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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와 소자를 품어주는 다윗(2196.2023.6.18)
삼상30:16-25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힘들게 살았습니까? 아무에게도 말못할 정도로 힘든 여정을 겪으시면서 남모르게 눈물도 많이 흘렸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도 아시시고 그래도 힘을 주셔서 감사하게 지치고 힘든 마음을 갖고라도 오늘 여기 앉아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여러분은 대단한 분들입니다. 자기에게 가슴을 치면서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자기자신에게 잘 참고 살아왔어 하고 박수한번 해 주세요. 앞으로의 삶 가운데에도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아무도 알 수는 없으니 하나 믿는 것은 기도 하는대로 하나님이 허락 해준다는 믿음을 갖기를 바라면서 힘과 용기를 내시기를 바랍니다.
또 사람이나 물질에 질질 끌려 다니지는 않았습니까? 수없이 주저앉았고, 주저앉고 싶을 때는 없었습니까? 좌절하고 포기하고 고통스러울 때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어느 누구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은 결코 쉽거나 만만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비틀거리고 컥컥하고 있습니다. 포기하고 쓰러지기 직전입니다. 어느 누구를 붙들고 ‘당신은 힘들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아픔과 한숨과 눈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불쌍한 것입니다. 알고 보면 모두가 측은합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은 천성을 향하여 달려가는 영적 투사의 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과정에서 패배와 좌절, 도약과 승리를 맛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패배에서 승리로 나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이 겪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때는 다윗이 아직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고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600명의 무명의 용사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적국인 블레셋 왕국의 가드왕 아기스에게 몸을 의탁하고 신세지면서 시글락이라는 성에 살았습니다. 어느 날 아기스왕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겠다고 출전을 하자고 합니다. 그러니 다윗은 본의 아니게 조국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자니 그렇고 안가자니 그렇고 입장이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일단 출정을 합니다.
시글락 성에는 여인들과 자녀들만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쟁터에 나가니 블레셋 군대의 여러 장수들이 다윗의 군대를 믿을 수 없다고 난리를 칩니다. 과거 골리앗을 죽인 경력이 있으나 어찌 그를 믿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 바람에 전쟁에 빠지게 되어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윗의 군대가 시글락을 떠나 있을 때, 이스라엘과 오랜 숙적이 있었던 아말렉 군인들이 시글락을 쳐들어와 시글락성의 여자와 아이들을 다 노예로 끌려가고, 소와 양이며 모든 짐승과 물건을 남김없이 노략질 해 갔습니다. 아말렉 침략자들이 온 마을을 휩쓸어 버렸습니다. 성은 불탔고 아내와 자녀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다윗과 용사들은 울 기력도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백성들이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괘씸한 자들입니다. 저들은 정말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환란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 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살집과 거처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리고 오합지졸을 일당백의 용사들이 되게 하고, 사람 구실을 하는 자들이 되게 했는데, 이제 와서 누구를 죽이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저들만 가족을 잃었습니까? 다윗도 가족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달리 반응합니다. 이 어려운 순간에 다윗이 어떻게 하여 위기에서 승리를 쟁취하였는지 말씀을 통해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신앙은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의지하는 백성을 돕는 분임을 교훈합니다. 삼상30:6절‘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분노가 극에 달해 자신을 원망할 때, 무릎을 꿇습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을 찾아 경배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사실 이 시점은 다윗에게 정말 힘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있을 수 없어서 블레셋의 가드왕, 아기스가 다스리는 지역에 내려와 신세지는 신세, 그것도 조국 이스라엘과 전쟁을 할 뻔 했던 때입니다. 겨우 조국과 전쟁을 피하고 돌아와 보니 시글락 성은 불타고, 가족들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지요. 거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돌을 듭니다.
