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에 마산역에서 출발하다...7시1분에 괴산휴게소에서 아침식사(씨락국 김치 밥)
인천대교 9시8분 도착
인천대교(Incheon Bridge, 仁川大橋)는 제3경인고속도로를 구성하는 다리이며, 영종도와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송도 신도시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2005년 착공 ,2009년10월 완공, 사업비2조3830억원총 길이는 21.38㎞에 교량이 18.2㎞이다.
고가교 구간은 경간이 50m, 연속 5경간에 PSC 박스 거더로 시공하고 있으며, 접속교 구간은 경간이 145m, 연속 7경간에 PSC 박스 거더로 시공하고 있다.
사장교의 경간은 800m로 세계 5위, 국내 1위이며, 강바닥판 상자형 거더에 주탑은 역Y형 콘크리트 구조로 높이는 238.5m이다. 공법은 서해대교에서도 쓰인 크레인이 작은 거더 블럭을 차례대로 가설하면서 케이블도 동시에 가설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또한 다리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사장교 구간과 접속교 일부 구간에 최대 10만톤급 화물선이 10노트의 속력에서의 충돌을 보호할 수 있는 선박충돌방지공이 설치되어 있다.
장진도 선착장에서 승선 10분정도 배를 타면 큰무리 선착장에 도착한다
**********************무의도(舞衣島)( http://www.muuido.co.kr/)
춤추는 무희의 의상처럼 아름다운섬
舞衣島(무의도)란 갑옷을 입은 장수가 칼춤을 추는 모습과도 같고 섬에 안개가 낀 날이면 말을 탄 장수의 옷깃이 날리는 현상인가 하면,생김새가 여인의 춤추는 모습을 닮았다고도 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고 전한다.
아무래도 무의도하면 가장 유명한 곳은 실미도 입니다. <실미도 사건>과 영화 <실미도>로 유명해진 실미도는 무의도에서 썰물 때 걸어서 갈 수 있습니다. 밀물 때는 바닷물로 막혀있으므로 여행하는날의 실미도 물때를
국립해양조사원(http://www.nori.go.kr/info/divid_forcast.asp?rid=6)에서 미리 확인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큰무리 선착장에서 실미도로 출발하다
여기부터 실미도
실미도 관광을한 후 큰무리선착장으로 돌아오다
큰무리선착장에서 버스로 와서 무의도 등산을 시작하다
***********************《실미도 영화》는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를 바탕으로 만든 2003년 12월에 제작된 대한민국의 영화이다. 1·21 사건을 계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보복하기 위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설립된 684 부대의 설립부터 시작해서 혹독한 훈련을 통해 완전한 전투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침투하는 것이 하루하루 늦어지다가 결국은 불만이 폭발해 실미도 사건을 일으키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1108만명의 관객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천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를 계기로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실미도 사건이 다시 주목을 받았으며, 실미도 부대와 같은 북파부대에 대한 내용이 재조명되기도 하였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실미도도 관광지로 개발되기도 했다.
흔히 '실미도 부대'라고 부르는 684 부대는 실미도에 있었던 북파부대이다. 684 부대는 1·21 사태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침투해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나, 남북 화해 분위기로 인해 임무 수행이 계속 늦어지자 1971년 8월 23일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서울로 잠입하여 실미도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실미도》가 흥행에 대성공하면서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684부대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인 김신조를 비롯한 31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해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1·21사태 이후 이 사태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1968년 4월 창설되었고, 일명 '실미도부대'로 불린다. 창설 목적은 '북한에 잠입해 김일성을 죽이는 것'이다.
창설 이후 이들은 실전과 똑같은 훈련과 철저한 인민군식 훈련을 받으며 단 3개월 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병기로 탈바꿈하였다. 그 뒤 3년 4개월 동안 출동명령만을 기다리던 중 1970년대 초 국제적인 긴장완화와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이들의 존재가 불필요해지자 정부는 기간병들에게 이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들은 기간병을 살해하고 실미도 사건을 이르켰다
*******************************121사태
사건개요
이 사건은 1968년 1월 13일 북한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군 정찰국장 김정태로 부터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청운동의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였으며,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다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군 ·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김신조를 발견하여 생포하고 이 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해서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총경 최규식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였다.(1·21사태는 1968년 1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장 공비들이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기습하려 했던 사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공작원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사건영향 ]
시도는 이처럼 미수에 그쳤으나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 이후 남북한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였다. 안보우선주의는 노동조합 및 민주화운동 을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예비군이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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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사건
실미도사건은 1971년 8월 23일 이 섬에 있던 북파부대원들이 자신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탈출하여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한 뒤, 서울로 진입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사건을 말한다.
개요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훈련병들 앞에서 기간병들은 손 쓸 틈도 없이 전체 24명 가운데 18명이 희생당하고 6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것이 1971년 8월 23일 6시경의 일이다. 기간병들을 살해한 북파부대원 24명(나머지 7명은 훈련 기간 중 사망)은 12시 20분경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하였다. 이어 인천에서 육군과 총격전을 벌인 뒤, 두 번째 버스를 탈취해 14시 15분경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대부분이 죽고, 4명만이 살아 남았다. 생존자 4명은 1972년 3월 10일 사형당하였다.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하였는데, 이후 이 사건의 진상은 갖가지 의문점을 간직한 채 30여 년 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684부대의 훈련병들이 겪은 3년 4개월 동안의 실상을 파헤친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1999)와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강우석 감독의 동명영화(2003년 12월 개봉)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2004년 초에는 1968년 3월 충청북도 옥천군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7명의 청년이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국방부에 의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684부대의 구성원들이 범죄자들이었는지, 아니면 민간인들이었는지를 비롯해 많은 점들이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