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명함’이 방해가 될 수도 있다
<16> 증시랑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②-1
[본문] 공(公)이 자신은 부귀하게 살고 있으면서 부귀에 꺾이고 얽매이지 아니하니 숙세(夙世)에 심� 반야의 지혜가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겠습니까?
다만 염려되는 점은 중간에 이 공부에 대한 뜻을 잊어버리고 영리하고 총명한 것에 장애가 되어 얻을 것이 있다는 마음이 몰록 앞에 놓여있는 까닭에 능히 고인들이 바로 끊고 질러가는 요긴한 곳에서 일도양단해서 직하에 쉬어버리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강설] 이 두 번째 편지는 먼저 부귀하게 살면서 그 부귀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참선공부에 매진하는 점을 크게 칭찬하였다. 실로 부귀한 것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기는 편리하지만 불법을 깊이 공부하는 데는 큰 장애가 되기도 한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필자는 아직도 소문난 부자거나 벼슬이 높은 사람으로서 불법공부를 깊이 있게 한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부귀한 것은 불법을 만나기 어려운 여덟 가지 중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참으로 숙세에 불법인연을 깊이 심지 아니하면 어려운 일이리라.
또 대혜 선사가 크게 염려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총명하고 영리한 것이다. 그 점도 역시 불법을 깊이 깨닫기 어려운 여덟 가지 중에 들어가는 것인데 총명하고 영리한 사람들은 그 총명한 머리로 불법을 적당히 꿰어 맞추어 이해하고는 그만 둔다. 불법이 체득되지도 못하고 인격화가 되지도 못한다. 즉 총명한 것이 장애가 된다. 이해득실을 일도양단해서 물리쳐 버리고 고인이 깨달으신 그 경지를 체득해야 하리라.
화두란 근본 성불에 필요 양식
선지식이 준 법으로 착각 말라
[본문] 이러한 병은 훌륭한 사대부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참납자(久參衲子)들도 또한 그렇습니다. 기꺼이 물러서서 힘을 더는 곳(省力處)에 나아가서 공부하지 아니하고 다만 총명한 의식으로 계교하고 사량해서 밖을 향해서 구합니다.
또 선지식에게 총명한 의식으로 사량하고 계교하는 것 밖을 향해서 본분의 양식(本分草料)을 보여주는 말을 잠깐 듣고는 흔히들 바로 그 앞에서 지나쳐버리고는 “과거의 고덕들이 실다운 법으로써 사람에게 주었다”라고들 합니다.
예컨대 조주스님의 방하착(放下着)과 운문스님의 수미산(須彌山)과 같은 류가 그것입니다.
[강설] 선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총명한 의식으로 헤아리고 사량하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총명은 오히려 깨달음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선비들이나 전문적으로 참선하는 납자들도 그 문제는 마찬가지다. 총명한 사람들의 병이란 자신을 향해 참구하지 않고 자신 밖을 향해서 깨달음을 구하는 점이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자신을 향해서 참구하도록 하기 위해서 큰 방편을 만들었다. 그것이 화두라는 것이다. 선불교 초기에는 없었던 방법이지만 근기가 날로 하열해지면서 그 하열한 근기를 무르익고 성숙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간화선법(看話禪法)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선불교의 전통이라고 하는 선법(禪法)은 곧 간화선법이다.
대혜 선사의 말씀에 의하면 화두란 곧 사람의 근본불성인 본분을 깨닫는데 필요한 양식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본분초료(本分草料)라는 말은 사람의 불성을 소에 비유하여 그 소가 화두라는 양식(草料)을 먹고 근기가 성숙해지면 깨달음을 이룬다는 뜻에서 이른 말이다. 그렇다면 총명한 의식으로 헤아리는 경계를 초월하여 바로 보여준 것은 무엇인가?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았을 때 또한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수미산이니라.”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을 때 어떻습니까?”
“방하착하라.”
여기에서 일체 의식과 사량과 헤아림이 모두 끊어지고 마음은 은산철벽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방편이요 실다운 법은 아니다. 그런데 총명한 사람들은 이것을 선지식이 준 실다운 법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을 대혜 선사는 병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출처 : 불교신문 201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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