우리가 이런 놈을 믿고 따라왔다니 드디어 슬픔이 분노로 돌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손에 돌을 들고 다윗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어느 조그만 장막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다윗이 발견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손에 돌을 들고 있어서 몹시 당황도 되었지만 다윗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엎드려서 여호와 앞에 울면서 묻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이 군대를 좇아가리이까? 그리하면 따라 따라 잡겠습니까?’ 그때 그러한 상황속에서 아무도 그렇게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만 다윗만은 그렇게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이 군대를 쫒아가리이까?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그러한 위급한 상황속에서 이것은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개인적인 생각을 허용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생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내어드리는 다윗의 겸손한 신앙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평안할 때나 위급할 때나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인격을 존중하므로 대소사를 무론하고 하나님과 의논하는 다윗의 신앙은 가히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리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누가 뻔한 일을 하나님께 묻는 이가 있습니까? 누가 일상 생활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을 가족이나 그 부모에게 묻듯이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 있습니까?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는 난관에 대처하는 다윗의 신앙을 보십시오.
다윗은 결코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더욱 하나님께 집중했고 의지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환난을 당할 때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문제 해결을 해야 합니다. 신앙인이 불신자보다 월등한 점은 고난에 처했을 때 환경과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그 상황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있습니다. 하나님만 소망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힘과 위로를 제공하십니다. 하나님이 힘이요 용기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구원의 산성’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피난처라고 방패라고 부르는 자를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 믿음이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입니다. 동서남북이 다 막혔을 때 아무리 찾아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에게 다가 온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의 원인이 침략자 아말렉에게 있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돌을 들어 치려고 하는 600명의 용사에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다윗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망각한 채 기도없이 살아온 자기에게 문제의 원인 있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가 기도없이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의 뜻과 방법대로 그리고 자신의 욕구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윗이 제사장 아비아달을 부르고 에봇을 찾았다는 것은 그러한 자신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묻고 응답 받아 행동하겠다는 다윗의 비장한 결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하였습니까? 삼상30:8에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이 잡혀갔는데 ‘쫓아갈까요’라고 묻고 있습니다. 쫓아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우리 같으면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셔도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하는 다윗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시면 그것도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일도 하나님 허락없이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예전에 다윗은 블레셋으로 망명할 때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왕 아기스의 요청으로 출전할 때도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일을 하나님의 허락 없이 자기 마음대로 결정했던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음을 그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다윗은 결정하기 힘들 때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해법을 가지고 나옵니다.
다윗은 8절‘가라 반드시 도로 찾을 것이다’는 응답을 받고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을 돌로 치려던 600명 용사들의 마음이 다윗이 기도할 때 녹아버렸고 오히려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이끌고 아말렉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빨리 달렸던지 200명이 뒤쳐져 버릴 정도였습니다. 다윗은 사력을 다해 뛰었습니다. 일단 우리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 최선을 다하여 달려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한 순종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전력 질주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드디어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탈취해간 모든 것을 다시 찾았고 잃었던 두 아내를 구원하였습니다. 또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여 몰고 오며 개선가를 불렀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소개된 다윗처럼 신앙적 반응이 나타나야 합니다. 먼저 실패의 원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상황이 어떠하던 감정으로 처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응답을 받았으면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빨리 깨달아 실패하지 않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혹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앙 안에서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도 절망이 눈앞에 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친히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다윗이 눈앞이 캄캄할 때 그때 행한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이게 다윗의 강점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능력입니다. 다른 사람과 구별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다윗은 이때 만해도 나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나 전쟁에는 이력이 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나름대로 대안도 생각할 수 있었고 참모들을 모아 전략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하나님이 뭐라 하시느냐? 하나님이 뭘 원하시느냐? 이것을 파악합니다. 다윗의 군대 600명, 그것도 어찌 보면 오합지졸입니다. 사기도 최악입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다윗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 우리를 보십니다. 내가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시는가를 보십니다.
