 바울의 전도는 보조적인 방법을 활용했습니다.
40절‘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손짓은 제스처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제스처를 썼습니다. 바울이 제스처를 썼다면 우리도 써도 괜찮겠지요? 입으로만 하는 것보다 표정과 손짓 몸짓을 활용하면 더 전달이 잘 됩니다. 제스처가 너무 심해도 혼란스럽지만 너무 없어도 전달이 잘 안 됩니다. 메시지 전달에는 이렇게 보조 재료도 필요합니다. 영상도 필요하면 활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 귀한 보조적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사입니다. 막16:20에‘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날 때 복음을 더 확실히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 완악한 이슬람 지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면서 신유은사를 활용하니까 회개하더랍니다.
은사가 구원의 방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은사가 구원 얻도록 믿음을 돕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기록하는 은사는 이제 종결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우시는 은사는 계속 됩니다. 복음전도에 은사는 필수입니다.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40절‘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당시 통용되던 언어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과연 어떤 말로 할 것이냐 잘 선택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통용되던 코이네 헬라어로 말 할 수 있었지만 대상이 히브리인이기 때문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당시 사용하던 유대 말은 아람화 된 히브리어였습니다. 즉 그들의 언어를 사용할 때 그 떠들던 무리들은 조용하면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언어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고전14:9에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했어요. 내용이 좋아도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수준에 맞게 해야 합니다. 어른에게는 어른에 맞게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에게 맞게 지식인에게는 지식인에 맞게 배움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또 그들에게 맞게 해야 합니다. 진리는 변할 수 없지만 전달하는 법은 달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더 다가가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책상머리에서 독서도 필요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청중의 삶의 현장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처한 형편이 무엇이며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의 심부에 닿는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현장을 모르면 좋은 말씀도 상관 없는 메시지로 들릴 뿐입니다.
바울은 아가보 선지자가 예언하여 11절‘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하며, 12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권하였으나, 이미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어 그의 마음에 ‘나는 주 예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 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는 꿈을 가지고 행동으로 옴겼습니다.
환난 중에 확신을 가진 바울입니다. 그는 로마 군대에 체포되어 끌려 가면서도 대중을 보고 전도할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그가 천부장에게 말하기를 39절‘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자기를 죽이려는 민중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동기로 한 말입니다. 그가 조금도 두려움 없이 전도열에 불탔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확신입니다. 그는 확신의 소유자였으므로 환난 중에서도 동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확신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당할 위험에 대하여 예언자들의 경고를 몇 번 받았습니다. 두로에서도 있었고(4절), 가이사랴에서도 있었습니다(10~14절). 그가 이미 하나님 말씀의 예고를 받았었는데, 그는 그의 길에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심을 확신했습니다. 언제나 말씀의 성취는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법입니다. 요13:19절‘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믿음을 주는 것인만큼, 누구든지 그 말씀을 가지는 자는 확신에 견고히 서게 됩니다. 롬10:17절‘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순종함으로 확신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확신을 얻게 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고난 받을 줄 미리 알고 있었지만(20:25), 그는 주님의 뜻을 순종하여 그곳으로 갔습니다(20:22,21:13~1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주신 목적은 우리의 순종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에 그는 기뻐하십니다(삼상15:22~23).
경험에서 확신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여러 차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죽을 자리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14:19~20, 18:12~17, 19:23~41). 사람은 경험을 통하여 배웁니다. 기도생활에 있어서도 우리가 많이 기도하는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며, 또 그 일로 말미암아 확신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대하여 상선벌악하시는 일에 관하여도 우리가 세상일을 자세히 지내보아야 그것을 알 수 있고, 그것에 대한 확신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일을 지내본 대로도 악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행사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확신은 긴 세월의 경험을 통하여 얻게 됩니다.
폴리갑은 86세의 고령으로 핍박자들에게 붙잡혔을 때에 예수를 버리면 놓아 주겠다는 그들의 말을 일축하고 말하기를 ‘86년 동안 나에게 해를 끼친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유익만 주신 예수님을 내가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86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한 그의 경험은 그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확신의 사람이었습니다. 딤후1:12절‘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고후1:10절‘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습니다. 죽을 고비도 하나님의 은혜로 넘김니다. 그러한 위기 가운데서도 바울은 품고 있는 꿈을 확신하고 이를 이룹니다.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그는 허락을 받아 복음을 전합니다. 그의 꿈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꿈은 행동하는 자에게 열매를 맺게 합니다. 우리 인생은 위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우리에게 주신 꿈을 품고 기회를 찾으면 반드시 주어집니다. 우리가 품고 있는 꿈이 주안에서 열매 맺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교회의 아름다운은 꾸준히 복음을 전할 때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복음 전하는 일과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또한 교회의 아름다움은 성도 간에 끈끈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특히 주의 종과 성도들과의 상호 신뢰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믿고 신뢰할 때 교회는 아름답게 성장합니다. 악한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교회를 분리시키려 합니다. 서로 불신하게 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성도간에 시험 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늘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의 줄을 붙잡고 서로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를 믿으십시오. 서로를 신뢰하십시오. 서로를 사랑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헤어질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복음에 생명을 건 교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부흥하게 하십니다.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날마다 부흥하는 교회가 되도록 힘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구주이실 뿐 아니라 위대한 전도자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에게서 배우십시다. 그리고 쇠사슬에 매인 최악의 환경에서 자기를 증오하는 최악의 대중을 상대로 가장 슬기롭게 복음을 전한 바울에게서 배웁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능력과 권세를 받아서 신앙의 높은 수준에서 보조적 방법을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전한 복음이 온전히 아름답게 열매 맺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