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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24. 운허용하 남을 헐뜯지 말라…부처님 공덕만은 분명하다
운허스님 진영. 1978년 동국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을 당시 찍은 사진이다.
운허스님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다른이 전부가 하기(下機)하는데 나는 떼를 쓰고 내리지 않고 기내(機內)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내린댔자 공항 내(內)일 것이니 볼 것도 없을 것이고, 또 일본 땅을 밟기도 싫었다. KAL기가 우리나라 비행기인즉 기내에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 영역(領域)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조선을 강탈했던 일본에 대한 스님의 의지는 이처럼 강력했다. 그래서인지 스님은 일제강점기를 회고할 때면 일본인은 반드시 ‘왜놈’이라고 표현했다.
남양주 봉선사 경내에 있는 운허스님 부도.
스님은 그때까지 사용하던 불천(不千)이라는 호를 불천(佛泉)으로 바꾸었다. 불천(不千)은 ‘不單千(불시단천) 億亦不畏(억역불외)’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왜놈) 1천명뿐 아니라 1억명이 와도 두렵지 않다”는 뜻으로 조국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정부까지 수립됐으니 ‘호를 지은 의미’가 사라졌던 것이다. 그래서 동지들과 상의한 결과 불천이라는 음은 그대로 두고, 부처 불(佛)과 샘 천(泉)으로 한문을 바꾸기로 했다. ‘부처님의 샘’이라는 뜻이니, 출가사문으로 수행자의 삶을 사는 운허스님에게는 더없이 좋은 의미가 있는 호이다.
아침예불은 밤을 새운 후에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등 몸소 모범을 보였다. 세수 80을 넘긴 고령에도 ‘큰방 공양’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건강을 염려한 다른 스님들이 “공양을 방으로 갔다드릴테니, 큰방에는 나오지 마시라”고 권했지만, 운허스님은 “기동을 못하게 되면 자연 안나간다”면서 사양했을 만큼 대중생활의 원칙을 지켰다.
봉선사=이성수 기자 ■ 운허스님의 유촉 ■ “사리를 주으려 말라”
△문도장(門徒葬)으로 봉선사 화장장에서 다비(茶毘)하라. △화환(花環).만장(錦輓)을 사절하라. △습골시(拾骨時)에 사리(舍利)를 주으려 하지 말라. △대종사(大宗師)라 칭하지 말고 법사(法師)라고 쓰라. △사십구재도 간소(簡素)하게 하라. △소장(所藏)한 고려대장경, 한글대장경, 화엄경은 봉선사에 납부(納付)하라. △마음 죽이는 중노릇을 하지 말라. △문도간에 화목하고 파벌을 짓지 말라.
■ 행장 ■
조국독립운동 ‘헌신’
1919년에는 삼원포에서 ‘신한족(新漢族)’이란 독립군 기관지를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흥사단에 가입했으며,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다. 무장독립투쟁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 동지가 체포되어 경성을 탈출해 양양 봉일사에서 은신했다.
1921년 5월 경송(慶松)스님을 은사로 강원도 고성군 유점사에서 출가했다. 1924년 동래 범어사에서 사교를 이수했고, 1926년 청담스님과 함께 전국불교학인대회를 개최했다. 1929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1930년 9월 조선혁명당에 가입했다. 1936년에는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을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노력했다. 해방 후 경기도 교무원장이 됐고, 1946년 4월에 광동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했다.
[출처 : 불교신문 2445호/ 2008년 7월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