여러분도 체험해 보셨습니까? 부도가 눈앞에 닥쳤습니다.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은행도 안된다하고 친척도 안 된다 합니다. 그때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그때 하나님을 의지하셨다면 하나님은 길을 열어주십니다. 자식이 쓸어졌습니다. 자식이 병이 났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닥쳤습니다. 그때 어찌하셨습니까? 그때도 하나님께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시146:3절‘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시고 하나님의 방법을 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교회로 나와 엎드리세요. 우리 상주감리교회는 24시간 누구나 언제나 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 안하고 결정하지 마세요. 모든 일은 기도하고 결정할 때에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2.다윗은 아무리 급해도 주변의 약자와 소자를 향한 사랑은 베풀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자와 소자를 돕는 자를 돕는 분입니다. 다윗의 부대는 아말렉의 약탈자들을 추적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열악했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은데다, 폐허가 되어버린 시글락 성의 모습에 사기가 많이 꺾여 있었습니다. 더욱이 지도자 다윗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는 땅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다윗은 붙들려가는 약자들,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 아말렉을 추격합니다. 남쪽으로 24km쯤 내려가서 브솔 시냇가에 도착합니다. 말이 24km이지 60리를 여러분 무기를 가지고 달려야 하는 행군,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러니 그 가운데 1/3에 해당하는 자들이 완전히 탈진해서 브솔 시냇가에 도착하여 이제 더 이상은 움직일 수 없다고 주저앉습니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지쳐서 더는 움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부 나가서 싸워도 600명입니다. 그 판에 200명이 주저앉습니다. 이제 전쟁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주저앉지 않습니다. 200명을 브솔 시냇가에 남겨두고, 나머지 400명과 함께 브솔시내를 건너 아말렉을 쫓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아말렉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길가에 버려진 애굽 소년 하나를 발견합니다. 다윗은 그를 데려다가 그에게 떡도 주고 물도 주고 무화과 뭉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줍니다. 결국 그 사랑에 이 애굽 소년의 마음이 녹아버립니다. 그리고는 자진하여 길 안내자가 된다 합니다. 결국 대승을 거두는 기회가 됩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우리는 주변의 약자, 그리고 소자, 그들을 보살피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아말렉을 쫓아 갈 때 지치고 피곤한 약자 200명, 다윗은 그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급하여도 길가에 버려져 죽어가는 애굽의 소자 하나를 내버리고 가지 않습니다. 가족이 다 붙잡혀 갔습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신하들이 얼마나 난리를 쳤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길가에 버려진 애굽의 소년 하나 때문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지체 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주변의 약자와 소자를 향한 사랑은 베풀고 가는 것입니다.
아말렉 군대조차도 그 병든 소년이 짐이 된다고 해서 버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소년을 극진히 돌보아줍니다. 소년은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고, 마시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그런 저에게 물과 무화과와 건포도를 주어서, 목숨을 구해줍니다. 이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런 다윗을 그냥 두실리가 없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가 우리 주변의 소자와 약자를 돌보는 것이 어찌 보면 시간 낭비 같고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고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 내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에게나 특히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며 도와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필리핀에 가서 봉헌 예배를 드리고 부흥회도 인도하고, 000지역에 가서 사람들에게 쌀 200명에게 나누어 드리고, 옷도 나누어 드리고 축구공과 등등 여러 가지를 나누어 드리고 선교지를 탐방하고 왔습니다. 특별히 어린이 전도를 향한 마음이 내게 있어서 어린이들과 시간날 때 같이 했습니다. 사탕과 껌을 하나씩 나누어주는데 줄을 얼마나 서는지 감사한 마음으로 그들과 놀아주고 율동할 때에는 율동을 같이 해주고 했습니다. 필리핀선교사 000 목사가 어린이들 눈높이를 빨리 맞추어준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옛날에는 필리핀이 우리를 도왔는데 이제는 우리가 돕고 있습니다. 약자를 돕고 사는 것은 우리들이 할 일입니다.
다윗이 아말렉을 추격하다가 들에서 만난 다 죽어가는 사람을 잘 먹여주고 도와주어서 정신을 차리게 되자 그로부터 얼마나 큰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쓸모없다고 그를 버린 아말렉 사람은 대수롭지 않아보이는 그 일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실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애굽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을 대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습게 지나칠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희생이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기쁨을 선물해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아말렉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한 사람의 생명을 우습게 본 결과 전체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 소년의 길 안내로 다윗 일행은 아말렉이 머물고 있는 진영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말렉은 이미 자신들의 승리에 도취해서 전쟁에 나온 군사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스스로의 파티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패배는 불을 보듯 뻔 한일이었습니다.
16절‘그가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탈취하였음을 인하여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우리 인생이 어느 한 순간에서 승리만을 만끽하고, 또 패배를 맛보기만 하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느 한 감정에만 너무 치우칠 것이 아닙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습니다. 전혀 변화가 없는 과정들도 반드시 있습니다. 다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너무 한 순간의 상황이나 감정에만 치우쳐 거기에 깊이 빠져 살 것이 아닙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현실을 극복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다 그 때가 있음을 인정하고, 너무 한 쪽에 치우쳐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믿음 안에 달려가는 겁니다. 오늘 우리도 그 길 위에 서있습니다. 앞으로 달려가는 것 외에 다른 비결이 있을까요? 말씀에 순종해서 걸어가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걸어가도록 만들어진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더욱 강하도록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가야만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고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일체의 세상사에 대한 믿음의 도전을 오늘도 잘 감당하도록 무릎 꿇어 기도하는 귀한 성도들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진정성’을 확인하십니다. 내속에 믿음을 확인하시고 내가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시험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은 시험합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 하십니다. 왜죠? 그의 믿음을 확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다윗에게도 가족 사랑의 진정성을 확인합니다. ‘네가 네 가족 사랑 하냐’,‘그럼 이 소년은 네가 어찌하나 보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소년을 통해 다윗의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결국 그 소년을 통해 가족을 다 찾게 하시는 복을 주십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여러분 따라서 하세요. ‘힘들 때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보십니다’,옆사람에게 말하세요.‘힘들 때 절대 흔들리지 마십시다’ 마10:42절‘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셨고’, 마18:10절‘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했습니다.
다윗은 낙오된 200명을 브솔 강가에 남겨두고 400명만 데리고 가서 승리하여 돌아옵니다. 그때 그 남겨두었던 200명에게도 동일하게 얻은 재물을 분배합니다. 그들도 약자입니다. 약자이지만 동등한 권리로 은혜를 받아야할 자들입니다. 그들은 한일이 없다고 차별하면 안 됩니다. 그 자세를 하나님이 귀히 보신 것입니다. 왜 다윗이 그 애굽 소년을 돌보았을까요? 제가 기도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거 다윗은 광야에 홀로 내버려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비록 비천한 종이었지만 저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 자기가 사울 왕에게 쫓길 때 혼자 버려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겪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마음으로 애굽 소년을 섬깁니다. 그러자 그 애굽의 소년이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년으로부터 정말 중요한 정보를 얻습니다. 그 소년은 아말렉 왕의 종이었기 때문에 지금 아말렉이 어디에 있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대략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군대를 그 곳으로 인도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은혜와 사랑을 베풀면 반드시 복으로 돌아옴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내가 받은 승리와 업적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내가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승리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5절‘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그 군대에게로 인도하겠느냐 그가 가로되 당신이 나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내 주인의 수중에 붙이지도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으로 맹세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당신을 이 군대에게로 인도하리이다’ 아울러 브솔 시냇가에 주저앉은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태도를 결정해야 합니다. 호되게 꾸짖어야 할까요? 창피하게 생각해야 할까요? 일단 휴식을 허락하되 시간제한을 두어야 할까요?
다윗이 한 대로 하는 건 어떨까요? 다윗은 지친 병사들을 쉬게 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병사 사백 명을 데리고 다시 추격에 나섰습니다. 일행은 황량한 벌판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 모래언덕 하나를 지날 때마다 실망이 차츰 커져만 갑니다. 아말렉 군대는 훨씬 전에 지나갔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윗은 결정적인 전기를 맞습니다. 11절‘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우고’이 이집트인은 어느 아말렉 사람의 하인이었습니다. 병들어 몸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자, 주인이 굶어죽든 말든 알아서 하라며 광야에다 버리고 간 것입니다.
다윗 일행은 종에게 무화과와 건포도 같은 음식을 먹이고 잘 돌봐서 기운을 추스르게 한 뒤에, 이전에 섬기던 무리에게 안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인은 기꺼이 앞장섰습니다. 다윗과 용사들은 매가 쥐를 낚아채듯 삽시간에 적진을 휩쓸었습니다. 이스라엘 여인과 아이들도 모두 구출했습니다. 무수한 아말렉 군사들이 전사했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군사들은 노략질한 값진 물건들을 내버리고 냅다 도망쳤습니다. 다윗은 희생양에서 영웅이 되었습니다. 온 백성이 다윗의 이름을 연호하며 함성을 질렀습니다. 다윗이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가족과 자식들, 물건을 취하여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윗의 용사들은 속이 씁쓸했습니다. 22절‘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게 하라’ 구조된 아내들은 화가 잔뜩 났습니다. 구조대원들의 마음은 원망으로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쉬고 있던 이백 명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제 다윗이 어떻게 좌중을 진정시키는지 봅시다. 그때 그 400명중 일부가 낙오자 200명에게는 처자만 주고 떠나가게 하자고 합니다. 사실 끝까지 전쟁에 갔던 400명은 힘이 넘쳐서 아말렉을 쫓아간 것일까요? 저들도 피곤하고, 지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자신이 해야 할 몫을 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브솔 시냇가에 남겨진 200명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낙오자 200명의 가족들은 자기 아버지가 자기들을 구하러 오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아빠는요? 우리 남편은 어디 있어요? 저기 브솔 시냇가에 쉬고 있어요. 얼마나 챙피 하겠습니까? 그러니 자기들을 그냥 그들이 말하는 대로 부인과 자식만 돌려주어도 감지덕지입니다. 그러나 그때 다윗이 나서서 말합니다. 23-24절‘다윗이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찌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한마디로 아말렉과 싸워 이긴 것을 마치 우리가 싸워 이긴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400명이 고생했습니다. 죽음을 무릅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이집트의 종을 만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이 너무나 쉽게 싸워 이기게 하셨습니다. 시작도 끝마무리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란 말입니다. 내가 받은 승리와 업적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길을 가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한순간에 공로주의에 빠지기 때문에 수많은 시비와 갈등과 불만이 생깁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는 줄로 믿으십시오. 우리도 종종 착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했다’,‘내가 교회를 섬겼다’ 물론 수고한 자들의 수고를 알아주어야 하지요. 하지만 이 주장의 태도가 자신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됩니다. 그러면 착각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착각하면 큰일입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셨고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으니 받은 은혜를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다윗의 말입니다. 400명만의 분배를 주장한 자들을 성경은 뭐라 합니까? 22절‘악한 자와 비류’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하면 ‘악하고 야비한 자들’이라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는데 마치 자기들이 수고해서 얻은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원래 ‘환란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입니다. 내 세울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이 무어라 표현했습니까? ‘남아서 물건을 지키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백 명 가운데 누구도 남아서 물건을 지키겠다고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쉬고 싶어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뒤에 처진 이들이 쉰 게 아니라 일을 한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브솔 시냇가에 머물렀던 지친 병사들의 입장을 존중해 준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이 지금 브솔 시냇가에 머물고 있습니까? 그럼 알아 둬야 할 게 있습니다. 쉬는게 잘못은 아닙니다.
브솔은 안식을 줍니다. 더불어 브솔 시내는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다윗은 스스로 잘나서 승리를 얻은게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막에서 만난 이집트인이 앞장서 길을 안내해 준 덕분이었습니다. 노력해서 얻은게 아닙니다. 승리는 마땅히 받아야 할 댓가가 아니라 선물이었습니다. 그런 처지인데, 어떻게 지쳐서 주저앉은 이들을 비난하겠습니까? 누구도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결코 누구도 멸시해서도 안 됩니다. 겸손하고 남을 더욱 높이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이고 성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다윗의 강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받은 은혜를 약한 자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 브솔 시냇가의 다윗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다윗이 한일이 예수님이 하신 일과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우리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25:40절‘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어렵고 힘든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웃을 배려하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처럼 위기를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돌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변의 약자와 소자를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시되 거만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승리를 얻었거든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고 브솔 시냇가의 교회와 성도가 되어서 함께 위로하고 나누고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넉넉한 상주감리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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